"정말 시킬 일 없으시냐구요."
"입 좀 다물거라, 씨끄럽다."
시킬 일이 정말 없냐는 질문만 벌써 열 번도 넘게 하니, 돌아오는 대답이 슬슬 격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가녀린 천상 여자한테 입을 다물라니, 너무하잖아.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니 몸이 쑤신다. 그래서 밖으로 나갈라치면 또 그건 안 된단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정국이 제 할 일만 하면서 날 가만히 냅두니 이 상황도 나름대로 불안하다. 차라리 부려먹기라도 하면 욕이라도 몇 마디하고 움직이면 될텐데, 무슨 폭풍전야도 아니고. 게다가 정국이 진지한 모습은 또 오랜만인지라 적응이 되질 않는다. 너무 심심한 마음에 석진에게 말을 걸었다가 정국이 정색을 하며 탁자를 엎으려고 난리를 치기도 했었기에 정말로, 정말 나는 숨만 쉬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 돌이 될 지도 몰라.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길래 말도 못 걸게 하는거야.
그나저나 나는 제대로 잡는 방법도 모르는 붓을 바로 잡고, 멋드러지게 이것저것 적어내려가니 정국이 나름 멋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럴 때보면 딱 한 나라의 군주인데, 평소에는 정말 고등학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어서 종종 느껴지는 갭에 새삼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이런 모습 유지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으니까 제발 석진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 더 어른스러웠으려나.
탁자 귀퉁이에 턱을 괴고 괜히 옷자락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고 있는데, 옆으로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서 돌아보니, 눈이 마주친 정국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탁자 위에 가득 쌓인 종이들로 시선을 돌린다. 갑자기 또 왜 이래. 그나저나 평소에 한복을 입고 생활하고 싶다는 소원을 이렇게 이루게 되다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그나저나 하루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 변하다니. 뭔가 굉장히 불안하다. 철이 들건 아닐테고. 남자는 죽을 때까지 평생 철 안 든다고 들었는데 내가. 자꾸 이 상태로 유지되면 내가 현실로 돌아가서 부려먹질 못 하잖아. 차라리 지금 내가 눈 딱 감고 망나니짓 하면 꼴 보기 싫어서라도 뭐 시킬려나.
"너 왜 그래?"
"네 기억력은 금붕어만도 못 하는 모양이구나."
왜 저러나 싶어서 던진 질문에 답변은 커녕 명령만 내려온다. 하하, 정말 때리고 싶네. 이를 악 물고 어색하게 웃자 무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붓을 열심히 움직인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금붕어래. 하지만 진지하게 나랏일 하시는 분께 감히 악을 쓰며 덤비기엔 지금 내 입장이 불리했기에, 입만 불퉁 내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거지같은 신분 제도. 이런 사회는 뜯어 고치는 게 옳은데. 벌써 이틀 째니까 얼른 일주일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돌아가면 나도 존댓말이나 쓰라고 해야겠다. 서러워서 살겠나.
괜히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정국이 일을 보고 있는 탁자 위로 휙 엎어지자 아니나 다를까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정국이, 들고 있던 붓을 내려 놓았다. 정국은 엎어져 있는 내 정수리 위에 큰 손을 턱하니 올려 놓더니 고개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국이는 코가 크다. 코밖에 안 보이는 것 같아. 제 코를 보고 웃는 거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아까 그 상태 그대로 날 쳐다보기에 민망해서 웃던 걸 관뒀다.
"……뭘 봐."
"널 본다."
어우 미쳤나 봐. 어디서 저런 멘트를 배워와선. 오글거림에 절로 표정이 찌푸려지는 나는 상관도 안 하고 태연하다. 저건 아마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으로 연기 했으면 남우주연상 탔을거야. 어떻게 저런 민망한 말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술술 말 할 수가 있는거지. 뒤에서 석진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가, 정국이 흘겨보자 그제서야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피한다. 내가 막 얼굴이 달아오르네. 손등으로 뺨을 식히며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냥 정말 가만히 있어야겠다. 괜히 건드렸다가 이상한 소리나 듣고 있잖아. 근데 왜 이렇게 낯 간지럽냐. 헛기침을 두 어번 하며 탁자에서 슬슬 멀어지는데 정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새빨간 도포를 펄럭거리면서 석진이 서 있는 쪽의 문으로 걸어가던 정국이 바닥에 앉아 벙쪄있는 나를 돌아보곤 다시 입을 연다.
"심심하면,"
"……네?"
"마실이나 나가자꾸나."
뭐야 왜 저래. 나 진짜 적응 못 하겠거든. 정말로 당황스러워서 대답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며 바닥에 계속 앉아 있자, 눈썹을 한 번 찡긋거린 정국이 다시 휙 돌아선다. 나오기 싫으면 계속 거기 있던지. 그리고는 쿵쿵, 일부러 심통났다는 듯 발소리를 크게 내며 혼자 쏙 나가 버린다. 쟤 진짜 뭐 잘못 주워 먹은 건가. 내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상태 그대로 석진을 쳐다보니, 나를 계속 기다리고 서 있던 석진이 턱 끝으로 나가잔 신호를 한다.
그러고 보니까 정국이 나가면 석진도 따라 나가야 맞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쭉 본 걸로는 누가 왕인지 참, 판단이 안 된다. 재촉하지 않지만 온화하게 웃는 석진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괜스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내가 잘 걸어온다 생각 했는지 석진도 금방 정국이 나간 길을 따라 간다. 얼마나 빨리 걸어 나간건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궁녀들도 나에겐 당황스럽게 다가왔다.
저 분은 좀 착해 보이시네, 나중에 몰래 나가고 싶을 때 꼬셔 봐야겠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을 빠른 반사신경으로 석진이 잡아주었다. 겨우 중심을 다시 잡고 머쓱하게 웃자, 석진이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금 나 보고 비웃은 거 맞지 저거. 사람이 말이야, 살다보면 자기 발에 걸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런거지. 하기야, 생색 안 내는게 어디야. 혼자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며 걷다보니 금세 궐 밖으로 나와있었다.
나무 앞에 서있던 정국이 우리 둘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건지 또 휙 돌아선다. 쟤는 다 좋은데, 행동이나 생각 같은게 너무 예고 없이 바뀐다니까. 아 정정한다, 다 좋은 건 아니고. 또 뭐가 불만인건지 입을 불퉁 내민 꼴이 다시 영락없는 고등학생이다. 정말 다루기 힘든 애네. 얘를 보니까 새삼 우리 엄마가 나를 키우느라 고생했을게 모두 이해가 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성격 개같은 아들 하나 키우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둘이 아주 여유를 부리는구나."
"뭐래 또……."
"한 나라의 왕을 이리 기다리게 해도 되는 것이냐."
지랄. 너 그거 권력 남용이야. 석진이나 나나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시선을 피하자 눈치를 보더니 헛기침을 어색하게 큼큼, 한다. 어디 계속 헛기침 해봐라. 그러다 목 쉰다고 해도 안 쳐다볼거지롱. 한 번 약 올라보란 식으로 더 눈길을 안 주자 금방 헛기침이 잦아든다. 둘이 짜고 치는 것도 아닌데 슬쩍 돌아보려다가 석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가면 갈 수록 정국을 놀리는 코드는 정말 잘 맞는 것 같단 말이지. 정국은 뒷전으로 하고 배를 잡고 웃고 있는데, 별안간 정국이 내 손목을 세게 잡아챈다.
아. 갑자기 덥썩 잡힌 바람에 내 입에서 짧은 신음이 튀어 나갔다. 그렇게 내 팔목을 잡은 채로 잠시 아무 말 없이 눈만 도록도록 굴리더니, 얼굴이 발갛게 변해서는 나를 잡아 끈다. 영문도 모르는 내가 끌려갈 리가 만무했다. 나도 같이 힘을 주며 버팅기니, 계속 잡아 당긴다. 뭐야, 뭔데. 어디 가려고. 그래도 상대가 남자이고, 흙바닥인지라 의도와는 다르게 발에 힘을 준다고 줬는대도 슬슬 끌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데?"
"네번째 조항을 잊은 것이냐."
"어디 가냐구요."
"보여줄 것이 있다."
참. 짧게 말을 덧붙인 정국은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풀 생각은 없는건지, 그대로 다시 뒤를 돌더니 천천히 따라오던 석진을 쳐다본다.
"너는 오지 말거라."
둘이 갈 것이니 근처에도 오지 말거라. 오면 내가 너를 혼낼 것이야. 나름 엄하게 이르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웃기지. 기분이 나쁠만도 한데 석진이 자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내 허리를 굽혀 인사를 정중하게 한 뒤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정국을 올려다보니, 손으로 내 눈을 턱하니 덮어 버린다. 지금 손 크다고 자랑하는 건가.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떼라고 버둥거리니, 금방 손은 치워준다.
한 번 나를 내려다 본 정국은 다시 나를 질질 이끌며 궐 뒷 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 도망 안 갈건데 이것 좀 놓지. 내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묵묵히 걸어만 간다. 도대체 보여줄게 뭐길래 이렇게 난리란 난리는 다 부려. 호랑이라도 숨겨둔 모양인가. 옆에서 계속 헛소리로 투덜거리며 끄는 대로 끌려 가주는데, 정원 같은 곳에서 우뚝 멈춘다. 잔디가 정갈하게 정리 된 바닥부터가 초록색으로 가득한게 눈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다.
우와, 여기 되게 초록색이네. 감탄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정국이 아직도 잡고 있는 팔을 살살 두 어번 잡아 당긴다. 쳐다보란 뜻인가 해서 정국을 올려다보니 왼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킨다.
"저것이 내가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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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매우 치세요 ^_ㅠ …….
할 말이 없습니다. 껄껄.
공부도 안 하면서 바쁜 척 하고 (주륵)
마음만 같아서는 항상 여기에 붙어 있고 싶습니다 꾸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