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2 (이상한 게 아냐, 당연한 거야)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운전석 문을 열었다. 사람의 온기가 없어 싸늘하게 식은 차 안의 공기가 제법 텁텁하기만 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차인 것이었다.
"……."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다 시동을 걸었다. 내가 생각했던 결과와는 차원이 다른 결과를 맞게 돼 조금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화가 났다.
*
어릴 적부터 원하는 것이라곤 모두 손쉽게 얻었던 것 같다. 장난감이 갖고 싶다 손으로 가리키면, 부모님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장난감을 집어 카트에 담으셨고, 지나가는 소리로 기타를 배워보고 싶다 말하면, 흔쾌히 기타 학원에 등록도 해주셨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엔 그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말만 하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게 척척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마치 누군가의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난, 어린이들이 선망하는 산타클로스의 존재조차도 믿지 않았다. 산타클로스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고? 뻥 치지 마. 난 그저께 울었는데 크리스마스 날 멋진 축구화를 선물 받았는 걸. 그러니까 그건 가짜야. 산타클로스에 대해 돌고 도는 보편적인 소문은 당연 가짜일 뿐더러, 애초에 산타클로스의 존재부터가 가짜야.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아, 바보들아.
누군가로부터 얻게 되는 건 많았지만, 그걸 되돌려 주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지게 돼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건 당연한 것이며, 원하는 건 어떻게든 모두 손에 넣어야 마땅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난, 보답이라는 걸 몰랐고, 고마움이라는 것 또한 몰랐다. 받는 데에만 익숙해져, 그걸 도로 돌려주는 법에 대해선 무지했던 것이다.
'저기… 찬열아, 나 너 좋아해….'
'응.'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받기만 하던 난, 거절하는 법도 잘 알지 못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직접 찾아와 고백을 한다든가, 책상 서랍 속에 작은 선물과 함께 연애편지를 넣어두고 가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진심어린 편지들과 선물들, 수줍은 고백들 마저 내겐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내가 이런 걸 왜 받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만 들었을 뿐,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 고백 받았구나. 나한테 연애편지를 썼구나. 나를 좋아하는구나. 생각은 1차원에서만 머물렀고, 더이상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나랑… 사귀어 줄래?'
'그래.'
아무 감정 없는, 얼굴도 처음 보는, 이름도 헷갈리는, 그런 여자 아이였다. 내 눈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한 채 사귀자며 수줍게 진심을 전해오는 목소리에,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긍정적인 대답에 환히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던 그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록 얼굴은 잊어버렸지만, 그때 그 표정은 기억 속 일부분으로나마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하는 연애는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도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려 몇 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거절하는 방법을 몰라 누군가 내게 고백을 하면 아무렇지 않게 수락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의 내 연애 횟수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많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 많은 연애 경험 중에,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라곤 단 한 번도 없었다. 감정 없이 하는 연애로 얻을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 아무것도 없었다.
'찬열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궁금한 거?'
'내가 이런 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 진도 말이야….'
무감정으로 하는 연애에 감정이 실린 스킨쉽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어쩌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플라토닉 러브만을 추구했던 건 아니다. 단지, 그 사람에게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니, 스킨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 리가 없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 이유 탓인진 모르겠지만, 난 줄곧 애인에게서 차이기만 했다. 애인에게 차인 보통 남자들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며 상당히 분하게 여기거나,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 슬픔에 허덕이며 눈물을 흘리곤 할 것이었다. 그러나 몇 번을 모질게 차여도, 난 아무렇지가 않았다. 왜 차였는지에 대한 이유조차도 궁금하지 않았다.
사귀는 사이, 즉 연인 사이에서의 스킨쉽은 보통 이러한 단계로 진행이 된다. 손 잡기, 팔짱 끼기, 포옹, 뽀뽀, 키스, 더 나간다면 관계를 맺는 것까지. 언제부턴가 이러한 단계가 마치 법칙이라도 된 것도 같았다. 지금껏 만나온 여자들은 내게 '스킨쉽'이라는 것을 요구해왔다. 간혹 이상한 여잔 사귄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내게 잠자리를 요구해왔고, 모텔로 향하자마자 이별을 고하곤 했다.
'찬열아, 넌 내가 싫은 거야?'
'아니.'
'나랑… 하기 싫어?'
'그냥, 별 생각 없어.'
'…….'
'왜?'
'넌 항상 무표정이야. 내가 아무리 지랄 발광을 떨어도 넌 매일 똑같은 표정만 짓고 있잖아.'
'그래?'
'… 그래? 그래라고 했어, 지금?'
'…….'
'우리 여긴 왜 왔어? 너, 나 보면 흥분하지도 않잖아.'
'네가 오자며.'
'…….'
'내 말이 틀려?'
'…….'
'…….'
'… 헤어지자.'
'…….'
'…….'
'그래.'
약간의 흔들림도 없이 알았다 답하는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해하는 모습 또한 아직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아마 헤어지잔 말에도 무덤덤한 내 반응 탓일 것이었다.
아, 차였구나. 헤어졌다. 이제 여자친구가 없다. 외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헤어져서 좋지도, 그렇다 해서 싫지도 않았다. 신기하리만큼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젠 피곤해서 10시에 잠들었어, 와도 같이 지나치게 평범한 말을 들은 사람의 심정과도 같았다. 그만큼 난 내 연애에, 내 여자에 무심했다.
마치 사귀는 사이라면 꼭 밟고 지나가야 하는 절차인 것처럼 의미가 변질되어버린 '스킨쉽'이라는 걸 내가 먼저 시도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먼저 입맞춤을 시도한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것이었다. 가슴 설레야 할 첫 키스를 아무 감정 없이 했다. 흘려 듣기론, 입을 맞추는 순간 귓가에서 종소리가 울린다던 첫 키스였지만, 내겐 그 어떤 설렘조차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저 의무감에 시도한 스킨쉽마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 셈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한 단어로 정의를 내리자면, 나는 밝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연애의 방식만 살짝 달랐을 뿐, 웃길 땐 웃고 슬플 땐 우는 평범한 사람, 아니 그 중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연애감정에만 서툴었을 뿐이지, 그것만 제외하면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지인의 딸이 고등학교 3학년이라며 과외수업을 해주는 게 어떻겠냐는 어머니의 제안이 들어왔고, 그녀의 제안에 거리낌 없이 수락을 해보였다. 바르고 착실한 여학생인데, 그 여학생 친구도 같이 수업을 받겠다네. 괜찮지? 끝까지 내게 의사를 묻던 그녀에게 또 한 번 흔쾌히 수락을 해보였고, 일주일에 두 번 학생들을 만나기로 했다.
'음, 안녕. ○○이랑 종인이지?'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친구가 여자일 줄 알았는데, 제법 키가 큰 사내였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처음부터 인상을 굳히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의아했다. 지금껏 내가 봐왔던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바라볼 때 저런 차가운 눈빛이었던 적이 없는데, 왜 저 아이는 저런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인지 궁금했다.
'고등학생을 상대로 작업 거는 것 같아요.'
'작업?'
'네, 작업.'
'음, 종인아. 나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
'왜이리 삐딱하게 생각하지? 첫 날부터 느꼈던 건데, 종인이는 나를 너무 싫어하는 것 같아.'
'자꾸 종인이, 종인이 하지 마세요. 저 유치원생 아니거든요.'
고등학생에게 작업을 거는 것 같다는 말이 조금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의도였던 건 전혀 아닌데 그게 그런식으로 느껴졌다니….
지금껏 제대로 된 연애를 해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절하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탓에 고백은 받는 족족 수락을 해 연애 경험도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연애 경험 속에 내가 진심으로 좋아했고 사랑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단지 연애감정이라는 것에만 서툴어 가슴 설레는 연애라는 걸 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감정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났고, 웃긴 영화를 보면 웃음이 났다. 그러나 '연애'라는 것에는 이상하게도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연애감정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단지 연애감정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샌가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정한 누군가를 보면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지켜보고만 싶은, 그런 이상한 감정을 말이다. 이 감정이 연애감정이었다는 건 시간이 흐른 뒤 친구놈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저 낯설기만 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선생님'이라 부르는 목소리가 좋았다. 칭찬에 약한 건지, 사소한 칭찬의 말 한마디에도 얼굴이 쉽게 달아오르는 모습 또한 귀엽게 보였다. 고등학생을 상대로 이런 감정을 품어도 될지에 관한 고민은 전혀 안중에 없었다. 고등학생이면 왜, 뭐가 어때.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내가 고딩을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이상해? 잘못된 거야?
'종인이 좋은 애지?'
'넌 종인이 좋아해?'
'나는 좋아?'
나는 네가 좋아.
맞물려 있는 입술의 촉감만이 느껴지던 지난 날의 입맞춤과는 차원이 다른 입맞춤이었다. 키스를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맞춰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입맞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탕과도 같이 달달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나누는 입맞춤이란 이렇게 달콤한 거구나. 그저 연애감정이라는 것 하나만 실렸을 뿐인데, 차이는 거대했다. 쉬이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법한 묘한 감정이 내 마음속을 지배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론 자꾸만 같은 말을 되뇌기 시작했다. 원하는 건 모두 얻어야 마음이 편해. 갖고 싶은 건 전부 가져야 해. 너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버린 이상, 너는 내 여자가 되어야 해.
그리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그 둘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쯤은 단번에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마음이 쌍방향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바보같이 삽질만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내가 제 3자인 입장이라 해도, 기회는 많을 듯했으니 말이다.
'싫어하진 않는다 했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란 말은 안 했는데요.'
'걔한테 잘 보이려 애쓰지 마세요. 그렇게 해서 결국 얻는 게 뭔데요? 은팔찌밖에 더 있어요?'
'안그래도 지금 수능 때문에 예민한 애 건들지 말아요.'
'지켜보는 나는 더 짜증나니까.'
지랄맞네.
*
- 알았어. 그럼 거기로 와. 늦지 말고.
"너 오늘 밤 새도 되냐?"
- 안돼. 과제 밀린 거 다 해야 된다.
"그런 건 좀 미리…"
한참을 침대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진 채 시간을 흘려보내다보니 시곗바늘은 어느덧 늦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괜히 마음이 우울하고 적적해 오랜 시절 알고 지내온 절친한 친구인 도경수에게 연락을 했다. 분명 오늘 일을 털어놓는다면 정신 나간 새끼라며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듣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상관은 없었다. 지금은 그냥 마음이 심란하기만 했다.
*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어내곤 집을 나섰다. 그리곤 주차가 되어있는 차로 다가가 망설임 없이 운전석 문을 열어 올라탔다.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이 꽤나 엿 같았다.
*
평소 자주 오던 술집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앉아있는 도경수의 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건지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고, 작게 손인사를 한 뒤 녀석이 앉아있는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왔냐."
"오랜만이네."
"너 바빴잖아. 고3 애들 과외선생 노릇 하느라."
"그러는 넌 대학 생활 어때."
"별로. 우리 과에서 내가 제일 나이 많아."
"당연하겠지. 넌 재수도 했고 군대도 갔다 왔으니까."
"내년에 휴학하려고."
먼저 마시고 있었던 건지, 도경수의 잔엔 맑고 투명한 액체가 반 쯤 채워져 있었다. 가만히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턱을 괴곤 다른쪽 손가락으로 술잔을 톡톡 건드리는 의미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술 마실 때의 얼마 없는 버릇 중 하나였다. 도경수의 작은 손짓에 의해 잔에 담겨있던 액체가 살짝 일렁였다.
"차였어."
"……."
무덤덤한 어투로 내뱉어진 내 말에, 테이블에 꽂혀있던 녀석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원체 말이 별로 없는 놈이었던지라, 도경수의 입술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한 채 큰 눈을 느리게 꿈뻑이기만 하던 녀석이 한숨을 작게 내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 했어?"
"어."
"… 너도 참,"
"……."
"독한 놈이다."
"뭐?"
"내가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고등학생을 상대로…"
"또 그 소리야?"
"물론 이제 성인이 된다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네 살 차이가 적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
"무슨 상관이야."
"……."
"내가 좋다는데."
"말 끊지 말고."
"……."
"담배 줄까."
"나 담배 안 피우는 거 알잖아."
도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꺼내들었던 담뱃갑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녀석이 술이 반쯤 담겨있던 술잔을 들어 쭈욱 들이켰다.
"네가 누굴 좋아하는 감정을 처음 느껴 본다는 건 나도 잘 알겠는데,"
"……."
"솔직히 좀 유치하다는 생각 안 드냐."
"……."
"게다가 좋아하는 남자애도 있는 것 같다며."
"나 원래 유치한 놈이야."
"……."
"유치한 놈이니까 유치하게 나갈 거야. 지금도, 앞으로도."
"……."
"… 씨발."
"……."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넘칠듯 위태롭게 담긴 술잔을 들어 한 번에 쭈욱 들이켰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돼. 왜 김종인을 좋아해? 오래 봐온 만큼 느껴지는 감정도 남다르다 이건가.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인상을 굳히고 있던 김종인은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듯했다. 얼마 지나고나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지겠지 하며 신경을 쏟지 않으려 노력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대하는 녀석의 모습은 삐뚤어지기만 했다. 그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재수가 없어 똑같이 대해주자, 하며 마음을 먹었던 것도 벌써 예전 일이었다. 그러나 고등학생을 상대로 이런 마음을 갖는 것도 조금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난 원래 유치한 놈이었으니, 남들이 보기에 유치하다 생각할 법한 행동을 해도 문제될 건 없었다. 난 원래 그런 놈이니, 그런 짓을 해도 상관은 없어.
자꾸만 들러붙는 모습이 싫었다. 듣기론 십 몇 년 동안의 시간을 함께 보내왔다지만, 그 사실 마저도 이젠 화가 났다. 함께 보내온 십 몇 년이라는 시간을 계기로 찰거머리마냥 옆에 찰싹 붙어있는 모습을 보기가 싫었다. 물론 녀석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싫었다. 둘이 친하다는, 항상 같이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해, 그냥."
"……."
"차였다며. 그럼 말 다 했지."
"……."
"싫다 하는데도 자꾸 달라붙고 귀찮게 하는 남자를 과연 여자들이 좋아할까."
"왜 포기해."
"뭐?"
"좋아하는 건 가지라고 있는 거 아니야?"
"……."
"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다 손에 쥐어야 해."
"그건 잘못된 거야."
"안 그럼 답답해서 못 살아."
"… 미친놈."
도경수의 낮은 목소리가 공중에 울려퍼졌다. 그리곤 한참 닫혀있던 녀석의 입술이 작게 벌어지며 또다시 낮은 목소리가 내게 물어왔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사실 듣고 싶은 대답이라곤 없었다. 누구든 내 편이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 하나였다.
"넌 존나 이상한 놈이야. 오늘 새삼 다시 느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도경수가 주머니 속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나더러 이상한 놈이라 하는 새끼는 아마 너밖에 없을 거다. 지금껏 여자 한 명도 안 사겨 본 너도 이상하다면 이상한 놈이지, 충분히.
"여기 금연 구역이야."
"알아."
대충 대답을 내뱉은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나오려면 나오라는 손짓을 해보이는 녀석에게 살짝 고개를 젓곤 술잔을 집어들었다. 분명 밤은 깊어갔지만, 집엔 들어가기가 싫었다.
*
결국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향할 수 있었다. 평소 술이 센 편이었던지라 많이 마셔도 상관은 없었지만, 어젠 도대체 얼마나 많이 마셨던 건지 만취를 한 상태로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이렇게 늦은 시각에 눈이 뜨이기도 참 오랜만이었다. 별로 할 일이 없을 때에도 일찍 일어나곤 하던 습관이 오늘은 적용되지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운 걸 보니, 밤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마셨던 술이 아직 덜 깬 듯했다. 도경수를 만나 무슨 말을 건넸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에 관한 모든 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제 저녁, 내가 했던 고백과 내가 들었던 거절의 멘트는 모두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다시 떠올리자 괜히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도 같으면서, 그와 동시에 내가 초라해지는 것도 같았다.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들은 아마 수능이 끝난 날을 기점으로 더이상 아무런 할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고3 뿐만 아니라 내게도 해당이 됐다. 고등학교 3학년만을 과외해주던 내겐 더이상 할 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매번 학습할 자료들을 찾아 프린트물을 만들던 토요일이, 그저 시간을 때울 만한 좋은 수단을 찾아야 할 무료한 날로 바뀌고 말았다. 분명 전보다 자유로워진 건 좋았지만, 이렇게 어떠한 할 일도 없이 무료하게 보내야만 한다는 건 싫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잠이 들었던 탓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분명 넥타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목엔 넥타이가 걸려있지 않았다. 아마 답답하다며 풀어놓곤 술집에 놓고 왔을 것이었다. 생일 선물이라며 전 여자친구가 줬던 넥타이 같은데…,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여자애 이름은 뭐였더라. 민지? 민주? 미안하지만, 이름은 고사하고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내가 방을 나섬과 동시에 잊혀지게 될 사실이었다.
*
샤워를 마치곤 대충 옷을 챙겨입은 채 집을 나섰다. 배는 고팠지만 속이 좋지 않았던 탓에 입맛이 없었다. 어차피 집엔 밥도 해두지 않아 밥솥은 비어있었고, 아쉽게도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제법 쌀쌀했지만 햇볕은 쨍쨍하게 내리쬤다. 거리엔 데이트 약속을 기다리는듯 보이는 남자, 세발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하하호호 웃고있는 어린 아이들, 카페 유리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내 등 각기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
그 중에서도 카페 앞 사내에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자세를 낮춘 채 카페 안을 유심히 훔쳐보기라도 하듯 조심스레 행동하는 모습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였다. 마치 생선 가게 안의 생선을 탐내는 도둑 고양이와도 같은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곤 곧이어 유리창에 몸을 기댄 채 앉아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카페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더니 걸음을 이쪽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고 말았다. 꽤나 갸름한 얼굴형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인상이 조금은 차갑게 보였다.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조금은 꺼림칙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슬쩍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 헙."
"……."
내가 뒤를 돌아보자,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건지 녀석과 또다시 눈이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시선이 맞닿자 흠칫 놀라며 대충 목례를 한 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꽤나 수상했다. 나는 분명 처음 보는 녀석인데, 녀석은 마치 나를 알고 있기라도 한듯 이상한 모습을 내비치는 게 괜히 기분이 나빴다.
녀석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방금 전 녀석이 카페 안에 대고 손을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주 작게 피어오른 궁금증이었지만, 다시 걸음을 옮겨 카페 안을 흘끗 살펴 볼 수밖에 없었다.
"… 음."
전혀 예상치 못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화가 치솟는 것도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연인 사이라도 되는듯 알콩달콩해 보이는 모습을 깨고 싶었다.
'네가 누굴 좋아하는 감정을 처음 느껴 본다는 건 나도 잘 알겠는데,'
'솔직히 좀 유치하다는 생각 안 드냐.'
'게다가 좋아하는 남자애도 있는 것 같다며.'
'넌 존나 이상한 놈이야. 오늘 새삼 다시 느껴.'
난 이상한 놈이 아니야. 당연한 거지. 내가 가져야 할 게 다른 놈한테 있으면 뺏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좋아하는 건 가지라고 있는 거야. 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다 손에 쥐어야 해. 안 그럼 답답해서 못 살아.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당연한 거야.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말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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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열이.. 그리 좋은 역할인 건 아니에요 :) 저도 알 수 없는 캐릭터네요.. 왜 이렇게 잡았지.... 끙끙
곧 저녁시간인데 저녁 맛있게, 배부르게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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