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4 (19세의 끝자락을 추억할 上)
시간이 멈춘 채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방학은 꽤나 빨리 다가왔다. 어째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제법 간단한 절차로 방학식이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방학식'이라 하기에도 벅찰 만큼 그다지 하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여차저차 방학식은 끝이 났고, 드디어 학교에서 해방이 되었다며 신이 나 펄쩍 뛰던 아이들의 아우성이 다시금 떠올랐다.
방학식이 끝난 뒤 김종인과 시내를 돌아다니다 결국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과 헤어지기가 싫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던 녀석의 행동 탓에 가슴은 매일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남들에겐 별거 아닐 수 있는 행동들이 내겐 그저 설렘으로 다가왔다. 마치 남자친구와도 같은 녀석의 행동에 마음이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답답했다. 친구라 하기엔 상당히 가깝지만 그렇다 해서 연인은 절대 아닌, 애매모호한 나와 녀석의 사이 탓이었다.
"몇 시에 나가니?"
"음…, 20분 뒤에 나가. 8시에 만나기로 했어."
자꾸 떠올리면 머릿속이 복잡해질 법한 생각들을 잠시 제쳐두곤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방학식을 치렀던 날로부터 벌써 며칠이 지나고 녀석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날이 다가왔다.
1월 8일 오전 8시 너희 집 앞에서 만나. 며칠 전, 녀석에게서 꽤나 간결한 문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흔쾌히 허락을 해줄 거라 생각하며 부모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을 때,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를 하셨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김종인과 함께라면 안심을 하고 마음을 놓던 부모님이셨지만, 녀석과 떠나는 1박 2일 여행이란 조금 걱정이 되시는 듯했다.
'곧 졸업인데, 3학년 끝나기 전에 추억 하나 만들고 싶어서요. 그래도 어머님께서 안 된다 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부탁드려요.'
'걱정 많이 되실 거라는 거 알아요. 제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잘 다녀 오겠습니다.'
직접 부모님과 전화통화를 하며 침착하고 담담하게 설득을 하던 김종인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 녀석을 믿은 채 결국 큰 맘 먹고 승낙을 해주시던 부모님의 모습까지도….
펜션 예약은 오세훈의 몫이었다. 녀석은 친척 중 그쪽 해수욕장 근처에 위치한 펜션을 운영하시는 분이 있다며 저에게 맡겨달라 큰소리를 쳤었다. 아직 미성년자이니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에, 어렵사리 부모님의 동의까지 얻고나서야 계획의 크나큰 뼈대는 세워진 셈이었다.
"……."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에 대한 떨림과 설렘은 전혀 없었는데, 이렇게 준비까지 마친 상황이 되자 괜스레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까워서 그동안 발라 보기는 커녕 아예 포장조차 뜯어보지 않았던 틴트를 서랍 속에서 꺼냈다. 김종인이 사준 틴트였다. 내가 이런 날 아니면 이걸 언제 발라 보겠어. 어차피 발라 봤자 녀석이 눈치 채주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특별한 네가 준 특별한 선물의 포장을 뜯어야겠다.
살며시 뚜껑을 열곤 아랫 입술에 틴트액을 묻혔다. 녀석이 골라준 색상이 내게 어울릴진 미지수였지만, 일단 색상 하나만 봤을 땐 마음에 쏘옥 들었다.
"20분 지났다. 종인이 기다리면 어쩌려고 아직도 거울만 보고 있어?"
"어? 아, 이제 나가요! 엄마, 다녀 올게! 아빠, 출근 잘 하세요!"
짐을 챙겨들곤 서둘러 운동화를 신었다. 헛딴 생각을 하다 또 약속시간에 많이 늦어버릴 뻔했다. 이런 버릇 정말 나쁜 버릇인데…. 고쳐야지, 고쳐야지 생각만 할 뿐 그걸 실천으로 옮기지 않아 아직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셈이었다.
휴대폰 배터리와 충전기를 잘 챙겼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생각을 되짚어 보곤 현관 문을 열었다. 짐이 그리 많은 건 아니었지만, 가방은 제법 묵직했다.
"늦어ㅅ… 어어…!"
김종인을 보자마자 늦어서 미안하다며 심심한 사과의 멘트를 전하고자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런 나를 보며 무언가를 툭 던져오는 녀석 탓에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날아오는 물건을 받아내야 했다. 반사적으로 손에 잡힌 폭신한 털뭉치를 내려다 보았다. 녀석이 나를 향해 던져온 건 다름 아닌 하얀 목도리였다.
"거긴 여기보다 훨씬 춥대."
"… 아…."
"덜렁이라 분명 안 챙겼을 것 같아서 오는 길에 하나 샀어."
"……."
"가서 춥다고 찡찡대는 거 듣기 싫기도 하고."
"… 고마워."
고맙다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내 손에 들린 하얀 목도리를 빼앗아 조심스레 내 목에 둘러주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가까워진 거리 탓에 숨이 턱- 하고 막힐 것도 같았다. 내 목도리를 사올 생각은 하고 제 목도리를 챙길 생각은 안 했던 건지, 녀석의 목은 허전하기만 했다.
"네 목도리는?"
"없어도 된다."
"… 억지대마왕."
"뭐?"
"좋다고."
"뭐가."
"너…"
"……."
"… 가 사준 목도리…."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진심이 튀어나올 뻔했다. 재빨리 임기응변의 기술을 발휘해 나름 자연스럽게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정말이지 간이 철렁할 만한 순간이었다. 아직까지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도 같았다. 곧이어, 내 목에 예쁘게 목도리를 둘러주던 김종인의 손길이 미세하게 멈췄다. 왜 그러는 건가 싶어 슬쩍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목도리로 향해있을 줄 알았던 녀석의 시선은 다름 아닌 내 입술로 향해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녀석이 황급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내게서 떨어졌다. 내 입술에 뭐가 묻었나…. 슬쩍 입술을 매만지며 녀석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가만히 앞만 보며 걷기만 하던 녀석의 시선이 다시 내 입술 쪽으로 향해왔고, 그런 녀석의 모습이 의아하기만 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잘 어울리네."
"응?"
"입술."
"……."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제가 골라준 거라 그런지 단번에 입술 색을 언급해주는 녀석의 모습에 마음이 설렜다. 이런 섬세한 변화를 손쉽게 알아채 줬다는 사실에 마냥 기뻤다. 사소한 행동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내 마음을 들뜨게 할 수 있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
*
10분이 지나서야 약속 장소에 모습을 비춘 오세훈 탓에 김종인의 화는 머리 끝까지 차오른 듯했다. 저도 잘못을 했다는 걸 아는지, 오세훈은 멋쩍게 웃으며 살금살금 김종인과 내 앞에 다가와 섰다. 그런 오세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쉰 김종인은 욕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는 듯했다.
"넌 무슨 해외 여행이라도 가냐. 짐이 왜이리 많아."
"그냥 이것 저것 챙기다 보니…. 아, 썬글라스 챙기려다 말았다."
"뭔 썬글라스…. 해외에 화보라도 찍으러 가는 건 줄 아나 보네. 썬글라스는 있냐."
"있지, 그럼."
"체육대회 소품으로 반 애들이랑 공구했던 그거?"
"뭐라냐…. 그거 하트 모양인데요."
서로 티격태격하며 말을 툭툭 내뱉는 김종인과 오세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초등학생들보다 유치하게 말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저게 정녕 스무 살을 앞둔 남정네들이 할 대화란 말인가….
"우리 기차 시간 언제야?"
"곧."
"와…, 나 좀만 더 늦었으면 기차 놓칠 뻔."
"좀만 더 늦지 그랬냐."
"… 오늘 아주 신나나 봐? 입이 귀에 걸렸네요~?"
"넌 귀가 입에 걸리게 만들어 줄게, 내가."
"… 충격."
한마디를 지지 않는 김종인의 언변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김종인과 오세훈은 서로의 신경을 긁어대기 바빴으니 말이다. 그런 녀석들과 1박을 함께 한다니…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평소 창밖의 경치를 보는 걸 좋아했던지라, 버스나 기차를 탈 땐 항상 창가에 앉곤 했다. 그런 나를 알고 있기라도 한지, 김종인은 아무렇지 않게 바깥 쪽 자리에 털썩 앉았다. 왜 자기가 혼자 앉아야 하는 거냐며 불평 불만을 해보이던 오세훈은, 딸기맛 막대사탕을 하나 물려주자 제법 잠잠해졌다. 옆에 앉아 가만히 휴대폰 게임만 하고 있는 김종인을 슬쩍 바라봤다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저번 설 연휴에 시골을 내려갈 때 이후로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였다. 겨울이라 그런지 크나큰 나무엔 이파리들이 없었다. 마냥 벌거벗은 초라한 나무였다.
도대체 모두의 마블이 뭐라고 예전부터 꾸준히 해오는 것인지, 녀석이 신기하기만 했다. 창밖에 고정시켜 두었던 시선을 옮겨,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주사위를 굴리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게임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좀 쳐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괜히 궁금했다. 설마 때리진 않겠지….
"… 아."
엄청난 내적 갈등을 거친 뒤 제법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나름 배려를 해 녀석의 차례가 아닌 상대편의 차례일 때 작은 장난을 걸어 보자 마음을 먹곤, 녀석의 손에 들린 휴대폰의 홈 버튼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꾸욱 눌렀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입에선 작은 탄성이 내뱉어졌고, 한참을 멍하니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녀석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졌다.
"혼나."
살짝 좁혀진 미간을 보자 조금은 겁이 났다. 워낙 진하고 뚜렷한 이목구비라 가만히 있어도 누구든 쉽게 다가서지 못할 인상인 녀석은, 조금이라도 표정을 굳히면 꽤나 무서운 인상이 그려졌다. 그런 녀석의 표정을 보자, 방금 전 했던 장난스러운 행동에 엄청난 후회감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역시 못 말리는 게임돌이라니까….
미세하게 굳어진 표정의 녀석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나름 미안함을 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게임을 이어갈 것만 같던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게임을 종료시키곤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오기 시작했다. 어깨에 녀석의 머리가 닿는 동시에 순간 온몸이 굳는 듯했다. 그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기조차 힘겨웠지만, 꽤나 어색히 고개를 돌려 힐끗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이 상태로 잠이라도 잘 기세인 건지, 녀석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사람마냥 괜히 숨이 막혀오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숨을 참아내다 슬슬 숨이 막혀올 즈음이 되면 한 번에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바로 옆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녀석의 샴푸 향 탓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 아."
그저 김종인에 대한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기 시작했을 때, 바로 옆 오세훈이 앉아있는 쪽에서 찰칵- 하며 사진이 찍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적잖이 당황해하는 오세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나와 김종인의 모습을 찍었다는 걸 알 수 있을 법한 각도로 앉아있던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꽤나 어정쩡하게 포즈를 취해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저는 이쪽을 도촬한 게 아니라, 창밖을 배경으로 한 채 셀카를 찍었던 거라며 간접적으로 부정을 하듯 말이다.
"… 대박 잘 나왔네. 이거 셀카로 해야지. 아니, 뭐래. 프사로 해야지."
괜히 혼자 당황해 말까지 꼬인 채 이상하게 내뱉어버린 오세훈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이지 허당기가 다분한 녀석이다.
*
"나 얼마나 잤냐."
"음…, 꽤 많이. 한 시간 반인가?"
내려야 할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천천히 잠에서 깨어난 김종인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내게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내 대답에 헛웃음을 내뱉곤 뻐근한 목을 몇 번 움직이던 김종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녀석의 눈엔 졸음이 가득해 보였다. 반쯤 감긴 녀석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미안. 어깨 아팠지."
"어? 아, 아니. 별로…."
손으로 제 눈을 비비며 다른 쪽 손으로 내 어깨를 살며시 주물러 오기 시작하는 녀석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사실 어깨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니, 내가 못 느꼈던 것일 수도 있는데…, 설렘이라는 감정이 너무나도 컸던 탓일까, 어깨가 아프고 저리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벌써 도착했냐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살짝 아쉬운 감정도 느껴졌으니….
*
꽤나 아늑한 분위기의 펜션이었다.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감탄사를 내뱉던 오세훈이 가장 먼저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여기 우리 방 찜."
"우리 방?"
"너랑 나랑 방 같이 쓰는 거 아니었어?"
"뭔 소리야. 당연히 각방 써야지."
인상까지 찡그리며 정색을 하는 김종인을 바라보던 오세훈이 제법 쿨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말을 툭 내뱉은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쏘옥 들어가 버린다.
"○○아, 옷 갈아입을 거니까 들어오지 마."
굳게 닫힌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종인이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천천히 안을 둘러보던 녀석이, 방금 오세훈이 들어간 방과는 조금 멀리 떨어진 방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 네가 써."
"너는?"
"난 여기, 가운데."
"아아…."
"너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언제나 한결 같은 무심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녀석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발걸음을 떼 방으로 향했다. 제법 깔끔하면서도 아늑한 실내가 마음에 쏘옥 들었다. 오세훈이 펜션 예약 하나는 잘 했네. 물론 친척의 힘을 빌린 거긴 하지만….
짐을 풀어 꽤나 느긋하게 정리를 하곤 침대에 편히 앉았다. 그저 고요하기만 한 방 안엔 똑딱거리며 움직이는 시곗바늘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올 뿐, 그 외엔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현재 시각은 갓 12시를 넘긴 제법 이른 시각이었다. 곧 점심 먹을 시간이네…. 그래도 역시 할 게 없을 땐 휴대폰이지. 딱 점심 먹기 전까지만 며칠 전에 다운 받아놓은 휴대폰 게임을 해야겠다 생각하며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곧이어, 굳게 닫혀있던 방문에 누군가 노크를 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 소리에, 침대에서 슬쩍 내려와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어 보았다. 열린 방문 앞엔 스냅백을 푸욱 눌러쓴 오세훈이 헤실헤실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왜?"
"나랑 산책 좀 하고 올래?"
"산책? 김종인은?"
"지금 씻고 있나 봐."
"그럼 김종인 다 씻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에이…. 야, 오늘 내가 김종인한테 당했던 걸 생각해 봐. 기다려 줄 가치도 없는 놈이지."
"……."
"그냥 둘이 스윽 한 번 갔다 오자. 혼자 가긴 심심해서 그래. 먹을 것도 좀 사오고. 저녁엔 조개 구이도 먹어야 되잖아."
"……."
"그래, 뭐… 김종인이랑 둘이 가고 싶다 이거지?"
"… 뭐라는 거야. 아니야. 갔다 오자. 근데 김종인한테 말은 하고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 전혀.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어련하시겠어."
어린 아이라도 된 양 고집을 부리는 오세훈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벗어두었던 겉옷을 집어들었다. 한 쪽 팔만 집어넣고 다른 쪽 팔은 아직 제대로 집어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막무가내로 내 팔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밖을 나서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꿈에도 알 리 없는 김종인이 들어가 있는 화장실에선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
역시 겨울 바람은 차가웠다. 아마 바다에 도착하면 더 추울 거라 말하던 김종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차디찬 바람 탓에 살이 에는 것도 같았다. 옆에 서서 제 얼굴을 감싸며 엄청난 추위에 대한 감탄사를 내뱉던 오세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닷물은 한없이 짙고 푸르렀다. 누가 새겨놓은 건지 모를 모래 위 간략한 메시지가 바닷물에 의해 순식간에 지워지고 말았다. 바닷물이 휩쓸고 간 모래사장 위엔 더이상 어떠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부서지는 햇살 속 잔잔히 물결치는 바다의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저 천천히 해안선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만 하는 오세훈을 따라 발걸음을 뗐다. 곧이어, 한참 동안이나 굳게 앙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며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너 김종인이랑 안 지 대충 몇 년 됐지?"
"음…, 엄청 오래 됐지. 십 년도 더 넘었으니까."
오세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냐며 녀석을 향해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다시금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오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평소 내가 봐왔던 능글맞은 오세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넌 지금까지 김종인이 남자로 보였던 적 없어?"
"뭐라고?"
"남자로 보였던 적 없냐고. 그냥 친구 말고."
"… 없지."
"단 한 번도?"
느릿느릿 떼어지던 오세훈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멈춰졌다. 그런 녀석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한숨을 푸욱 내쉰다. 오늘따라 오세훈이 이상한 것도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겠지. 도대체 내게 그런 걸 왜 물어오는 것인지 이유가 궁금했다.
"왜?"
"왜냐니?"
"아니, 그렇게 많은 시간을 알아왔는데 어떻게? 말이 돼?"
"……."
"맞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다 했지."
"어?"
"그때 그랬었잖아. 내가 무작정 단톡 만들었을 때."
"… 아."
"그럼, 그거 김종인은 아닌 거야?"
"그때 그건 그냥 장난으로 그랬던 거야."
"장난?"
"… 그래, 장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듯한 오세훈의 표정에 괜히 주눅이 들었다. 안그래도 차가운 인상인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지으니 꽤나 무섭게 느껴졌다. 확실히 선을 긋는 듯한 내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 건지, 녀석이 제 뒷목을 쓸었다. 그리곤 살짝 몸을 돌린 채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에, 덩달아 시선을 바다 쪽으로 옮겼다. 김종인이 남자로 보였던 적…, 당연히 있지. 그게 바로 지금인 걸. 생각해보면 난 김종인을 남자로 보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김종인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전에도 난 이미 녀석에게 은근한 설렘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저 쉽게 눈치를 채지 못했을 뿐이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선을 그어놓지 않다간 왠지 오세훈에게 내 마음을 들키게 될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맞아. 그게 김종인인 것도… 맞고.
"일부러 김종인 떼어놓고 나온 것도, 너랑 김종인 뒷담 까려고 그랬던 거야."
"……."
"이거 다 이르면 안 된다."
"너 하는 거 봐서 이를지 안 이를지 결정할래."
"이야…, 완전 치사하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냅백을 고쳐 쓰는 오세훈을 바라보다 살풋 웃곤, 옷깃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살짝 몸을 움츠렸다.
"추워?"
"그냥. 바람이 좀 차가워서."
"이럴 때 김종인은 뭐 어떻게 해줘? 옷 벗어줘?"
"응? 아니…. 춥다 하면 자기도 춥다 해. 그리고 끝이야. 왜?"
"… 아, 멍청한 새끼."
"뭐라고?"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깨를 으쓱이며 시치미를 뚝 떼던 오세훈이 내 겉옷에 붙어있는 모자를 씌워주기 시작했다. 모자를 쓰자 차가운 바람이 조금은 차단되는 것도 같았다. 고맙다는 말 대신 팔을 뻗어 녀석의 어깨를 살짝 토닥여 주었다. 초반엔 별로 친하지 않아 녀석의 말에 대꾸를 하기도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어느새 녀석이 편해진 것도 같았다. 그렇다 해서 비밀스러운 것까지 털어놓을 정도로 친해진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름 편한 사이가 되었다는 건 분명했다. 좋은 거겠지….
"너도 모쏠이야?"
"… 그건 왜 물어 보는 건데?"
"그냥. 김종인은 모쏠이잖아."
"넌 아니야?"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아."
"……."
"김종인 걔는 고백도 많이 받는 놈이 왜 여태껏 애인이 없었을까."
"그러는 너는. 너도 고백 많이 받을 것 같은데."
"부끄럽지만, 난 아직 운명적인 사랑을 믿거든."
"……."
"운명의 데스티니랄까."
꽤나 진지하게 말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운명의 데스티니라니…. 마치 전설의 레전드와도 같은 어이없는 발언이었다.
"김종인은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것도 아닌데…, 왜일까."
"… 아직 연애할 생각이 없나 보지."
"오오."
"고3한테 연애는 사치라고 하긴 했었어, 저번에."
"하지만 곧 고3 생활도 끝인데."
"… 뭐, 대학 가면 연애 하겠지. 김종인 좋다 하는 여자들도 많을 테고."
자꾸만 우울한 쪽으로 생각이 치우쳤다. 모쏠이면 뭐해. 어차피 대학 가면… 여자친구 사귀겠지.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동안 연애를 안 했던 거라면, 이제 곧 하겠네. 더이상 걸릴 것도 없고, 오히려 자유로워질 테니까. 여자친구… 사귀겠지.
"김종인 같은 애들이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장난 아니지."
"……."
"그냥 딱 전형적인 해바라기."
"… 그렇구나."
"매일 나랑 티격대고 싸우긴 해도, 좋은 놈인 건 맞는 것 같아."
"… 네가 김종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
"… 야, 너 농담이 좀 심하다."
내 말에 정색을 해보이며 기가 막히다는듯 헛웃음을 내뱉는 오세훈의 반응이 웃겼다. 당연 장난이었지만 그걸 또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이야.
"졸업하고 김종인 군대 가면 어떻게 버틸래, 너."
"… 아…."
"… 아, 군대 갈 생각 하니까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려."
"… 잘 다녀 와. 얼마 안 남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는 녀석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벌써 코 앞에 다가와버린 셈이니, 어찌 보면 녀석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1년 9개월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벌써부터 막막했다.
"김종인한테 잘해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어."
"그런가."
"그럼, 당연하지."
"음… 어쨌든, 김종인 여자 될 사람은 좋겠다."
"……."
"그치."
자꾸만 의미 모를 말들을 내뱉으며 씨익 웃어보이는 오세훈의 모습에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유독 '김종인의 미래 애인'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하는 게 조금은 이상했다. 그리곤 곧이어 내 머리 위에 제 손을 살포시 얹어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시금 말을 건네온다.
"진짜 좋겠다. 그치."
"… 뭐야."
"너 아주,"
"……."
"좋겠어."
오세훈은 아주 독특한 놈인 게 분명했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특이하고 유니크한 놈일지도.
이건 후문이지만, 오세훈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해온 말이 무슨 의미였던 건지 정확한 이해가 가능했던 건, 훗날 내가 김종인의 여자친구가 되고, 김종인이 내 남자친구가 되던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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