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현성] 자존심
W. jh23
그러니까, 김성규에게는 자존심이 인생의 전부였던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ㅡ사실 연애의 끝을 보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ㅡ김성규가 왜 그렇게 칼날을 세우고 있었는지,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김성규에게 매달린 것도 나였고, 고백한 것도 모조리 나였다. 남자든 여자든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려던 김성규에게 몇 달, 각고의 노력 끝에 마음을 얻어낸 것도 당연히 나. 김성규는 큰 이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카페를 빌려 피아노를 쳐주는 것보다는 비 오는 수요일의 장미 한 송이를 더 좋아하곤 했다. 자존심은 그렇게 세가지곤, 말은 그렇게 툭툭 내뱉으면서도 좋아하는 티가 확 드러나던 김성규였다. 나도 처음엔 그게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면서도 '돈 아깝게 왜 사오냐?'라며 어깨를 가볍게 내리치던 그 행동도, 고작 기습뽀뽀 한 번에 절대 만지지 말라면서 몸을 뒤로 내빼는 모션도 모두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무작정 동거를 시작했다. 그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김성규가 오피스텔 전세금의 반을 지불했던 점이었다. 동거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던 내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김성규는 쉽게 수긍했다. 약간의 고민 없이, 마치 밥 먹었냐는 일상의 대화처럼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동거에 돌입했다. 어쨌든 그렇게 죽고 못살던 김성규에게 질려버린 것도 내가 먼저. 사랑스럽고 귀여워보이던 김성규의 철벽 수비는 이제 재미없는 한물 간 영화처럼 느껴져서, 나는 곧이 곧대로 반응하고 감동하는 다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더욱 화가 났던 것은, 동거를 하면서도,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크게 요동하지 않던 김성규의 태도였다. 항상 새벽이 되서야 귀가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혹은 그저 우연인지 몰라도 김성규는 항상 소파에 앉아 내 얼굴을 보고서야 잠이 들었다. 여성용 향수의 냄새가 짙어도, 셔츠 카라에 립스틱이 묻어도 그저 눈길을 한 번 주는 것이 끝. 나는 그런 김성규에게 약간의 화만 났을 뿐 어떠한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함께 쓰던 침대도 이젠 온전히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술에 취한 채 비틀비틀 침대에 누워버리면, 김성규는 당연한 일상처럼 소파에 얇은 담요 하나만을 가지고 잠을 청했다. 내가 숙취에 시달리며 깼을 때는 꿀물과 북어국을 끓여놓은 채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질식할 것 같은 공기로, 우리는 그렇게 위태로운 동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회의감이 든 것은 오늘 새벽이었다. 친구 부모님이 상을 당해 만날 수 없다던 그녀의 연락 덕분에 나는 하루종일 오피스텔 안에 있어야만 했다. 김성규는 외출하지 않는 나를 보고도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휴대폰을 만지는 것도 아니었다. 김성규는 그저 멍하니, TV에 눈을 고정할 뿐이었다. 조금 지겨우면 서재에 들어가 서양 음악사에 관한 책을 읽고, 배가 고프면 다 말라 비틀어진 빵 한 조각을 떼어먹고, 이런 반복적인 생활이 김성규의 전부였다. 소파에 멀찍이 떨어져 앉은 나는 제 3자처럼 김성규를 관찰할 수 밖에 없었는데, 김성규가 식탁 앞에 쪼그려앉아 우유 한 잔 없이 며칠 전에 사 놓은 빵을 먹는 것을 보고 문득 회의감이 든 것이었다. 나와 김성규가 이런 사이가 된 지는 어엿 6개월. 빠르게 넘어간 달력에 시선을 한 번 주고, 김성규의 마른 몸을 한 번 보고, 김성규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 얼굴을 잠깐 쳐다봤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비참하고도 못된 사람이란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김성규는 항상 옆에 있었고, 내가 만취해 들어와도 항상 꿀물을 타주었으며, 내가 레스토랑에 가서 칼질할 때 김성규는 빵이나 먹고 지냈던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식탁 앞에 앉아, 김성규의 하는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빵을 뜯는 저 손가락이 내 등장과 함께 갈 곳을 잃고, 김성규의 무릎에 안착했다. 내 얼굴을 오랫동안 보지 않던 김성규가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려는 것을, 가까스로 붙잡고 허리를 안았다. 내 행동에 아무 표정 없는 김성규. 그래서 답답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왜, 그렇게 자존심 세던 김성규가 아무 말 하지 못하는지, 나는, 그래서 더 두려웠을지도.
"화 안나?"
"……"
"내가 이러고 다니는거 화 안나냐고."
"화 낼게 뭐가 있어."
성격이 변한걸까. 애인의 성격이 변할 동안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무엇이던가. 그 세던 자존심이 이렇게 굽혀질리가 없는데. 오랜만에 듣는 김성규의 목소리에 울컥한 내가 무작정 김성규를 벽쪽으로 몰아세우고 눈을 마주했다. 피한 것은 김성규였다. 왜ㅡ하는 갈라진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렇게 튕기고 내빼던 김성규는 어디로 간걸까. 나는 김성규의 얼굴을 들어올려 나를 보게 했다. 눈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으나 초점은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김성규가 엄청나게 살이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리한 얼굴, 창백한 안색. 사실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런 변화쯤은 눈치 챌 수 있었는데. 내게 이 오피스텔이란 그저 '자는 곳'이었을 뿐. 우리 둘의 아지트라고 생각했을(혹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김성규에겐.
"비켜줘. 손 좀 씻자."
비켜, 혹은 비켜라,가 아닌 비켜줘. 묘하게 달라진 그의 말투에 인상을 찌푸리자 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리는 김성규가 야속해 나도 모르게 뒷덜미에 내 입술을 묻었다. 그제서야 경직되는 몸. 안그래도 비썩 마른 몸이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로웠다. 왜 그래ㅡ 내 말에 김성규가 조심스럽게 몸을 빼내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김성규라는 내 안식처가 무서워서, 나는 화장실에 들어간 김성규를 보기 위해 문을 벌컥 열었다. 저 슬리퍼, 거울 아래 붙어있는 칫솔 두 개, 컵 두 개. 모든 것은 두 개였고, 화장실에 있는 사람은 김성규 혼자였다. 나는 어떤 불안감이 내 몸을 휩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바닥이 젖는 것도 모른 채 김성규에게 다가갔는데,
왜 겁 먹은 얼굴인거야.
그니까, 김성규는 그 여섯 달 동안 무척이나 달라져있었다. 자존심이 너무 센 나머지, 저 혼자의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부러져버린. 뭐 그런 식이었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내 추측이긴 하지만. 내 끈질긴 구애에 설렜던 자신을 탓하면서도, 끝까지 내 탓은 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 만나지 말라고 애원할 김성규의 성격이 아니기에, 나는 그것을 괜찮다는 신호 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손을 씻고 물기를 털던 김성규가 내 어깨를 스치고 나와 소파에 앉아, 여느 때처럼 TV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담요 밑으로 들어간 손이 꼼지락대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라 나는 내 멋대로 TV를 끄고 나를 보게 했다. 그러나 김성규는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세던 자존심이 부러진 게 자존심 상한걸까. 그 아이러니한 자존심이란 단어에 내가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TV를 켜고 쿵쾅거리는 소리를 부러 내며 서재 안으로 들어와 마른 세수를 했다.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나는, 분명 다시 김성규에게 설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김성규를 향한 세포들이 다시금 꿈틀거리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지만, 그 동안 김성규에게 지은 죄가 너무 많아 돌이킬 수 없는. 김성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ㅡ고민에 휩싸일 즈음에 책장 밖으로 약간 튀어나온 작은 노트가 눈에 띄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은 그것은 다름 아닌 김성규의 일기장이었다. 성격과 어울리는 조금 휘갈긴 글씨. 첫 페이지엔 귀엽게도 '열어보면 쥬거!'라고 쓰여있었다. 나도 몰래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몇 페이지를 넘겼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페이지엔 우리의 연애 초기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일기는 김성규와 다르게 솔직했다.
2012.X.X
오늘 남우현이 나한테 고백했다 아 설레기 싫은데 이미 설렜어 어떡하지
2012.X.XX
나한테 이러는거 보면 좀 안쓰럽긴 한데 귀엽다 근데 또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2012.X.X
상처받긴 싫은데 남우현이라면 괜찮을 것 같기두 하고 나한테 이렇게 공 들인 사람이 없으니까
사랑받는게 이런 기분이구나해서 좋긴 한데 좀 겁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2012.XX.X
동거하자고 햇다. 거절했어야 하는데 이미 고개 끄덕였다. 나는 병신이다 병신. 또 차이면 어쩌려고
여기까진 읽을 만 했다. 그러나 내가 외도를 시작할 쯤에 ㅡ물론 김성규는 나에게 겉으론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ㅡ 쓰인 일기는,
2013.X.X
벌써 며칠째. 내 성격에 질린걸까 어떡하지
2013.X.X
그냥 집이라도 들어왔으면 좋겠다 얼굴이라도좀보게
2013.X.XX
남우현이 잘못한게 아니라 내가 잘못한거야 내가 설렜으니까. 한 번 그렇게 당하고도 또 설레냐 김성규 병신이다 진짜
2013.X.X
내가 여기서 나가야 되는건지 있어도 되는건지 모르겠다 내가 진짜 그렇게 쉽게 질리는 타입인가 또 고민된다
2013.X.XX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기나할까 모르겠지 뭐 나 혼자 축하하는 500일.
그리고 그저께의 일기.
2013.X.XX
아파서 남우현한테 전화할 뻔했다.
……순간적으로 나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넘쳐 흘러서, 그 일기장을 들고 벌컥 나와버렸다. 김성규는 석고상마냥 그 자세 그대로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내가 나오든지 말든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저 모양새. 나는 TV를 다시 끄고 김성규에게 그 일기장을 흔들어보였다. 그제서야 미묘하게 표정의 변화가 생긴 김성규가, 나를 노려보는데, 왜,
"아프면 말을 해야될거 아냐! 뭐? 전화할 뻔했다? 애인이 폼이야? 핸드폰을 폼으로 들고다녀?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알지!"
"……"
"벙어리야? 왜 말을 안하는데?! 응? 지금도 아파?"
김성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내 손에 들린 일기장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김성규가 씩씩대는 나를 두고 먼저 발을 옮겼다. 옮긴 곳은 어이없게도 우리의 침대. 아니, 6개월 동안 나 혼자 썼던 침대. 꼬물꼬물 기어들어가는 그 모습을 한참 보는데, 김성규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 아픈거 알았으면, 나 이제 이 침대 써도 되는거지?"
"……"
"머리가 아파서 좀 쉴게. 여자 만나고 와."
축축한 목소리를 숨기려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김성규에게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빨리 나으라는 상투적인 표현도, '죽 먹을래?'하는 말도. 아까와는 반대로 내가 소파에, 김성규가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었다.
연재할까 아니면 여기서 끝낼까 고민중인 이야김니당 자존심이 너무 세지만 우횬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소심해지고 자신을 탓하며 마음의 문을 닫은 성규와 이제서야 반성하고 다시 시작해보려 하는 우현으 ㅣ이야기.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너무너무 감사해요 댓글으 ㅎ아상 다 보고 있어여ㅠㅠ 저번 글 댓글도 지금 달러 갑니다ㅠㅠㅠㅠㅠS2 댓글,신알신 모두 땡큐베리감사!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