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06
w.규닝
06. 이상보다 덜한 정상
"성규씨. 모니터 뚫어지겠네. 마시면서 해요."
컴퓨터에 집중을 하느라 가까이 맞대고 있던 고개를 틀었다. 익숙한 브랜드 카페 음료가 마우스 옆 쪽에 놓여졌다. 고마워요. 예의상의 웃음과 함께 음료를 받아들었다. 박 선생님이 가깝게 허리를 숙여왔다. 뭐 보고 있었어요? 딱히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있던 것도 아닌데 반사적으로 마우스는 엑스표를 눌렀다.
"그냥요. 취업 관련해서 이것 저것."
"취업? 성규씨 아직 3학년 아니예요?"
"맞아요. 그래도 미리 준비해두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무언가에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만큼이나 민망한 일은 없다. 괜히 아무 링크나 클릭했다가 도로 창을 닫았다. 박 선생님이 몇 번 잔기침을 했다. 바짝 숙여온 고개는 여전히 내가 보고 있던 모니터 창을 향해 있었다. 검색어 창에 입력된 영자 칼럼이라는 글자 끝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박 선생님은 한참이나 화면을 훑었다. 딱히 무슨 말을 들은것도 아닌데 무언가를 들킨 것 같아 서둘러 백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박 선생님이 허리를 폈다.
"칼럼 쪽에 관심 있으신가봐요."
"…그냥 알아는 보고 있어요."
"영문학과라길래 그냥 단순한 진로만 생각했었는데, 꽤 다른 변신도 있네요. 성규씨랑 왠지 어울린다."
박 선생님이 스스럼없이 웃었다. 나도 어색하게 따라 웃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책장을 뒤지던 원장 선생님까지 뒤를 돌아 대화에 끼었다. 칼럼? 성규씨, 예비 칼럼니스트에요? 앞서 나간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웃고 있었다. 나는 그저 어정쩡한 대답으로 응수했다. 아직은 그냥 관심분야이긴 한데. 말끝을 흐린 탓에 약간의 정적이 생겼다. 박 선생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완전 몰랐죠. 성규씨가 워낙 사생활은 오픈하지 않는 타입이기도 하고. 딱히 그 쪽으로는 뭔가 하려고하는 걸 직접 못 봐서인가. 되게 의외네요."
"의외에요?"
"의외죠. 전혀 몰랐는데."
박 선생님이 유하게 웃었다.
그 말에 마우스를 달깍이던 손가락이 굳었다. 하릴없이 포털 사이트 링크 주위를 배회하던 마우스가 내 손짓에 따라 일순간 제자리에 멈췄다. 나와는 달리 박 선생님의 입은 바빠졌다. 말 안해주니 몰랐다느니, 성규씨는 어려워서 사적으로는 말을 붙일수도 없었다느니 하는 목소리는 원장 선생님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 속에서 주를 이루었다. 잠시 멈추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괜한 말에 신경을 써 손을 멈춘 것이 뒤늦게 웃겨 입꼬리를 올렸다. 영자 칼럼을 검색했던 창을 단숨에 닫았다. 학원 관련 자료들로 가득한 바탕화면이 훤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결론은 뭐, 성규씨 새로운 모습이었다구요. 아 참 그리고 나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찾으려던 자료나 인쇄하고 수업에 들어가자,하는 생각으로 pdf창을 마악 열었을 때였다. 뭔데요. 최대한 딱딱한 티를 감추려고 낸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 선생님이 또 다시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같게 했다.
"오늘 A2반 나 대신 좀 맡아줄 수 있어요?"
"A2반이요? 5시 타임에 박 선생님 반?"
"네. 그 시간에 급하게 다녀올 데가 있어서. 마침 성규씨 그 때 앞 타임 20분이 저랑 안 겹치더라구요. 수업까지 맡아달라는 건 아니고, 오늘 어차피 중간 시험 볼 시간이었으니까 프린트 해 둔 시험지만 배부해주시면 돼요. 성규씨 수업 전까지만 조금 감독도 해 주시면 더 좋고."
"네."
수업까지 맡아달란 말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 거 아닌 요구였다. 금세 고개를 돌려, 은연중에 심드렁한 말투로 응수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박 선생님의 대답에는 화색이 어렸다. 진짜? 성규씨 왜 이렇게 흔쾌해요? 한 톤 높아진 목소리가 기뻐하는 내색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해준대도 의문인가. 조금은 귀찮은 질문이라는 생각에 예의상의 웃음과 함께 박 선생님을 돌아다보았다. 왜요? 간단한건데 안 해줄 이유도 없잖아요. 그에 박 선생님은 의외라는 듯 웃었다.
"그냥. 왠지 성규씨라면 좀 어렵겠다 싶었어요. 거절할것도 같았고."
예의상의 웃음이라지만, 그 마저도 서서히 굳혔다. 박 선생님은 내 안색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지 내키는대로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어쨌든 고마워요. 밥 살게. 밥이 부담스러우면 뭐, 다른 걸로라도."
어쩐지 그 순간에는 작게나마 웃고싶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박 선생님의 리액션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멍하니 보던 모니터 창에서 인쇄 버튼을 눌렀다. 그럼 수고해요. 딱히 유쾌하지는 않은 기분으로 프린팅 되는 소리에만 귀를 세우고 있을 때,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기계적인 목소리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박 선생님도요. 내 대답을 끝으로 박 선생님의 슬리퍼소리가 사무실에서 멀어져갔다. 금방 나온 두 장의 종이가 천장의 에어컨바람에 팔랑거렸다. 나도 모르게 내쉰 한숨은 그렇잖아도 붕 뜬 기분을 더욱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
"미미씨."
강의실 유리문을 누군가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 다짜고짜 강의실 밖으로 밀어낸 이후에는 퇴근할때까지 데면데면하게 스쳐 지나갔던 남우현이었다. 녀석은 조금 열린 문틈새로 얼굴을 내밀고 잠깐 나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이제 막 수업 시작하려는데. 하여간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조금은 부산스러운 학생들에게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복도 쪽으로 나왔다. 마악 수업이 시작되려는 복도에는 남우현만이 전부였다.
"왜요. 수업 시작이니까 빨리 말해요."
"점심 먹었어요?"
남우현이 대책없이 활짝 웃었다. 그에 내 표정은 보란듯이 구겨졌다.
"들어가볼게요."
"아 잠깐, 나 아직 말 안했잖아요."
"점심같은 시덥잖은 말이면 나중에 문자로 해요. 바쁘니까."
"약속할 거 있어서요."
그 말에 내가 의아한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남우현은 비실거리며 웃었다.
"거봐. 시덥잖은 말 아니죠?"
"약속?"
"어제 일 말이예요. 이제 다시는 밖에서 안 만날게요. 학생들."
아아.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것 같아 적당한 리액션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생각해봤는데, 미미씨 말처럼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남우현은 내 앞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불쑥 내밀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거예요. 약속. 그렇게 말하며 내 손가락이 걸리기만을 기다리고있는 남우현의 자신감에 찬 표정이 웃겼다. 그 손과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비웃듯 웃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말이어서 이렇게 수업 시작 바로 직전에 바쁜 사람을 불러내고 있어요?"
"지금 안 만나면 저녁 시간쯤 돼야 얼굴 볼 수 있잖아요. 이런걸로는 핸드폰으로 연락해도 답장 안 할거면서."
잘 아네. 어쩐지 이제는 남우현이 나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마친 것 같았다. 그건 맞는 말이겠다는 생각과 함께 심드렁한 얼굴로 녀석이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약속 해줘야죠. 허공에 민망하게 놓인 손이 내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다. 녀석과 나 사이에 '약속'이라는 단계까지 거쳐야 할 만큼 이렇다할 연결고리는 없었던 것 같으니까.
"어쨌든 좋은 결정이네요.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라고 봐요. 근데 왜 나랑 약속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 쪽 행실이 이상했던거지 뭐 나한테 죄 진 거라도 있어요?"
"네?"
"그 쪽이 결심을 하든 말든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인데 왜 내가 남우현씨 약속을 받아내야하는건데요. 그렇게 하면 내가 얻는 거라도 있어요?"
남우현이 불쑥 내밀었던 손을 거둬갔다.
"그렇잖아. 난 단지 조언했던거예요. 남우현씨가 워낙 미친 짓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뭐 좋자고 남우현씨한테 약속을 받아내요? 무슨 이득을 보자고?"
"이득같은 거 없어도, 약속 받아줘요."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냐구요."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남우현은 어색하게 내렸던 손을 다시 내게 내밀며 웃었다.
"마음쓰는 것 같았거든요."
남우현의 말에, 이번에는 내 표정이 어색해졌다. 그게 무슨 말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남우현은 말을 이어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내 일에 마음 써주는 것 같아서 기분도 되게 묘했고.
"뭣보다 미미씨가 내 앞에서 그렇게 목소리 높인 거는 어제 처음 봤어요, 나."
"…그래서요."
"나중에 생각해봤는데, 생각할수록 성규씨한테 고마워서."
"……."
"진짜 내가 싫었으면 반응도 그저 그랬을텐데. 그렇게까지 역정 내면서 어이없어 해 주는 게, 집 가면서 생각해보니까 좋더라구요. 생각보다 많이 좋았어요."
그래서 김성규씨때문에 한 결정이니까, 약속 받아줘요. 남우현은 꽤 어려운 말로 나를 현혹시키고 있었다.
엄청난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했다. 옳지 못한 일에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지만 남우현 딴에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왠지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는 내 의도를 인정해버릴 것 같아 녀석의 말을 머릿속에서 받아쳤다. 그건 순전히 네 자기합리화일 뿐이며 너를 좋게 보고 있어서 충고를 해 준 건 아니라고. 내 스스로에게 충분한 변명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이 남우현은 내게 진득히 눈을 맞춰왔다. 나는 최대한 삐딱하게 엇나간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혼나는 거 좋아하나봐."
"……."
"진지하게 묻는 건데, 남우현씨 진짜 변태에요?"
남우현이 급기야는 내 눈 앞에 제 손을 들어 보였다.
"변태라는 소리 세 번째 듣네요."
"……."
"그런가봐요. 미미씨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죠 뭐. 어쨌든 약속은 빨리 해줘요."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뻔뻔스러운 목소리가 내 귀를 홀렸다. 홀렸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기분은 이상했으니까. 남우현의 입에서 '그렇다면 그런거겠죠' 하는 말이 나온 순간 점심 시간 내내 뜬구름처럼 뒤숭숭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하릴없이 부유하던 마음이 어딘가에 정착해 가라앉는 느낌. 아마 그 때문에 녀석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한참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녀석을 응시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우현은 답이 없는 내게 근성있게도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무엇이 됐든 내가 맞을거라는 뉘앙스의 말은 내 마음을 알맞게 가라앉혔다.
어쩌면 점심 즈음에 박 선생님에게서 들었던, 두 차례의 화살과는 상반되는 말을 해 주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성규씨라면 좀 어렵겠다 싶었다는 말과는 전혀 상반되는 남우현의 말. 딱히 그것을 신뢰하고 있지는 않지만 궁금했다.
"남우현씨는 나 안 어려워요?"
한없이 약속만을 기다리고 있던 남우현이 서서히 애타는 표정과 함께 손을 마악 흔드려고 했을 때였다. 내 물음에 녀석은 표정을 고치며 의아하게 되물었다. 어렵냐구요? 그 말에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남우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뱉었다. 그럼 쉬워요?
"미미씨가 쉽다는 건 말이 안되지 않나? 무지 어려워요."
그럴 줄 알았다.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직설적인 대답에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허탈한 마음에 한 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근데 왜 자꾸 말 걸어요. 남우현씨한테 살갑게 해 주는 것도 아닌데."
"아, 혹시 어렵냐는 말, 불편하냐는 뜻으로 물은 거예요?"
"네?"
"그건 아닌데. 불편하진 않아요. 어렵기는 완전 어렵지만."
남우현은 까다로운 어른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애쓰는 어린애처럼 고민하는 듯 뵈는 손짓을 시작했다.
"불편한거랑 어려운거는 다른거죠. 나는 미미씨가 어려울 뿐인거고. 공부 쪽으로 생각해보면요.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기를 쓰고 풀고싶듯이 다가가고 싶은 것도 당연한거에요. 이 문제를 꼭 맞추고 말겠다. 이런 거?"
겨우 생각해 낸 예시가 공부같은 거였나보다. 이상한 손짓으로 모노드라마를 찍듯 설명하던 남우현이 눈을 접어 웃었다. 어려운 문제. 남우현이 덜컥 꺼낸 어려운 문제라는 말에 차츰 생각이 많아질때 쯤, 적당한 때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이 저리지도 않는지 꾸역꾸역 내게 손을 내밀고 있는 남우현에게서 몸을 틀었다.
"들어가요. 남우현씨도 수업이잖아."
"진짜 끝까지 약속 안해줘요?"
이미 너무 늦어져버려 풀릴대로 풀린 채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는 강의실 문을 일부러 소리나게 열었다. 학생들의 이목이 앞 쪽으로 주목되었다. 너무한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선 남우현 앞에서 보란듯이 문을 닫았다.
"문자로 말해요."
"……."
"답장해줄테니까."
*
곧바로 튀어올 줄 알았던 문자는 의외로 다섯시 즈음이 넘어서야 도착했었다. 또다시 약속을 운운하는 문자가 오면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고민하기를 두시간 째. 섣불리 녀석과 이야깃거리를 하나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리질을 치기도 여러번이었다. 준비해 온 수업내용을 필기하면서 학생들에게 설명을 덧붙일 때에도 말은 종종 헛나오기도 했으며 시험지를 채점 할 때에는 맞은 문제를 틀렸다고 표기하는 등, 엄한 실수도 잦았다. 그에 비해 녀석의 문자는 간단했다.
「다시는 안 만날게요. 미미씨가 하지 말라면 안 해요.」
「만나지 말라고 말하면.」
남우현은 모든것이 직설적이었다. 하는 행동도, 말투도.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확실하게 표현해오는 녀석이었다. 나는 한동안 관자놀이를 짚어 키패드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답장을 전송했다. 「만나지 마요.」 솔직히 이런 답을 보내는 와중에도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녀석에게 학생을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건지. 이렇게까지 명령해서 내게 득이되는 것은 아까나 지금이나 없는 것은 같았다. 남우현의 페이스에 휘말린 것 같다는 생각은 뒤늦게서야 찾아들었다. 이십여분쯤 후, 남우현에게 솔직한 대답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럴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고 낯선 기류였다. 이런 류의 대화가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누군가를 만나라, 만나지 마라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연인 관계에서나 성립될 법한 구속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레 눈썹은 구겨졌다. 나는 일부러 휴대폰을 책상에서 멀찍이 떨어트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었다. 남우현과 나 사이에서는 말도 안되게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기류였다.
* * * * *
나와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낸 것에 성공한 남우현은 예상했던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 학원에서 유일하게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 아니, 녀석의 말마따나 정정하자면ㅡ 유일하게 나를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 아마도 녀석은 나와 한 층 더 가까워진것이라고 섣부른 판단을 내린 듯 했다. 남우현은 나를 아주 친한 친구 대하듯 이전에는 하지 않던 장난도 서슴지 않았다. 더우니까 붙지 말라고 말 하면 보란듯이 옆자리까지 의자를 끌고 다가와 하고 있는 일에 참견하기 일쑤였으며 저 때문에 어지럽다는 내 앞에 노호혼을 올려두기도 했다. 이전까진 몰랐는데, 남우현은 변태가 맞다. 남이 저를 싫어한다거나, 화를 내는 걸 즐기나 싶으니까. 원래 노호혼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내가 눈을 돌리는 곳마다 노란색 노호혼이 머리를 흔드는 것을 보고 있자니 없던 짜증도 솟구치고는 했다. 사무실에서 잠깐 졸다가 눈을 떠 보면 늘 그랬듯이 얄미운 노호혼은 내 눈 앞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전화 누구예요."
한 번은 장동우에게 걸려온 전화를 사무실 안에서 받은 적이 있었다. 왜요.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남우현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웃었다.
"학생인가 해서."
"학생이면 남우현씨가 어쩌게요?"
"만나지 말라고 해야죠."
경악스러운 내 표정과는 달리 남우현의 표정은 단호하다싶을정도로 멀쩡했다. 나는 휴대폰 밑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대화 상당히 이상하거든요?"
"뭐가 이상한데요?"
"이상하다면 이상한 줄 아세요. 전화 받고 올 테니까, 거기 앞에 둔 종이 만지지 말아요."
"아, 잠깐만요. 나 물어볼 거 있는데!"
"나중에요."
남우현의 심통난 표정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전화기 저 편의 장동우는 무슨 일이야?하며 옆 사람에 대한 정보를 캐물었다. 별 거 아냐. 요즘따라 뻐근해진 어깨를 두어번 돌리다가 한숨쉬듯 대답했다. 금세 화젯거리는 돌아갔다. 장동우는 학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 주제를 틀었고, 비상계단 아랫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녀석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기 시작했다. 군휴학 서류제출에 관한 얘기, 권 조교님에 관한 얘기. 이번에 새로운 회장은 어떤 선배로 추진되고 있다느니 하는 내 관심사 밖의 이야기였지만 꽤 들을만 했다. 그렇게 이십여분정도를 농땡이 치다가 들어선 사무실에서는 남우현 대신 익숙한 노호혼이 머리를 달랑거리고 있었다.
뭐 가 이 상 해 요 ?
갸웃거리고 있는 노호혼의 머리 위에는 테이프로 고정시킨 포스트잇이, 그 고갯짓에 따라 양 옆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쩐지 담배 생각이 간절해지는 느낌이었다. 귀퉁이에 분홍색 분필가루가 묻은 포스트잇을 신경질적으로 빼내었다.
특히나 몇 시간 후 교실에 들어섰을 때에는, 남우현의 이상기류가 정점을 찍고야 말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미씨 좋아해요.
어쩐지 교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학생들은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더랬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앞줄에 앉은 여학생 두 명이 누군가를 놀릴 때 주로 하는 환호성으로 나를 맞았다. 미미쌤, 부러워요! 하는 목소리는 의아한 내 시선을 칠판으로 향하게끔 만들었다. 자연스레 오른쪽 끝 모서리를 향해 올라간 내 시선은 종잇장 구겨지듯 구겨지고야 말았다.
전화를 받으러 나가기 전, 할 말이 있다고 말하던 남우현의 말이 스치듯 떠오르면서 마지막으로 봤던 녀석의 심술난 표정이 생각났다. 최근들어 스스럼없이 내게 치대던 녀석의 온갖 장난질들도. 말투도. 서스럼없어진 과감한 행동들도.
정말 이렇게까지 못된 종류의 장난으로 덤빌 줄은 예상도 못 했었지만. 조금 잘해줬던 것에 대한 대가는 겨우 이런 것이었다. 결국에는 즐거운듯이 커진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내 귀 끝까지 벌겋게 물들여버렸다. 녀석의 낙서를 힘주어 지우면서 생각한 게 하나 있었다. 남우현은 나를 어려운 문제라고 했었다. 정말로 어려운 문제는, 결국에는 풀리지 않아야 정말로 어려운 문제라고. 어렵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풀리는 순간에 그것은 바로 '쉽다'는 개념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테니까.
"왜 노려봐요?"
바로 몇 시간 후, 저녁 타임에 사무실에서 조우한 남우현은 멀뚱멀뚱히 뜬 눈으로 내게 물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남우현이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녀석은 제가 쳤던 장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른 쪽의 장난이면 몰라도, 그런 류의 장난은 왠지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왜 그런 낙서를 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싹 가셨다. 나는 녀석의 옆자리 의자를 소리나게 끌어당긴 후 앉았다.
"아뇨. 아무것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따져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녀석은 첫 만남 때 내게 남자에게 인기가 많느냐는 예의없는 질문을 던졌었다. 이번에는 내가 역으로 묻고 싶었다. 요 며칠 내게 하는 행동은 그런 질문을 받을 만큼 충분히 이상하고 의심스러웠으니까. 아니라고 하기에는 나에게만 보여주는 녀석의 행동이 아주 많았다. 박 선생님에게도 하지 않는 어깨동무라던가, 이상한 간섭이라던가. 어디서 주워온 같잖은 노호혼으로 사람 약을 올린다던가, 또 연인끼리나 할 법한 구속 하나를 약점 잡아 시도때도없이 내게 써먹는다던가. 그것도 모자라 남우현은 학생들의 눈 앞에서까지 적나라하게 나를 놀려먹는 것으로 괴롭힘의 정점을 찍었다. 좋아한다는 낙서를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ㅡ 딱히, 녀석이 나를 좋아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서도. 내가 정말로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서도. 홧김이라고 쳐도 좋으니까 예의니 뭐니 하는 것은 신경쓰지않고 묻고 싶은 말은 있었다.
남우현씨야말로 남자 좋아해요?
물론 남우현에게서는 아니라는 대답이 떨어질 거다. 그렇게 된다면 다시금 대답할 말도 생각해놓았다. 그게 아니라면,
자꾸 의심스럽게 행동하지 마요. 기분 진짜…
이상하니까. 완전 많이.
♥^ㅠ^♥ |
저번편에서 퐁퐁이그대가 예쁜 작가이미지를 선물해주셨어요 사랑받는 작가라 행복해요. 다시한번 고마워요~.~! 사랑 사랑 내사랑잉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