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09
w.규닝
09. 기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무더위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마지막 장마를 앞둔 며칠은 놀랄만큼 날이 좋았다.
반 별로 수량 정확히 쌓아둔거니까 배부만 하면 돼요. 사무실 한 켠에 허리까지 오는 참고서 탑 맨 위에는 그 동안 드문드문 본 적 있던 남우현의 글씨가 써붙어있었다. 출근도 아직 안 했으면서 무슨 오지랖은. 본인이 가져갈 책도 정리되어있냐면서 어깨 너머로 머리를 빼 붙어오는 박 선생님의 머리를 피해 쪽지를 집어들었다. 참고서 배부 용건을 써 붙인 종이 뒤에는 남우현 특유의 하늘색 포스트잇이 덤으로 따라붙었다. 이럴 줄 알았어. 눈대중으로 참고서 수를 세고 있는 박 선생님 몰래 등 뒤로 포스트잇을 숨겼다.
점심은 먹었고?
그 날 이후로 은근슬쩍, 또 자주 자주 뒷말을 잘라먹고있는 남우현의 능청스러운 쪽지였다. 먹었으면 니가 어쩔건데. 도대체 남의 식사여부가 왜 그렇게 궁금한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망설임없이 포스트잇을 구겨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참고서를 뜯느라 생겨난 포장비닐 사이로 아무렇게나 구겨진 포스트잇이 비집고 들어갔다. 성규씨, 이거 옮기는 것 좀 도와줘요. 거의 본인의 상체만한 분량의 참고서를 안아 든 박 선생님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는 이미 내 손에서 떠난 포스트잇을 멍청하게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그리고 또 점심이라는 단어를 되뇌이면서.
"…배고프긴 하네."
높이 쌓여있던 참고서 탑을 강의실 안으로 옮기느라 두어번 왕복 운동을 했어도 남우현은 아직 그림자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하여튼 지각은 밥먹듯이 하지. 확신하건대, 녀석은 아마 학창시절에도 지각으로 하루하루 벌점을 면하지 못했을거다. 직접 나타나서 점심 얘기 꺼낼것도 아니면 그냥ㅡ 조용히 사리고, 건드리지나 말 것이지. 괜히 생각나게.
학생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는 학원 로비에서 콩나물같이 숙여지는 고개 인사를 받고 있자니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날씨따라 뜨거운 햇볕이 필터링 없이 들이치는 로비 창문에 블라인드를 드리우고 있을 때 즈음에야, 학생들보다 늦게 학원 문턱을 밟은 남우현이 등 뒤에서 헛기침을 해왔다. 미미씨, 좋은 아침. 아니 좋은 점심. 목소리만으로도 녀석의 들뜬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그 날 이후로 남우현은 매사에 지나치다싶을만큼 들떠있었기에 알 수 있는 일이다. 남우현은 오늘도 내일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저만의 기분에 도취되어 하루하루를 구름 위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흐트러진 블라인드를 손으로 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우현은 조금 과장된 몸짓으로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집어넣었다.
"미미씨 오늘 뒷통수 예쁘다."
"뭐?"
오늘도 역시나 서스럼없는 남우현의 말에 조금은 소름이 끼쳐 몸을 홱 틀었다. 남우현은 신발장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다가 그런 내게 생글거리며 웃어보였다.
"이제야 뒤돌아주네."
"…아."
"밥 먹었어?"
포스트잇으로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블라인드를 내리다 만 손이 어정쩡하게 허공에서 굳었다. 꽤나 거리를 두고 떨어진 녀석과 나 사이로 금방 도착한 학생들 무리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까딱이고 지나가고 있었으며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에도 비어있던 신발장에 신발은 하나둘씩 채워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내게서 답이 떨어지지 않자 남우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반말이 거슬리는거면, 극존칭으로 말해주길 원해요?"
"……."
"진지는 드셨어요?"
남우현은 내게 한껏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나는 있는대로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실 줄 알았어요."
여태껏 뒷짐을 지고 있던 남우현이 쇼핑백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실까봐 내가 진지 배달 왔죠."
딱 봐도 초밥이 든 쇼핑백이 허공 위로 달랑거렸다. 나는 어쩐지 뿌듯함에 젖어있는 표정과 마주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는 남우현이 마저 슬리퍼로 갈아 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우현은 다소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 쪽을 향했다.
"하여튼 초밥 진짜 좋아해."
"알아줘서 고마워요."
녀석은 끝까지 지는 법이 없었다. 남우현은 금세 의자를 끌어다 테이블에 자리했다. 이미 멀쩡해진 블라인드 앞에서 괜한 시간을 좀 더 보내고 들어선 사무실에서는 남우현이 이미 뜯어놓은 나무젓가락이 정갈하게도 놓여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우현은 어서 앉으라는 듯 나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후식으로 도넛도 있어요. 불과 며칠 전, 그저께 즈음이렸으려나. 남우현은 벌써 나의 도넛 취향까지 알아내 갔었다.
마지막 장마에 가까워져가는 날, 녀석에게 오랜만에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었다.
"진짜 미쳤어요?"
높아진 내 언성에도, 남우현은 그저 시큰둥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앉아. 채점용지에 점수를 표기하던 펜을 저만치 내던지자 남우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다시 집어왔다. 화내지 말고 일단 앉아요. 상황 파악이 더딘건지, 아니면 아예 이제 내 반응 같은 것은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모양인지 끝까지 여유로운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남우현이 내 팔을 끌어다가 앉혔다. 나 안 미쳤어요. 전부 맞는 말이고. 녀석이 내 손에 펜을 다시 꾸역꾸역 쥐어주었다.
몇분 전, 성적 확인 차 사무실에 잠시 들린 학생들에게 남우현은 지나가는 말투로 장난을 던졌다. 너희 미미쌤 수업 열심히 들어? 그러자 학생들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남우현은 덧붙였다. 떠들기만 해. 내가 찾아갈테니까. 그에 경악스러워진 내 표정은 개의치도 않는지 남우현은 거칠 것 없이 웃었더랬다. 학생들은 저희들끼리 까르르 웃다가 신난 듯 물었다.
"왜요? 우리는 미미쌤 수업 듣는건데, 남쌤이 왜 찾아오시는데요?"
"너희가 떠들면 미미씨가 스트레스 받아서 힘들어하거든, 밤에."
"밤에?"
"나랑 단 둘이 있을 때."
남우현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웃었다. 그게 싫으니까 떠들지 마. 그에 학생들이 무슨 리액션을 취하려고 할 때 즈음에는 내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강의실로 들어가라며 학생들을 떠밀어내고 나서야 마주한 남우현은 멀거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미친거냐며 녀석에게 따져 묻자 남우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진정시키려 들었다. 그리고나서 지레 늘어놓는 변명은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사실이잖아요. 미미씨 피곤하면 퇴근 때 쯤에는 말도 잘 안 하면서. 나는 지극히 사실만을 말한건데 미미씨는 왜 과민반응이에요. 어떤 쪽으로 필터링 해 들으셨길래?"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잖아요. 아까 분명…"
"전혀. 난 순수하게 말한거에요. 미미씨가 온통 신경을 그 쪽으로 쏟고 있어서 그렇게 받아들인거지."
남우현은 의외로 조금 굳은 눈을 하고서는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녀석은 나날이 고단수로 덤벼오고 있었다. 사람을 애꿎은 저질로 만들어버리질 않나. 확실히 남우현은 내게 무언가에 대한 '해석'을 바라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요즘들어 녀석을 피하고싶어했던 나를 인정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우현은 내게 항상 '왜'같은 질문을 달아주었다. 저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 그리고 그것의 성분을 캐물어보려 남우현은 끝없이도 내게 부딪혀왔다.
오늘은 3일간의 장마에 접어드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우중충하게 가라앉은 구름이 느리게도 건물 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정없이 비가 쏟아진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날씨였다. 그로인해 한껏 습해진 학원 내부에 에어컨을 작동시킨 이후에는 멍하니 사무실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드디어 비 시작이네. 그래도 이것만 그치면 이제 휴가철이니까. 박 선생님은 보조 프린트를 정리하다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나는 정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앉은 공기 탓에 소란스러워진 학원 내부가 잘게 울렸다. 성규씨 오늘 우산 안갖고왔다했죠. 나는 차 타고 퇴근하면 되니까 내 우산 쓰고 가요. 박 선생님이 컴퓨터 옆 책상에 자신의 우산을 소리나게 내려두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드려던 순간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으와. 완전 쏟아지네."
전에 없이 허겁지겁 들이닥친 남우현은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옷깃을 털었다. 거의 튕겨져나오듯 사무실에 몸을 들인 남우현은 마룻바닥에 그대로 젖은 가방을 떨어트렸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하던 일에 몰두중이던 박 선생님의 고개마저 빠르게 돌아왔다. 남우현은 정신없이 젖은 소매를 털어냈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 난 후에야 미미씨도 일찍 왔네요. 인사를 건넨 남우현이 젖은 소매를 꾹 눌렀다.
"그럼요. 아무렴 내가 지각쟁이보다 늦을까봐요."
"비 안 올때 출근해서 다행이에요. 지금은 완전 쏟아지거든. 오는 길에 비가 와서 쫄딱 젖었어요. 어, 형도 왔어?"
녀석의 인사에, 저만치서 스테이플러로 프린트물을 정리하고 있던 박 선생님이 적당한 대꾸를 돌려주었다. 니가 맨날 밥먹듯이 지각하니까 하늘이 천벌 내린거야, 인마. 남우현은 녀석대로 그런 게 어딨냐며 눈을 접어 웃었다. 남우현은 멍하니 앉아있던 내 옆자리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정말로 오던길에 봉변을 맞은 듯, 남우현은 머리 끝부터 해서 젖지 않은 곳이 없어 보였다.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는 녀석에게 옆 쪽에 걸려있던 마른 수건을 건네주자 남우현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젖은 머리를 닦아냈다.
"미미씨한테 할 말 있어서 빨리 온건데, 타이밍 좋게 비가 올 줄은 몰랐어요."
"할 말이란 게 뭔데요."
"오늘은 내가 미미씨랑 상의할 게 있어서요. 같이 의논해보자고 할거에요."
그 대목에서는,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래서 아까처럼 그래서 할 말이 뭐냐는 대답을 섣불리 뱉지 못하고 천천히 눈썹을 구기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부터 20분동안은 수업도 없어서 당장 할 거 없는 거 다 알아요. 젖은 곳 좀 조금만 말리고 올 테니까. 남우현은 금방 앉았던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형. 에어컨 앞에서 옷 좀 말려도 되나? 남우현은 그저 들뜬 목소리로 박 선생님에게 물었고,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무실 문을 연 남우현은 학원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저새끼 뭔데 저리 급해?"
"…그러게요."
"성규씨, 남우현 지금 수업 시작 전까지 시간 비었나?"
박 선생님은 남우현이 열고 나간 문짝을 뒤쫓아 보다가 물었다. 녀석의 시간표를 외우고 있을 리 없는 나는 사무실 한 켠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는 스케줄표에 눈을 돌렸다. 이 시간 쯤이면….
"아뇨. 앞으로 30분은 비어있는 것 같은데."
"아, 그럼 남우현한테 부탁해야겠네."
"뭘요?"
"내가 이거 정리하느라 수업에 좀 늦을 것 같거든요. 10분 정도. 그래서 그 동안만 애들 조용히 시키고 있으라고 할려구요."
박 선생님이 벽면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설명했다. 아직 채점이 덜 끝난 것도 있고, 기록부에 올려야 할 것도 남아있고…. 이것저것 본인의 사정을 늘어놓는 입을 빤히 쳐다보다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뒷일을 계산해놓기도 전에 덜컥 입을 열었다.
"그거 제가 맡고 있을게요."
"성규씨가? 지금?"
"어차피 저도 시간 남는 건 마찬가지라서. 누가 하든 상관 없는 일 아녜요?"
"그렇긴 하죠."
"지금 들어가면 돼요? B2강의실이던가."
다시한번 스케줄표에 눈을 돌려 시간표를 좇았다. 박 선생님은 스테이플러를 내리찍는 손을 바쁘게 놀리다가 멋쩍은 듯 웃었다.
"매번 고마워요. 내가 손이 느려서 일처리가…."
"뭘요. 시간이 남아서 하는 일인데."
더 볼 것도 없이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까지 등 뒤에서 고맙다는 인사를 늘어놓는 박 선생님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녀석이 옷을 말리고 있을 로비의 반대편 복도로 발걸음을 놀렸다. 행여나 녀석이 잡아챌세라 빠르게 코너를 돌아 B2 강의실 안으로 몸을 숨긴 후에는 낯선 인기척에 고개를 든 학생들 앞에서 숨을 골랐다. 학생들은 오늘은 미미쌤이 수업하시는거냐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어왔고 습관적으로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 앉았다.
잠깐동안만 있는거니까 소란스럽게들 굴지마. 어쩐지 조금 풀어지려는 분위기를 다잡은 후에는 딱딱하게 구신다며ㅡ 알게모르게 야유를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딱 잘라 대꾸했다. 학생들은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도망가봤자 결국엔 같은 건물 안이라는 것을 뒤늦게서야 자각했다. 나날이 고단수로 덤벼드는 남우현에게 이미 술래잡기 같은 것은 일도 아니었다는 것을 정말로 뒤늦게서야.
"나오셔야죠."
알아버렸다는 걸. 이제야 좀 녀석을 피해 '할 말'이라는 것에서부터 도망을 쳤다고 안도했을 때였다. 당연하게도 유리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남우현은 절반 정도 문을 열고 내게 명령했다.
"할 말 있다고 했잖아. 도망치지 말고 나와요."
일부러 눈이 많은 곳으로 숨어들려고 했던 내 작전은 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남우현에게는 좋은 조건이었다. 남우현은 내 작전과는 반대로ㅡ 수많은 눈 앞에서 내게 부딪혀오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게 제 쪽에는 유리한 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애초에 남우현의 작전은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내가 반응이 없자, 나와 제 자신을 번갈아보고 있는 학생들 앞에서 보란듯이 유리문을 재차 두드렸다.
"나와요. 좋게 말할 때."
매섭게도 끊겨 내리고 있는 빗줄기처럼, 남우현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뚝뚝 끊겨왔다. 남우현은 이미 학생들의 눈치 같은 건 개의치 않는 녀석이었다. 나는 결국 강의실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하고 있어. 어색하게 웃으며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유리문은 금방 닫혔다. 강의실의 끝자락이라, 빛이 잘 들지 않는 복도 끝으로 나를 몰아세운 남우현의 입꼬리가 웃었다.
"기다리랬잖아요. 그 말 한지가 채 1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도망을 쳐요? 못들은 거 아니잖아. 할 말 있어서 일부러 빨리 왔다고 한 거 들었잖아. 너."
"굳이 앞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문자로도 얼마든지 연락할 수 있는거고. 마침 박 선생님 일이 급하다니까 내가 대신해준거지, 도망이라고 표현하지 마요."
"문자로 안돼요. 얼굴 보고 해야하는 말이라서 그런 걸로는 안된다고."
비가 오고 있는 탓에, 평소보다 한결 더 캄캄해진 복도 끝에는 거의 빛이 들지 않고 있었다. 엇비슷하게 배열된 강의실에서 비춰나오는 빛이 복도 중간 중간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조금은 눌려 보였다. 그런데에다가 상황마저 무겁게 겹쳐버린 탓인지, 아까와는 다르게 훨씬 화나보이는 얼굴은 비를 따라 분위기를 조성하고있었다. 졸지에 벽에 닿아버린 등이 소름끼쳐, 일부러 녀석을 향해 있는 눈을 치켜떴다. 할 말이라는 거 빨리 해요. 내 말에 남우현이 자세를 고쳐 섰다.
"이 시간에 복도로 나오는 학생들 많아요. 이러고 있는 거 별로 보이고싶지 않거든요."
"이러고 있는 거?"
"너무 가깝잖아."
남우현은 오히려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왔다. 당연하게도 나는 고개를 숙였고, 녀석은 나와 지독히도 눈을 맞추려고 했다.
"김성규씨가 이미 그 쪽으로 신경쓰고 있었다면, 차라리 잘 됐네. 하고싶었던 말이 그런거거든요."
"…무슨 말인데요."
"내가 유지은 따로 만나는 거, 김성규씨가 반대했잖아."
"그거야,"
"나도 박 선생님이랑 미미씨 둘만 만나는 거 싫어요. 내가 그걸 오늘에서야 알았는데ㅡ 그 이유를 찾고 있거든요."
드문드문 비치는 형광등 빛이 남우현의 머리 위로 내려앉아있었다. 나보다 낮은 곳에서, 숙여진 고개 속으로 눈을 맞춰오기 위해 자세를 낮춘 남우현의 머리카락만이 정확한 윤곽을 띠고 눈길을 잡았다. 아주 조금 눈을 들어 남우현을 살폈다. 녀석은 정말로 모르겠는 눈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항상 직설적이고 단호했던 성격 탓에, 되받아오는 것들은 모두 깔끔하고 단촐한 인간관계 뿐이었다. 이토록이나 어려운 말들로 판단력을 흩뜨려트리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이렇게나 대답을 망설이는 거라고 내가 나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한동안을 대답하지 않아도, 남우현은 나와 마주치고 있는 눈을 저 혼자 깜빡였다. 그 쪽이랑 내가 왜 이러는지,
"나랑 같이 고민해요. 그래서 퇴근할 때 결과 말하기."
미미씨가 나, 생각하고 있는 것도.
이런 난관에 부딪히게 될 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녀석과의 대화를 피하려고 했던 걸지도. 사실은 나도 모르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나는 언젠가ㅡ 녀석이 저돌적으로 내 속을 캐내 올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비록 그것이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서도. 나는 녀석이 제 강의실로 모습을 감추어버린 후에도, 할일을 마저 끝낸 박 선생님이 강의실 쪽으로 걸어오느라 복도 끝에 혼자 남은 내게 뭐하냐는 물음을 건네게 될 때까지도 잔뜩 굳은 발을 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퇴근 때 봐요. 그 때 말해. 무언가를 알아차린 이후로, 한 번 해석을 시작한 남우현은 끝도없이 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무조건 제 방식대로ㅡ 자신이 내키는대로. 그게 무엇이 됐든 아직 준비 면에서 느린 나를 상관하지 않는 채로.
녀석은 생각보다 조금 많이, 유치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 * * * *
"야. 너 전화 와."
"……."
"씹새끼한테서 전화 온다고."
"알아. 내버려둬."
반으로 갈라진 장동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진짜 안 받아? 벌써 몇 분째 오고 있는데. 반으로 갈라지다 못해 머리 위쪽이 뭉개진 장동우가 내 앞에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올려 그 팔을 걷어냈다.
"안 받아도 괜찮아."
"너 학원 마감도 안 했는데 중간에 튄 거라며. 원장한테 연락 오는 거 아냐?"
"원장 아냐. 씹새끼야."
"그럼 누군데?"
"씹새끼라니까."
안 받아도 되는 전화야. 나는 결국에 끝없이 진동하는 휴대폰을 보란듯이 뒤집어놓았다. 장동우는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취했네. 우리 규. 귀가 먹먹해진 탓에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 팔을 마저 뿌리치고 뒤집어져서도 진동을 하고 있는 휴대폰 위에 티슈 통을 올려두었다. 티슈를 업은 휴대폰은 외려 더 시끄럽게 덜덜 떨었다. 에이씨, 귀찮게. 결국은 이가 갈리도록 꽉 물은 내가 휴대폰을 집어 들어 물컵 안에 가둬 놓으려고 했을 때에는 장동우의 팔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에헤이, 컵 안에 물 들었는데. 빠트리는 건 안되지. 그에 힘겨운 눈을 멀거니 뜨고만 있자 장동우는 내 손에서 휴대폰을 앗아갔다. 귀찮으면 내가 갖고 있을게. 그럼 되지? 장동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가져. 전부 다. 가져. 장동우가 내 앞에 있는 술잔을 슬그머니 옆으로 밀어낸 후, 그 자리에 물컵을 대신해 놓았다.
"내 술잔 바꿔치기 하지마라. 다 보여."
"…완전히 맛간 건 아닌가보네."
"야. 있잖아."
이번에는 셋으로 분리된 장동우가 어?하고 대답을 흘렸다. 나는 마른안주를 모아놓은 앞접시에 손을 뻗었다.
"우리 둘이 고등학교 때."
"응, 응."
"청소 안 하고 자주 튀었잖아."
"응, 그랬지."
"하기 싫어서 튄 거 아냐. 청소 하기가 싫어서. 청소 안하려고 죽어라 튀었던거잖아. 너랑 나."
내 말에 장동우는 와하하 웃었다. 당연하지. 너랑 나 청소 하나는 존나게 싫어해서. 오랜만에 꿍꿍이 없이 탁 트인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마음까지 한결 편해져ㅡ 취한 와중에 풀린 입이 비실거리며 웃었다. 응. 장동우.
"이번에도 그래서 튄거야. 싫어서."
"학원 마감이?"
"응. 싫어서."
그러니까 더 따라. 나는 장동우가 바꿔치기 해 놓은 술잔을 도로 집어 녀석에게 불쑥 내밀었다. 둘로 합쳐진 장동우가 잠시동안 뜸을 들이다 내 앞으로 손을 저었다.
힘든 일 있다더니, 진짜 엄청 힘든가보네. 장동우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정확히도 귓가를 파고들었다. 장동우는 이따금씩 술잔을 비켜가 내 손에 술을 쏟고는 했다. 나는 엄한 곳에 흐르는 술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정에 가까워진 지금 시각. 뒤늦게 나의 부재를 알아차린 녀석의 전화가 끊기지도 않고 울고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어서인가.
나는 오늘 두번째로 도망을 쳤다.
이번에야말로 붙잡히면 어떤 식으로든 녀석에게 휘말려버릴것만 같아, 내 입장에서 두 번째 도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남우현은 오늘 안에 기어코 내게 어떠한 답이라도 들어낼 것 같아서 한 결정이었다. 비겁하지만 나는 술자리로 몸을 숨겼다. 당장은 바쁜 일이 있어 만나기 어렵겠다는 장동우에게 되지도 않는 떼를 써서까지 만들어 낸 술자리 안에 숨어 나는 휴대폰도 멀리했다. 첫번째 도망의 끝에서, 녀석은 내게 퇴근때 보자는 말을 했었지만 나는 그에 응하지 않았다. 퇴근은 고사하고, 자정이 가까워져오자 불안함을 못이겨 학원을 벗어났었다.
있는대로 선을 넘은 만큼, 그 정도에 맞게 합당한 일탈을 하고 싶었다. 비겁하게 방향을 튼 나를 나는 술로 달래보려고 애를 썼다. 장동우는 내가 떼를 쓰는 만큼 잔에 술을 채워넣어주었다. 장동우는 이따금씩 내 머리를 익숙하게 쓰다듬었다. 규야. 오늘따라 많이 마시네. 녀석은 지금 내게 어리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장동우의 손바닥 아래에서 테이블 위에 그대로 엎드렸다. 누군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다는 게 마치ㅡ 너는 지금 일탈을 했지만 괜찮다. 너는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며 나를 다독여주는 것 같아 좋았다.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자꾸만 감기려는 두 눈에 힘을 주어 치켜떴다. 마지막으로 내 손이 움켜 쥔 것은 눈사람이었다.
"눈사람이야. 동우야."
"그거 땅콩이잖아…."
조금만 자고 싶었다. 오랜만에 몸에 술이 들어오자 평소보다 훨씬 버티지 못했던 탓이었다. 나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젓고있는 장동우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조금만 자기로 하며 고개를 숙였다.
*
"눈사람…."
조금 늦은 새벽같았다.
그 뒤로 꽤나 시간이 흘렀다는 건 얼추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절반 좀 넘지 않게 남아있는 소주병과 질색하며 고개를 젓는 장동우의 얼굴이었는데 깨어나보니 내가 있는 곳은 호프집 앞 계단이었다. 비는 어느덧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후 다섯시 정도까지만 해도 잠깐 끊겼던 비가 지금은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내렸다. 자고있던 통에 계단 끝으로 삐져나갔던 신발 끝이 젖어 있었다. 아직까지 흐릿한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떠, 발을 안쪽으로 가져왔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무릎을 끌어모아 턱을 묻고 있자니 금세 눈 앞에 장동우가 드리워졌다.
"일어났네."
"응. 눈사람…."
그대로 쥐고 잤던 건지, 손바닥 안에 들려있던 눈사람을 그대로 장동우에게 내밀었다. 장동우는 곧바로 받아들지 않고 나와 눈사람을 번갈아보았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많이 먹으라고. 다시한번 흐릿하게 으깨지는 장동우의 머리 끝을 쳐다보다가 녀석의 손을 끌어왔다. 장동우는 순순히 내게 손바닥을 내주었다. 나는 녀석의 손바닥을 느린 동작으로 꾹꾹 편 후에 눈사람을 올려두었다.
이제, 가자. 집에. 그러다가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이제 됐어. 열두시도 지났고… 집에 가고싶어. 오늘은 좀 많이 지친 느낌이었다. 나는 무릎 위로 묻었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택시 타야지. 내가 두 팔을 녀석에게로 뻗었지만 장동우는 그런 나를 끌어주기보다는 방관하고 있었다. 장동우는 결국 나와 눈높이가 같도록 마주 앉았다.
장동우의 어깨 너머로 빗줄기가 한참이었다. 호프 지붕 끄트머리에 치여 사납게 튀어나가는 물방울들이 나름대로 시끄럽게 귓가를 때렸다. 한기는 특히 더했다. 나와는 다르게 우산을 챙겨왔던 장동우가 내 눈만을 빤히 바라보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우산을 꺼내들었다. 잠시동안 가방을 뒤적이던 동우가 접이식 우산을 폈다. 무섭도록 땅에 치닫던 비가 녀석이 편 우산에 가려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꺼트렸다. 옷 속으로 적잖이 끼쳐오는 찬바람에ㅡ 아주 조금 선명히 앞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까는 진짜 화났는데. 도망간다고 갔으면 차라리 따뜻하게 집에라도 가 있지."
"……."
"이게 뭐야. 몸도 하나 못 가누고."
내 머리 위로 우산이 기울어졌다. 어차피 내 쪽으로는 비가 내리지도 않고 있었지만 우산을 든 이의 손잡이는 내 쪽을 향해 훨씬 기울었다. 등이 젖겠는데. 너 등이 다 젖겠는데. 물에 젖으면 그와 함께 흐트러지는 수채화처럼 내 앞의 잔상이 엉망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늠할 수 없는 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가져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고, 그 바람에 뒷통수를 소리나게 벽에 부딪혔다. 그 뒤로 잠시동안은 정적이 흘렀다.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요. 취한사람 데리고 치사하게 뭘 하고싶지는 않아서, 정말로 순수하게 집에만 데려다주고 갈려고 한 건데."
"……."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나중에 나보고 나쁘다고 하지만 말아줘요."
장동우가 내 앞에 제 눈을 드리웠다.
"고민해봤어요? 미미씨랑 내가 뭔지. 나랑 같이 고민해봤어?"
장동우가 씌워 준 우산 끝이 내 머리 위에 닿았다. 녀석의 목소리가 비에 섞여 가라앉아있었다. 장동우는 내가 준 눈사람을 손에 들고 꼭 쥐었다. 이미 몇배는 더 무거워진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감았다. 그래도 녀석은 나를 기다렸다.
장동우는 나를 절대 재촉하지 않았다. 나와 눈높이를 같게 하느라 쪼그리고 앉아있는 게 불편할 법도 한데 녀석은 진득히도 나를 기다렸다. 내가 여태껏 고민하고 있던 것을 녀석은 어떻게 알아낸건지. 한참동안 계속되었던 술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내 방정맞은 입이 고민거리를 발설해버린것인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복잡했던 머릿속을 빗물따라 씻겨내버리고 편해진 속으로 잠을 자고싶었다.
"나 친구 많이 없어."
"응."
"친구가 장동우 너밖에 없어. 아니 아예 없어."
"…응."
"그래서 조금 많이 외로워도, 적어도 누구를 가려 사겨야 하는지는 알아."
잠시 후에는 마른 옷깃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앞에 잠자코 앉아있던 장동우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게 누군데."
"내기하는거래."
"……."
"내기로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다 알았어. 결국에는 진짜로 나랑 알고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꼭 진짜처럼 연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새끼 방식으로 놀아나다보니까 어지러워… 죽겠어."
"내기?"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동우가 잡고 있던 우산의 손잡이가 조금 삐끗했다. 녀석은 곧 우산의 막대를 제 어깨로 짚은 후에 내 쪽으로 고개를 가져왔다. 그러자 난데없이 한기가 찾아들었다. 녀석이 우산을 잠시 치워뒀던 탓인가ㅡ 빗속을 감돌고 있던 한기가 갑작스럽게 끼쳐왔다.
"추워."
"내기가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춥다. 집에 가자."
"김성규."
장동우가 조급하게 내 머리를 붙잡았다.
"나 내기한 적 없어."
"……."
"내 기억에 없다고."
그 막연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번에는 정말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한잔을 받고 나면 또 다시 한 잔. 끝을 모르고 술을 들이키던 두 시간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북받치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내 옆머리를 감쌌다. 어차피 고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마당이라, 그 손에 힘을 맡기고 시선을 꺼트렸다.
"오기나…장난같은 걸로 다른 사람 마음 얻으면."
"……."
"그게 재밌을까? 항상 생각했어."
나를 붙잡은 장동우의 손에 힘이 실렸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별거 없는 나한테 밑도 끝도 없이 잘해주니까…. 나는 좋았어. 그래도, 좋아하기 싫었어. 나는 내기니까. 그 사람한테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는 게 되고싶지는 않았는데."
"……."
"기억에 없는게 더…나빠."
두 손을 떠나 어깨에 걸쳐 있던 우산의 막대가 계단 옆으로 떨어졌다.
물론 나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지붕 아래로 온전히 들어와 앉아있는 탓에 내게서 우산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던 반면에 장동우는 아니었다. 녀석의 머리 위의 우산이 사라지자 빗줄기는 기다렸다는듯이 그 위로 들이쳤다. 덕분에 잠시 후에는ㅡ 녀석의 머리카락 뿐만 아니라 내 이마 언저리까지 빗줄기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술자리를 마감한 듯 뵈는 취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느라 호프 문 앞은 빈번히 시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내게서 꿈쩍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몇 번의 취객 무리가 옆을 지나고, 또 옆을 지나고. 호프 옆쪽으로 작게 켜 두었던 네온사인 전광판마저 침침하게 꺼졌을 때 즈음에야 나는 다른 쪽 손에 쥐고 있던 눈사람을 녀석에게 마저 내밀었다.
"어쨌든 가자. 추워."
이건 오늘, 나랑 술 마셔줘서 주는 선물. 나는 꾹 쥐어진 녀석의 손바닥을 아까처럼 힘주어 폈다. 세게 쥐고 있었는지 핏기가 가신 손바닥 위에 눈사람을 내려두었다. 너 이거 좋아하니까. 도로 꾹꾹 주먹을 쥐게끔 만든 후에는 저만치 나동그라져있던 우산을 내가 먼저 주워 들었다.
무서워서 그랬다. 무작정 경계범위를 무너뜨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결국에는 내게서 차지하게 되는 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피해보고도 싶었다. 이미 내게 진심이 아닌 사람에게 내 쪽에서 먼저 진심을 보여주는 것만큼 비참하고 초라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내게 닥친 모든 친절을 빚지고 싶지 않았고, 그 페이스에 휘말리기 싫었던 거였는데. 이미 그것은 늦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장동우가 아닌 남우현은 내 말에 순식간에 표정을 잃었다. 이번에는 내가 녀석에게 우산 끝을 씌워주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대답을 들려줬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판단과 행동은 녀석의 몫이었다. 나는 충분히…. 내깃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남우현은 내가 드리운 우산 속에서 잠시 후에는 뜻 모르게 웃어보였다.
장마의 둘쨋날에서 나는 감기에 걸렸다.
무언가를 털어놓은 대가로 받는 답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음날 보란듯이 잔기침을 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온통 쓰린 속을 움켜잡고 있으니 어지러운 머리가 동시에 지끈거려왔다. 서걱거리며 부딪히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오늘만큼은 조금만 지각을 해보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맡에 위치한 창문에 빗줄기가 후두둑 부딪히는 소리가 선연했다.
여름 감기는 오래 가던데. 속기침을 하면 할수록 칼칼해지는 목을 부여잡으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당겼다.
ㅠㅠㅠ |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후다닥 다 썼쑤유 헤겧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