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10
w.규닝
10. talkin' bout rule
빗물 묻은 신발창들이 지나간 자리가 지나치게 번들거렸다. 우산을 접어, 학원 앞 도로에서 한참동안이나 물기를 털어내다가 계단을 올랐다. 이미 흙에 번진 물기가 계단 곳곳에 발자국을 찍어놓았다. 부러 조심스럽게 밟은 계단 끝에서는 코 위까지 얼굴을 덮고있는 마스크를 눈 밑까지 끌어당겼다. 우산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어깨며 팔에 튄 빗방울을 툭툭 털어내고 학원 문을 열었다.
마침 로비에서 나란히 창문 밖을 보고 있던 박 선생님과 남우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성규씨 왔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기위해 허리를 굽혔다.
"감기 걸렸어요? 오늘따라 늦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창문 쪽을 보던 몸을 틀어 의아한 듯 내게 묻는 박 선생님의 목소리가 어른거리며 들렸다. 아까 전부터 서서히 오르던 열 때문인지 관자놀이가 화끈거리며 달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냥 조금요. 찬바람을 쐬고 잤더니. 될 수 있는대로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고 고개를 돌린 곳에는 어제처럼 빤한 시선이 내게 닿아 있었다. 일부러 그 쪽에서 고개를 거둬 느릿느릿 신발 뒤꿈치를 매만졌다. 한여름에 겉옷이며 마스크로 꽁꽁 싸맨 내가 웃기기는 했는지 박 선생님은 걱정한답시고 뱉는 말에 웃음기를 섞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무실을 향하기 위해 잠깐 본 남우현만큼은 언제나 그랬듯 능청스러운 아침 인사 대신에 예의상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 * * * *
열로 인해 달뜬 손가락으로 달력을 짚었다. 수요일. 일정이 텅텅 비어있는 오늘의 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금요일까지는 정확히 이틀이 남아있었다. 이번주까지만 자율을 맡으면 되는 거였으니까. 딱 이틀만 더 버텨보자는 심산으로 달력을 덮었다. 모두가 수업에 들어간 이후 조용해진 사무실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10분동안 뭘 하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황망해진 머리를 탁자 위에 기대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화면 보호기가 작동중인 컴퓨터 모니터가 눈에 밟혔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당겨 앉았던 의자의 방향을 컴퓨터 쪽으로 틀어 앉았다. 엔터 키를 누르자 캄캄했던 화면이 탁,하며 점등됐다.
"검색하면, 나오나…."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고 있던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취중진담 다음날, 이라고 썼다. 사실 이런 걸 검색해서 무언가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게 득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목구멍에 얹힌 듯 불편하게 떠오르던 단어를 막연히 적어넣은 것이었다. 물론 이렇다할 결과도 검색되지 않았다. 하긴. 어느 누가 남의 취중진담 다음날을 궁금해하겠어. 하염없이 휠을 내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의도치 않게 화들짝 놀라버렸다. 누군가의 인기척에 화면을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머그컵을 휘휘 저으며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던 남우현도 나의 과민반응에 놀란 눈치였다. 녀석의 눈이 빠르게 내 표정을 스캔했다.
"왜 놀라요?"
"누,누가 놀라요. 나 안 놀랐어요."
놀라긴 누가 놀라. 그냥, 누가 들어오나 싶었던거지. 나는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를 풀며 잠시 턱으로 끌어내렸던 마스크를 올려 썼다. 남우현은 그저 무표정으로 머그잔을 쥐었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녀석보다 빠르게 화면을 손으로 가렸다. 한 발 늦은 남우현은 내 머리 옆으로 고개를 빼 화면에다 시선을 고정했다. 이미 검색어 창을 가린 탓에 내가 입력한 글씨는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 뭐예요. 갑자기 쉼 없이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할 새도 없이 소리쳤다.
"왜 훔쳐보고그래요. 남이 컴퓨터 하는 걸."
"뭘 하고 있었길래 내가 들어오자마자 깜짝 놀라나 싶어서요."
"야한 거 보고 있었어요! 야한거."
남우현은 내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나도, 뱉어놓고도 민망해져오는 대사에 가뜩이나 열이 오른 얼굴이 더욱 뜨거워져감을 느꼈다. 아무말이나 뱉어놓고보자 심산이었지만 하필이면 한다는 변명이. 그러나 더욱 민망한 건, 남우현은 내 되도않는 변명에도 웃어주지 않았다. 평소같으면 일부러 눈치없이 나도 같이 봐요.하며 내 손을 잡아 내렸을 녀석이건만 오늘은 아니었다. 남우현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다시 모니터를 스캔했다. 혹시라도 검색어가 보일까 모니터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남우현은 모니터에 두었던 시선을 거둬가며 말했다. 허술하네. 미미씨.
"위에만 가리면 뭐해요. 검색 결과가 다 보이는데."
그걸 검색하면 야한 거 나와요? 남우현이 간이 냉장고 위의 바구니에서 녹차 티백을 꺼내며 말했다. 남의 심장이 내려앉건 말건, 녀석은 그저 녹차 포장을 찢어 티백을 머그컵에 담구면서도 뒷말을 덧붙였다. 모니터를 누르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남우현이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이 예민하게도 느껴졌다. 남우현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처럼 담궈놓은 티백을 느리게 저었다.
"다음날이 신경쓰이는거면 걱정마요. 오늘은 미미씨랑 아는척도 안 할게."
"……."
"서투른 거 아니까 그래요. 내가 기다려주는거야. 오늘 하루만."
아직까지 모니터를 가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나를 지나친 남우현은 나보다 먼저 문고리를 잡았다. 대신 오늘이 지나면, 무슨 답이라도 내려줘요. 나한테. 그 말과 함께 남우현은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다시 혼자 남겨진 사무실에서는 내 힘을 잃은 손이 키보드 위로 떨어져내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망연자실해진 마음 속에 찬바람이 들이차는 것 같았다. 애꿎은 마스크를 눈 밑까지 끌어당겨보았다가, 검색창의 글씨와 깜빡이는 커서를 보자 덜컥 차오르는 민망함에 마스크를 더욱 끌어당겨 눈 위까지 덮어버렸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하나도 안 보여.
그러다가 다시 책상 위에 엎드려버리고 나서는 조금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다시금 사무실 문이 열리고, 급기야는 나를 데리러 온 학생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릴때까지 나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두 팔에 얼굴을 묻었었다. 선생님. 수업 들어오셔야죠. 그에 나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ㅡ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먼저 들어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
오늘은 선생님 목이 안 좋아서 작게 말할게. 들어가는 수업마다 내가 뱉는 첫마디였다. 은연중에 '오늘은 떠들지 말아달라' 혹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테니 알아서 조용히 하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주는 학생들은 드물었다. 오히려 여학생들은 더했다. 미미쌤 어디가 아프세요 부터 따뜻한 물 대접까지. 시키지도 않은 수발을 자청하며 녀석들의 분위기는 오히려 풀어져만갔다. 열 때문에 지끈거려오던 머리에 스트레스까지 얹혀지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높이기 싫어 누군가가 내 어깨를 주무르면 주무르는대로, 이마를 짚어주면 짚어주는대로 몸을 맡겼다.
"성규씨가 아프니까 학원이 전체적으로 가라앉네요."
잠시 가져갈 게 있어 들른 사무실에서 마주친 원장 선생님이 안쓰러워 뵈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학생들이 성규씨 눈치 본다고 조용하잖아요. 가끔씩 우리 선생님들 돌아가면서 아파볼까봐."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말투로 소리내어 웃은 원장 선생님은 제 입가를 가리면서 한참을 웃은 후에야 농담이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저 죄송해요.하고 순응하고 말았지만 사실은 선생님 눈에는 학원이 조용하던가요?하며 따져 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은 것이었다. 박 선생님도 장난을 거들었다. 아, 그럼 다음번에는 제가 아플게요. 그러자 원장 선생님도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그럴래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내가 아프지 뭐. 그다지 재밌지도 않는 장난을 흘려 듣다가, 원하는 파일철을 찾고 나서는 사무실을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아 맞다, 성규씨! 컴퓨터 바로 앞까지 목을 빼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던 박 선생님이 갑작스레 몸을 돌려 나를 불렀다.
"네?"
"거기 뒤쪽 책상 위에 좀 봐봐요."
박 선생님이 상체를 뒤로 뺀 후에 내 뒤의 책상을 가리켰다. 여기요? 파티션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책상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네. 거기. 탁상 달력 앞에 약 봉지 보여요?"
박 선생님의 말마따나, 책상 앞에 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하얀색 약봉지였다. 네. 있어요.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박 선생님은 가져가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그거 내가 이 아래 약국 가서 사온거에요. 아까 점심 때 보니까 성규씨 약은 안 챙겨 먹는 것 같길래."
저녁 먹고나서 먹어요. 박 선생님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시선을 모니터에 갖다 박았다. 예상치 못했던 호의에 곧바로 고맙다는 대답을 뱉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엑셀 파일에 열중인 듯 보이는 박 선생님의 뒷통수를 바라보다가 약봉지를 집어들었다. 어딘가 이상한 모양이라 생각이 든다 했더니, 봉지는 작은데 안에 담긴 내용물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물약이며 알약이 서투르게 쌓여진 내용물을 뒤적이다가 픽 웃었다. 뭘 이렇게 많이 챙겨주셨대.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약봉지 밑바닥에 깔려 있던 립밤이며 비타민 가루약 같은ㅡ 미심쩍을만큼 정성스러운 물건들을 발견하고 나서야 나는 봉지 겉면을 살펴보았다.
완벽하게 하얀 봉투 뒷면에는 예고에 없던 흰색, 하늘색이 어우러진 분필자국이 선명했다. 잠시 얼이빠져 그것을 훑어보고만 있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그렇잖아도 부르텄던 입술을 꾹 물었다. 박 선생님이 준비했다던 약봉지는 애초에 누군가의 손을 탄 것이 분명했다.
이 곳에 놓아두기까지 몇 번이나 매만졌던건지 봉투 뒷면은 갖은 분필색이 모두 어우러져 묻어있었다. 분필. 빠르게 연상되는 분필과 칠판의 이미지에ㅡ나는 그 자욱을 따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짜증나. 그리고는 서둘러서 그것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마음은 뭐가됐든 녀석에게 이상한 마음 같은 것을 빚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벙 쪄 사무실에서 시간을 지체했다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쳐버릴까봐 재빨리 걸음을 옮겨 강의실 안으로 자리를 피했다.
강의실 안의 책상 위에 내려두기가 무섭게, 봉지 안의 감기약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
"먼저 퇴근할게요."
정말이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조용했던 하루의 끝자락이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향해 달려갈수록 어제처럼 불안한 마음은 증폭되고 있었다. 결국은 열한 시 오십분 정도에 학원 안의 모든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강의실은 다시 정적 속에 빠져 있었다. 나는 섣불리 강의실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앉아 미리 매고 있던 백팩의 가방끈을 붙들었다. 사무실 쪽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일단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문은 잠궈야지 퇴근을 할 텐데. 분필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약봉지를 한참동안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홱 틀었다. 먼저 퇴근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나타난 남우현은 정말 제 할 말만 꺼낸 후에 다시 문을 닫았다. 열쇠는, 프론트 위에 뒀어요. 남우현의 슬리퍼 소리가 강의실에서 멀어져갔다. 나는 그 뒤로도 강의실 안에서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결국에는 현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아찔해진 두통 탓에 잠시동안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는 기다려주겠다던 남우현은 마지막까지 정말로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이걸 고마워해야하는건가. 아니면 오늘도 숙제를 내려준 녀석을 다시 미워해야 맞는건가. 스스로도 자조적이라고 느낄만큼 의미없게 웃다가 약봉지를 챙겨 들었다. 봉지 입구를 비틀어 잡은 채 강의실 문을 열었다.
남우현이 두고 간다던 열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불이 꺼진 사무실 프론트 위의 열쇠를 집어들자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고요한 공간 안에서 나만 내는 소음이 싫어 곧바로 문을 닫았다. 복도로 나오자 훤한 유리창 밖으로 아직까지 쏟아지고 있는 비를 마주했다.
"도대체 언제쯤 그칠까."
언제쯤. 나는 느리게 슬리퍼를 끌어다가 창문 앞에 멈춰 섰다. 열쇠를 든 한 손과, 약봉지를 틀어 잡은 다른 쪽 손을 모두 무릎 위로 얹고나서 허리를 굽혔다. 창문에는 이미 빗방울이 많이 번져 비춰지는 건물들은 흐릿하게 빗물과 함께 섞여 있었다. 자정 즈음 되는 시간이라 거리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캄캄하게 불이 꺼진 회색 건물들 아래,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빠진 정류장 팻말이 비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했나 싶었다. 창문에서 눈을 거두고, 창문 틀에 올려놓았던 접이식 우산을 챙겨들었다. 오늘은 곧바로 집에 들어가서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학원 문 밖, 텅 빈 공간에 열쇠가 저들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열쇠 구멍이 잘 보이지 않아 곁들였던 휴대폰 랜턴을 끄고 계단을 밟았다. 오늘같은 날씨에, 택시가 다니기는 할까. 뭐 그런 시덥잖은 고민과 함께 답답하게 얼굴을 덮고 있던 마스크를 턱 밑으로 끌어내리며 건물 문을 벗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먼저…퇴근…"
"……."
"…한다면서요."
건물을 나서기 바로 전, 계단 위 깜깜하게 불이 꺼진 로비에서 다시 마주친 건 남우현이었다. 우산을 펴기 위해 허공으로 옮겼던 손이 그대로 굳었지만 남우현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퇴근 했었어요. 남우현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고, 내 머리는 반사적으로 후회를 시작했다. 마스크…벗지 말걸. 얼굴을 가리고 싶은데. 남우현은 한동안 발장난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한 발짝 나가있던 신발을 바로했다.
"퇴근하던 길이었는데, 다음날이 밝아서 바로 되돌아왔어요."
"……."
"어제는 내가 기다려주기로 했으니까… 생각해보니 얼굴도 제대로 못 봤더라고."
녀석보다 한 발자국 정도 앞서 나가있는 내 팔을, 남우현이 잡아당겼다. 덕분에 후두둑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한 켠 물러나 남우현의 앞에 정확히 서게 되었다. 남우현은 저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나를 세워두었다.
"보고싶어서 온거예요. 보고싶어서."
남우현은 내 쪽으로 몸을 틀어 섰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보고싶다고 말해오는 녀석에게 되돌려 줄 말이 없었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입은 다물고 있는 게 최선책이라 생각해 애먼 시선을 녀석의 등 뒤로 향하게 했다. 남우현은 이미 내 대답같은 것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녀석은 빗나가있는 내 눈에 진득히도 제 눈을 맞췄다.
"오늘은 어제 아니야."
"……."
"하루는 지났어요."
남우현의 고개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미 충분히 가까운 곳에서 숙여져 있던 앞머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싶을 정도로 이마에 와 닿았다. 애써 멀리 두고 있던 시선을 빠르게 남우현의 얼굴로 가져왔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빼자 현관의 차가운 유리문에 부딪혔다. 마치 어제와 같은 상황이었다. 어질어질하게 취해 호프집 문턱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던 날. 미처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같은 상황은 다시금 나를 찾아왔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시간에, 장소에. 당황한 눈을 질끈 감았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옅은 숨이 내게로까지 와 닿았다. 칠흙같이 어두워진 주위 속에서, 시원하게 바닥을 치는 빗소리가 쉼 없이 귀를 간지럽혔고ㅡ 가까운 곳에서 남우현의 눈이 감겼다. 나는 한껏 긴장해 뻣뻣해진 숨을 삼켰다.
"나 좋아하지 마요."
힘주어 감았던 눈을 살짝 뜨자, 보이는 것은 내게로 오다 멈춘 녀석의 고개였다. 남우현의 감겼던 눈이 느리게 떠졌다. 겨우 뱉은 내 목소리에 당장의 상황은 멈추었지만 남우현의 질긴 시선은 여전히 내게 머물러있었다. 소리나게 침을 삼켰다. 그에 따라 오른손에 쥐고 있던 약봉지를 더욱 세게 쥐어, 약이며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어떻게 알았어."
남우현은 여전히 고개를 거두어가지 않은 채로 물었다.
"나조차도 어제 알게 된 사실을, 미미씨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
"그냥…알았어요."
사실은 전부터, 어쩌면 녀석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은 내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항상 직감에 대해서 주저하는 편이었다.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은ㅡ결국에 전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직면하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니까. 이미 소용없겠지만 그래서 끝까지 부인해보고도 싶었다.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냐. 괴롭히려고 했던거야. 하지만 그것은 예상했던것처럼 이미 남우현과 나 사이에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제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남우현은 결국에 내게 신고를 해오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이미 멀리 왔다는 것도 알겠네."
"말 했어요. 나 좋아하지 마요."
남우현의 고개가 다시 내 쪽으로 향해 움직였을 때에는, 다급하게 녀석의 팔을 붙들었다. 이제는 거의 스칠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살짝 우위에 선 남우현은 고문처럼 나를 정확히 내려다보았다.
진심이야. 좋아하지마. 어쩌면 처음으로 뱉어졌을 내 반말을 남우현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미 늦어버린 시점에서 하는 경고이기도 했지만 녀석은 지독히도 제 마음이 내키는대로 고개를 가져왔다.
기어코 닿은 입술은 서늘했다. 삼일째 계속되던 장마 속에서ㅡ 예기치 못했던 소나기는 한 차례 더 빗물을 퍼부었다. 전혀 예상 밖에 있던 시나리오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영화의 필름처럼 귓가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사선으로 들이치는 비가 녀석의 어깨를 적셨고 남우현이 고개를 틀었다. 그와 함께 더욱 깊이 맞물리는 입술에 정신없이 밀려나던 고개가 어느순간 유리문에 고정됐다. 남우현의 손이 차가워진 내 뒷통수를 움켰다. 빗속에서 오랫동안 발장난을 하고있었던 탓에 시원하게 마른 녀석의 볼이 뜨겁게 열이 오른 내 얼굴과 맞닿았다. 남우현의 손이 내 고개를 조금 들어올렸다.
왼손에 들려있던 우산이 떨어지며 대리석 바닥에 플라스틱 손잡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생경했다. 그와 동시에 입술은 다시 떨어졌다. 남우현의 감은 눈이 조금 떠졌다.
"하지 마."
그러기도 잠시, 녀석은 다시 내게 입을 맞췄다. 내 뺨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면을 향해 고정되어있는 내 고개와는 달리 녀석은 다시 고개를 틀었다. 남우현의 손끝이 머리칼을 헤짚어드는 느낌에 전율이 올랐다. 그게 싫어 고개를 비틀면 당연하다는듯 녀석의 고개도 따라왔다. 감은 눈꺼풀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우산을 잃어 텅 비어버린 손으로 녀석의 목덜미를 짚자 입술이 다시 떨어졌다.
"좋아하지마."
내가 재차 강조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좀 더 답답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남우현이 이전보다 거칠게 입을 맞췄다. 그 반동으로 몸이 밀렸지만 남우현은 개의치않았다. 한 쪽 팔을 세게 다잡다가 놓친 약봉지마저 바닥으로 뒹굴었다. 떨어져나온 물약 통이 조그맣게 고인 빗물 위로 떨어지면서 신발 옆에 와 닿았다. 숨이 부족해 어깨를 밀어내는 내 팔을 녀석은 오히려 잡아내렸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남우현에게서 암묵적으로 버티고 있을 때 입술은 다시 떼어졌다. 밭은 숨을 고르는 녀석에게 그제서야 한 발 비켜섰다. 그 때만큼은 남우현이 나를 막지 않았다.
"이상해."
"……."
"이상해서 죽겠어. 그러니까 하지 말랬던건데…."
"……."
"진심도 아니면서,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일부러 녀석의 앞에서 입술을 훔쳤다. 언젠가 녀석에게 꼭 하고싶었던 말이었는데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인 것 같았다. 남우현은 정말이지 진심으로 이기적이었다. 아무런 미동없이 나를 보고있는 녀석에게서 눈을 돌려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방금 전 떨어트린 약봉지가 빗물에 젖어 눌어지고 있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눌러 두어번을 닦아냈다. 남우현이 돌아서며 젖은 약봉지의 끄트머리를 밟고 섰다.
"생각해봤는데."
"……."
"아니, 아무리 생각해봤어도 니가 말했던 내기는 생각이 안 나. 그게 더 나쁘다는 니 말을 듣고 어제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잠이 안 왔어. 아무리 기억하려고 했어도… 내가 너한테 줬다는 상처가 안 떠올라서."
"……."
"근데 그걸 다르게 생각해보면 다행인 일인 것 같아."
남우현의 말에 비가 흐드러지는 바닥으로 두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남우현은 잠시 후에 조금 웃었다.
"내기라는 말실수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매순간 너한테 진심이었다는 걸 설명할 수 있어서."
남우현은 다시 내 어깨를 당겨 안았다. 훤하게 식었던 뒷목을 녀석의 팔이 둘러왔다. 아니라며 밀어낼 새도 없이 남우현은 차근차근 내 이성을 잘라냈다. 여지껏 남우현은 말에 있어서 청산유수인 녀석이었으니까. 그래서 더이상은 속고싶지 않은 마음에 변명하듯 진심이라고 말해오는 남우현을 있는 힘껏 밀어내보고싶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남우현은 끝까지 내 입장은 봐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깨를 감은 팔에 힘이 실렸다. 녀석은 아까보다 더욱 깊게,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나도 오기인 줄 알았어. 자꾸 치이고 치이니까 오기가 나서 내가 이렇게 덤벼보는구나, 생각했었는데."
"놔."
"그게, 나 좀 상대해줬으면 좋겠다의 출발점인것도 모르고. 그리고 그 생각이 결국…"
"놓고 말해."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그게 그렇게… 변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 남우현의 한쪽 손이 내 뒷통수를 안아 당겼다.
"좋아하지 말아달라. 그런 말 할 거면 적어도 어제 저녁에는 해야 됐어요."
"……."
"순서 지켜. 지금 미미씨 말보다, 내가 먼저였어."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뗀 남우현은 다시 입술을 찾아들었다. 녀석은 끈질기게도 자신은 정당하다 내게 설명해오고 있었다. 그런 말마저 한껏 이기적이라는 것도 모르고. 나는 바로 앞에서 감긴 눈꺼풀을 있는대로 노려보았다. 한없이 다정하게 뒷목을 감싸는 손이 미워 고개도 반대로 비켜보았다. 그 바람에 비가 들이치는 곳으로 몸이 틀어져 머리가 엉긴 뒤통수와 녀석의 손에 빗줄기가 쏟아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뒷머리가 젖어들자 남우현은 다시 내 몸을 돌려 세웠다. 그런 와중에도 끝없이 내게 밀어붙이는 입술은 끈질겼다. 종래에는, 아까부터 머릿속에서 촤르르 펼쳐지던 필름이 일순간 정지되어버리는 것을 느끼며 나도 녀석을 따라 눈을 감았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유리벽면에 뒷통수가 닿았다. 몇분 전 떨어트렸던 물약이 발치에 채여 계단 밑으로 나동그라졌다. 숨이 부족해 입술이 열리자 남우현은 더 깊게 고개를 틀었다. 여러번의 입맞춤 끝에 알게 된 것은ㅡ 처음에는 분명 서늘했던 녀석의 뺨이 내가 가진 열에 옮아 달아있었다는 것이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내 오른손은 녀석의 어깨를 짚었다.
장마의 끝. 녀석을 만난 이래, 가장 말도 안되는 새벽이었다. 눈을 감고있는 내내 거짓말같았지만 사실이었다. 내 자존심은 아니었지만 이성은 이미 남우현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었으니까. 드문드문 숨이 비켜가고, 마지막으로 본 학원 앞 상가 간판이 녀석으로 인해 아득하게 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