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08
w.규닝
08. 그리고 전환점
달갑지 않은 상황이 오면 으레 그렇듯이, 시간은 어느 순간부터 느리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오직 내 체감상 문제일지는 몰라도ㅡ 나의 세계에서만큼은 한없이 느려진 시간은 매일 매일에 곤혹스러움을 안겨다주었다. 그것은 느려진것 뿐만 아니라 가끔은 아예 멈춰버리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 날 이후로는 사적으로 날 멀리하던 남우현과 본의아니게 눈이 마주쳐버릴 때라던가. 물론 표면상으로는 달라진 게 없었다. 녀석은 예의 그 살가운 눈웃음으로 고개를 까딱였지만 이제는 내 쪽에서 그것이 더이상 살가워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남우현은 평소처럼 넉살좋게 인사를 건네왔고, 나란히 빠른 출퇴근도 같이 했으며 직원 회의가 있는 날이면 내 취향에 맞는 음료를 잊지 않고 준비해주었다. 달라진 것은 하나 없었지만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직감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녀석은 더이상 내 저녁 안부를 묻지 않았다.
쓸 일도 없는 볼펜 끝을 괜히 달깍거리며 번갈아 누르고 있었다. 성규씨, 뭐해? 인기척도 없이 옆으로 다가온 원장 선생님이 물었다. 쓸데없이 복잡하게 떠오르는 남우현의 행동들을 떠올리고 있던 걸, 들켜버린 것도 아닌데 지레 놀라 고개를 저었다. 원장 선생님은 의아한 눈을 내게 고정했다가 간이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성규씨, 요즘 계속 넋 놓고 있네.
"취업 고민인가? 칼럼?"
원장 선생님이 냉장고에 들고 온 맥주캔을 하나씩 집어넣으면서 물었다. 아니예요, 그런거. 적당히 대꾸를 하자 원장 선생님도 딱히 캐물을 생각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에 웬 맥주예요?"
"그냥. 차에 있던건데 이 날씨에 차 안에 내버려두면 따뜻해지니까 넣어두려고. 그나저나 야간 자율은 잘 돼가고 있어요?"
오직 냉장고 안쪽에 시선을 고정한 원장 선생님이 가볍게 던져 물었다. 항상 똑같아요. 달깍거리던 볼펜을 이제는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율이라서 저희가 잘 해야하는 건 없어서요."
"분위기는 어수선하지 않고?"
"전혀요. 밤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더 가라앉아있어요. 다들 잠이나 안 자면 훌륭한거죠."
캔맥주 정리를 대충 끝낸 원장 선생님이 흡족한 듯 웃으며 문을 닫았다. 성규씨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마음이 한결 편한데? 매일 칼퇴근이라 좀 신경쓰였거든요. 특유의 시끄러운 슬리퍼 소리가 뒤쪽 테이블로 멀어져갔다.
"많이 힘든 줄 알았어요. 특히나 어제는 우현씨까지 나한테 언제까지 자율 맡으면 되는거냐고 묻더라구. 그렇게 힘든 티 내는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두 사람이 좀 걱정돼서 물은거예요."
"남우현씨가요?"
"응. 이제 기말고사가 다음주니까 다음주 금요일까지만 하면 될거예요. 그러니까 성규씨도 조금만 힘내줘요."
가끔 저녁에 출출하면 연락해도 돼요. 간단하게 먹을거라도 챙겨서 학원에 들를게요. 어쩌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일지도 모르는 말을 듣고 있자니 그다지 맞장구 쳐 웃고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네,하는 대꾸로 원장 선생님과의 대화를 끝맺었다. 게다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남우현의 반응을 한다리 건너 듣게 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녀석이 충분히 마음상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식으로 돌려듣게 되니 언짢은 마음은 배가 되어 부풀었다. 수업, 먼저 들어가볼게요. 15분은 족히 기다려야 시작될 수업이었지만 먼저 사무실을 떠나고싶어서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수고하라는 원장 선생님의 말을 끝으로 아직까지 아무도 오지 않아 텅 빈 강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피곤한 하루들의 연속이었다. 내일은 힘겨웠던 평일들의 끝자락이고 하니, 오늘 밤에는 장동우라도 불러서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퇴근이 절실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책상이 허전해 이유없이 펴 놓았던 교원 수첩 위로 몸을 엎드렸다.
*
"성규씨, 오늘따라 엄청 피곤해하네."
수업과 수업 사이, 20분의 빈 타임에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있기란 보통 심심한 일이 아니었다. 할 게 없어 책장 모서리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었더니 박 선생님이 물었다. 금요일병인가? 웃음기어린 목소리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런가봐요. 내 대답과 동시에 저 쪽 끝에서 복사기 버튼을 이리저리 보고 있던 남우현의 고개가 내게 돌아왔다.
"졸려하는 것 같은데. 커피라도 좀 마셔요."
남우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복사기 버튼을 힘주어 눌렀다. 아마 잘 눌려지지 않는 모양인지 여러번 힘주어 누르느라 남우현의 표정이 곱지만은 않았다. 지나가는 제 3자에게 건넨듯한 말투여서, 내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잠시 후에서야 반응을 했다. 나 커피 안마셔요. 남우현은 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꾸했다. 알아요.
"그건 아는데, 피곤해보여서 하는 말이에요. 내가 그런걸 모를까봐."
"걱정은 고마운데."
"……."
"안 마셔요."
복사기 버튼에 올라가있던 남우현의 손이 굳었다. 녀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몸을 굽혀 버튼을 살폈다.
"하여튼, 말이라도 그러겠다고 안 하지."
이전과는 다르게 엇나간 목소리였다. 하지만 딱히 그 대목에서는 아니라고 반박할 것도 없어 그냥 고개를 숙였다. 하릴없이 발장난을 시작할 때 즈음에는 달력을 가지러 사무실에 들어섰던 박 선생님이 수고하란 말과 함께 사무실을 벗어났다. 벽시계가 내는 초침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감돌았다. 그 위에는, 남우현이 꾹꾹 누르고 있는 고장난 버튼소리가 이따금씩 들렸다. 슬리퍼를 일부러 소리나도록 바닥에 끌었다. 흘깃 올려다 본 남우현은 복사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모양인지 허리를 굽혀 기계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큼,흠흠. 부러 크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거, 요즘 자주 고장나던데…."
"……."
"또 말썽이예요?"
아무런 소음 없는 공간 안의 정적이 싫어 일부러 물은 것이 맞다. 하지만 남우현은 내 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꼬인 표정으로 그 안쪽을 들여다보다가 잘 눌리지도 않는 버튼을 여러번 눌러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고개를 빼어 녀석의 행동을 관찰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 버튼은 눌러봤자예요. 잘 안 먹히더라고….
"복사 용지가 안에서 걸려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내가…"
"응. 알아서 할게요."
남우현은 여전히 기계 안쪽에 눈을 두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사 용지 넣는 곳을 열어, 덜컹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알아서 하겠다는 녀석의 말로, 그에 장단이라도 맞추듯이 내 입은 꾹 다물렸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순간 다음 말을 잊어버린 탓에 그런 것이었다. 평소같으면 말이 잘린 것에 기분이 상해ㅡ 그럼, 남우현씨 마음대로 하세요. 하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을테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면 안 될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어딘가 달라진 남우현에게 더이상 불을 지피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엇나간 마음에 다른 이유까지 보탤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남우현은 한동안을 고장난 기계와 씨름하고 있었다. 간간히 삐딱한 혼잣말과 함께, 말을 듣지 않는 복사기를 들추어보던 남우현은 끝내 허리를 짚어 그 앞에 섰다. 한숨을 내쉬며 그 위를 두어번 탕탕 치는 녀석에게, 머리와는 따로 노는 입이 다시 한 번 먼저 말을 걸었다. 안 고쳐져요? 그러자 남우현은 사무실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내게 눈길을 돌렸다.
"요즘 자주 고장난다고 했죠."
"네."
"원장 선생님한테 말씀 드려야겠네요. 아예 고장인 것 같아서."
남우현은 그 옆에 널어두었던 제 프린트물을 집어들었다. 제 할 말만을 끝낸 남우현이 갑자기 이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 같아, 책장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빠르게 떼어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나 남우현은 사무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미련없이 사무실을 나가려던 녀석은 문고리를 잡은 손을 멈추었다가 내게 잠깐 시선을 돌렸다. 멀거니 녀석의 뒷모습만 좇고 있던 눈을 들킨 것 같아 빠르게 숙였다. 남우현은 잠깐의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말 할까말까 한 건데."
"……."
"펜 끝 입에 물지 마요."
네? 약간의 음이탈과 함께 넋을 놓고 자세를 바로 하자 그제서야 내 입에 물렸던 펜이 무릎으로 떨어졌다. 낯선 이질감에 화들짝 놀라며 무릎 언저리를 쳐다보았다.
"참견하는 거 딱 질색이신 거 아는데, 남이 하지 말란 짓은 좀 하지 말아요. 몸에 안좋다고 했잖아."
금방 입에서 떨어진 펜이 다시한번 무릎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물고 있었던 것 같다. 방금 전까지의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보면. 남우현은 한숨섞인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몇 번 말해요. 남우현이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생경했다.
"나 싫어하는 건 이제 상관없어요. 근데 아무래도 그런 건 좀 신경쓰이거든요. 펜 끝 입에 물지도 말고,"
오늘 커피도 꼭 마셔요.
마지막 말을 할 때 쯤, 녀석의 눈은 내 쪽이 아닌 문 너머를 향해 있었다. 문은 다소 세게 닫혔다. 문을 염과 동시에 밖에서부터 확 끼쳐오는 더운 바람이 시원한 사무실 안으로 녹아들기가 무섭게 녀석은 다시 문을 닫았다. 어느새 사무실엔 나만이 전부였다. 커피. 묘하게 바뀐 녀석의 행동거지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 있었다. 은근히 고집스러운 잔소리. 나는 괜히 커피라는 말만 소리나게 되뇌이며 벽면에 걸린 시계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5분. 이제 슬슬 몸을 일으켜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어깨가 한층 더 뻐근해진 느낌이었다.
* * * * *
"주말동안 푹 쉬어요. 이제 다음주까지만 하면 되니까."
"박 선생님도 푹 쉬세요."
그래야죠. 능청스럽게 웃으며 박 선생님이 한 손을 들어보였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박 선생님은 금방 사무실을 벗어났다. 야간 자율이 시작되는 저녁 시간. 늘 그렇듯이 박 선생님의 퇴근을 지켜보다가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았다.
관계가 어색해지고나서야 시간은 어찌나 이상하게만 흘러가는지. 녀석과 얼굴을 마주할 필요가 없는 수업시간이라던지 쉬는시간에는 그렇게나 빨리 지나가던 시간은 꼭 대면해야만 하는 시간에 거짓말처럼 멈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무실 안쪽의 벽시계 초침소리는 제한이 걸린 카운트다운 소리처럼 날카롭게만 들려왔다. 테이블에 이마를 박으니 하릴없이 달랑거리고있던 발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 둘 곳 없는 두 팔도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 시간에 남우현은 더이상 학원에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 날 이후, 녀석은 저녁시간이 다가올 때 즈음 조용히 학원을 빠져나가 어디에서든 시간을 때우고 느즈막히 들어왔다.
"열쇠 챙겼어요?"
결국, 의도적으로 나를 피하던 남우현과 정면으로 맞부딪힌것은 퇴근 시간. 자잘한 뒷정리와 함께 학원을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거의 반나절만에 듣는 남우현의 목소리가 오늘도 수고했다는 말 대신 지극히도 사무적인 용건을 꺼냈다. 멀뚱히 서서 백팩의 가방끈을 붙잡고 있던 내가 손에 쥐고 있었던 열쇠를 흔들어보이자 남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앞서 현관에 나가 있던 남우현은 어느새 신발까지 다 갖춰신고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술 생각이 났다. 오늘은 퇴근하고 장동우를 불러 술이나 한잔 해야겠다는 생각을 낮에도 했었지만, 앞으로의 행로를 나도 모르게 바꾸어버린 것은 아마 내가 감정적으로 행동해버린 탓이었으리라.
꾸물대며 남우현 쪽으로 이동하려다가 방향을 틀어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산스럽게 냉장고를 열어 맥주캔을 챙겨들자 남우현의 표정은 점점 더 의아해져갔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남우현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남우현은 내가 든 맥주캔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했다.
"그게 뭔데요?"
"맥주요."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그럼 뭘 물었는데요? 같이 마시자는 거, 못알아들어서 물은거에요?"
어서 받으라며 맥주 캔을 내민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잠시동안 미동도 없던 남우현은 결국 내 손에 들린 맥주캔을 받아 들었다.
"집에 가면서 먹을게요."
"그러라고 준 거 아니에요."
앞서가는 남우현을 따라 학원을 벗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요즘 내가 누구 때문에 스트레스 쌓여 죽겠는데, 원인이 뭔지 몰라서 더 죽겠거든."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문고리에 열쇠를 꽂았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같이 좀 마셔달라고 준 거에요. 남우현씨가 마침 옆에 있었잖아."
그러다가 돌아본 남우현의 표정은, 잘 모르겠다. 나 역시도 녀석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나보다 그 쪽은 더한 것 같았다. 전혀 의도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표정 안에 여실히 드러났다. 남우현은 답답해 마지않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먼저 걸음을 옮긴 것은 내 쪽이었다.
언제나 이 시간 즈음 바깥은 여름날씨 답지 않게 선선했다. 물론 자정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라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ㅡ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난 후의 새벽 공기는 훨씬 더 시원하고 서늘했다.
이미 차가 끊긴 정류장 팻말을 지나쳤다. 혹시나 뒤따라오는 남우현의 발길이 끊길까 조금 멈추었다가 걸음을 옮기는 순간에도, 바람이 시원하다는 쓸데없는 잡생각으로ㅡ 녀석에게 먼저 술을 권했던 내 행동에 대한 한풀꺾인 자존심을 잊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학원에 무슨 술이래."
"……."
"예상 외로 불량하네요."
"훔친거에요."
뒤따라오던 남우현은 무작정 걷기 시작한 이래, 한참 후에서야 정적을 깼다. 훔친거라는 나의 말에 남우현은 조금 웃었다.
"그게 더 불량해."
새벽이라 캄캄한 가로수길을 걷다가 조금씩 걸음을 늦추었다. 그제서야 뒤따라오던 남우현의 걸음과 엇비슷하게 걷게 되자 들고 있던 맥주캔을 앞으로 가져왔다. 나보다 먼저, 남우현의 캔이 먼저 따졌다.
*
그렇게 걷다가 도착한 곳은 우리 둘 중 어느 누구하고도 연고가 없는 아파트단지의 공원이었다. 출근 중에 오다 가다 봤던 아파트 단지일 뿐이지만, 이렇게 그 안까지 발걸음할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것은 녀석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서늘한 돌길을 지나 놀이터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기까지 남우현이 한 말은 고작 한 마디였다. 여기에 와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이 곳에 들어설 일이 전혀 없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남우현은 겨우 두 모금 쯤 마셨을 맥주 캔을 벤치 위에 소리나게 내려두었다.
"입에 안 맞아요?"
"아니, 그냥."
"……."
"천천히 마시려구요."
"맥주 김 빠져요. 맛없어지는데."
"처음으로 김성규씨가 뭘 제안해줬는데."
"……."
"아깝잖아요. 맛없어진 맥주여도 그게 나아."
불량하다는 말 이후로 다시 웃은 적은 없던 남우현은 그 때까지도 무표정 그대로였다. 나는 그대로 들이키려던 맥주 캔을 바로했다. 남우현과는 다르게, 벌써 절반은 마셔버린 듯 가벼워진 캔을 괜히 옆으로 흔들다가 멈추었다. 내가 처음으로 뭔가를 제안해줬다는 녀석의 말에 이상하게 뭔가가 울컥했지만 그다지 내색하진 않았다. 남우현은 인기척을 멈춘 내게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돌 사이에 난 풀을 괜히 발로 즈려밟다가 입을 열었다. 남우현씨. 녀석은 심심하게 대답했다. 네. 그에 나도 무릎 쪽으로 내린 캔을 만지작거렸다.
"언제까지 일해요?"
원래 이렇게 물으려던 건 아닌데, 할 말을 찾다보니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상한 주제가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남우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잘 몰라요. 적어도 내년 초까지는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래?"
"응. 이게 제일 적성에 맞는 것 같아서요. 개강하면 시간이야 조정하면 되는거고."
영양가 없는 질문에 영양가 없는 대답이었다. 아…그래요. 별 생각없이 수긍을 하면서 차가운 캔을 빙글빙글 돌렸다.
"나는 그 전에 그만둘 것 같은데. 새로운 분 오시면 또 맞춰드리느라 남우현씨 고생 좀 하겠어요."
"설마. 안 그래요. 미미씨보다 어려운 사람이 또 있을까봐?"
"……."
"내 생각에는, 그 쪽같은 사람 둘도 없어요."
누가 오든 김성규씨보다는 쉬울걸.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뱉으며 남우현이 웃었다. 녀석은 그제서야 내려뒀던 맥주 캔을 집어 들이켰다. 원래부터 직설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그 날 이후로부터는 훨씬 더한 것 같았다. 특히나 내게는 한층 더 서스럼없어진 말투는 지금의 날씨따라 시원스러웠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남우현을 따라 맥주를 들이켰다. 이미 절반 넘게 마신 것 같은 캔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내 생각엔 지금 남우현씨가 더 어려워요."
"왜요?"
"남우현씨는 다 알죠. 내가 그 쪽 별로 안좋아한다는 거."
남우현은 잠깐의 정적 끝에 대답했다. 알지. 그에 나는 어쩐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어. 속마음을 까맣게 모르겠다고. 싫다는 사람한테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도 내 입장에선 이해가 안되고, 뭣보다… 내가 남우현씨한테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
"지금은 더 모르겠어요. 그래서 술 마시자고 한 거고. 몇일 전까지는 싫다는사람 붙잡고 장난치기 좋아했던 사람이 지금은 왜,"
아직도 정면을 향한 남우현의 무표정한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지를."
녀석이 직설적으로 나온다니까 내 쪽에서도 오히려 수월하게 할 말을 뱉었던 것 같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짚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쩐지 돌려 말하면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 같아 한 선택이었다. 남우현은 내 말에 아까처럼 또 정적을 돌려주었다. 이번은 조금 긴 침묵이었다. 남우현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 표정 안에 전부,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녀석은 순식간에 복잡해진 얼굴을 미묘하게 숙였다. 그러다가 벤치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맞추었다.
"사람이 여러번 퇴짜를 맞잖아요. 그러면 멀쩡하던 머리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그런 걸 내가 알아야해요?"
"당연하지. 나랑 미미씨 얘긴데. 방금 모르겠다고 해서 알려주려는거에요."
시선을 둘 곳을 몰라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해 맥주를 들이켰다. 술은 이제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듯 하지만 얘기는 이제야 막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이 차이고 차여서 궁지에 몰리면요."
"……."
"짜증나요. 하루종일 차였던 생각밖에 안난다니까."
평소처럼 절반은 웃고 있는 목소리였지만 표정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남우현은 벤치 뒤쪽에 손을 얹고 편하게 걸터앉았지만 내 자세는 더 굳어갔다. 그러거나말거나 남우현은 여유롭게 캔을 쥐었다.
"그리고…"
"방금 선언하신거에요."
"네?"
"짜증나는 짓이라고 선언했잖아요. 여러번 퇴짜를 맞으면 그렇다면서."
내 말에 남우현은 멀거니 내 눈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은 이제 곧 나올 것 같았다.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해결책은 쉬운 것 같아 스스로도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간단한 걸, 너도 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앞으로도 남우현씨한테 퇴짜만 놓을거에요. 지금처럼 계속. 그러면 서로한테 짜증의 연속이잖아."
"……."
"됐어요. 오늘은 남우현씨 솔직한 마음이 듣고 싶었던거니까. 시간은 꽤 걸렸지만 정확한 답을 들어서 좋네요. 서로 윈윈하려면 앞으로 대충 눈인사만 하면서 지내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지금처럼. 모르겠다는 눈으로 보지 마요. 그러니까 내 말은…멀리 지내자는거에요."
가까운 적도 없었지만. 남우현은 계속되는 직설적인 화법에 처음 그랬던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솔직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어찌됐건 가까워지려 노력했던 사람에게 하는 말 치고는 상황상 미안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컴컴하게 불이 꺼진 맞은편의 아파트단지에 눈을 돌렸다. 남우현은 여전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조용한 아파트단지에 서늘한 바람이 불자 분위기는 조금 더 어색해졌다.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텐데. 사실은 어서 '그렇게 하자'는 대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나 저러나 마음이 불편한것은 똑같으니까. 하지만 남우현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다 먹은 맥주캔을 조금씩 찌그러트렸다.
"김성규."
빈 맥주캔이 찌그러지는 소음만이 전부였을 때였다.
"말은 쉽네."
남우현은 남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갑자기 딱 잘라 떨어진 반말에 무의식적으로 녀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남우현은 내가 그러고 있던 것처럼 소리나게 캔을 찌그러트렸다.
"나 지금 또 차인 거 맞지."
"……."
"눈치도 되게 없어. 김성규씨는 무슨 말을 듣든 그런식으로밖에 해석을 못하나봐요. 남은 어떤 생각을 갖고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본인 기분 내키는대로."
"해석이요?"
"네. 엉망이었어요. 방금 해석."
엉망이라는 말에 그 순간만큼은 나도 발끈해 자세를 바로했다.
"사람 싫고 좋은 문제에 해석이 따로 필요해요?"
"알아. 김성규씨 무슨 말 하고싶은지. 이정도 되면 적당히 나가떨어져야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그런 의미였던 거 알아요. 그런데 난 아니거든. 나는 하나도 안 편해. 아까 말했던 것처럼 짜증나고 또 화나는데,"
"……."
"미미씨 말처럼 하기 싫어진 이유를 나도 모르겠어. 나는 그 쪽이랑 아무것도 아닌 사이처럼 단순하게 지내기 싫어요."
남우현의 말을 끝으로, 캄캄했던 정면의 아파트단지 일층에 불이 들어왔다. 덕분에 윤곽으로만 알 수 있었던 남우현의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노랗게 재워진 빛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남우현은 듣고있는 나보다 훨씬 답답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며칠동안 계속해서 생각한거에요. 오기야.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어. 순전히 내 오기인 건 맞는데, 내가 진짜…."
"……."
"속상해서 그래. 김성규."
한참이나 찌그러트렸던 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금까지도 남우현의 손에 들려있던 맥주캔이 날카롭게도 찌그러져 맨바닥에 뒹굴었다. 맥주 캔 위에도 형광등 빛은 쏟아졌다. 바로 대답을 돌려줄 수가 없어 나는 형편없이 찌그러진 캔과 남우현이 신은 신발의 끝에다 시선을 고정했다. 그늘 밑의 벤치라, 유난히 더 시원한 바람이 발목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속상하다는 말이 정확히 뭘 뜻하는지를 몰라, 사실은 되물어보고싶었다. 정확히 뭐가 속상한지를.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녀석도 모르는 눈치였다. 제가 뱉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이보다 더 답답한 표정이 그 답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남우현은 나를 따라 한참이나 말을 잃었다. 편하지 않은 사람과 오래 겪는 침묵은 어색할만도 한데 결코 그러지 않았다. 녀석과 나 사이에 어쩌면, 침묵은 알량한 말싸움보다 훨씬 더 편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남우현의 말을 끝으로 서로는 이렇다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둘의 맥주캔이 동난 것은 벌써 오래 전 얘기였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맨바닥에 신발을 끌었다.
"어쩌자는거에요. 도대체."
그러자 잠시 후에 남우현은 입을 열었다. 마치 내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렸다는듯이.
"당황하게 만들거에요."
"……."
"그러면 조금이나마 내 생각 해줄 거 아냐. 나만 신경쓰이고 그러는 거 짜증나서. 못된 방법같지만 그러고싶어."
캔을 떨어트렸던 남우현의 빈 손이 허공에 떨어졌다.
"너도 똑같이 당해보라고."
남우현은 분명 끝에, 앞으로는 제 내키는대로 행동할거라 말했었다. 장마가 지나간 후 쌀쌀한 날씨에 딱 맞는 이상한 선언이었다. 사실은 그 때까지도 나는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가 있다고,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자리를 떴었다. 결국은 아무런 수확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ㅡ 한산하게 비어있는 공원의 길을 되돌아 나오는 와중에도, 아무런 인사 없이 각자의 길로 헤어지는 와중에도 녀석의 경고 같은 것은 가볍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충분히 녀석을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남우현은 당황스럽고 또 당황스럽게 나를 궁지로 몰아갔다. 지금에 와서 이토록이나 녀석에게 겁을 먹어버린 것은, 아마 그동안은 내가 상대를 너무 쉽게 생각해왔던 탓이라고.
이상하게도 본능적으로ㅡ 녀석을 피하게만 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학생들이 들이닥치기 10분 전의 교실에서, 남우현이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을때에서야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도 똑같이 당해보라고. 잘은 모르겠지만, 남우현이 말했던 저만의 '해석'을 이미 천천히 진행중인 것을ㅡ 무의식적으로 깨달아버린 때에는 이미 그 과정을 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