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07
w.규닝
07. 돌멩이, 치사율.
남우현이 잠깐 내려 둔 이어폰에서 재생중인 노래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남우현은 온전히 음악을 끄지 않은 채 이어폰을 내렸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캡이 녀석의 어깨 언저리에서 달랑거렸다. 오늘은 수업 일찍 끝났네요. 남우현은 뒤적거리고 있던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던 나는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옆모습에 눈을 고정했다.
남우현은 읽고 있던 페이지 중간 즈음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가 싶더니 별안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레 놀라 얼굴을 뒤로 빼자 남우현은 웃었다. 아, 아까ㅡ
"칠판에 내가 써놓은 거 봤어요?"
남우현은 먼저 제가 했던 장난을 입 밖으로 꺼냈다. 갑작스레 녀석과 눈이 마주쳐 놀란 것도 잠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봤죠. 장님도 아니고.
"글씨 존나 못쓰던데요."
"원래 천재는 악필이에요. 그것보다 대답 해줘야죠."
남우현은 제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 장난에 대답까지 필요해? 녀석의 뻔뻔스러운 행동에 뜨악하며 입을 벌렸다. 남우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 안해봤어요?"
내 표정은 한참 더 경악스러워졌을거라 확신한다.
"네. 전혀. 그럴 필요성도 못 느끼고."
그에 헤실거리며 웃고 있던 남우현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남우현은 시계를 건드리고 있던 손을 거둬 내렸다. 물끄러미 내 눈을 바라보던 녀석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음악을 정지시켰다. 간간히 우리 둘 사이로 흘러나오던 미약한 소음이 뚝 끊어졌다. 남우현은 짐짓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그럼."
남우현은 왼손으로 옆 머리를 짚었다. 그 덕에 내 쪽에서 볼 수 있는 남우현의 얼굴은 완벽히 차단되었다. 남우현은 다시금 형광펜을 집어 든 모양이었다. 사각거리며 밑줄을 긋는 소리가 선연했다. 남우현은 다시 노래를 재생시켰다. 사무실 공기 속의 모든 소음에 벽을 친 남우현은 다 읽은 참고서의 종이를 소리내어 넘겼다.
그런 녀석의 옆 쪽으로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뵈는 노호혼이 놓여 있었다.
나를 놀릴때와는 반대로 노호혼의 고개는 못에 박힌 듯 고정되어있었다. 노란색 노호혼의 웃는 얼굴은 남우현을 향하고 있었지만 녀석은 답지 않게 참고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물론 생소한 광경이기는 했다. 내 앞에서는 언제가 됐든 나를 상대하기 바빴던 녀석은 거의 처음으로 내 앞에서 다른 것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할일없이 볼펜을 깔짝대다가 자리에서 일어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남쌤!"
별안간 파티션 뒷쪽에서 튀어나온 여학생 하나가 남우현이 꽂고 있던 이어폰을 잡아당기며 불렀다. 난데없는 인기척에 놀란 듯 어?하는 대답과 함께 남우현의 고개는 번쩍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내 고개도 그 쪽으로 향했다. 여학생은 남우현의 이어폰을 손에서 놓고 옆 쪽에 비치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냥요. 저녁시간인데 저녁 안 드세요? 여학생의 살가운 물음에 남우현은 조금 웃었다. 나는 됐어. 너는 먹었고? 남우현의 말에 여학생은 조금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저는 다이어트중이란 말예요. 이 시간에 뭐 먹으면 안돼요. 살 쪄서."
"니 나이 때에는 살 안 쪄. 막 먹어도 돼."
"쌤, 완전 엄마같은 소리 하지마요!"
여학생은 남우현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치면서 웃었다. 어른들은 무조건 그런식으로만 말한다며 질책하며 웃는 목소리가 간드러졌다. 얼핏 살펴본 바로는 그 아이 같았다. 프로필 사진 속의, 밖에서까지 따로 만난 적 있는 여학생. 얼굴은 잘 외우는 편이 아니라 긴가민가하며 시선을 옆으로 비키려 했을 때에는 이미 여학생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난 후였다. 아, 미미쌤은 저녁 드셨어요? 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학생은 애교가 묻어나도록 인상을 그었다.
"쌤도요? 우리학원 선생님들 단체로 단식하시는거예요?"
"니들때문에 단식한다, 니들 때문에. 너희가 공부를 하도 못해서."
남우현은 마음에도 없는 농담과 함께 여학생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아! 때리지 마요! 맞은 곳을 문지르며 울상을 지은 학생이 수차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저 이번에는 시험 잘 봤거든요. 수리도 2등급이나 올랐고, 사탐도 다 해서 세 개밖에 안 틀렸고. 그러면 남우현은 남우현다운 대답으로 응수했다. 이번 시험은 수리가 쉽게 나왔다느니, 남들도 너만큼은 다 맞아서 변별력이 없는 시험이었다느니. 두 사람의 투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화사하게 웃고 있었던 프로필 사진이 머릿속을 스쳤다. 필름이 터지는 것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은 사진과, 만나지 않겠다는 남우현의 말이 겹쳐 들려 아마 그 때부터 서서히 짜증이 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화를 낼 입장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단지, 손바닥 뒤집듯 모순적으로 행동하는 녀석의 태도가 싫어서. 그런 가식이 달갑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에 이렇게 열이 오르는 것도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주거니 받거니하는 좋은 분위기에서 먼저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표정은 풀지 않은 채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한동안 남우현과 눈을 맞추고 있던 여학생이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걸었다. 미미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자 여학생은 어설프게 웃었다.
"선생님은 원래 그렇게 말이 없으세요?"
"…응. 말주변이 없어서."
"아 그렇구나. 전 또 제가 싫으신 줄 알았어요."
여학생이 멋쩍게 옆머리를 매만졌다.
"선생님 웃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싫어하는 거 아냐."
"……."
"그냥 성격이 그래."
그 대목에서는, 은근히 고개를 뻣뻣이 고정해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남우현의 고개가 틀어졌다. 평소답지않게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은 빤히도 나를 쳐다봤다.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입을 꾹 다물고 말자 여학생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다시 웃었다.
"혹시나 하는 건데, 쌤 두분 안 친하세요? 동갑이시라는 말은 들은 것 같은데, 딱히 친해보이지는 않으셔서요."
소리에 반응하는 인형처럼, 남우현의 고개는 다시 여학생을 향해 돌아갔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내 대답을 대신해 남우현이 말을 이었다. 유지은, 그런 말 할 시간에 들어가서 공부나 더 해. 아마도 내가 대답을 회피할거라 생각해 멋대로 질문을 마무리지으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에이, 쌤은 참견 마요! 까칠한 응수로 남우현의 잔소리를 차단한 여학생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서 나올 답을 기다렸다. 어디에 한참 기대고 있었는지, 반듯하게 눌린 뒷통수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안 친해."
"……."
"딱 질색이야."
저런 성격. 마지막 말은 입 안으로 삼킨 채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몸을 수그리고 나와 남우현을 번갈아보던 여학생이 급하게 물었다. 어, 미미쌤. 어디 가요? 저녁 드시러 가세요? 영양가없는 질문에, 그래도 조금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모를 남우현의 초점 없는 눈은 테이블을 향해 있었다.
"응. 저녁 먹으러. 박 선생님이 저번에 밥 사주신다고 하셔서 같이 먹을까 하고."
"……."
"저녁 시간 다 가겠네. 남우현씨도 지은이랑 둘이 먹어요."
남우현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여학생을 뒤로하고 등을 돌렸다. 복도를 지나 현관으로 걸어가는 와중에도 고요한 학원에는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신발을 꺼내 주섬주섬 맞춰 신는 동안에야 여학생의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우현 쪽으로 더욱 바짝 붙어 선 여학생은 뭐라고 중얼거리며 말을 걸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미련없이 문을 열었다.
괜한 박 선생님 핑계를 대긴 했는데, 사실은 미리 해둔 연락같은 것은 없었다. 이미 멀리까지 퇴근하셨으려나. 한참을 문 앞에 못 박힌 듯 섰다가 휴대폰의 홀드 버튼을 길게 눌렀다. 최근 통화목록을 한참 내리자 보이는 박 선생님의 이름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꾹 눌렀다. 신호음은 길게도 갔다.
학원 안이나, 밖이나 고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계속되는 정적에 조금은 머쓱해져 코를 훌쩍였다. 그 덕에 휑해진 마음속에 헛바람이 들이찼다.
*
"성규씨, 안 먹어?"
네? 허공에 넋을 놓고 있다가, 예고없이 불리운 이름에 필요 이상으로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찌개를 뒤적이던 젓가락질을 멈춘 박 선생님이 의아한 눈치로 내 얼굴을 살폈다. 뭘 그렇게 놀라. 딱히 무언가 나쁜짓을 하다가 들킨 것도 아닌데 괜히 서둘러 젓가락을 집어 밥을 한 입 떠먹었다. 박 선생님이 내어준 앞접시를 받아드는 와중에도 뒤숭숭하게 들이찬 헛바람은 꺼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티를 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박 선생님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박 선생님이 내 얼굴 앞에 손을 두어번 저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밥이 잘 안 들어가?"
"아뇨. 그게 아니라 잠시 딴 생각 좀 하느라."
"얼른 들어요. 내가 사는거니 성규씨가 맛있게 먹어줘야 마음이 편하지."
박 선생님이 숟가락을 쥔 손으로 어서 먹으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에 서둘러 두번째로 급하게 밥을 밀어넣다가 목이 퍽퍽해져 물컵을 들었다. 박 선생님의 젓가락질이 뚝 멈추었다. 목이 막혀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와중에 곁눈질으로 본 박 선생님은 여전히 의아하게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안해. 그에 나도 조심스럽게 물컵을 내려놓자 박 선생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턱을 괴었다.
"근데 성규씨가 진짜로 나한테 밥을 사달라고 할 줄은 몰랐네."
"…연락하라면서요."
"아, 물론 돈 아깝다는 말은 아니었어. 그냥 신기하다는 뜻이지. 오히려 내가 사주겠다고 했어도 괜찮아요,하면서 튕길 줄 알았거든. 특히 퇴근 후에 성규씨가 먼저 연락한 건 처음 아닌가? 그래서 조금 놀랐다 이거야."
"혹시 제가 실례한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의외였다고요 의외."
박 선생님이 헛헛하게 웃었다.
"게다가 성규씨가 사달라는 거면 예를들어 양식이나 뭐, 그런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식 좋아하시고."
"……."
"새로운 면 많이 보여주시네요."
그 말에 이번에는 내 손이 멈추었다. 그것을 감지한 박 선생님은 다시 어서 들라는 듯이 내 손짓을 돋구었다. 불편하라고 한 말 아니예요. 멈추지 말고 들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식의 어색한 말들을 들으면서 편하게 젓가락질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저만 먹는 것 같아서. 박 선생님도 좀 드세요. 내 말에 박 선생님도 서둘러 숟가락을 들었다. 나야 뭐, 아까 간단하게 빵 같은 거 먹어서. 나는 것보다 성규씨랑 좀 친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밥 같은 건 아무래도 좋네요.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아부성이 다분한 말을 듣고 있자니 뒤숭숭하게 풀어졌던 마음이 다시금 붕붕 뜨는 것 같았다. 좋다고 하기도ㅡ그렇다고 싫다고 하기에도 뭔가 묘한 말. 누군가가 내게 살갑게 대할 때면 느껴지는 민망함이었다. 처음과는 다르게 깨작이며 젓가락질을 시작하자 박 선생님은 좋은 뜻이라는 말을 재차 강조했다. 성규씨가 아무래도 좀 딱딱했으니까,하는 말을 딱 자르며 끼어들었다. 박 선생님.
"박 선생님은 제가 어려운거에요, 불편한거에요?"
사실은 이렇게 공격적으로 물은 생각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물음인 터라 조금은 뜬금없었음을 인정한다. 박 선생님은 예? 하며 되묻는 듯 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걸 묻는거에요?"
"그냥, 저번에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요. 저에게 부탁하는 건 왠지 어렵겠다 싶으셨다고 하셨던 거."
"내가 그랬었나?"
박 선생님이 턱을 괴다가 흐음,하는 소리를 내었다.
"잘 생각은 안 나네. 근데 나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거든요, 어려운거랑 불편한거랑 뭐가 다른지. 바로 어제 남우현도 똑같은 걸 묻더라고. 그래서 생각을 좀 해봤었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요."
"네?"
"나는 잘 모르겠다고."
"아니, 그거 말고…. 앞에 뭐라셨어요? 남우현씨 얘기."
"아, 나 우현이랑 말 놓고 지내는 거 알죠? 근데 어제 갑자기 나한테 그러더라구요. 형, 혹시 김성규한테 뭐라고 했어? 불편하다고 했어? 하면서 별 이상한 질문으로 꼬치꼬치 캐묻는 거 있죠. 그래서 모르는 일이라고 막 대답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영 찜찜하긴 했어요. 내가 진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하고."
"……."
"내가 만약 진짜 그렇게 물은 적 있으면."
"……."
"담아두지 말고 그냥 흘려 들어요. 내가 가끔 아무 생각없이 말하곤 하니까. 아마 진심 아니었을거야."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투와 함께 끊겼던 식사를 다시 시작하는 박 선생님의 입에서 쩝쩝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젓가락 끝에 조금 들려있는 밥알들을 그대로 입 속으로 밀어넣으며 억지로 씹었다. 있다가 저녁 쯤에는 비가 올 거라며, 아마 이번 주 내내 장마가 또 시작될거라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얘기를 시작한 박 선생님의 말을 흘려 듣다가 생각했다. 나는 박 선생님의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묻고 싶었던 건 남우현 넌데. 녀석은 나를 어려운 걸로 정의했었지만 사실은 모르겠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녀석이 쉬운건지ㅡ 아니면 불편하지 않은건지.
불편한 생각과 함께, 불편한 사람과 한 식사라서 그런지 불편한 시간은 느리게도 흘러갔다. 저녁이 될 때쯤 시작된다던 비는 정확히 그 쯤 되는 시간에 폭우를 쏟아붓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어. 성규씨 우산 없지. 그에 고개를 끄덕이자 박 선생님은 나가자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학원 가까우니까 데려다주고 갈게. 멀쩡한 남자 둘이서 좁디 좁은 1인용 우산을 나눠쓴다는 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러마고 대답했다. 꼴사납게 쫄딱 젖어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게다가 이미 자습 시작 시간을 10분이나 넘겨버린 후였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어 머리만 젖지 않게끔 박 선생님에게 바싹 붙어 우산을 같이 했다.
이윽고 들어선 학원에서는 보기좋게 남우현과 맞부딪혔다.
"남우현. 오늘도 수고해라. 성규씨도요."
비맞은 우산을 탈탈 털며, 됐다는데도 굳이 학원 위까지 걸음을 같이 했던 박 선생님은 사무실에 앉아있다 머리를 빼꼼 내민 남우현에게 넉살좋게도 인사했다. 형. 퇴근했으면서. 그다지 반가운 티는 없어 뵈는 남우현의 목소리가 박 선생님을 맞았다. 나는 그냥 성규씨 데려다주러 온거야. 밖에 비 오는데 우산이 없대서. 그렇게 말하며 박 선생님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내일 봐요, 그럼. 남우현이 뭐라고 인삿말을 건네기도 전에 학원 문 밖으로 나간 박 선생님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어색한 사무실으로까지 번져 들렸다. 나는 남우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신발을 갈아 신었다. 느리게 슬리퍼를 끌어 사무실로 향했다. 남우현은 그 때까지도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있지 않았다. 민망하게도, 내가 복도를 걷는 모양새에 그대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탓에 내 동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남우현은 평소와 다르게 입도 달싹하지 않았다. 원래같으면 어디갔다왔어요 하는 물음부터 뭐 먹었어요 하는 물음까지ㅡ 궁금하면 제 내키는대로 무엇이든 물어봤을 남우현이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달랐다. 차라리 정적이 흐르는 강의실에 들어가 앉아 감독이나 시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교원 수첩을 집어들려고 했을 때였다. 다른 때는 우산, 잘만 가져오더니. 남우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겉옷 벗어요. 어깨 젖었어."
"……."
"우산 하나에 두 사람이 들어가니까 그렇잖아. 평소처럼 우산 좀 갖고 다녀요. 괜히 다른 사람 우산에 빌려 살지 말고."
남우현의 손에 들려 있던 스테이플러가 조금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 떨어졌다.
"나랑 같이 쓰기 싫어서 우산도 매일 들고다녔었잖아. 앞으로도 그렇게 해요. 나한테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하고도 같이 쓰지 마. 할 거면 뭐든지 공평하게 해요."
"내가 알아서 해요. 우산을 들고 다니든, 안 들고 다니든 전적으로 내 마음이라고."
"알아. 그건 김성규씨 마음이긴 한데."
"……."
"차별 받는 건 썩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우산 갖고 다녀."
녀석은 쉽지않다. 그 순간에는 그렇게 정의하기로 했다. 불과 삼십분 전 까지만 해도 나는 녀석이 쉬운건지ㅡ 그게 아니면 불편하지 않은 건지를 고민했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남우현은 나만큼이나 어려운 사람이었다. 뭐든지 쉽게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느 하나 쉬운 것 없이 어렵게 말해오고 있다. 차별. 녀석은 내게 차별이라고 일렀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딱히 남우현과 박 선생님 사이에 선을 그어 행동하려던 의도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대꾸를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저 녀석의 말은 무시하고 책장을 뒤적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아직도 조용한 남우현을 등 뒤로 하고 책장을 뒤적이다가 교원 수첩을 찾아 들었다.
"나 그렇게 어려운 말 싫어해요. 어쨌든 우산은 갖고 다닐 테니까,"
"……."
"차별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요."
내 말에 남우현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갖고 있던 스테이플러를 하릴없이 달깍였을 뿐. 나는 그 뒷통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컴퓨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남우현씨는 감독하러 안 들어가나. 학생들 다 기다리겠는데. 혼잣말 비슷한 내 잔소리에도 남우현은 스테이플러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컴퓨터 쪽으로 걸어가 pdf파일을 열고, 프린터를 조작하는 동안에도 남우현은 말이 없었다.
"할 일 없으면 이번 달 출석현황 좀 엑셀파일로 만들어줄래요?"
나 역시도 모니터로 눈을 고정한 채 감정없이 한 말이었다. 그냥 이 어색한 정적이 싫어서 쓸데없는 말이라도 해보자는 심산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해도 되는 일이었지만, 녀석과의 진지한 기류를 깨 보고자 괜히 먼저 말을 건 것이었다. 내 말에 남우현은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곧 싱거운 승낙이 떨어질 줄 알았던 내 예상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아뇨."
"……."
"미안한데 나도 엑셀은 딱 질색이라."
퇴근 때 봐요. 한동안을 꿈쩍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남우현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나는 부러 남우현이 사무실을 벗어날 때까지 딱딱하게 얼은 눈을 모니터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남우현의 발소리가 사무실 저편 코너를 돌고 나서야 나는 컴퓨터와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았다.
질색이라. 남우현은 내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외워뒀다가 돌려주었다. 질색이라고 말해오는 목소리는 먼젓번과 같이 숨 없이 굳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남우현이 앉았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학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만지작거렸을 스테이플러 주변에는 자잘한 철심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쓸데없이 허비된 스무개 남짓한 철심들이 몇 개는 마룻바닥으로, 몇 개는 고리가 채워져 장난스럽게 늘어져있었다. 그쪽으로부터 눈을 거둔 나는 녀석에게 부탁하려던 엑셀 창의 엑스표를 힘주어 눌렀다. 먼저 켰던 pdf창이 모니터 화면을 대신 채웠다. 그제서야 조금,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학원을 벗어나 박 선생님에게로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던 시점에서처럼.
*
그리고 그 이유는 오래가지 않아 밝혀졌다.
"뒤쪽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니들만 공부하는 거 아니잖아."
자습 감독에 들어오고 나서, 이유없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다가 짜증스럽게 말을 뱉었다. 그쳤던 장마가 다시 시작되어서 그런 탓인지 강의실은 전체적으로 부산스러웠다. 자습임에도 불구하고 저들끼리 소근거리는 소리가 잦아 그 쪽으로는 고개도 들지 않고 이마를 짚은 채 질책했다. 그에 학생들은 조금 조용해지는가 싶다가도 다시금 목소리를 키워갔다. 오늘따라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탓에 잔소리는 재차 거듭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빈 종이 귀퉁이를 새까맣게 덧칠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모르는 문제가 있다며 내 앞에 참고서를 드리운 여학생 하나 때문에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여학생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헤실거리는 웃음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책상 옆 쪽으로 몸을 숙이고 앉은 여학생은 여기, 하며 문제집을 짚었다. 의무적으로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나는 어렵다던 문제 대신 작게 쓰여진 글자를 마주했다.
쌤. 남쌤이랑 밥은 잘 드셨어요?♡ 장난쳐서 쏘리요.
무슨 밥. 나는 대답 대신 이게 뭐냐는 듯한 눈으로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동그란 두 눈을 깜빡이던 여학생은 그 말 밑에 다시 무언가를 추가해 적기 시작했다. 나는 부산스레 움직이는 펜 끝을 주시하다가 표정을 굳혔다.
남쌤이 칠판에 적어놓은 거 원래 「저녁으로 초밥 좋아해요?」였는데, 우리가 몰래 지워놓은거에요.
여학생은 아까 전처럼 배시시 웃으며 그 밑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하트를 그려넣었다.
이렇다할 리액션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나에게도 상황정리라는 것은 필요했기 때문에. 애초에 어려운 문제 같은 걸 물어볼 생각은 없었는지 그 말을 일러줌과 동시에 여학생은 자리로 돌아갔다. 드디어 조금은 수다를 줄이고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한 학생들 탓에 고요해진 강의실이 더욱 숨을 죄여왔다. 이윽고 오후수업 전후에, 유난히 저들끼리 낄낄대며 웃고있던 교실이 떠오르고, 뜬금없는 낙서가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왜요?'
'…….'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그 낙서를 본 직후ㅡ 거의 경멸스럽게 녀석을 노려보고 나서 돌려받았던 천진난만한 남우현의 반응과,
'칠판에 내가 써놓은 거 봤어요? 대답 해 줘야죠.'
저질스러운 장난에 대답까지 요하는 녀석이 이해가 가질 않아 잔뜩 굳혔던 내 표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아까처럼 또다시 이마를 짚었다.
'저녁 먹으러. 박 선생님이 저번에 밥 사주신다고 하셔서 같이 먹을까 하고.'
'…….'
'저녁시간 다 가겠네. 남우현씨도….'
…지은이랑 둘이 먹어요.
그리고 그 직후부터 시작된 이유모를 답답함은.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씩 그 이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답지않게 굳어있던 남우현의 표정 때문이었으리라. 아마 그것 때문에 나는 오늘 하루종일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마셔도 마셔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처럼 녀석은 나의 심기를 바싹바싹 태워오고 있었다. 불이 올랐던 도화선의 시발점을 찾아냈다. 비록 그 끝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오해에서 출발했다고 할지라도ㅡ결국에 모든 것의 원천은 남우현이었다. 녀석의 굳은 표정 하나하나가 걸림돌처럼 내 발에 걸리적거려 오늘은 하루종일 마음 한 켠이 무겁게도 눌러있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지만, 비단 오늘만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녀석을 알게 된 이래 몇일 전부터ㅡ 계속해서 나는 원치 않는 곳에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금 이토록이나 답답해져버린걸지도. 확실히 나는 필요 이상으로, 남우현에게 패를 던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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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나는 왜이렇게 게으른걸까요 그대들은 나처럼 살지 말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