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 글이 빼곡히 적힌 문서를 읽어 내려가던 지원이 문서에서 시선을 옮겼다. 손에 든 문서를 제 앞의 작은 상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재야.”
지원의 목소리에 그림자처럼 창가를 지키던 재가 지원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창문을 좀 열어보거라.”
“날이 찹니다.”
“괜찮다. 좀 갑갑하구나.”
지원의 말에 재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제 옆의 창문을 조심스레 양쪽으로 열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은은한 달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짙은 푸른 색의 하늘로 시선을 옮긴 지원이 잠깐동안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달은 어디에 떠있는 건지 지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수히 많은 별들이 하늘에 수를 놓은 듯 빛나고 있었다.
“…밤하늘이 이리도 밝구나.”
지원이 중얼거렸다.
시선을 옮겨 창밖으로 심어진 꽃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워 온전히 색을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꽃들은 달빛 아래서 저마다의 색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꽃을 둘러보던 지원의 시선이 하얀 꽃들 위에서 멈췄다.
하얀 꽃.
지원은 저도 모르게 공주를 떠올렸다.
땋은 머리 위로 하얀 꽃을 끼운 공주의 모습이 지원의 눈 앞을 스쳤다.
“나중에….”
이리 구경이나 한 번 오라 할까.
뒷말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 지원을 향해 재가 “예?” 하고 되물었다.
그런 재의 물음에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짧게 답한 지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조금 전 시선이 머물렀던 하얀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마마!”
“으음….”
“공주마마! 일어나셔요, 얼른요!”
리의 다급한 부름에 공주가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떴다. 반쯤 감긴 눈으로 리를 바라보자,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리가 공주의 팔을 잡고 살살 당기며 말했다.
“마마, 전하께서 이리로 오셨어요!”
“그래, 전하께서 이리… 뭐?”
리의 말에 공주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은 공주가 제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전하께서? 여기에? 어째서?”
“저도 잘 몰라요. 조금 전까지 공주마마를 부르셨는데….”
리의 말에 울상이 된 공주가 연신 제 머리를 쓸어내렸다.
급하게 리가 주는 저고리 안으로 팔을 넣는데, 밖에서 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느냐.”
목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란 듯 제 몸을 움찔하던 공주가 저고리의 앞고름을 리에게 맡기며 말했다.
“네에, 네!”
대충 정리가 된 옷을 매만지며 공주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길이가 긴 제 치마도 잡지 않은 채로 방 밖으로 발을 내딛던 공주의 발이 문틈에 걸렸다.
공주의 몸이 휘청이고, 잡을 곳이 없어 기울던 공주의 몸을 바로 옆에 서 있던 지원이 잡았다.
“으아!”
팔로 공주를 반쯤 안은 지원과 공주의 눈이 마주쳤다. 놀란 공주가 얼른 지원에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공주가 지원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보이진 않았지만 지원이 제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
무슨 말을 먼저 해야하나 고민하던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때, 지원이 피식 웃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내가 깨운 것이냐.”
“아니에요! 곧 일어날 생각이었습니다.”
“모습을 보아하니 자고 있었나 보구나.”
지원은 재미있다는 듯 공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지원의 말에 공주의 볼이 옅게 붉어졌다.
“송구하옵니다. 이리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게 되어서….”
그 말에 지원이 피실 웃으며 답했다.
“아니다. 괜찮다.”
“…….”
“이리 일찍 와서 미안하구나. 물을 것이 있어서 말이야.”
지원의 말에 공주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힐끔, 지원을 바라보았다.
늘 함께 외출할 때에 입었던 가벼운 차림과는 다른 의복이었다. 지원은 예禮국 특유의 문양이 그대로 새겨진 곤룡포를 걸친 채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을 말 없이 바라만 보던 지원이 물었다.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
색…? 갑자기 무슨 색이지?
영문을 알지 못 하는 공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예?” 하고 되묻자 지원이 다시 공주를 향해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색 말이다.”
“저는….”
대답을 하기 위해 공주가 숙였던 고개를 조심스레 들었다. 그리고 그 때, 저를 바라보고 있던 지원과 눈이 마주쳤다.
지원은 아무 말 없이 공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 손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공주의 행동에 지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공주의 얼굴 앞까지 도달한 지원의 손이 공주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레 걷어 올렸다.
다시 흘러내리지 않도록 뒤로 넘겨준 지원이 대답을 기다리는 듯 공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공주는 제 가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조금씩 빨라진 것을 느꼈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잠깐을 머뭇거린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전에 말씀드린 것 처럼 백색을 좋아합니다.”
“백색 말고, 그 다음으로는?”
“…다홍을 좋아합니다.”
뜸을 들이고 나온 공주의 대답에 지원의 시선이 공주에게서 떨어졌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공주는 여전히 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깐 다른 곳에 닿았던 지원의 시선이 다시 공주에게로 닿고, 눈이 마주치자 공주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 모습이 웃긴 건지 양쪽 입꼬리가 고르게 올라간 지원이 답했다.
“그래, 알았다.”
잠깐의 정적. 공주가 머뭇거리다가 지원을 향해 물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전하?”
공주의 물음에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멀리 다녀올 것 같구나.”
대답을 들은 공주가 다시 한 번 머뭇거렸다. 무언가를 물을까 말까 고민을 거듭하던 공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래… 걸리시나요?”
공주의 물음에 이번에는 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공주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것들이 궁금했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냥 묻고 싶었다.
혹 오래 나가 계신 것은 아닐까, 어딜 가시는 것일까, 무슨 연유로 가시는 것일까, 하는 것들이 묻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삼킨 공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잊고 있던 것이 생각이라도 난 듯, 지원이 “아.” 하는 소리를 뱉으며 제 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지원이 공주를 향해 내밀었다.
지원의 손에는 하얀 꽃이 달린 비녀가 쥐어져 있었다.
비녀의 한 쪽 끝, 하얀 꽃을 발견한 공주의 볼이 조금 더 붉어졌다.
공주의 손목을 잡은 지원이 그 팔을 제 쪽으로 당겨 손바닥이 위로 오도록 하였다. 펼쳐진 손바닥 위로 조심스레 비녀를 올린 지원이 말했다.
“…그냥 네게 주고 싶어서 가져왔다.”
지원의 말에 공주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비녀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지원의 손이 닿는 감촉에 공주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지원 또한 비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않느냐.”
지원의 중얼거림에 공주가 망설이다 물었다.
“무엇이 말이에요?”
“흰 꽃을 볼 때마다 네가 떠오르는 것 말이다.”
그 말에 비녀를 바라보고 있던 공주의 시선이 지원을 향했다.
지원 또한 비녀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옮겨 공주를 바라보았다.
다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지원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으며 말했다.
“…백화白化.”
“…….”
“이제 이리 부르면 되겠구나.”
말을 멈춘 지원이 잠깐동안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백화야.”
저를 응시하며 부르는 지원의 부드러운 음성에 공주는 제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 전하.”
작게 나온 공주의 대답에 지원이 웃었다.
* * *
리는 벌써 돌아가고 없었다. 제 방 안으로 쪼르르 걸음을 옮긴 공주가 방 안에 들어서자 마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드러난 공주의 귀 끝이 잔뜩 붉어졌다.
“어떡해….”
공주가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백화야.” 하고 저를 부르는 지원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겨우 저를 진정시킨 공주가 제 손에 쥐어진 비녀를 그제야 바라보았다. 다시 볽이 붉어진 공주가 괜히 비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네 생각이 나서….
조금 전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비녀를 만지작거린 공주가 앉은 몸을 일으켰다.
방 한 쪽에 올려둔 상자를 조심스레 꺼낸 공주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한 번도 신지 않은 꽃신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꽃신을 바라보던 공주가 상자 안으로 손을 넣었다. 비녀를 꽃신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공주가 흐뭇한 표정으로 꽃신과 비녀를 바라보았다.
자꾸만 저도 모르게 “흐.” 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 * *
지원이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입 안에 머금은 지원이 저도 모르게 보일 듯 말 듯한 인상을 썼다.
언제 마셔도 영 별로군.
지원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원의 표정을 읽은 건지 맞은 편에 앉은 사내가 지원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 봅니다.”
“예. 조금.”
지원의 답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우리 황煌국의 맛에 적응을 하는 것은, 황국 사람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다고들 하더군요.”
“아무래도 다들 제 나라의 맛에 익숙하고 길들여져서 그런가 봅니다.”
지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제 앞의 잔을 잡았다.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댄 남자가 차를 몇 모금 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지원의 잔과는 다르게 이미 찻잔이 거의 다 비워진 상태였다.
맞은 편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원이 제 찻잔을 잡았다.
마시지도 않을 찻잔 속의 물을 이리 저리 기울이던 지원이 나즈막히 말했다.
“여전히 연국의 공주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원의 말에 남자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의 눈에서 “어째서?” 하는 의문을 읽은 남자가 피실 웃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그리곤 아직 지원이 묻지 않은 질문에도 먼저 입을 열어 답했다.
“여러가지 이유에서지요.”
“…그게 무엇입니까.”
“저도 저지만, 아바마마 또한 연국의 공주를 아주 열심히 찾고 계십니다.”
“…….”
“아시잖습니까. 완전한 정복에 대한 꿈이 대단하신 거. 연국의 왕실을 완전히 파멸시키지 못 한 것이 아쉽다, 늘 그리 말씀하시니까….”
남자가 쓴 웃음을 지으며 제 앞의 잔을 다시 들었다. 조금 남은 차가 입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금방 찻잔은 바닥을 보이게 되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잔을 내려놓은 남자가 먼저 몸을 일으켜 섰다.
“하루 머물지 않으실 예정이라면, 지금 가셔야 늦지 않게 예국에 도착하실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원이 앉은 몸을 일으켰다.
마주보고 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원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으며 말했다.
“이만 가겠습니까.”
“이리 오셨는데 아바마마를 못 뵙고 가셔서 어떡합니까.”
“괜찮습니다.”
“다음 번에는 미리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침묵으로 답한 지원이 몸을 돌려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런 지원을 배웅하려는 듯 남자가 지원의 뒤를 따랐다.
궁의 입구를 향해 걷던 지원의 눈에 하얀 꽃이 들어왔다. 예국에서 붉은 꽃이 많고 흰 꽃이 적다면, 황국은 그와 반대였다. 흰 꽃이 많고 붉은 꽃이 적었다.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던 지원의 머릿속에 다시 공주가 떠올랐다. 가만히 시선을 두던 지원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다음 번에 올 때에는 황국의 흰 꽃들을 들여가야겠습니다.”
“아, 예국에서는 흰 꽃이 드물지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함께 걷던 남자가 지원의 시선을 따라 흰 꽃을 바라보며 답했다.
“저도 예국에 가게 된다면 붉은 꽃을 가득 들여와야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지원이 작게 웃었다. 흰 꽃을 향해 손을 뻗은 지원이 꽃잎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선물로 준다면 참으로 좋아할 것 같습니다.”
“꽃을 말입니까?”
“예. 꽃을 좋아하는 여인이라….”
지원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꽃을 좋아하는 여인?
…예국의 왕에게 여인이 있었나?
남자의 의문을 모른 채, 제가 무슨 말을 중얼거린 지도 모르는 듯 한참을 꽃잎을 쓸던 지원이 꽃에서 손을 거뒀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지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선 채로 하염없이 그 뒷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꽃… 그리고 여인.
남자의 옷이 작게 불어오는 바람에 움직였다.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의복 끝자락에는 황煌국 왕실에서만 볼 수 있는, 오직 왕족만이 새길 수 있는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검은색과 황색이 섞인 의복을 걸친 남자. 그는 황煌국의 세자, 구준회였다.
아무런 말 없이 생각에 빠져 있던 준회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준회가 입을 열었다.
“알아보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