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그랑-
요란한 소릴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린 유리병을 내려다봤다.
그 모습이 마치 지금의 우리 모습 같아서 한동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보니 짙은 회색으로 가득 찬 하늘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날 보며 눈물을 흘린 채 서 있었다.
하늘과 땅의 거리가 가까워져있는 모습이 마치 당장이라도 먹구름 속에서 커다란 손이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갈 것만 같았다.
울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그 모습에 서둘러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산산조각 난 유리조각을 들고 그대로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찢어내버렸다.
뚝, 뚝.
찢어진 상처를 참아내며 시계 위로 붉은 피를 흘려냈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그녀를 잃기 전으로 시간을 돌려놔주라고.
거짓말처럼 상황은 역으로 돌아갔다.
창문 밖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어두컴컴했던 하늘도 밝아지고, 깨진 유리병도 다시 붙여지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이 열려지며,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내 마지막 소원을 하늘이 들어주었나 보다. 그만큼 내 소원이 간절했었나 보다.
"탄소야.."
덜덜거리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왜 이제 왔어, 기다렸잖아.라고 말해줄 것 같았던 그녀가 차갑고 딱딱해진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릴 따라 흘러가던 시간이 다시 멈춰진 것 같았다.
누구냐고 물어오는 네 목소리에 겁이 났다.
"왜 그래 탄소야.."
"오지 마세요..!"
"나 몰라? 전정국이잖아!"
"몰라요, 그런 사람!"
뒷걸음질 치며 거짓이 아닌 정말 진심이라는 듯이 외치는 네 목소리와 표정에 생각했다.
네가 죽기 전으로 시간을 돌려놔 달라고 했더니 정말 그대로 되었지만, 너무 멀리 돌아와버렸구나.
지금 우리는 함께 가 아닌 너와 내가 된 남남이구나.
그 순간 우리의 지난 기억들이 생각났다.
드문드문 스쳐 지나가는 그 기억들이 다 사소하게 느껴졌는데, 이제 와보니 정작 중요한 기억들을 거의 놓쳐버린 듯싶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네 손은 정말 따뜻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맞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게 된 것일까.
그때 기억났다. 우리가 지금 왜 이렇게 된 것인지.
헤어지자고 말해오는 네 흔들리는 마음을 잡으려고 되지도 않는 집착을 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네 손을 더 꽉 잡고, 싫다고 외치는 네 몸을 안으며 전정국이라는 틀에 가둬버렸던 것 같았다.
그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면 네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 독한 사랑이 집착인 줄 모르고 네 목을 더 조여갔다.
알고 있었다. 네가 점점 더 망가져가는 모습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놓칠 수 없다는 미련함과, 다시 내 곁에 남아있겠다는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지금 너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을 만들어 낼 줄이야.
두려워졌다.
이젠 더 이상 환한 네 미소도, 따뜻한 네 품도.
지금 보이는 네 얼굴도 더 이상 볼 수가 없고 만질 수도 없다는 것 때문에.
싫다. 이젠 더 이상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날 기억 못 한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밖에.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그녀와 나는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
아직 이별의 낭떠러지 끝에 위태롭게 서있을 뿐.
나는 그 낭떠러지 끝에서 발을 돌렸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일 뿐.
다시 되돌아가서 다른 길로 걸어가면 그 끝에는 분명 너와 낙원이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시 길을 돌아간다. 그 먼 길을.
"김탄소."
"..."
"어디 갔다 왔어, 많이 피곤하지?"
"..."
"지금 자기 많이 힘들 테니까 나도 오늘은 일찍 집에 갈게."
내 말에 잠시 멍하니 내 얼굴을 마주하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마치 무언가가 기억이 난다는 듯이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언젠가는 이별이 내 앞에 무릎 꿇으며 사죄할 것이다.
시간은 다시 우리와 함께 천천히 흐를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올 거라고 믿으며 지금은 잠시 널 놓아줄 것이다.
날 향해 뛰던 네 심장도 멈추고, 생각도 멈췄겠지만,
고장 난 시계가 다시 움직이 듯, 네 마음도 다시 움직일 거라고 믿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지나쳐 집을 나왔다.
지금 우리는 마치 12시 30분의 시곗바늘처럼 서로 등을 지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모든 걸 버리려고 했던 너를 내가 다시 잡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서로 등을 보이는 이 시점이 우리 사이를 더 멀게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 그걸 깨달았을 때에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신은 날 위해서 시간을 되돌린 것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시간을 되돌린 듯싶었다.
미안하고 사랑해, 김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