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
26.
난 민윤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인정한다. 내가 그 애에 대해서 아는 건, 그저 나와 같은 버스를 탄다는 것과 그래서 나보다 학교에서 멀리 산다는 것, 전학을 왔다는 것, 민윤기라는 것, 글쎄. 더 없는 것 같다. 난 그 애의 생일도 모르고, 형제관계도 모르고, 심지어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좋아한다고 말한다는 게 약간 모순돼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좋다. 그 동그란 뒷통수랑, 하얀 피부랑, 내 후드집업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그 핏줄이 불거진 손, 그리고 무덤덤한 성격과... 농구. 모든 것이. 적어도 내가 아는 그 애의 모든 것이. 좋다.
27.
나는 내가 겪은 모든 것이 버스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비가 오고, 어두침침하고,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날 꺼내줄, 그리고 이 모든 걸 바꿔줄 버스 한 대를 기다리는 것이다. 난 학생이니까 교복을 입고 있고, 교복 와이셔츠는 젖어서 축축하다. 달라붙은 와이셔츠.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그건 내가 버스정류장을 옮겨서 그렇다. 전에는 정국이와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그러나 버스가 도무지 오지를 않아서 내가 전정국을 버리고 떠났을 뿐이다. 버스 정류장을 떠나서 다시 도착한 버스 정류장. 여전히 버스는 오지 않고. 나를 따라서 온 전정국. 그러나 또 여전히.
아마 영원히 안 올건가 봐. 전정국의 고개가 주억인다.
28.
"누나가 돌아올 줄 알았어."
"......"
"그래서 안 와서 찾아오려다가,"
"......"
"언제까지 안 오나 보려고 안 찾아온건데."
끝까지 안 와. 그래서 내가 온 거야.
이전까진 정국이에게 가고 싶어도 못 간거라고 생각했다. 안 간게 맞았다. 할 말이 없다. 입술을 꾹 깨물고 창밖만 보았다. 달리는 택시 너머로 부슬비가 떨어지고 있다. 멍청한 탁류들. 여기서 내가 뭐라 말하는 건 사치였다. 다 변명이고, 껍데기다. 그 지옥같은 곳에서 나보다 일 년은 더 산 저 애한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일 년정도 행복하게 살았다고 경각심을 늦춘 게 탈이었다. 행복하면 행복하지 않을 것을 더 대비해야하는데. 그게 열일곱 먹을 때까지 겨우 배운 한 가지였는데. 겨우 일 년 평범하게 살았다고. 민윤기를 만났다고. 혼자 좋아했으면 안 됐던 거였다. 다 잊으면 안 됐던 거였다. 결국 이렇게 다 깨져버릴 줄 알았다. 다시 과거가 잠식할 줄. 알았다.
몸이 성치 않은 전정국을 우선 집으로 데려가 씻게 하고 따뜻한 밥을 먹였다. 누나가 해준 밥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덤덤하게 뱉는데,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정국이의 어디까지 빗물에 젖은건지 모를 일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우리 아빠가 젊을 때 아빠와 연을 끊은 걸로 알고 있다. 아마 얼굴 안 본지 우리 나이보다 더 됐을 거다. 거의 키우지 않고 버린 자식. 그 자식의 자식들. 전정국의 엉망인 꼴을 보고 할머니는 잠시간만, 이라는 말을 붙이고 같이 사는 걸 허락해주셨다. 아무래도 우리도 둘은 힘들어. 수입 없어질 일이 코앞인데. 목소리는 본디 무게보다 수천배는 무거워져서 내 어깨를 꾸욱 짓눌렀다.
밤이었다. 전정국이 침대에서 자고 내가 땅바닥에 누웠다. 누나로서의 일말의 행동이었다. 깊은 밤. 전정국의 목소리는 여전히 빗물에 젖어있고,
누나. 이제 어디 가지 말아.
응.
나는 소리 없이 운다.
29.
정국이의 전학 수속을 마쳤다. 정국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담임 선생님 덕분에 일이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정국이가 늘 맞아서 학교에 왔었어요. 찾아가지를 못해서 전화통화로 얘기를 하는데, 선생님의 목소리가 연민에 차 있었다. 차라리 그 연민에 감사한다.
30.
아르바이트로 모아 뒀던 돈으로 정국이의 교복을 사고, 정국이가 옷이고 뭐고 다 아버지가 있는 곳에 두고 왔기 때문에 아주 잠시간 입을 옷과 속옷들도 샀다. 극히 적었다. 며칠 못 버틸 것이다. 여름이라서, 정국이는 땀도 많이 흘리는데. 답은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뿐이었다. 돌아가서 정국이의 짐을 다 가져와야만 한다. 알고 있다. 내가 해야 한다.
"월요일이면 나 누나 다니는 곳 가는 건가?"
"응."
"누나랑 고등학교 같이 다니는 거 맨날 상상했었는데."
웃는다. 아이처럼. 행복해보인다.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난 아이는 티끌없다.
정국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애인데, 애가 아닌 눈이 나를 본다. 열일곱이었다. 눈을 마주볼 수가 없어서 살짝 눈을 내렸다. 정국이의 눈은 거침없이, 스스럼없이, 무엇 하나 장애 없이 나를 향한다.
"정국아."
"어."
"조심해."
"......"
여기 생활에 익숙해지면 안 돼.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그렇게 오래 못 거둬 주실 거야."
일부러 얘기 안 꺼냈는데,
"엄마도 도망갔다며."
우린 지금 답이 없어. 문제는 태어났다는 것 그 자체야.
"오래 지속 못 돼. 잠시 행복해도, 그게 끝이야. 행복하면 더 불행이 찾아와. 잊으면 안 돼."
"......"
"조심해. 아니, 조심하자."
나에게 하는 말이다.
30.
분명 엊그저께, 오늘은 월요일이고, 저번주 금요일에 본 얼굴인데 지나치게 반가웠다. 버스 정류장. 일찍 못 일어나는 전정국을 적응시키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은 익숙하게도 민윤기가 우리 집 앞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온 것이다. 가벼운 하복 차림. 주머니의 찔러넣은 손마저 보고 있는데 그립다. 안녕! 반가워서 목소리가 크게 나갔다.
"... 안녕."
그런데 한 박자 늦은 민윤기의 인사는 의구심에 차 있었다. 눈길이 앉아있는 전정국을 한 번 향했다가, 다시 나를 본다. 말 없는 눈길이 묻는다. 누구야?
"누나, 누구야."
그리고 이어지는 전정국의 설익은 목소리. 민윤기에게 시선이 고정돼서 미처 못 보고 있던 정국이도 민윤기가 궁금했나보다.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반 친구. 그리고 민윤기를 향해 입을 뗐다. 내 친동생이야. 민윤기의 저 애매한 시선.
"사정이 있어서, 따로 살다가. 오늘 우리 학교로 전학 와."
"아."
짧은 설명을 들은 민윤기가 그 애매한 시선으로 애매하게 웃었다. 길쭉한 입술이 동그랗게 모이며 뱉어낸 작은 탄성, 아. 동생이랑 닮았네. 무미건조하지만 뜨뜻미지근하기도 한 저 목소리의 온도가 너무 좋다. 조금 크게 웃었다. 전정국과 닮았다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웃다가 딱 멈춰섰다. 행복에 익숙해지면 안 돼. 내가 한 말이 꼭 사이렌처럼, 머릿속에 울린다.
31.
"근데 너. 금요일에,"
평소처럼 살짝 떨어진 걸음으로 교실에 올라가던 때였다. 전정국은 자신의 반을 찾아 떠나고, 일찍 왔기 때문에 계단엔 민윤기와 나 둘 뿐이었다. 갑작스런 말에 고개를 확 쳐들었다. 어느새 계단 끝에 다다른 민윤기가 가만히 멈춰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왜 조퇴했어?"
완벽한 상하. 민윤기가 나를 내려보는 시선. 뭔진 모르겠지만 부끄러워져서 아아, 하며 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때, 그냥-. 손이 목뒤로 올라간다.
"아팠어."
"어디가."
"그냥......"
"......"
모르겠다. 아프긴 아팠다. 전정국이 찾아왔으니까. 근데 어디가 아팠는진 모르겠어.
"그냥, 다."
말은 뱉고 후회하는 것이다. 아차, 싶었다. 정적이 맴돈다. 민윤기의 시선이 계속 내 얼굴즈음에 머무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정적이었다. 민윤기가 말한다. 그래. 몸을 돌리고 계단을 올라간다. 터벅 터벅 소리가 차가웠다.
그래.
왜인진 모르겠지만,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게, 안심이 된 건지, 상처가 된 건지, 위로가 된 건지. 모르겠다.
32.
전정국은 살갑지 못한 성격을 가지고도 잘도 친구를 사귀었다. 잘난 얼굴 덕택일지도 모른다. 동생이랑 닮았네. 미지근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정말 닮았어? 물어볼 걸 그랬다. 당황한 모습도 꽤 귀여울지 모른다. 민윤기. 입 안에서 부드럽게 굴러가는 발음. 민윤기. 아, 민윤기.
민윤기. 생각하지 말자. 좋아해봤자 뭐해. 익숙해지지 말자. 걘 나와 다른 세상 사람이야. 비참하게 아무리 말해봐도 세 글자의 작은 음절은 계속 입 안에서 맴돈다.
33.
집 안의 공기가 나 혼자있을 때보다 미묘하게 차가워졌다. 원래 나한테도 말을 안 걸으셨던 할아버지는 거의 우리 둘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다. 가장 큰 문제는 전정국의 옷과 생필품을 찾으러 그 집에 다시 가야만 한다는 거였다. 학교에서도 멍하니 있는 시간이 잦아졌다. 전정국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 내가 가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 심란했다.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도 서러웠고, 그냥, 다 깨져버렸다고 느꼈다. 그랬다. 그당시의 나는.
민윤기가 늘 우리 집 앞 버스정류장에 있었다.
왜 여기까지 오냐고 어디 사냐고 물어볼 용기는 없고, 물어보면 도망가버릴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별말 안했다. 그래도 너무 좋았다. 매일매일 버스를 같이 기다리는 게 꿈만 같았다. 전정국은 뭔가 불만을 품은 눈으로 민윤기를 보고는 했지만. 상관 없었다. 전정국은 전에 없이 조금씩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언제 한 번 전정국이 늦잠을 자서 늦게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던 날. 우연의 일치처럼 늦게 나온건지 여직이 버스 정류장에 있던 민윤기. 늦어서 사람이 많았던 버스. 낮은 하늘. 버스 밖으로 스쳐지나가던 푸른색 나무들. 팔에 계속 스쳤던 민윤기의 팔. 향기. 하교를 같이 하지 못하는 게 제일 아쉬워. 멀리까지 나가는 빨간 버스. 어디를 가는 건지. 이유도 없이 점점 더 네가 좋아지는 이유는 뭘까.
34.
몇 개 못 산 속옷과 옷으로 전정국이 버티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다. 그러길 미루고 미루다 결국 예전 집으로 가서 다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다. 내일. 내일 갈 거다. 마음먹은 순간부터 아랫배도 아프고, 손도 떨리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갔다가 아빠를 만나면 어쩌지. 근데 아마 안 만날 거다. 아빠는 늘 밤 늦게야 집에 와서 깽판을 쳤으니까. 나는 내일 학교 끝나고 바로 갈 거라서 저녁 쯤에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아빠를 만날 일은 없다.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많이 아파? 안 나갈 거야?"
체육시간이었다. 생리통이라는 거짓을 두르고 책상에 엎어져있었다. 옆으로 온 혜진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응. 안 나갈래. 대답하며 몸을 좀 더 웅크리니 내 등에 닿아오는 작은 손짓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안정감. 안정감이 들 때면 불안하다.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더운 여름인데 은근히 선선한 감이 있었다. 좋다. 내일 가서 혹시나 아빠한테 맞을지도 모르니까 옷을 좀 두껍게 입으려했는데 잘됐다. 좋은 날씨 가지고 이런 생각밖에 못하는 게 비참하다. 자기동정이 제일 불쌍한 거랬는데. 날 불쌍해하는 내가 제일 불쌍하네.
"야."
덜컹, 놀랐다. 민윤기. 민윤기 목소리다. 뜬금없이. 고개를 확 쳐들었다.
이미 다들 교실을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그 와중에 앞문 옆에 서있는 민윤기가 나를 보고 있었다. 손에는 교실 열쇠를 쥐고 있다. 민윤기는 내가 벌떡 일어나서 조금 놀란 듯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조용히 물었다.
"안 나가?"
의아함.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살풋 흔들리는 민윤기의 검은 머리카락.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어졌다. 고개를 끄덕였다. 안 나가.
"왜?"
"아파."
"넌 참 자주 아프네."
별로 자주 아팠던 적 없어. 예전엔 늘 아팠지만. 대답할 말을 속으로 삼키고 살짝 웃었다. 민윤기가 다가온다. 차가운 금속성의 열쇠가 책상 위에 닿는다.
"열쇠 가지고 있어."
"응."
차가운 열쇠를 손에 쥐었다. 자물쇠가 같이 달려 있었다. 다시 엎드리려는데, 말을 끝내고도 민윤기가 내 앞에서 떠나지를 않는 거다. 안 나가나? 생각하며 눈을 올렸다가 정면으로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종소리 대신 밖에서 운동장에서 선생님께 인사를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기합받는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민윤기의 시선이 내게 내리 꽂히는 듯했다. 아아.
잠시 나를 내려보던 민윤기는 터벅터벅 힘 빠진 걸음으로 걸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움직이는대로 눈을 움직여 쳐다보니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왜 앉아? 묻지는 않았지만 내 눈빛이 충분히 묻고 있을 것이었다. 민윤기가 큰 손으로 내 뒷통수를 꾸욱 눌렀다. 예고 없는 스킨십(이랄 것도 없는 스킨십)에 깜짝 놀래서 힘을 주었다가 누르는대로 그냥 푹 엎드렸다.
"자."
"......"
"나 여기 있을 테니까."
안정감. 다정함.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들이 익숙해질만큼 자주 찾아온다.
민윤기는 어쩌면 사람 기분을 정말 잘 파악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심함이 이 아이를 대변해주는 것마냥 애들도 민윤기를 표현할 때 주로 그렇게 말하고는 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 사람을 세심하게 본다고. 그런 애라고. 민윤기에 대한 나의 무지함이 서럽다.
편히 잠들지 못했다.
35.
공교롭게도, 그 집을 가기 위해 타야하는 버스가 민윤기가 하교할 때 늘 타던 빨간버스였다. 하루종일 손을 떨고 불안해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혜진이가 쥐어준 사탕 몇 개를 들고 멍청하게 버스정류장에 앉아있었다. 민윤기는 늘 그랬던 것처럼 절대 앉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도로를 보고 있다. 저 뒷모습도 내가 민윤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전정국은 학교 상담실로 보냈다. 우리 맞고 살았다는 얘기는 하지 말고 대충 고민같은 거 말해. 속 풀릴 거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담이지만 아는 척 말했다. 전정국과 같이 하교를 하지 않아야 그 집에 혼자 갈 수 있었으니까, 학교에 좀 더 머물게 하려고. 전정국은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하러 갔다. 나 먼저 집에 가 있을게. 거짓말을 했다.
빨간버스가 왔다. 눈 앞이 어지러이 흩어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무섭다.
민윤기가 먼저 버스에 올랐다. 따라 올라서 버스카드를 찍고 버스를 둘러보는데, 고개를 들자 마자 민윤기가 바로 내 앞에 있어서 깜짝 놀랬다. 민윤기가 예의 그 낮고 정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눈만 굴리고 있자, 날 내려보던 눈빛을 거두고 하차문 바로 옆에 두자리가 있는 곳에 앉는다. 가서 옆에 앉아도 되나. 쳐다보고만 있었다. 민윤기가 내 눈을 맞추고 손으로 제 옆자리를 톡, 치기 전까지. 바로 주인이 부르는 개처럼 빠르게 걸음을 옮겨 옆자리에 앉았다. 팔뚝끼리 맞닿는다.
타기 전엔 그렇게 무서웠는데 민윤기랑 같이 타니까 아무 생각도 안 든다.
"너는 어디 가?"
정말 가볍게 물었지만 사실 수천 번도 더 묻고 싶었던 말이다. 근데 대답이 없다. 대답은 커녕 그저 쳐다만 본다. 민윤기의 눈빛은 언제나 정적이다.
"내가 먼저 물었는데."
목소리도. 정말. 나른하고, 정적이다.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아 나는, 나는 어디 가냐면... 몇 초동안 속으로 온갖 장소가 다 나왔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답인 것 같았다.
"전에 살던 집."
"왜?"
"가지고 올 게 있어서."
깨끗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애매한 표정이 계속 유지된다. 이제 너도 말해줘. 민윤기가 나를 향해있던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병원."
병원.
"이 버스 우리 동네 대학 병원 가거든."
"아....."
"거기 가."
"왜?"
"그냥."
나 역시 깨끗한 대답을 받은 건 아닌 것 같다. 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어서 민윤기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바람이 선선했다. 병원.
창 밖으로 진 노을이 참 예뻤다. 민윤기도. 병원이라니. 왜일까. 저번에 봤을 때 윤기가 안과에 갔던 것이 생각난다.
민윤기는 한참을 창 밖을 보고 있다가 좀 지나서야 다시 나를 보았다. 민윤기가 창 밖을 보는 내내 민윤기의 뒷통수만 쳐다보고 있었던 터라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민윤기가 비식 웃는다. 왜 웃지. 머릿속으로 민윤기가 웃는 이유의 경우의 수백 가지가 지나간다. 답은 없을 거였다. 시선을 돌린 곳에 민윤기가 한참을 보던 노을이 있었다. 아, 탄성을 뱉어냈다.
"노을 예쁘다."
내 목소리에 날 보던 민윤기가 다시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본다. 민윤기의 향이 짙게 끼쳐왔다. 문득 노을을 보는 민윤기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냥.
"별로."
목소리가 조금은 우울하게 느껴져서.
"나한텐 다 그저 그래."
왜? 저렇게 붉게, 노을 져 있는데.
대답하려 입을 뗀 순간 버스 안내음이 내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이번 정류소는, **대 병원, **대 병원입니다. 다음 정류소는-, 민윤기가 내려야 한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민윤기가 꾸욱 벨을 누른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도 따라 일어섰다. 민윤기가 자리를 빠져나가고 다시 앉았다. 가까이서 스친 곳들이 다 붉게 달아오른다.
"잘 가."
"응."
띡, 민윤기가 버스카드를 찍었다. 버스에서 민윤기가 사라질 생각을 하니 뭔가 다시 겁이 나기 시작한다. 민윤기의 동그란 뒷통수. 아무 생각도 안 들게 했는데. 다시금 무언가 나를 덮쳐온다. 역시 안정감 같은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떨리는 손을 꾹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주머니에 지갑을 넣으며 나를 본 민윤기가 또다시 애매한 표정을 했다.
"너-."
민윤기가 막 입을 뗐는데 버스가 병원에 도착해버렸다. 하차문이 열린다. 민윤기가 병원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한 칸 내려간다. 내가 웃으며 손을 막 흔들었다. 민윤기의 벌려졌던 입술이 굳게 다물리고, 자기도 대충 손을 흔든다. 고개를 돌리고 내려가는 걸음이 차분히, 느렸다.
버스에서 내려서자 마자 민윤기가 뒤돌아 나를 보았다. 이제 버스에 오롯이 나 혼자다. 그렇게 느껴진다. 아. 무섭다. 윤기야. 같이 가 줘. 말하고 싶다. 근데 난 쟤랑 하나도 안 친해. 우리 반에서 여자애중엔 제일 많이 대화해봤겠지만. 뭔가. 그냥. 나는. 다 겁이 나. 무섭다. 울 것 같아.
울고 싶어.
울고 있었다.
민윤기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처럼 울음이 터져서 그냥 엉엉 울었다. 손에 얼굴을 묻었다. 버스가 출발한다. 민윤기가 어떤 표정이고 뭘 하는지 모르겠다. 궁금하지도 않다.
나는 꼭 불행의 열차를 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