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16 (시작)
6월 11일, 새로운 마음, 새 뜻으로 손을 맞잡고 저희가 첫 걸음을 디디려 합니다. 바르고 올곧은 가정,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부디 참석하시어 많은 축하와 격려 부탁드립니다. 하얀 청첩장 안에 쓰여있는 문구를 한 번 더 읽곤 작게 미소를 지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지 않은, 제법 깔끔한 느낌의 하얀 청첩장이었다. 꽤나 간략한 내용으로 정리가 되어있는 두꺼운 종이엔 일시와 장소가 쓰여 있었고,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엔,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었다.
'김준면♡한주현'
보건선생님께서 벌써 결혼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선생님껜 죄송하지만 애인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꽤나 뜻밖인 결혼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건선생님과 그리 친했던 게 아니었어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그와 꽤나 어울려 지내던 오세훈은 청첩장을 받은 날부터 방방 뛰며 옷을 사러 가곤 했다. 결혼식은 이번 주 토요일 오후 다섯 시였다.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다녀온 결혼식은 아마 3년 전 사촌언니의 결혼식이었을 것이다. 제법 오랜만인 결혼식에, 김종인과 함께 간다는 것이 마냥 설레기만 했다.
'야, 나 뭐 입을까? 솔직히 정장을 입으면… 다들 내가 신랑인 줄 알겠지?'
'신랑 신부가 확 부각되게 겁나 평범하게 입고 갈까? 뭐, 평범하게 입어도 평범해 보여야 말이지….'
자신감을 가득 실어 거만하게 말을 건네오던 오세훈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하여간 오세훈은 자신감 빼면 시체인 놈인 듯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긴 하지만….
청첩장을 다시 봉투 속에 넣어 첫 번째 서랍 속에 쏘옥 집어넣곤 가방을 챙겨들었다.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딱 지금 이 시간에 나가야 했다. 하루가 지나면 지날수록 날씨는 꾸준히 더워지기 바빴고, 더위로 인해 온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7,8월로 접어들면 이것도 더욱 심해질 텐데 말이지-. 마음속으로 작은 한탄을 내뱉곤 운동화를 신었다. 그리곤 작게 하품을 하며 현관 문을 활짝 열어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
아무 생각없이 현관 문을 닫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쯤, 문의 바깥 손잡이에 걸려있는 낯선 우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듯 보이는, 모양이 제법 익숙한 새 우산이었다. 예쁜 벚꽃 무늬가 가득 그려져 있는 분홍색 우산-. 언젠가 내가 SNS에서 좋아요 버튼을 누른 적이 있는 그 우산이었다. 우산의 손잡이 부분엔 작은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었다.
- 오늘 비 온대. 우산 꼭 챙겨. -
글씨가 지렁이마냥 삐뚤빼뚤한 걸 보니, 분명 김종인일 듯했다. 학교 가기 전에 몰래 들러 우산을 놓고 갔을 줄이야…. 전혀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버스 안에서 고맙다는 장문의 문자 메시지라도 작성해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작은 포스트잇을 두 번 접어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오늘 비가 올 거라는 말은 없었지만, 날은 제법 흐렸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한 아슬아슬한 날씨였다. 먹구름이 잔뜩 꼈을 뿐더러 습도 또한 높은…. 짜증지수가 하늘을 찌를 듯한 날씨였다. 한숨을 길게 내쉬곤 우산을 꼬옥 챙겨든 채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버스 안의 공기는 꽤나 텁텁했다. 기사 아저씨께선 에어컨이 고장났다며 승객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멘트를 건네오셨고, 어쩔 수 없이 끈적끈적한 상태로 학교까지 향해야 했다. 오늘은 웬 일인지 승객들도 많아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없었고, 그저 버스 손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대략 몇십 분을 서서 가야 했다. 정류장에 멈춰설 때마다 배로 증가하던 승객 탓에 이리저리 낑기고 낑겨 하마터면 우산을 놓칠 뻔도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든 학교엔 도착을 했고,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찜통 같던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계획했던 대로라면 에어컨 바람이 빵빵한 버스 안에서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며 장문의 메시지를 작성해 김종인에게 보내고 답장까지 받았어야 하는 건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상관은 없었다. 고마움은 이따 전화로 전해도 충분하니까-.
첫 수업이 진행될 강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기가 조금은 어색했지만, 작게 심호흡을 하곤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에 있던 여러 시선들이 내게 꽂혀왔다. 가장 앞 자리에 앉아있는 여자 선배에게 꾸벅 인사를 하자,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 준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지만 꽤나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친화력 만큼은 최고인 선배였다. 그녀의 뒷 자리로 걸음을 옮기곤 가방을 내려놓았다. 내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몸을 돌려 내게 시선을 옮겨온 그녀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다시금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배! 그거 들었어?"
"네? 뭐요?"
"지금 이 수업 있잖아."
"아, 네. 왜요?"
"친구가 말해줬는데, 후배랑 도경수 선배가 이 수업 성적이 제일 높다네-."
"… 에이, 설마요. 저 이 수업 중간고사도 잘 못 봤는데요…."
"어쨌든 그렇대. 워낙 까다롭기로 소문난 과목이잖아. 아예 포기하고 재수강 신청하려는 학생들이 은근 많나 봐."
"아…."
"그 선배도 공부 꽤 열심히 하잖아. 내 생각에, 아마 과탑은 둘이야. 딱 정해졌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해오는 그녀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날 바라보며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녀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좋겠다, 후배. 난 재수강 삘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덧붙이는 그녀에게 연신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곤 슬쩍 강의실 안을 둘러 보았다. 그는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아님, 지금 흡연실인가-. 도경수 선배에 대한 얕은 상상을 하며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고 있을 때쯤, 강의실 문이 열리며 그가 모습을 비추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를 생각하자 바로 눈앞에 그의 모습이 보여와 정말이지 신기했다. 검정색을 좋아하는 듯 보이는 그는 오늘도 역시 검정 옷이었다. 검정 반팔 티셔츠와 검정 야구모자. 바지와 신발까지 검정색이었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까맸을 텐데-.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걸음을 옮겨오는 그에게 작게 인사말을 건넸다. 모자의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엔 역시 아무런 표정도 걸려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건넨 인사말을 들은 건지,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나와 제법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 며칠간 잊고 있던 문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오늘, 과제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며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 카페에서 잠깐 보자던-. 그저 그의 모습을 응시하며 그가 보내왔던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되새겼다. 끝나고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겠다던 김종인과 길이 엇갈리면 큰일인데….
[김조닝.. 나 오늘 선배랑 회의할 게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은 채 한 글자 한 글자 메시지를 입력해 김종인에게 전송을 했다. 어쩌면 오늘은 얼굴을 아예 못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김종인도 요새 과제다 뭐다 학교에서 요구해오는 것이 많다며 피곤해 죽겠다고 했으니…. 얼른 방학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다시금 강의실 문이 열리며 교수님이 안으로 발을 들이셨다.
"좋은 아침이네요, 여러분."
식상한 인사말로 정적을 깨신 교수님께서 하나둘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조금의 틈도 없이 수업은 시작이 되었다.
*
오늘은 좀 안 조나, 싶었지만 수업이 끝나기까지 고작 20분 정도만을 남겨놓은 채 또 꾸벅꾸벅 졸고야 말았다. 오늘 역시, 다른 학생들이 의자를 끄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서서히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어째 가면 갈수록 잠이 많은 김종인을 닮아가는 것도 같았다. 매번 잠이 많다며 녀석에게 잔소리를 해대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서둘러 짐을 챙기곤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집어넣었다. 어느새 강의실엔 서너 명의 학생들밖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 강의실을 나서며 휴대폰을 꺼내 홀드를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김종인에게선 문자 메시지가 몇 개 도착해 있었다.
[언제쯤 끝나는데? 많이 늦어?]
[카톡 확인해. 커피 기프트콘 두 개 보내놨어.]
[수업 중이겠지.. 수업 끝나는 대로 연락해.]
[아직도 수업? ㅠㅠ]
김종인의 심경 변화가 뚜렷이 엿보이는 문자 메시지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내 입가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김종인이 우는 이모티콘을 사용하다니. 이모티콘의 '이'자도 모를 만큼 한글과 숫자, 여러 문장부호가 아닌 다른 기호는 아예 사용하지를 않던 녀석의 손가락에서 저렇게도 귀여운 이모티콘이 하나 완성돼 나오다니…. 정말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겨우 우는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왔을 뿐임에도 귀여움이 물씬 묻어났다. 도대체 그런 잘생긴 얼굴에 귀엽기까지 하면 어쩌자는 걸까, 싶었다. 본인은 제가 귀엽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게 더욱 귀엽게 느껴졌다.
"……."
기프트콘 두 개를 보냈다는 김종인의 문자 메시지를 읽곤 바로 카카오톡으로 들어가 확인을 해보았다. 내 몫 뿐만이 아닌 선배의 몫까지 챙겨줬다는 사실과, 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먹을 수 있도록 일부러 그 카페의 기프트콘을 보내왔다는 사실에서 녀석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내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라떼로 맞춰 상품을 구입한 녀석에게 은근한 고마움이 느껴졌다. 하여간 알게 모르게 섬세함을 지닌 녀석이라니까-. 마음속에 두둥실 피어오른 설렘과 고마움을 한가득 느끼며 김종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쯤 아마 점심을 먹고 있겠지. 이미 다 먹었거나-.
- 여보세요.
"김종인…."
- 어, 수업 끝났어?
"응, 끝났어. 근데 끝난지도 모르고 졸고 있었어…."
- 어제 늦게 잤냐. 아닌데. 너 나보다 일찍 잤잖아.
"… 근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졸고 있더라."
- 자랑이다.
"… 점심 먹었어?"
- 먹고 있어.
"아, 진짜? 그럼 일단 끊고 이따 다시 걸까?"
- 아니, 거의 다 먹었어.
"누구랑 먹었어? 밥 먹었지? 빵이나 컵라면 말고?"
- 밥 먹었지. 동기 한 명이랑 선배 한 명이랑 같이.
김종인과의 전화통화에 집중을 하며 학생 식당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벌써 도착해버린 장소엔 제법 많은 학생들이 줄을 서 학식을 받고 있었다. 오늘 메뉴는 부대찌갠가….
- 끝나면 연락해. 선배랑 할 거 있어서 좀 늦는다며. 늦으면 더 데리러 가야지.
"아마 그렇게 늦진 않을 거야. 오늘은 안 와도 돼. 피곤한데 어떻게 데리러 와…."
- 안 피곤해. 맞다, 나 밥 먹고 바로 집 가. 뒷 수업 교수님이 사정이 생겼다 하셔서 갑자기 휴강됐어.
"뭐야, 진짜? 짱이다. 김종인 좋아서 방방 뛰겠네."
- 대신 수요일에 보강해. 공강인데 학교 나가야 돼.
"……."
짜증이 잔뜩 섞인 것만 같은 김종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리곤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 식판을 집어들었다. 기프트콘 보내준 거 고마워. 잘 먹을게. 선배도 분명 좋아하실 거야. 환히 미소를 지으며 녀석에게 고마움이 듬뿍 담긴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런 내 말에 살풋 웃음을 짓던 녀석이, 밥 먹고 다시 연락을 하라며 이내 끝인사를 건네왔다. 같은 공간에 녀석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휴대폰에 대고 알았다는 대답을 건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얼굴이 더욱 보고 싶었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었으려나. 오늘은 앞머리를 올렸을까, 내렸을까. 신발은 어떤 신발을 신었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궁금한 것 투성이였다. 목소리를 들으면 더 보고 싶고, 네 번째 손가락에 껴진 커플링을 바라보면 더더욱 보고 싶고…. 자주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떨어져 있기만 하면 자꾸만 김종인이 생각나고 보고 싶었다.
어느새 맛있는 학식으로 가득 찬 식판을 내려다보며 황급히 걸음을 옮겨 빈 자리를 훑기 시작했다. 다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떡하니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 건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자리가 많이 남지 않아 낯선 사람과 마주보며 밥을 먹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불만을 표하며 다시 한 번 식당 안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쪽엔 아예 모르는 학생들, 저쪽도 아예 모르는 학생들…. 그냥 창가 쪽 자리에 외롭게 혼자 앉아 식어가는 부대찌개에 밥이나 말아 먹을까- 하는 생각이 치밀 무렵, 익숙한 얼굴 하나가 시야에 박혀왔다. 제법 구석진 자리에 혼자 앉아 젓가락으로 밥을 떠먹고 있는 남자-. 도경수 선배였다. 정갈한 자세로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하얀 쌀밥을 오물거리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려던 그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곤 슬쩍 고개를 들어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그런 그에게 고개를 숙여 작게 인사말을 건네곤 조심스레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오늘은… 부대찌개네요."
조용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아무렇지 않은 척 식상한 멘트를 꺼내놓았다. 아까 오전 수업을 들을 때의 모습과 같이, 그는 까만 야구모자를 푸욱 눌러 쓴 모습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좀 없애보고자 건넨 말이었지만, 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밥을 먹기만 하는 그의 반응 탓에 어색함이 더욱 가중되고야 말았다. 원체 말과 표정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도경수라는 사람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내 입장이었다면 분명 엄청난 뻘쭘함을 느꼈을 듯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작게 헛기침을 내뱉곤 큰 맘 먹고 다시금 입을 열어 말을 건넸다.
"이따 카페에서 할 과제 얘기 말인데요…. 교양수업 과제 말씀하시는 거죠? 하긴, 선배랑 저랑 같이 듣는 수업 중 과제를 내주신 수업은 교양수업 뿐이ㄴ…"
"과제?"
"네. 선배도 뒷 수업 1시에 시작해요? 수업 끝나고 5시까지 카페로 가면 되죠?"
"무슨 카페?"
"네?"
"……."
"선배가 오늘… 과제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고 잠깐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나자 하셨잖아요…."
"내가?"
마치 처음 듣는 소리라도 되는 양 그가 내게 되물어왔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내비치며 일정한 간격으로 눈을 꿈뻑이기만 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약속을 잊어버린 건가. 내가 꿈을 꾼 건 분명 아닌데. 그가 술김에 문자를 잘못 보낸 건 아니겠지. 어지럽게 뒤엉키기 시작하는 생각들을 일체 무시하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며칠 전 그에게 왔던 문자 메시지를 화면에 띄워놓았다. 그리곤 조심스레 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묵묵히 문자 메시지를 읽어내리던 그가 작게 미간을 좁히며 내 눈동자로 시선을 옮겨왔다.
"나, 이런 문자 보낸 적 없는데."
딱딱한 어투로 말을 건네온 그가 곧이어 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목록을 스윽- 훑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내 내게 휴대폰을 내밀어 보인다. 이상하게도, 그의 휴대폰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메시지 화면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그럼 지난 금요일, 나와 짧게나마 연락을 나눴던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그러한 문자를 보내온 사람은 물론 다른 사람일 듯했다. 누구지, 누구. 생각의 범위를 넓혀나갈수록 의미 모를 공포감과 불안감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까지-. 그리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남자친구가 매일 데리러 오지? 학교 끝나면."
"네? 아, 그렇… 죠."
아무렇지 않게 건네오는 그의 한 마디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진,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말에 어색히 대답을 하곤 젓가락으로 밥을 떴다. 벌써 다 먹은 듯 보이는 그의 식판은 제법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왠지 입맛이 싸악 사라졌다. 아직 반도 넘게 남은 밥과 국, 반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 선배…."
"……."
"… 박찬열이라는 사람 말인데요."
"……."
"선배랑 친구… 잖아요. 그 분이, 저 고3 때 과외를 해주셨거든요."
"알아."
"……."
"찬열이가 네 얘기 많이 해, 나한테."
그동안 마음속으로 꽁꽁 숨기고만 있던 말을 어렵사리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나 뜻밖이었다. 훤히 드러난 팔에 다시금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박찬열이 말하던 그 여자애가 너였다는 건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
"……."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놈이야."
"……."
"가끔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해서 나까지 당황하게 만들 때도 꽤 많아."
"……."
"이미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감정이 부족한 애야. 자기가 하는 행동이 잘못된 거라는 걸 아예 몰라."
"……."
"SNS에 네 사진 올려놓지 마. 그거 다 캡쳐해, 박찬열이."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자니 온갖 불안감과 두려움이 엄습해오기 시작하는 것도 같았다. 하는 SNS라곤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이 다인데…. 그걸 박찬열이 전부 엿보고 있었다 생각하니 정말이지 소름이 돋았다. 엿보는 것만이 아닌 캡쳐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초조함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날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잔반 처리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있기가 두려워졌다. 또다시.
*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놈이야.'
'가끔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해서 나까지 당황하게 만들 때도 꽤 많아.'
'이미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감정이 부족한 애야. 자기가 하는 행동이 잘못된 거라는 걸 아예 몰라.'
'SNS에 네 사진 올려놓지 마. 그거 다 캡쳐해, 박찬열이.'
자꾸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뒷 수업은 어떻게 들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내가 듣고 있는 게 교수님의 말씀인지, 도경수의 목소린지 파악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이미 저들끼리 얽히고 얽혀 엉망이 되어버린 몇 가지의 생각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혀왔다. 밥 먹고 다시 연락을 하라던 김종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학교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이 났다.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버스 정류장을 향해 디디는 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5시에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나자던 도경수 선배와의 약속은 원래 없던 것이나 다름 없으니, 카페로 향할 이유는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마저 무섭고 불안했다. 가까이 위치한 카페를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랬다. 왠지 저 카페 안에….
김종인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 부탁을 할까 생각했지만 곧장 마음을 접었다. 덥고 습한 오늘은, 그저 집 앞 편의점을 갔다 와도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날씨니 말이다. 심지어,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벚꽃 우산을 펼칠 때가 된 건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우산을 챙겨줘서 고맙다는 말을 까먹고 김종인에게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여간, 덤벙대는 데엔 내가 1등인 듯했다.
*
꽤나 빨리 도착한 정류장에, 버스에서 내려 발을 내디뎠다. 그리곤, 제법 거세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황급히 우산을 펼쳤다.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새 우산엔 하나둘 빗방울이 내려앉았다. 굴곡진 우산의 투명한 면을 따라 도로록 흘러내리던 물방울은 천천히 길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옷이 젖을 세라 서둘러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학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약하던 빗줄기가 어느새 이렇게 거세진 건가, 싶었다. 얼른 집에 가서 김종인에게 연락을 해야지,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몇 분을 걷자 집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고, 거의 뛰다시피 해 집 방향으로 향한 뒤 우산을 접었다. 얼마 안 썼음에도 불구하고 우산엔 물기가 가득했다. 우산을 대충 두어 번 털곤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몸과 마음이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얼른 씻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뗐다.
"……."
익숙한 손길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자 손을 뻗었을 때, 문의 손잡이에 걸려있는 쇼핑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신 없는 누군가가 백화점에서 룰루랄라 물건을 사놓고 여기다 걸어놓고 간 거라기엔 말이 안 됐고, 누군가 나를 위해 선물로 사놓고 간 거라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어색한 손길로 쇼핑백을 들어 내용물을 살펴 보았다. 안엔 하얀 블라우스와 분홍색 스커트, 제법 비싸 보이는 귀걸이 세트가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누가 쇼핑을 해놓고 우리집 현관 문에 잘못…
생각을 정리하며 마음속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을 무렵,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집어들어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화면에 띄웠다.
[갑자기 비 와. 우산 챙겼어? 아직 선배랑 같이 있냐.]
김종인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제가 아침에 벚꽃 우산을 챙겨주고 갔다는 사실을 망각한 건지, 녀석은 의아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저 묵묵히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두어 번 더 읽어보곤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리곤 쇼핑백 속에 담긴 옷들을 꺼내 보고자 봉투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손엔 제법 빳빳한 포스트잇 한 장이 잡혔다. 아무 의심없이 포스트잇을 꺼내들어 몇 줄 적힌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우산에 붙어있던 포스트잇과 같은 포스트잇이었다.
-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곧 결혼식 간다며. 입고 갔음 좋겠다. -
메시지를 읽음과 동시에 다시금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리곤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던 포스트잇을 꺼내 펼쳐 보았다. 분명 같은 포스트잇, 같은 글씨체였다. 김종인이 챙겨주고 간 거라 생각했던 우산이 왠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럼 도대체 누가….
"아, 깜짝…! 죄, 죄송합니다…."
손에 들린 두 장의 포스트잇을 매만지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런 날 보며 고개를 갸웃하곤 에헴- 기침을 내뱉던 위층 아주머니께선 이내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오르셨다. 왠지 모르게 괜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어서였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곤 서둘러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곤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풀던 문학 문제집을 찾기 위해 책꽂이를 살폈다. 그러나 그걸 지금까지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몽땅 갖다 버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빈 틈없이 빽빽하게 책이 꽂혀있는 책꽂이를 다시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제법 얇은 프린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외를 하던 시절, 그가 여러 고사성어들을 알아보기 쉽게 정리해준 프린트물이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버리지 않고 보관해둔 건데,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곤 프린트를 넘겨가며 그의 흔적을 찾았다.
"……."
프린트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그의 글씨체로 제법 긴 문장이 하나 쓰여 있었다. 수능을 잘 보라는, 수능 시험에서 대박을 치자는 문장이었다. 당시의 난 그 문장 하나에 제법 잔잔한 감동을 받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이렇게 뒤바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싶었다. 어렵사리 발견해낸 그의 글씨체와, 포스트잇 두 장에 적힌 글씨체를 비교해 보았다. 비읍을 둥글게 쓰는 것 하며, 리을을 흘려 쓰는 것이… 서로 일치했다. 박찬열이었다. 제발 아니길 바랐건만, 결국 반전은 없었다. 우산과 옷, 포스트잇…. 범인은 박찬열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놈이야.'
'가끔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해서 나까지 당황하게 만들 때도 꽤 많아.'
'이미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감정이 부족한 애야. 자기가 하는 행동이 잘못된 거라는 걸 아예 몰라.'
'SNS에 네 사진 올려놓지 마. 그거 다 캡쳐해, 박찬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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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랜만인 것 같아요.. 사실 금요일에 오려 했다가 못 오고, 토요일에 오려 했다가 또 못 오고.. 결국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와버렸네요. 저를 매우 치세요..! (방어막) 예.. 맞아요.. 그 문자는 경수가 보낸 게 아니라, 찬열이가 경수 폰으로 보낸 겁니다. 우산도, 옷도.. 다 찬열이가 준 거예요. 다들 오해 없으시겠됴? ㅎㅎ
암호닉은 다음 주 수요일, 신청이 끝나고 정리가 되는 대로 목록을 올리도록 할게요 :) 다들 주말 마무리 잘 하시고, 저녁 맛있게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