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18 (불청객)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웬 동요를 흥얼거리기 시작하던 김종인이 실실 웃어보였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오세훈은 아예 주저앉아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며 힘겹게 말을 꺼내던 녀석은 이내 너무 웃어 배가 아픈 듯 제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김종인은 제가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넌 먼저 들어가라는 현명한 방도를 내놓던 오세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굳이 같이 가겠다 고집을 부리는 김종인 탓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함께 향해야 했다. 아예 우리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생각인 듯, 김종인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잔뜩 취해 몸이 늘어진 녀석을 부축하며 걷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나마 오세훈이 옆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한 김종인을 대하는 오세훈의 태도는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김종인이 취했다는 사실 하나만을 인지한 채 자연스레 욕을 내뱉기도 했고, 동요를 불러 보라며 자꾸만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독재자라도 된 양 이것저것을 시키기만 하던 오세훈은 마치 객기를 부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정말 불쌍한 건, 김종인은 녀석이 시키는 대로 모든 걸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귀여운 꼬마가 닭장에 가서 암탉을 잡으려다 놓쳤다네~"
"야, 다른 노래."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존나 재미없음."
재미없다면서 함박 웃음을 짓고있는 건 무슨 경우인지….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녀석이 은근한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취한 김종인이 재미난 놀잇감이라도 되는 양 오세훈은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흘기며 다시금 힘겹게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코앞이 집이었지만, 왠지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야."
"응?"
"진짜 너희 집에서 재워도 돼?"
"그럼 어떡해. 안 가겠다는데…."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오세훈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집의 형태가 보였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계단을 올랐다. 김종인을 부축한 채 오르는 계단이란 정말이지 힘들었다. 고작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찼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런 날 흘끗 보던 오세훈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이내 김종인을 부축하고 있던 내 손을 떼어낸 뒤 혼자 녀석을 부축해 힘껏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살짝 뻐근한 팔을 몇 번 주무르곤 오세훈을 뒤따라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어? 야, 이거 뭐냐. 뭔 포스트잇이 여기 이렇ㄱ… 아, 왜 가져가."
의미 모를 말을 내뱉으며 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던 오세훈의 손엔 작은 포스트잇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 포스트잇에 적힌 문구를 읽어내기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에, 황급히 손을 뻗어 얇은 종잇조각을 빼앗았다. 그런 날 의아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오세훈은 이내 헛웃음을 내뱉었다.
"뭔데? 같이 좀 알자."
"… 아니야. 버릴 거야, 어차피."
애써 포스트잇을 구기곤 조그마한 핸드백 속에 쏘옥 집어 넣었다. 그런 내 행동이 여간 이상한 게 아닌지, 오세훈은 자꾸만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녀석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김종인이었다면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한 채 그게 뭐냐며 끝까지 캐물었을 게 분명했다.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벽에 기댄 채 눈을 꼬옥 감고 있는 김종인의 손을 잡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현관 문이 열렸고,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던 김종인은 이내 옆에 놓인 쿠션을 끌어안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알싸한 술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것도 같았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여기까지 데려다 줘서 고마워. 피곤할 텐데, 가자마자 푹 자. 어차피 내일 일요일이니까…."
"김종인 여기서 자라 하고, 넌 방에서 자라."
"방에서 재울 건데?"
"넌?"
"난…."
"아, 뭘 그렇게 피곤하게…. 얘 어차피 곧 잠 들어. 방까지 또 어떻게 옮기게? 그냥 여기서 자라 하고, 넌 방에서 편하게 주무세요."
"감기 걸리면 어떡해…. 내 마음이 안 편해."
"감기가 왜 걸려. 얘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 그치, 김종인?"
쿠션을 꼬옥 끌어안은 채 고른 숨을 내뱉고만 있는 김종인에게 수긍의 대답을 구하며 묻던 오세훈이 이내 녀석의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내가 알아서 재우고 갈 테니까, 넌 네 할 일 해라. 씻고 얼른 자. 시간이 존나 늦었음."
"… 아니, 뭘…."
"김종인 놈아."
"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다시금 장난기가 발동한 건지 김종인에게 시선을 둔 채 장난스레 입을 열던 오세훈이, 제 행동을 제지하는 듯한 내 말에 푸스스 웃어보였다. 그러더니, 굴하지 않고 다시 입술을 떼 조곤조곤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넌 바보고, 멍청이지?"
"……."
"너 나보다 못생겼잖아. 인정?"
뭐가 그리 웃기고 재밌는 건지, 오세훈의 입가에 환히 걸려있는 웃음은 떠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이내 녀석의 팔을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너 가, 그냥. 재우고 가긴 무슨…. 계속 이렇게 놀려먹다 갈 거잖아."
"놀려먹다니…. 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마지못해 내 손길에 끌려 일어나는 듯싶던 오세훈이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그 모습이 꽤나 의아하게 느껴져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녀석을 빤히 바라보자, 틱틱대듯 말을 건네오기 시작한다.
"약속 하자고, 인마."
"무슨 약속?"
"네가 방에서 자. 김종인은 여기, 소파에서 재우고."
"… 또 그 소리다."
"걱정돼서 그래."
"괜찮다니까 그러네."
"김종인 닮아서 고집도 더럽게 세네요."
"……."
"아씨, 몰라. 네가 거실에서 자든 방에서 자든 신경 안 쓸 테니까, 무조건 따로 자."
"아, 그건 당연하지…."
"아, 그건 당연하지?"
날카롭게 말끝을 올리며 되묻던 오세훈이 내 이마에 딱밤을 주었다. 그리 세게 맞은 것 같진 않은데, 이마는 살짝 아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간 이마를 살살 매만지자, 이내 녀석이 살풋 웃어보인다.
"아, 가기 싫다. 김종인 저렇게 꽐라된 모습을 이제 또 언제 봐. 존나 보기 힘든 건데…."
"… 내 생각엔, 앞으론 절대 술 안 마실 것 같아."
"아니야. 아까처럼 계략을 꾸미면 돼. 치밀하게-."
"하지 마, 그런 거…."
"싫음."
"… 얼른 가."
"안 그래도 갈 거야. 가자마자 막 무섭다고 세훈아…, 제발 다시 와 줘…. 뭐, 이딴 소리 하기만 해 봐. 네 생각과는 다르게 존나 매정하고 시크한 남자거든, 내가."
"…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유감이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내뱉던 오세훈이 이내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왔다.
"간다. 오늘 고생했어."
"응, 너도. 조심해서 가."
"오냐. 아, 맞다. 나 오늘 찍은 사진 나중에 다 인화할 건데, 너도 줄까?"
"어, 진짜? 주면 나야 고맙지."
"줄게, 그럼."
"그래, 고마워. 음…, 집 도착하면 잘 도착했다 문자 한 통이라도 해주든지…."
"됐어, 인마. 집 가자마자 씻고 잘 거야. 존나 피곤함."
작게 하품을 하며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오세훈의 등을 밀다, 녀석의 등을 콩콩 아프지 않게 때렸다. 이내 신발을 챙겨 신은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현관 문을 열었고, 대충 손을 흔들어 보이며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겉으로 표현은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김종인을 함께 부축해 줬다는 게 내심 고마웠다. 장난기가 좀 심해서 그렇지, 은근 괜찮은 구석이 많은 녀석인데 왜 여태껏 애인이 없는 걸까…. 의문이었다. 녀석도 얼른 좋은 사람을 만나 달달한 연애를 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쿠션을 꼬옥 안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김종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
김종인이 깨지 않게 슬금슬금 다가가 옆 자리에 살포시 앉곤, 곤히 잠든 녀석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렇게 자면 고개도 아프고 허리도 아플 텐데-. 지금쯤 속도 쓰리고 울렁거리겠지. 억지로 끌려 간 거긴 하지만, 이럴 줄 알았더다면 더 완강히 거절을 하고 술자리에 참석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대놓고 김종인을 노려 술을 마시게 할 작정이었다는 걸 난 미리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왜 멍청이처럼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도 느껴졌다. 걱정은 눈덩이마냥 커져만 갔다.
"종이야, 미안해."
"……."
"… 나 때문에…."
아예 쿠션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잠이 들어버린 김종인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한 점에 의해 살랑살랑 춤을 췄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녀석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 술 기운 탓인지, 녀석은 작은 스킨쉽에도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아마 잠이 깊이 든 듯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짧은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에, 느린 손길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오세훈에게서 온 짧은 카톡 메시지였다. 버스 기사 아저씨의 현란한 운전 솜씨 덕분인지, 녀석의 길쭉한 다리 덕분인지, 녀석은 제법 일찍 집에 도착을 한 듯했다.
잘 자. 식상하기 그지 없는 두 글자를 마저 전송하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니, 정말이지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세훈 탓에 의도치 않게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쳐야 했고, 웨딩홀에선 이런저런 짓궂은 멘트를 날려오는 삼인방으로 인해 진땀 아닌 진땀을 빼야 했다. 그리고,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대망의 술자리…. 물론 술은 김종인이 다 마셨지만, 좌불안석의 상태로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내겐 고역 그 자체였다. 힘든 하루였던 만큼, 오늘은 침대에 몸을 뉘이기만 해도 바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깨끗이 씻고 나오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인은 아직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듯했다. 안 그래도 잠이 많은 녀석인데, 술도 진탕으로 마셔서 그런지 녀석은 아예 깨어날 생각을 않고 있었다. 꽤나 불편한 자세로 깊은 잠을 청하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다시 옆 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이왕이면 침대에서 편히 자길 바랐지만, 이미 깊게 잠이 들어버린 이상 그럴 순 없을 듯했다. 아쉬움이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며, 녀석을 따라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불안한 생각에 핸드백을 열었다. 그리곤 아까 황급히 넣어두었던 구겨진 포스트잇을 꺼내들었다. 왠지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하필이면, 그때와 같은 포스트잇이었다. … 왜 이래요, 나한테. 제발 이러지 마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간절한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구겨진 종잇조각을 천천히 펼쳐 보았다.
- 내가 준 옷 안 입었네. 근데, 남색 원피스도 예쁘다. 너랑 어울려. 다 어울린다. 다 예쁘네. 옆에 내가 있으면, 넌 더 예쁘겠지? -
구겨진 포스트잇을 들고있는 손엔 작은 경련이 일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다 못해, 이젠 눈물까지 고이기 시작했다. 무섭다는 말론 가히 표현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정말 미치겠다. 난 이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가면 갈수록 정도가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그만 해달라는 말로 멈출 사람이었다면, 그는 진작에 그만 뒀겠지. 울면서 애원하고 빌어봤자, 그는 눈 하나 꿈쩍 안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을 하자 덜컥 겁이 났다. 줄줄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을 대충 닦아내곤, 다시 포스트잇을 구겨 쓰레기통 속에 집어넣었다.
"……."
숙이고 있던 고개가 슬슬 뻐근해지는지, 김종인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눈물 자욱을 지워내고자 황급히 손등으로 볼을 벅벅 문질렀다. 이내 천천히 눈을 떠보이며 자세를 고쳐 앉곤 입맛을 다시는 듯싶던 김종인이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맛이 이상한 음식을 먹기라도 한 듯, 녀석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나 입에서 쓴 맛이 나."
"… 응?"
"어떡해. 속도 안 좋아."
실컷 자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인은 아직 만취 상태였다. 내일 아침에 꼭 해장국을 끓여줘야겠다 생각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곤 유리컵에 물을 가득 담아 얼음 몇 개를 띄운 뒤 다시 녀석에게 다가가 차디찬 물컵을 건넸다. 그런 날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녀석이 이내 컵을 받아들었고, 꿀꺽꿀꺽 시원하게 물을 한 번에 들이켜 마셨다. 물을 넘길 때마다 움직이던 목울대를 보고만 있자니 묘한 감정이 드는 것도 같아 작게 헛기침을 하곤, 다시 녀석의 옆 자리로 가 털썩 앉았다.
"이거 얼음이다."
"어? 아, 맞아. 얼음이야."
"내가 방금 마신 거, 얼음물이었어?"
"응, 얼음물이었어."
"신기하다."
뭐가 그리 신기한 건지, 김종인은 얼음만 남은 유리컵을 이리저리 살펴 보고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김종인으로 돌아간 것도 같았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의 모습으로-.
"여긴 내 여자친구 집이잖아."
"여자친구 누구야?"
"너지."
"옳지."
어린아이를 다루듯 김종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술을 잔뜩 마셔 속이 엉망이 되었을 거란 생각에 걱정은 되었지만,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내심 기쁘기만 했다. 평소 알게 모르게 나오던 귀여움과는 차원이 다른 귀여움이었다. 오늘 이후로 녀석은 아마 술을 입 근처에도 가져다 대지 않을 테니, 오늘이 아니면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볼 일이 앞으론 영영 없을 듯했다. 그래서,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며 더욱 짓궂게 녀석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종이야."
"응."
"나 좋아?"
"응."
"왜?"
"몰라. 그건 알 수 없어."
"뭐야…. 왜 알 수 없어?"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어디 있어."
"… 하긴."
"나랑 결혼하자."
"응?"
"결혼할 거야, 너랑."
"……."
"어디 가면 안 돼, 나 두고."
"……."
"알았어, 몰랐어."
"……."
"대답이 안 들려…."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작게 웅얼거리듯 말을 하던 녀석이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아까보다 발음은 많이 나아진 듯했지만, 여전히 김종인은 취기가 어린 모습이었다.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두어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내 내 손목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 당긴다. 갑작스레 꼬옥 안긴 상태가 돼 어색해 하기도 잠시, 갈피를 잃은 채 허공에만 머물러 있던 팔을 녀석의 허리에 둘렀다. 정적만이 맴도는 공간 속, 들려오는 소리라곤 김종인의 숨소리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똑딱거리는 시곗바늘 소리조차도 들리지가 않았다. 김종인의 몸은 불덩이마냥 뜨거웠다. 머리칼을 감싸고 있는 샴푸 향, 몸에서 느껴지는 섬유유연제 향, 미세하게 풍겨오는 알코올 향이 뒤섞인 듯한 묘한 향이 코끝을 자극해왔다. 이러다 또 잠이 들면 어쩌지. 침대에 편히 눕혀야 되는데…. 작은 걱정을 하나씩 키워가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만 있을 때,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뭐야? 너한테서 좋은 냄새 나. 포도 냄새야."
"… 나? 아…, 포도향 바디워시를 써서 그런가…."
"포도 뭐야! 나, 포도를 안고 있는 것 같아."
"… 그렇게 많이 나?"
자꾸만 이곳저곳 향을 맡으며 가까이 다가오기 바쁜 김종인의 모습에, 잠시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술 기운 때문인가.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지. 머릿속엔 불안한 궁금증들이 하나둘 제 영역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내 목덜미엔 녀석의 입술이 지그시 닿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어야 했다. 이상하면서도 야릇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심장은 더욱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마음속으론 자꾸만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 종인아…, 자, 잠깐만."
김종인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팔을 풀어 조심스레 녀석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런 내 행동에 녀석은 제법 쉽게 품에서 나를 놓아주었고, 이내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다시 눈을 꼬옥 감았다. 그 짧은 사이 또다시 잠이 들었던 듯했다. 살짝 달아오른 볼을 어루만지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곤, 묵묵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 못 살아, 진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잠만보, 졸음쟁이. 마음속으로 작은 투정을 내뱉곤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얇은 이불 하나를 꺼내 다시 김종인에게 다가갔고, 녀석을 편히 눕힌 뒤 얇은 이불을 활짝 펴 조심스레 녀석의 몸을 덮어 주었다. 이렇게 자고 일어나 아침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겠지. 그건 살짝 아쉬웠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답답할 것도 같아, 녀석의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주곤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잘 자. 들리지 않을 인사말을 건네곤 거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얼굴을 기댄 채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슬슬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게, 아무래도 얼마 안 있어 잠이 들 것만 같았다.
*
그 날 김종인은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푸욱 잘 잤다. 예상대로 난 녀석이 누워있는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이라곤, 침실 벽지의 규칙적인 문양이었다. 분명 소파에 기댄 채 구부정한 자세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난 침대 위였다. 먼저 일어난 건지, 화장실에선 김종인이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녀석이 날 침대까지 데려다 준 듯했다.
속이 안 좋아. 죽을 것 같아. 나를 보자마자 김종인이 내뱉던 말이다. 저를 위해 손수 끓여준 해장국을 힘겹게 한 술 뜨던 녀석은, '세훈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이라는 게임 멘트를 들은 후로 아무런 기억이 없다 했다. 아예 그때부터 필름이 끊긴 것이었다. 술김에 동요를 흥얼거렸다는 것도, 횡설수설 어리벙벙하게 말을 늘어놓았다는 것도, 포도 향이 난다며 내 목덜미에 작게 입을 맞췄다는 것도… 녀석은 전부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진 모르겠지만, 녀석은 엄청난 창피함을 느끼고 있었다.
'알기 싫으니까, 제발 말하지 마. 난 몰라도 돼.'
제법 놀리듯 어제의 김종인을 흉내내 보이자, 녀석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술에 취한 제 모습이 이렇다- 라는 걸 조금도 알고 싶지가 않은 듯, 녀석은 아예 눈과 귀를 닫았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귀여워 난 자꾸만 녀석을 놀려댔고, 이내 정색을 해보이는 모습에 입을 꾸욱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심한 오세훈이 있었다. 오세훈은 당장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김종인에게 전화를 해왔고, 이제는 아예 명대사가 되어버린 듯한 멘트를 인사말 대신 건네왔다.
'김종인…, 어디 가는 거야? 우리 같이 가는 거…. 어? 뭐지? 뭐야아-?'
그런 오세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김종인은 가차없이 전화통화를 끊었다. 괴로운 듯 제 머리를 감싸쥔 채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던 녀석은 꽤나 단호한 한 마디를 읊조렸다.
'앞으론 술 절대 안 마셔. 내 앞에서 소주나 맥주 얘기 하기만 해. 다 엎어 버릴 거야.'
그리고 난 다짐을 했다. 앞으론 소주, 맥주가 아닌 와인, 막걸리 얘기를 꺼내기로-.
그로부터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기말고사는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서로 바빠진 탓에 매일이다시피 얼굴을 보던 김종인과는 만날 기회가 자연스레 줄어들고 말았다. 그건 정말이지 아쉬웠지만, 기말고사 뒤면 있을 행복한 여름방학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견뎌냈다. 오늘은 목요일, 시험은 바로 다음 주였다. 오늘 하루는 특히나 바쁜 하루였다. 저번처럼 시험이 얼마 안 남은 이런 중요한 시기에 조별과제를 내주신 교수님 탓에 점심시간에도 조원을 만나 최종적인 회의를 해야 했고, 쉬는시간에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번 조별과제도 도경수 선배와 함께 하기로 했다. 서로 잘 맞기도 할 뿐더러, 이미 같이 해본 경험이 있어 아무래도 다른 사람과 하는 것보단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너랑 도선배한테 이 수업 A+ 학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야! 라며 자신있게 말을 건네오던 여선배에게, 난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이지 피곤한 하루였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김종인은 오늘, 나 못지 않게 바쁜 하루가 될 거라 했다. 같은 조원의 예상치 못한 실수로 도면을 다시 그리게 되었다며, 오늘은 데리러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연락을 해오던 김종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오늘은 조금이라도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역시나였다. 아쉬움을 잔뜩 끌어안은 채 터덜터덜 외로이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김종인 보고 싶다. 종인이 보고 싶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힘겹게 계단을 오르며 김종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꺼내든 휴대폰 화면엔 '오세훈'이라는 세 글자가 떠있었다.
오세훈과의 간단한 대화를 나누곤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도착한 현관에,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 본 거라고, 잠시 눈이 착각을 한 거라고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쉬이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현관 문엔 거짓말처럼 포스트잇이 또 붙어 있었다. 며칠간 잠잠하나 싶더니, 또 시작인 듯했다. 이렇게 의도치 않게 또다시 불안감을 안겨주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정말이지 확인하기가 꺼려졌지만, 어쩔 수 없이 확인을 해야 했다. 이번 메시지는 언뜻 보기에도 제법 간결해 보였다. 크게 심호흡을 하곤, 여백이 대부분인 포스트잇에 천천히 시선을 고정시켰다.
- 뒤 돌아 봐. -
딱 네 글자 뿐이었다. 뒤 돌아 봐. 뒤 돌아 봐. 뒤를…. 짧디 짧은 한 문장을 읽어냄과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왠지 뒤를 돌아보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불현듯 일기도 했다. 갑작스레 치밀기 시작하는 불안감과 두려움 탓에 심장박동은 빨라졌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엄청난 내적갈등을 겪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셋을 세며 황급히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문을 열었다. 급한 마음에 혹시라도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하면 어쩔까 하는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 손가락의 움직임은 정확했다. 열린 문의 손잡이를 잡곤 서둘러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나, 밖에서 누군가 문을 잡고 있기라도 한 듯 쉽게 문이 닫히지가 않았다. 닫으려 안간 힘을 써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팔엔 서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손잡이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문이 닫히지 않게 밖에서 꼬옥 잡고 있던 누군가가 내 앞에 모습을 비추었다.
"나야."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안으로 발을 들이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오늘도 종인이랑 같이 안 오네."
"……."
"시험기간이라 바쁘긴 한가 봐, 미친새끼가."
"……."
"과제, 시험-.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
"너랑 내가 같이 있다는 거 알면, 존나 후회하겠지? 바빠도 그냥 데려다 줄 걸. 과제따위 포기하고 같이 집에나 갈 걸."
옅게 풍겨오는 향수 냄새가 이질적이었다. 박찬열. 이렇게 눈앞에서 또다시 박찬열을 마주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
더보기 |
오늘 진짜 덥지 않았나요..? 전 찜통 속에 들어와 있는 줄 알았어요..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씨.. 푹푹 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들 냉방병 조심하세요! 시원한 것도 좋지만, 에어컨은 적당히 틀어야 합니다.
* 암호닉 *
[ㄱ/ㄲ] 가글 /가락 /가지 / 거꾸로해도정수정 / 거뉴경 / 건망고 / 검은콩두유 / 고기만두 / 구글조닌 / 구사일생 / 규규 / 귤껍질 / 귬귬 / 근댕 / 글잡캡틴미녀 / 기적 / 김종이ㄴ / 까까 / 까리까리 / 깜종인 /꺄 / 꽃이된다 / 꿀꿀 / 꿀잼 / 꿍야슈슈 / 뀨룽 [ㄴ] 나노 / 나니꺼 / 나무 / 냠냠 / 냥냥 / 네네스노윙 / 녹차라떼 / 니나노 [ㄷ/ㄸ] 다래 / 다예 / 다원 / 다이아 / 단이 / 단팥 / 달달이 / 도도토 / 도비 / 도어엉 / 도토도 / 됴깡 / 독자17 / 듀파 / 듀퐁 / 디보 / 따따 / 또해 / 똥잠 / 뚜뚜 / 뚱바 / 뚱이 [ㄹ] 라온이솔 / 라인 / 라코 / 랑우 / 런웨이 / 럽미베베/ 레몬사탕 / 로리나 / 로운 / 로이 / 롯데월드 / 루피뚜 / 리리 / 리찌 / 릴리 [ㅁ] 마시멜롱 / 만떼 / 말랑 / 망고 / 망고빙수 / 맥듀 / 맴매맹 / 메론빵 / 메리미 / 멜리멜랑 / 멜팅 / 모별 / 모서리 / 모찌 / 몽글몽글 / 몽디 / 몽이 / 뭉이 / 미리별 / 민럽 / 민석쀼쀼 / 민소쿠쨩 / 민툽 / 밍뿌 / 밍쏘쿠 [ㅂ/ㅃ] 바나나 / 바나나킥 / 바자다가 / 바카 / 바퀴 /박보 / 밤비 / 밥 / 배리 / 배큥아리 / 백현모양처 / 벚꽃너굴이 / 별다방커피 / 보노보노보 / 보스 / 복숭아 / 봄봄 / 봄비 / 분무기 / 불가 / 불꺼진방 / 비비빅 / 빵 / 뽀뽀뽀 / 뿅아리 / 뿌꾸빰 / 쁌쁌 [ㅅ/ㅆ] 삼디다스 / 샤니빵 / 서쥬니 / 설레미 / 설렘사 / 셜록 / 숑숑이맘 / 슈둥슈둥 / 슈팅스타 / 스누 / 스무살의봄 / 스윗펌킨 / 스파게티 / 스폰지밥 / 슨니야 / 시동 / 시매니저 / 시카고걸 / 썬다운 / 쑤우쑤우 / 쓔쓔 [ㅇ] 아가야 / 아야어여 / 아이스크림 / 안녕내게다가와 / 알콩/ 애를도라도 / 얍스 / 어린왕자 / 어화둥둥 / 여니 / 열럽 / 영쓰 / 예헷 / 오빠설렘사 / 오세훈의각시 / 올봉 / 왕 / 요거트 / 요맘때 / 용이 / 우유퐁당 / 우주최강 / 윋드유 / 윌리웡카 / 윤슬 / 윤천사 / 은하수 / 이과생 / 이레네 / 이야핫 / 일루와 [ㅈ/ㅉ] 자몽이제일조아 / 젤라 / 종달샘 / 종대마님 / 종스팸 / 종이니니 / 종이인형 / 종종걸음 / 지블리 / 짝짝 / 짱구여친 / 쫑니 / 쮸쀼쮸쀼 / 찌개 / 찐빵 [ㅊ] 찬샤 / 찰떡 / 체리 / 초코 / 초코붕 / 초코파이 / 쵸파/ 치드봉봉 / 치즈돈가스 / 츤데레 [ㅋ] 카프 / 콩부인 / 쾌지나첸첸나네 / 큥쓰큥쓰 / 큥큥 / 키엘 / 킴벌리 [ㅌ] 타니 / 털ㄴ업 / 테라피 / 툭툭 [ㅍ] 퓨어 /핑구 [ㅎ] 핫초코 / 해피 / 햄버거 / 행쇼 / 허니잼 / 형광등 / 호이호잇 / 훈훈 / 희망 / 히밤 [영어] DB /dprth8391 / HaMo / YUNE [숫자] 0408 / 0616 / 0618 / 0622 / 1226 / 3관왕센 / 500원 / 84니니 [특수문자] #두근 누락됐다면 꼭 말해주세요 :) 당분간 암호닉 신청은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