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20 (지켜줄게)
결국 거실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잠이 들고야 말았다. 밤새 웅크리고 있던 탓에 살짝 뻐근해진 허리를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버린 사이 다시 박찬열이 찾아와 너를 괴롭힐지도 모른단 불안한 생각에, 어젯밤은 네 집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소파에 누워 잠이 든 네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다,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겨 침대에 놓인 얇은 이불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다시 거실로 발을 디뎌 얇은 이불로 네 몸을 덮어주었다. 이유없이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곤히 잠든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동안 혼자 얼마나 힘들었어. 혼자 얼마나 마음앓이를 했어. 떠오르는 생각들이, 전해주고 싶은 말들이 무수히 많았다.
"……."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이제서야 발견하고 말았다. 작동엔 문제가 없었지만, 잔뜩 금이 간 휴대폰 화면은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사실 작동엔 문제가 없으니 상관은 없었다. 액정이 깨졌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리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휴대폰을 몇 번 만져보곤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 귀찮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밥 꼭 챙겨 먹어. -
테이블에 놓인 포스트잇을 하나 뜯어 간단히 메모를 작성했다. 잘 보이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며 슬쩍 주변을 살펴 보았다. TV 화면에 붙여놓을까, 냉장고에 붙여놓을까, 테이블 위에 붙여놓을까. 적절한 위치를 찾고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 배터리와 분리된 휴대폰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득, 어제 저녁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오던 오세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야, 인마. 너 어디야? 학교야? 이상해. 존나 이상하다고.'
'네 여친한테서 문자가 왔어. 오타도 가득하고, 뭐라 해야 하지…. 하여튼 이상한 문자. 심지어 말도 끊긴 채로…. 야, 듣고 있냐?'
'문자 확인하자마자 전화 걸었는데, 안 받아. 배터리가 없는 건지, 아예 전원을 꺼둔 건지….'
'뭔가 이상해서 집엘 찾아가 봤는데, 아무도 없어.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눌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어. 새끼야, 지금 학교에서 과제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만 초조하고 불안해?'
꽤나 불안하게 들려오는 오세훈의 말에, 난 이미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녀석과의 전화통화를 끊자마자 네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역시 여자의 기계적인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제발 집에 있어라. 휴대폰은 배터리가 없어서 꺼진 거고, 넌 자느라 초인종 소리를 못 들은 거라 해. 제발 그런 거여라. 집에 없는 거 아니지. 집에 웬 나쁜 사람이 침입한 건 아니지.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니지. 불안감은 점점 커져 이내 온 신경세포들을 자극해왔다. 버스가 오기까진 아직 11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있었고,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타야했다. 요금이 십만 원이 나오든, 백만 원이 나오든 상관 없었다. 1분이라도… 아니, 1초라도 빨리 네게 향할 수 있다면-.
"……."
다시금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에,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깊게 잠이 든 네 얼굴은 천사처럼 곱고 예뻤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너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 스르륵 흘러내려 눈가를 덮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정돈해 주었다. 배터리는 어디다 둔 거야. 휴대폰이 먹통이잖아. 휴대폰이 이래가지고 연락은 어떻게 해. 적당히 작고 붉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어주곤, 다시금 이불을 꼬옥 덮어주었다. 포스트잇은 테이블 위에 살짝 붙여두었다. 네가 눈을 뜨자마자 확인할 수 있도록-.
*
[김종인 너 인마, 학교 왜 안 나오냐? 교수님이 오늘 중요한 거 수업하신다 했잖아. 다음 주가 시험인데.. 제 정신이냐?]
같은 과 선배로부터 온 문자 메시지를 두어 번 읽곤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깨진 액정 탓에 글씨가 뚜렷이 보이지가 않았다. 오늘은 왠지 학교에 가기가 싫었다. 물론 시험은 당장 다음 주였을 뿐더러 금요일인 오늘은 하필 오전부터 오후까지 수업이 꽉꽉 채워져 있는 바쁜 날이었지만, 오늘 만큼은 집에서 푹 쉬고 싶었다. 도저히 학교에 나가 수업을 받을 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고, 습관처럼 자꾸만 깊은 한숨을 내뱉게 되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어제 저녁, 문을 열자마자 보여오는 광경에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낯선 남자에게 덮쳐진 채 발버둥을 치고 있는 네 모습에,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왠지 낯설다 생각했던 남자는 그동안 잊고 지내던 박찬열이었다. 왜 또 나타난 거지. 도대체 왜-. 갑자기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보단 박찬열에 대한 분노감이 훨씬 앞서, 무작정 주먹을 날렸다. 이런 내 모습에 덜컥 겁을 먹은 건지, 넌 양쪽 손으로 입을 틀어 막은 채 숨 죽여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네 앞에선 욕도 안 하던 내가, 결국 상스러운 단어를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는 쉽게 풀리지가 않았다. 아니, 풀릴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나타난 건지- 육하원칙을 사용해 묻고 싶었다.
오랜만에 나타난 박찬열은 예전 그 모습이 아니었다. 웃기지 않은 말과 상황에도 싱글벙글 웃어보이던 과거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과거의 모습도 그리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지만, 어제 마주한 모습은 제법 소름이 끼쳐 더더욱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못 본 사이 많이 변한 듯싶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알아야 할 것도 많았다. 어젠 너무도 정신이 없어, 머릿속에 차오르는 궁금증들을 몽땅 털어낼 수가 없었다. 왜 내게 그것들을 숨겼을까. 왜 조금도 털어놓지 않은 채 혼자 끙끙 앓고만 있었을까. 네게 의문이 듦과 동시에,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난 진작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 왜 난 네 상황을 조금도 알지 못했을까. 박찬열 말대로, 난 내 좋은 맛에만 살았던 걸까. 난 네 애인 자격이… 없는 걸까. 내가 지켜 주겠다, 내가 보호해 주겠다…, 그동안 난 머리로만 생각을 했던 걸까. 널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가 뒷통수를 쾅- 하고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그 사실 하나에 너무도 화가 나면서 마음이 아파,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치민 분노감에 의도치 않게 네게 모진 말들을 내뱉어 버린 내 자신 또한 밉게 느껴졌다. 왜 그랬지, 내가. 지금 제일 힘들고 아픈 건 내가 아닌 너일 텐데. 괜찮아. 나 있으니까 괜찮아. 이 말 한 마디를 해주는 게 그리 어려웠을까,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몸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게 나는… 그리 어려웠을까. 그냥 꼬옥 안아주며 다 괜찮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고, 말 한 마디 건네줄 걸. 난 후회 덩어리였다. 모든 게 후회로만 다가왔다. 안 그래도 여리기만 한 네게 상처를 줘버렸다. 나도 모르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후회로 번졌고, 동시에 내 자신이 한없이 밉고 싫어졌다. 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화를 내고 너를 꾸짖었던 거지. 잠시라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볼 걸. 왜 이해하려 들지 않았을까. 왜 내 생각만 했을까. 자꾸만 어제의 기억, 어제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충격을 금치 못한 채 넋이 나가있던 내 모습, 서럽게 엉엉 울음을 짓던 네 모습, 너와 나를 감돌던 냉랭한 분위기까지-. 울던 네 모습을 떠올리자 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 다가가 안아줬어야 하는 건데. 왜 난….
"……."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에, 어지럽게 구겨진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 덮었다. 순식간에 차단된 공기에 숨이 턱- 하고 막히긴 했지만, 상관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초인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덮고있던 이불을 걷어찬 뒤 황급히 뛰어 인터폰 화면도 확인하지 않은 채 잠금장치를 풀어냈다. 그러나, 역시 기대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열린 현관 문 사이로 보여오는 얼굴은 오세훈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하고 있던 휴대폰 게임을 종료시키던 녀석은 이내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 덩달아 어슬렁어슬렁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학교 안 간 건 어떻게 알고 왔어."
"너 오늘 공강이잖아."
"… 아닌데."
"오늘 공강… 아, 너 수요일 공강이냐? 헐, 네 여친이 오늘 공강이구나. 착각했다. 너 그럼 학교는? 오후 수업이냐?"
"너야말로 학교는."
"난 오후에 수업 있음."
"……."
"넌 인마, 학교 안 가냐고."
"안 가."
"휴강 됐음?"
"아니, 그냥 안 간다고."
"… 뭐야? 생 양아치네. 뒤늦게 중2병이 도진 건가? 내 인생의 유일한 낙은 Free다…. 뭐, 이런?"
"아니야, 그런 거."
가기 싫어서-. 작게 덧붙여 말하곤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오세훈이 잠시 무언갈 생각하는 듯싶더니 바닥에 털썩 앉으며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어제 왜 전화 안 받았음? 궁금해서 잠을 못 잤잖아. 너까지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일찍 잤어."
"… ○○이 집에 가 봤어? 집에 있디? 휴대폰은 왜 꺼져 있었대? 초인종 소리는 못 들은 거래?"
"……."
"……."
"자느라 못 들었대."
"뭐야, 잠을 그렇게 깊이? 요즘 시험기간이라 피곤한가…. 누구 닮아서 잠도 많은가 봐."
"……."
"그래도 다행이네.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듯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오세훈을 흘끗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면 좋겠다. 다행이라는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음 좋겠다. 다행…. 다행인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내가 감으로써 더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인 건가. 그 상황에서 박찬열을 밀어내 줬다는 게… 다행인 건가. 아니, 다행인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내 생각만 한 채 연약한 몸을 안아주지도, 괜찮다고 보듬어 주지도 못했고, 오히려 화를 내버렸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은 안아주지 못했다는 자책으로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를 괴롭혀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면 좋겠다. 어제 일이 그냥 단순한 악몽이었던 거면 좋겠다. 몸이 피곤하고 지친 탓에 내가 악몽을 꾸었던 거면… 진짜 좋겠다. 이제와 간절히 소망해봤자 아무 소용 없는 말들을 되뇌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오세훈은 결국 점심 식사까지 해결하고 난 뒤에야 집을 나섰다. 하루종일 멍한 상태로 앉아만 있는 내게 무슨 일 있냐며 물어오던 녀석은 연신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럴 때마다 난 애써 고개를 젓곤 침대에 누워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 답답한 놈이었다.
오세훈 하나만 없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렇게 하는 거없이 침대에 누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학교에 나가 출석 도장이라고 찍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감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다. 단지 수업 들을 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해버린 무단 결석이지만, 집에 있다 해서 특별히 무언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잠시 머리라도 식힐 겸 잠이나 자볼까, 해도 잠은 쉽게 오지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침대에 누운 채 천장만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찰나, 문득 어제 들었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도경수도, 너도, 네 애인도.'
'도경수가 누구야.'
'… 같은 과 선배. 너도 본 적 있어. 저번에 학교 앞에서….'
'…….'
'… 박찬열이랑 친구야. 꽤 가까운 사이-.'
어제 저녁 박찬열에게 들었던 한 마디와, 잠 들기 전 너와 간단히 나눴던 몇 마디를 떠올리며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리곤 무작정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나도 본 적 있는 선배라면, 그때 학교 앞에서 본 그 남자가 도경수겠지. 의도치 않게 내 질투의 대상이 되었던 남자-. 아직까지 생김새도 기억이 날 정도로, 그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역시 세상은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박찬열과 아는 사이일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웠다. 약간의 걱정과 불안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지만, 일단 저질러 보자 생각하며 바닥을 나뒹굴던 스냅백을 집어들었다.
*
아무런 정보도 없이, 아는 거라곤 단 하나도 없이, 그냥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지금 내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교통카드를 집에 놓고 와버리는 바람에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구겨진 천원짜리 한 장과 몇 백원으로 버스비를 대신 내야 했고,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휴대폰을 또 떨어뜨려야 했다. 이젠 아예 작동조차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휴대폰은 까만 화면만이 띄워진 채 버튼조차 먹히질 않았다. 액정도 엉망이야, 아예 작동도 안 돼-. 순식간에 장난감 전화기보다도 못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 휴대폰을 몇 번 더 만져보곤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정말이지, 하루종일 재수가 없었다.
*
얼마 안 있어 도착한 장소에 발을 디디곤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보았다. 얼굴조차 익숙지 않은 사람이 다짜고짜 찾아와 잠깐 얘기 좀 하자 하면, 도경수라는 사람은 얼마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내비칠까. 내심 걱정은 됐지만, 그리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가 학교에 있을지 없을지도 미지수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온 학교는 제법 한산하기만 했다. 막상 찾아왔긴 한데,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안으로 들어가 도경수를 찾아야 하나. 어느 강의실에 있을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 아니 그보다, 지금 학교에 있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데. 점점 부풀기 시작하는 생각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창 더울 시간대라 그런지, 따가운 햇볕은 까만 머리통을 뜨겁게 달궈왔다. 어디선가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는 땀방울들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곤 근처 위치한 벤치로 가 털썩 앉았다. 크나큰 나무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나름 더위를 식힐 수 있을 듯했다. 선선한 바람 또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시원했다.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있다보면 언젠간 모습을 비추겠지, 생각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솔직히 가능성은 희박했다. 여기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 해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을 뿐더러,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그를 놓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성공할 확률보단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은, 어찌 보면 도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상관은 없었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기회는 많으니-.
*
정확히 한 시간 반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도경수는 커녕, 그를 닮은 사람조차도 보이지가 않았다. 눈을 꿈뻑이는 시간도 아까워 두 눈 똑바로 뜬 채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지만, 역시 내가 찾는 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다음 기회를 노리지 뭐-. 은근히 샘솟는 아쉬움을 뒤로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내 자신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종일 뭘 했더라, 내가. 시험 전 마지막 수업 날인데도 불구하고 학교도 멋대로 빠지고, 다짜고짜 남의 대학에 찾아와선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사람을 기다리겠다며 설치다 결국 허탕을 치고, 그렇게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고-. 게다가 휴대폰은 망가져서 아예 작동도 안 되고…. 왜 이러지, 오늘. 왜이리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지. 오늘 왜이리… 모든 게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지.
"……."
분명 한 건 없는데 온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이토록 무기력한 적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모든 일에 의욕이 없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넘기곤 얼마 안 있어 도착한 버스 정류장 의자에 털썩 앉았다. 7분 뒤면 버스가 도착할 것이라는 안내 화면을 확인하곤 다시 시선을 앞 쪽으로 옮겨놓았다. 지금쯤 넌 뭘 하고 있을까.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시험 공부를 하고 있을까. 내 머릿속은 온통 네 생각 뿐인데, 넌 어떨까. 네 머릿속에도 나라는 존재가 작게나마 자리잡고 있을까. … 어제 너무 차갑게 굴었는데, 그래서 날 미워하면 어쩌지. 이젠 날 보고 웃어주지 않으면 어쩌지. 이제 더이상 네가 날…
"……."
"……."
불안한 생각에 잠겨있을 때쯤,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갑자기 비가 오려나. 우산 없는데-. 이 와중에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역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고, 희미하게 풍겨오는 담배 냄새에 작게 미간을 좁혔다. 이어폰을 꽂은 채 휴대폰 화면만을 응시하고 있는 무표정의 남자-. 도경수였다. 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느껴진 건지, 이내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아왔다.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저 사람은 표정이 아예 없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는 딱딱한 얼굴이었다.
"저기,"
"……."
"저번에 우리 한 번 봤죠, ○○이랑-."
"네."
"… 그, 갑자기 죄송한데요."
내 말에 작게 고개를 갸웃해 보이던 그가 무심하게 눈을 꿈뻑였다.
*
근처 위치한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빈 자리는 제법 많았지만, 먼저 구석 자리로 발을 떼는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장 끝 자리에 앉아야 했다.
"할 얘기가 뭔데요?"
"말 놓으세요. 제가 한참 어리잖아요."
내 말에 그저 입술만 오물거리던 도경수가 다시금 한 마디를 건네왔다. 딱딱한 말투와 목소리가 꽤나 무심하게 들려왔다.
"뭔데, 할 말."
"……."
"……."
"박찬열이랑 친구라면서요."
"……."
"박찬열에 관해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요."
박찬열이라는 단어에 미세히 인상을 찡그리는 듯싶던 도경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그의 짙은 눈썹을 바라보다, 머릿속으로 수천 번을 고민한 뒤 천천히 입술을 떼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사실, 어제 여자친구 집에 와있었어요."
"박찬열이?"
"네."
"걔가 왜."
"몰라요, 그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연락이 안 되길래 뭔가 이상해서 가봤는데, 둘이 같이 있었어요. 집에-."
"……."
"박찬열이 이상했어요. 예전 박찬열이 아니었어요.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어요."
"……."
"… 그 쪽은 아니죠, 그런 사람."
"……."
"……."
"아니야,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는 대답 하나로 이렇게 안심이 될 줄이야-.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애꿎은 커플링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다시금 도경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
"여자친구 잘 챙겨."
"……."
"박찬열은 상상 이상으로 또라이 같은 놈이야."
"……."
"감정이 부족해서 죄책감 같은 것도 잘 못 느껴."
"……."
"마음만 먹으면 더 심할 짓도 할 것 같아, 내 생각엔."
"……."
"학교에선 내가 알아서 잘 챙길 테니까 걱정 말고."
"… 박찬열 연락처 좀 줄 수 있어요? 번호를 예전에 지워 버려서."
"줄 순 있는데, 그 새끼가 번호를 주기적으로 바꿔서 소용은 없을 걸."
"… 뭐 아는 거 없죠. 그동안 박찬열 행실에 대해서."
내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듯싶던 그가 제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요즘들어 좀 조용한데,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해."
"……."
"너무 걱정하진 마. 지켜주면 되잖아, 네가."
무심코 내뱉어진 그의 한 마디에 많은 생각들이 치밀었다. 지켜주면 되잖아. 그래, 지켜주면 되지. 지켜주면 되는 거야. 난 지금까지 뭘 걱정하고 우울해했던 거지. 여태 무슨 일이 있었건, 앞으론 그런 일이 안 일어나게 지켜주면 되는 건데. 난 왜 생각이 1차원에서만 머무르는 거지. 난 왜-.
*
도경수와의 짧디 짧은 만남 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얼마 안 있어 학교 앞에 도착한 버스는 이내 내 앞에 멈춰섰고,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바로 올라탈 수 있었다. 고작 버스카드 하나 없다고 이렇게 버스 요금을 내기가 불편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잔돈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돈까지 없었더라면 이 더운 여름 날 꽤나 먼 거리를 터덜터덜 걸어 집까지 향했어야 할 것이다. 버스 안에서 그나마 시간을 때우던 용도인 휴대폰은 하필 고장. 사실 휴대폰이 먹통이라 해서 그다지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너와 연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싫었다. 시험 끝나면 바꾸지 뭐. 어차피 바꿀 생각이었는데-. 애써 합리화를 하곤 손을 뻗어 버스 벨을 꾸욱 눌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근처 위치한 커다란 편의점으로 향했다. 꾸벅꾸벅 졸고있던 건지 문이 열림과 동시에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서는 남자 알바생에게 작게 목례를 하곤, 음료 코너로 향했다. 커피는 몸에 안 좋아. 그럼…,
"1,800원입니다."
딱 두 장 남은 천원짜리 지폐를 건네곤 거스름돈 200원을 받았다. 봉투에 넣어드릴까요? 상투적인 알바생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그냥 주세요.
"아, 혹시… 포스트잇 있으세요? 제가 간단히 뭘 적어야 하는데, 종이랑 펜이 없어서."
차디찬 음료를 한 손에 쥔 채 편의점을 나서려던 찰나,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다시 뒤를 돌아 알바생에게 물었다. 그런 내 말에 아무렇지 않게 포스트잇과 까만 볼펜을 건네는 그에게 심심한 감사의 멘트를 전하곤, 판판한 계산대 위를 받침으로 삼아 간단한 문구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포스트잇을 한 장 떼어내 음료의 뚜껑에 꾸욱 눌러 붙이곤 편의점을 나섰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하루를 의미없이 보내긴 했지만, 시간은 제법 빨리 흐르는 것도 같았다. 편의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네 집은 단지 몇 걸음 만에 형태가 나타났다. 바로 코앞에 위치한 집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니, 다시금 어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서럽게 우는 네 모습은 언제 떠올리든 너무도 가슴이 아리다. 네가 우는 몇 가지의 이유들 중 하나는 분명 나겠지. 물론 내가 포함되어 있겠지. 어쩌면, 내가 널 울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아니, 사실 하나도 안 괜찮아. 근데 넌 괜찮을까. 넌 어때. 괜찮아? 난 너만 괜찮으면 되는데. 한없이 여리기만 한 널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안아줘야지. 내가 안아줄게. 미안해, 아프게 해서. 따뜻하게 안아줄게, 예쁜아. 지켜줄게, 아가.
"……."
묵묵히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아마 넌 공부 중이겠지. 방해 안 되게, 문 앞에 음료만 놓고 갈게. 네가 발견할 수 있을지 없을진 모르겠지만, 그냥 놓고 갈게.
- 공부 열심히 해. 너무 무리하진 말고 가끔 쉬기도 하면서. 당분간 연락 안 될 거야. 휴대폰 망가졌어. 급한 일 있으면 오세훈 통해서 연락해. 곧 보자, 우리. -
포스트잇이 떨어지지 않게 다시 꾸욱 누르곤 음료를 현관 문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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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맞아요. 저번 편에서 여주 집 초인종을 가장 처음으로 눌렀던 건 세훈이였어요. 초인종은 눌렀는데 들려오는 답은 없고, 걱정이 돼서 종인이한테 연락을 한 거죠! 그래서 종인이가 우다다다다다- 찾아온 거였어요. 우리 다시 달달해집시다.. 우울한 거 싫어요.. 그쵸..
* 암호닉 *
[ㄱ/ㄲ] 가글 /가락 /가지 / 거꾸로해도정수정 / 거뉴경 / 건망고 / 검은콩두유 / 고기만두 / 구글조닌 / 구사일생 / 규규 / 귤껍질 / 귬귬 / 근댕 / 글잡캡틴미녀 / 기적 / 김종이ㄴ / 까까 / 까리까리 / 깜종인 /꺄 / 꽃이된다 / 꿀꿀 / 꿀잼 / 꿍야슈슈 / 뀨룽
[ㄴ] 나노 / 나니꺼 / 나무 / 냠냠 / 냥냥 / 네네스노윙 / 녹차라떼 / 니나노
[ㄷ/ㄸ] 다래 / 다예 / 다원 / 다이아 / 단이 / 단팥 / 달달이 / 도도토 / 도비 / 도어엉 / 도토도 / 됴깡 / 독자17 / 듀바 / 듀퐁 / 디보 / 따따 / 또해 / 똥잠 / 뚜뚜 / 뚱바 / 뚱이
[ㄹ] 라온이솔 / 라인 / 라코 / 랑우 / 런웨이 / 럽미베베/ 레몬사탕 / 로리나 / 로운 / 로이 / 롯데월드 / 루피뚜 / 리리 / 리찌 / 릴리
[ㅁ] 마시멜롱 / 만떼 / 말랑 / 망고 / 망고빙수 / 맥듀 / 맴매맹 / 메론빵 / 메리미 / 멜리멜랑 / 멜팅 / 모별 / 모서리 / 모찌 / 몽글몽글 / 몽디 / 몽이 / 뭉이 / 미리별 / 민럽 / 민석쀼쀼 / 민소쿠쨩 / 민툽 / 밍뿌 / 밍쏘쿠
[ㅂ/ㅃ] 바나나 / 바나나킥 / 바자다가 / 바카 / 바퀴 /박보 / 밤비 / 밥 / 배리 / 배큥아리 / 백현모양처 / 벚꽃너굴이 / 별다방커피 / 보노보노보 / 보스 / 복숭아 / 봄봄 / 봄비 / 분무기 / 불가 / 불꺼진방 / 비비빅 / 빵 / 뽀뽀뽀 / 뿅아리 / 뿌꾸빰 / 쁌쁌
[ㅅ/ㅆ] 삼디다스 / 샤니빵 / 서쥬니 / 설레미 / 설렘사 / 셜록 / 숑숑이맘 / 수박마루 / 슈둥슈둥 / 슈팅스타 / 스누 / 스무살의봄 / 스윗펌킨 / 스파게티 / 스폰지밥 / 슨니야 / 시동 / 시매니저 / 시카고걸 / 썬다운 / 쑤우쑤우 / 쓔쓔
[ㅇ] 아가야 / 아야어여 / 아이스크림 / 안녕내게다가와 / 알콩/ 애를도라도 / 얍스 / 어린왕자 / 어화둥둥 / 여니 / 열럽 / 영쓰 / 예헷 / 오빠설렘사 / 오세훈의각시 / 올봉 / 왕 / 요거트 / 요맘때 / 용이 / 우유퐁당 / 우주최강 / 윋드유 / 윌리웡카 / 윤슬 / 윤천사 / 은하수 / 이과생 / 이레네 / 이야핫 / 일루와
[ㅈ/ㅉ] 자몽이제일조아 / 젤라 / 종달샘 / 종대마님 / 종스팸 / 종이니니 / 종이인형 / 종종걸음 / 지블리 / 짝짝 / 짱구여친 / 쫑니 / 쮸쀼쮸쀼 / 찌개 / 찐빵
[ㅊ] 찬샤 / 찰떡 / 체리 / 초코 / 초코붕 / 초코파이 / 쵸파/ 치드봉봉 / 치즈돈가스 / 츤데레
[ㅋ] 카프 / 콩부인 / 쾌지나첸첸나네 / 큥쓰큥쓰 / 큥큥 / 키엘 / 킴벌리
[ㅌ] 타니 / 털ㄴ업 / 테라피 / 툭툭
[ㅍ] 퓨어 /핑구
[ㅎ] 핫초코 / 해피 / 햄버거 / 행쇼 / 허니잼 / 형광등 / 호이호잇 / 훈훈 / 희망 / 히밤
[영어] DB /dprth8391 / HaMo / YUNE
[숫자] 0408 / 0616 / 0618 / 0622 / 1226 / 3관왕센 / 500원 / 84니니
[특수문자] #두근
분명 암호닉을 신청한 것 같은데 목록에 내가 없다, 하시는 분들 몇몇 계실 거예요. 그런 분들은 아마 암호닉 정리할 때 자기 암호닉 언급을 안 해주신 분들이거나, 제 실수로 누락되신 분들입니다.
난 분명 15화에 암호닉생존신고or신청을 했는데 누락됐다, 하시는 분들 계시다면 꼭 말해주세요 :)
당분간 암호닉 신청은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