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 전정국 00
* * *
나이가 지극히 드신 체육선생님은 갑자기 생겨버린 수업이 여간 귀찮았던 것인지 우리에게 무얼 하고싶은지 물었고, 혈기왕성한 19세 아이들은 연신 짝피구를 외쳐댔다.
그 덕분에 우리 반은 이번 시간에 짝피구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대충 공을 우리에게 던져준 뒤 사라지셨고, 반 아이들은 공이 주어지자마자 짝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였다. 홀수와 짝수로 나누자, 그냥 원하는 사람끼리 짝을 짓자, 귀찮으니 그냥 서 있는 대로 대충 하자 등등 아이들의 의견은 모두 제각각 이었고, 몇 분을 실랑이 한 끝에 체육부장이 결론짓기로 하였다.
"그냥 자기 짝꿍이랑 하자."
맙소사. 짝꿍이라 하면, 교실에서의 짝꿍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내 짝은 전정국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짝피구를. 내가 전정국의 등허리에 붙어 공을 피하는 상상을 하니 치가 떨리도록 소름끼쳤다.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 무용지물 이란걸 깨달았다. 이미 아이들은 제 짝궁을 찾아가 짝을 짓고 있었고, 체육부장은 팀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꼼짝없이 전정국과 짝을 해야만 했다. 얼굴을 오만상으로 찌푸린채 전정국의 옆으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자, 뒤에 있는 사람이 맞으면 아웃이야! 경기 시작한다!"
나는 자연스레 전정국의 뒤에 섰고 (나보다 족히 15cm는 더 큰 전정국을 내가 막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소심하게 전정국의 셔츠 자락을 잡았다. 대충 설렁설렁 하다가 공에나 맞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야, 꽉 잡아"
"..?"
"내 허리 잡으라고"
전정국은 손수 내 팔을 끌어 제 허리에 감게 했다. 잊고 있었다. 전정국은 승부욕이 대단한 아이였다. 전정국이 유일하게 집중하는 수업은 체육시간 이였고, 전정국은 달리기면 달리기, 축구면 축구, 농구면 농구 뭐 하나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또, 그만큼 승부욕도 장난 아니였다. 나는 전정국의 허리에 감긴 내 팔을 보며 인상을 썼다. 느낌이 이상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의, 그것도 불과 몇 분 전까지 나와 신경전을 벌이던 아이의 허리를 감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정국은 아무래도 엉거주춤 제 허리를 감은 내 팔이 영 못미더웠는지, 자신의 두 손으로 허리를 감은 내 팔을 단단히 잡고 게임에 임했다. 워낙 운동을 잘 하는 전정국 이였기에 상대 팀에서는 집중적으로 우리를 향해 공을 던졌고, 움직임이 느린 나는 민첩한 전정국의 몸을 따라가느라 진을 뺐다. 전정국은 우리 쪽으로 공이 날라오는 족족 피했고, 혹여 뒤에서 공격을 할 때면 나를 등 뒤로 숨기며 내가 공을 맞지 않게 잘도 피해다녔다.
'휘익-'
결국 전정국과 나만이 코트에 남은 채 게임은 끝이 났고, 승리는 우리 팀의 것이 되었다. 나는 게임이 끝나자마자 전정국의 허리에서 손을 풀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고생했어"
바닥에 주저 앉은 날 보며 전정국이 내게 말했다. 나는 전정국의 말을 듣자마자 벙쪄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채 종이 칠 때 까지 그 자리에서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처음 보는 전정국의 다정한 모습이었다. '다정하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방금 전의 전정국은 굉장히 다정했다. 그리고 그 다정함은 왠지모르게 낯설었다.
*
체육 시간이 끝난 후, 나는 괜히 부끄러워 다음 수업시간 내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옆에 앉은 전정국이 신경쓰여 고개도 쉽게 돌릴 수 없었다. 다행히도 이번 시간은 점심시간 이였고, 나는 우리 학년이 늦게 먹는 날 임에도 종이 치자마자 친구를 끌고 급식실로 향했다. 전정국과 마주치기 싫었다.
"야 오늘 우리 늦게 먹는 날인데, 뭐 이리 빨리 나왔어? 다리 아픈데..."
내 친구 지원이는 급식실로 향하는 내내 궁시렁 댔고, 나는 배고프다는 핑계를 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정국을 피해 일찍 도착한 급식실은 다른 학년의 줄로 꽉 차 있었고, 나와 김지원은 급식실 밖에 줄을 설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줄어들지 않는 줄의 행렬에 괜히 나왔나 싶기도 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거나 손장난을 치며 얼른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한 무리의 학생들이 갑자기 줄의 앞쪽에 끼어들었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있던 나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고개를 돌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전정국과 그의 무리가 서 있었다.
"뭐야 쟤네.. 왜 새치기 해?"
지원이도 짜증난다는 듯 내게 속삭였고, 나는 전정국의 무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탄소야~"
너무 끈질기게 쳐다 본건지, 무리에 섞여있던 정호석과 눈이 마주쳤고 정호석은 반갑다는 듯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덕분에 시선은 모두 내게 집중 되었고 전정국도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정호석은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민망함에 정호석의 시선을 회피할 수 밖에 없었다.
"탄소야~ 지금 밥 먹어?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
"나랑 같이 먹을래? 기다리기 힘들잖아!!"
정호석의 말은, 자신과 함께 새치기를 해서 밥을 먹으면 더 빨리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뜻 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정호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정호석과 전정국의 무리는 다른 아이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양아치 짓은 절대 하고싶지 않았다.
"가"
"응?"
"가라고. 그리고 너네 뒤로 가서 서. 너희가 뭔데 힘들게 줄 선 애들 앞에 끼어들어?"
"..."
"늦게나온 주제에, 다른 애들한테 피해 주니까 좋아? 지금까지 기다린 애들은 뭐가 돼? 밥 먹고싶으면 뒤로 가서 줄 서"
어디서 저런 깡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 나는 겁도 없이 정호석에게 불만을 토로했고, 정호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화가 난건가, 뭐 화가 나면 어떠한가. 나는 이미 참을대로 참았고 잘못한건 정호석과 그의 친구들 이었다. 나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던 상관 없다. 나는 당당했고 혹여 정말 해코지라도 한다면 정말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역시.."
"..?"
"넌 정말 매력있어!!"
또 벙쪘다. 정호석은 눈까지 크게 뜨며 다시 한 번 내게 매력을 운운했다. 정호석은 말을 끝내고 다시 제 친구들에게 돌아가 정말로 친구들을 끌고 줄의 맨 끝으로 향하였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정호석이 정말 맨 뒤로 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무리에는 전정국도 포함되어 있었고, 전정국은 나와 정호석이 얘기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정호석의 무리가 맨 뒤로 사라지자 지원이와 내 주변의 아이들은 무슨 대단한 사람을 본 것 처럼 나를 바라보았고, 지원이는 박수를 치며 내게 말을 했다.
"와 김탄소..."
"뭐"
"대단해.."
부끄러웠다. 나는 연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지원이의 손을 저지한 채, 드디어 줄어들기 시작한 행렬을 따라 서둘러 급식실로 들어갔다.
밥을 먹는 내내 정호석의 행동과, 나와 정호석을 바라보던 전정국의 눈빛이 신경쓰여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꾸역꾸역 배를 채웠다. 급식을 먹고 나온 뒤, 오늘 급식이 부실했다며 나를 매점으로 이끄는 김지원을 따라갔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나보다. 분명 우리보다 밥을 늦게 먹었을 정호석과 전정국은 매점 의자에 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나는 정호석이 나를 발견하지 않길 바라며 살금살금 아이들 속에 파묻혔다. 사람이 많으니 나를 쉽게 찾지는 못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초코우유 하나를 주문했다.
아이들이 붐벼 나를 숨길 수 있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카운터에 득실대는 아이들로 인해 팔이 짧은 나는 아주머니가 건네주시는 초코우유를 쉽게 건네 받을 수 없었다. 한창을 허우적대며 몸부림을 치던 찰나, 대뜸 뒤에서 팔이 하나 튀어나왔고, 나의 초코우유를 집었다.
"어, 어.. 내 우유..!!"
나는 바보같은 소리를 내며 팔이 튀어나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땅콩만한게 팔도 짧네"
팔의 주인은 다름아닌 전정국이었고, 전정국은 초코우유를 내게 내던지듯 쥐어주고 다시 사라졌다.
*
어떨결에 초코우유를 받아들고, 내게 어디 갔었냐며 잔소리를 하는 김지원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채 교실로 올라왔다. 아까 매점을 나올 때 분명히 정호석과 전정국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아직 교실에 올라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십여분 정도 남은 점심시간을 지원이와 수다를 떨며 보냈다.
"비켜"
어제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로 배를 잡고 이야기하던 중, 비키라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고 내 뒤에는 전정국이 서 있었다. 전정국의 시선은 내 옆 자리에 앉아있는 지원이에게 향해 있었다. 아마 지원이에게 비키라고 한 모양이다.
"아, 미안..!!"
지원이는 당황하여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수업 종이 치려면 멀었는데, 왠일로 일찍 들어온 전정국이 매우 신경쓰였다. 전정국은 지원이가 떠나자마자 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휴대폰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아까의 일을 고맙다고 해야할지, 심각하게 고민 되었다. 어쨌거나 전정국은 나를 도와주었다. 남에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지라 혼자 고뇌하며 끙끙댔다.
"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전정국이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혹시 지원이가 자기 자리에 앉아 있던 것이 불쾌했던 걸까?
"어, 어..?"
"새치기같은거, 안 해"
"..응?"
"끼어든거 아니라고. 나랑 정호석은 축구부 프리패스 쓴거야"
축구부 프리패스라 하면, 축구부 아이들이 점심 시간에 순서에 상관없이 먼저 점심을 먹게 해 주는 제도였다. 우리 학교 축구부는 꽤나 유명했고, 점심시간에 연습을 하는 축구부 아이들을 위해 생긴 것이였다. 전정국과 정호석이 축구부인지는 몰랐다. 전정국의 말을 듣고보니, 아까 내가 정호석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 굉장히 민망했다.
"딴 애들은.. 새치기 맞는데, 나랑 정호석은 아니야"
내게 그런 취급을 당한게 꽤나 억울했던 것인지, 연신 새치기가 아니였다고 말을 했다. 그 덕에 나는 배로 민망하였다.
"아.. 오해해서 미안."
"..."
"그리고, 아까 고마워 매점에서.."
어떻게든 민망함을 없애보고자, 전정국에게 매점에서의 일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별 게 다 고맙네"
전정국도 민망했는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애꿎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 * *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어제 올린 2화가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워서 어쩔줄 몰랐습니다ㅠㅡㅠ.. 많이 부족한 글 임에도 재밌다고 댓글 남겨주시는 독자님들 덕에
힘이 막 나요 불끈불끈!! 오늘은 조금이나마 덜 까칠한 정국이를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만족 하실련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bgm도 깔아봤는데
어울린듯 안어울리는 느낌..☆★ 꾸준히 제 글 읽어주시는 분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암호닉 신청해주시는 분들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ㅠㅡㅠ
암호닉 신청하신 분들은 추후에 텍스트 파일을 공유하게 된다면, 따로 번외편 같은 것을 챙겨드릴 생각입니다..♥ 그럼 오늘도 읽어주신 내 사랑들 고마워요! 좋은 밤 되세요 :)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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