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작은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w. 월백
세상은 아주 작은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수천, 수억 개의 원이 모여 점을 이루고 점이 모여 하나를 이룬다. 창 밖으로 보이는 비 오는 거리의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길가에 있는 아주 작은 나뭇잎도 작은 숨구멍을 내놓는다. 구멍이 모여 하나의 면을 만들고 그것이 나뭇잎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모든 것들이 같은 이치였다. 예를 들자면 김명수는 세모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각형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얼굴형에 역삼각형의 몸. 나는 우스갯소리로 그를 늘 놀렸다. 명수는 내 말에 누가 입 꼬리를 양 옆에서 잡아 당긴 것처럼 웃었다. 그러면서 언제나처럼 탁자 위로 뜨거운 귤차를 올려 주었다.
나는 작은 나뭇잎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빙빙 돌렸다. 뜨거운 김이 솟아 오르는 귤차 안으로 잎을 톡 떨어뜨리자 잎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비 오는 날이면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걸 좋아했다. 꾸벅꾸벅 졸면서 찻잔 속으로 코를 박을 뻔하면 명수는 가만히 고개를 받쳐 주었다. 사실 나는 비 오는 날이 좋은 것이 아니라 비 오는 날의 명수를 좋아했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손으로 턱을 괴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코 끝에 걸쳐 놓은 안경이 간당간당 매달려 있을 때까지 멍하니 밖을 보는 일이 허다했다. 명수는 식초에 푹 절여 시들시들해진 무 같은 사람이었다. 두 마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고 누군가 자신을 부르거나 건드려도 늘 먼 곳만 바라보며 스쳐 지나갔다. 김성규, 하고 부르는 날이 있다면 그의 기분이 어느 때보다도 좋은 날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뾰족하게 날을 세우지 않았지만 둥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그마저도 세모꼴을 닮았다며 웃었다. 명수는 이따금씩 책장을 팔락이며 다시금 창 밖을 보았다. <차가운 피부><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손가락 끝으로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작은 책을 두드리면서.
명수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나는 그 때 한창 음악에 고취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독 나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집중해서 읽던 책의 주인공이 온갖 퍼즐 종류를 모으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그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입되어 퍼즐을 샀다. 그것이 몇 달이 지나 시들해지면 그 다음에는 뜬금없이 작곡에 꽂혔다. 인터넷 기사에서 어린 나이에 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서점에 달려가 작곡 책을 가득 사 오면 몇 달 뒤 먼지 낀 책장에 켜켜이 쌓였다.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열정적으로 무대를 휩쓰는 밴드의 무대를 본 후로는 갑작스럽게 밴드를 시작했다. 나는 설에 받았던 용돈과 교과서 사이에 꽂아 숨겨 놓았던 쌈짓돈을 쥐고 붉은색 기타를 샀다. 가장 낮은 가격은 초보들이 사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자존심에 그보다는 조금 더 비싼 기타를 샀다. 작곡 책이 있던 칸에는 기타 입문 책이 같이 꽂혔다. 딱 두 달이 지난 뒤 나는 밴드를 같이 할 멤버를 구하러 학교 곳곳을 쑤시고 다녔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장장 6년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만나 사랑하고 연애하고. 나는 늘 목마른 사람이었다. 누군가 끊임없이 내게 관심과 애정을 쏟아주길 바랐고 아주 사소한 변화도 눈치채 주길 바랐다. 길 가다가도 수십 번씩 바뀌는 감정의 변화들, 온전히 나를 위한 말들. 이기적이고 맹목적인 애정을 갈급했다. 명수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밥 먹었어?’ 라는 짧은 한 마디도 힘든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6년의 세월을 함께 있었던 이유는 김명수가 계속 내게 잔류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몇 번씩 성질에 못 이겨 깔딱거리는 숨으로 소리를 지르고 이별을 통보하고 나면 명수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면 나는 어느 새 또 그의 등허리를 껴안고 있었다. 가슴에 무언가 유착된 것처럼 기댈 무언가가 없이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가 나를 내 뿌리 째 부정하게 만들고 흔들어 놓는 것이 싫었다. 미련이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늘 명수 쪽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시 돌아가고 또 사랑을 원했다. 지나간 추억에조차 외면 받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릴 까봐. 명수는 언제나 묵묵했다. 잠잠하고 담담하게. 그는 이기적인 내 곁에 머물렀다. 늘 비 오는 창가를 바라보면서. 한 없이 추락하는 빗방울을 쫓으며.
그는 말했다. 자신의 세상은 작은 유리 시계의 상자 안이라고. 숫자 사이를 아주 느리게 돌아가고, 작은 초침 소리 외에 모든 것이 정적인. 가끔은 너무 단조로워서 부수고 싶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가 쏟아져 내릴 때 모든 것이 변해서라고 말했다. 0.1초의 짧은 시간 사이에 빗방울의 위치가 바뀌고 크기가 달라지고 그게 세상을 동적으로 보게 만들어준다는 말이었다. 같은 의미로 명수는 눈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느리게 돌아가는 시계처럼 천천히 내려와 세상을 멈추어버리기 때문에. 명수는 빗방울이 흐르는 창문 위로 검지를 지그시 눌렀다.
이번 여름은 지독히도 비가 쏟아졌다. 3일 정도를 제외하고는 한 달 내내 비가 내렸고 일기 예보는 온통 비 소식이었다. 그 한 달 동안의 명수는 죽기 직전에 가장 건강한 사람처럼 6년 중 최고로 밝은 모습이었다. 그는 노르스름한 색이 완연한 에그타르트를 내게 사다 주었다. 꿀을 바른 겉면은 바삭하게 부서졌고 커스터드 크림을 섞어 넣은 달걀은 적당히 부풀어 올라있었다. 갓 구운 빵을 사다 주거나, 율무와 아몬드를 갈아 넣은 우유와 조간 신문을 아침마다 가져다 주었다.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바라 왔었던, 나를 위한 일련의 애정들을 한 달 사이에 전부 보여주었다.
성규야.
응?
비 맞고 다니지 마. 명수는 집 앞에 쪼그려 앉아 비를 맞던 내 앞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는 얇은 페브릭으로 된 반바지와 가슴 골까지 깊게 파인 브이넥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비를 맞아 축 처진 머리카락이 눈에 척척 달라붙었다. 나는 따가운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비.맞.고.다.니.지.마. 명수의 말이 짧게 메아리 쳤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었던 것이 언제였지. 혹은 걱정의 말을 해준 것은 언제였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나는 그 날을 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조화와 부조화를 이루던 그 순간. 비에 씻겨 내려진 거미줄. 빗방울을 머금은 나뭇잎. 손바닥 위로 기분 좋게 퍼지는 물방울의 감촉. 김명수의 미소. 그것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아름답고, 정적이었던 순간이었다.
이듬해 가을. 명수는 장마가 끝나던 즈음 사라졌다. 비가 완전히 멈췄을 때였다. 여름이 지났다고 비가 완전히 그치는 것은 아니었으니 가을에도 비는 내렸다. 다만 그 때와 같은 비가 아니었을 뿐이다. 사라지기 전에 명수는 내게 물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한 적이 있냐고. 멈춰버린 세상 안에서 벗어나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을 본 순간,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 때.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기억하기를 염원한 적 있냐고. 나는 그가 떠난 빈 자리를 바라 보며 귤차 위에 이파리를 떨어뜨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저 느낄 뿐이었다. 너는 그래서 떠난 걸까. 단조로움이 가득한 작은 시계 상자를 깨고, 네가 그토록 염원하던 순간을 맞이 했을 때. 너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떠난 것이었을까.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가버린 걸까. 명수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몰랐다. 그가 사라진 뒤, 내게 유착되어 있던 것들을 명수로 채웠듯이 나라는 존재가 그의 무엇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를 이루던 것의 경계가 부서지고 아주 작은 점들이 깨어져 나가는 순간. 모든 것은 본연의 모습을 잃는다. 아주 작은 세모로 이루어져 있던 명수는 어느 순간 끄트머리부터 부서졌다. 쥐가 치즈를 갉아먹은 모양처럼 깨져버린 그는 더 이상 세모가 아니었다. 점철된 것처럼 억지로 붙어있던 점들은 칼로 싹둑 자른 듯이 떨어져 나갔다. 명수는 스스로 조금씩 자신을 부서뜨리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왜 떠났는지.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었고 나는 우리가 다름을 인정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돌아올 수 있게 여지를 남겨두는 건 내 몫이었다. 오로지 김성규의 몫.
탁자에는 나 홀로 앉아 있었다. 나는 찻잎을 손가락 끝으로 푹 눌렀다. 창문 위로 롤러코스터처럼 돌아 내려오는 빗방울을 보며 명수의 말을 생각했다. 비 오는 가을은 지난 여름처럼 비가 많이 내렸다. 늦은 매미 소리가 들렸다. 탁자 위에는 버림받은 책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차가운 피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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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얘기네요ㅎㅎ
요즘 글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작문 공부?
글잡에 올지는 미지수네요. 바빠요 많이많이... 반가웠어요 오랜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