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 전정국의 일기
00
" 정국아, 밥 먹어야지. "
형이 떠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그 3년동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건 자잘한 모래들이었고, 곁을 지나가는 누군가를 애써 외면하며 허상에 살았다. 여전히 불만 보면 무서웠다. 집 안 가스렌지를 들어냈고 서랍 속에 처박혀 있던 라이터들을 버렸다. 여전히 불만 보면 캄캄한 밤 속에서 울고 있을 형이 떠올랐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심장이 뛰는 게 뛰는 게 아니었다. 눈에서 떨어지는 건 물이었고, 늘 그랬기에 굳이 닦지 않았다.
" 정국아, 학교 가야지. "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더라. 형을 보내고 난 후부터였던가. 형을 보냈던 그날이 떠올랐다. 뜨거운 곳에서 떠났던 형을 뜨거운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화장터에서 그리운 사람을 보내는동안 나는 혼자서 형이 차가운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리라. 형은 돌아가서 나를 항상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믿은 지도 벌써 2년째였다. 처음 1년은 그렇게 허무하게 가버린 형이 원망스러웠고 그 다음 1년은 매일 일기를 쓰며 버텼다. 말이 일기지 편지였다. 형에게 보내는, 그리고 차마 하지 못 했던 말을 가득 적은 낡은 노트 한 권. 형이 엄지 손가락만 한 동전으로 사준 노트였다.
마지막 1년은, 지금의 나는.
" 정국아. "
눈물이 났다. 늘 흐르던 게 오늘은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참 오랜만에 손을 움직였다.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내렸다. 나는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빛이 들어왔다. 참 오랜만의 빛이었다. 숨이 막혔다. 답답했다. 코와 입을 막고 있는 이것 좀 떼주세요. 갑자기 들어온 빛에 눈을 찡그리며 끔뻑였다. 여기가 어디지.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용했고, 고요했다. 형을 잃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조용하고 고요했는데.
" 정국아. "
형?
목소리가 들렸다. 형이 아니었지만 형을 불렀다. 형의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형만큼이나 다정했다. 곧 코와 입이 시원해졌고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형?
형이 아닌 걸 알고 있었지만 입을 뻐끔거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게 왜 이러지. 손을 들어 목을 잡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나오던 목소리가, 아니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잘 나오던 목소리가 대체 왜.
" 정국아, 정신이 들어? "
01
정국이가 눈을 감은 지 벌써 3년째였다. 한동안 보지 못 했던 얼굴이 고생을 많이 한 듯 많이 까끌해져 있었다. 몇 년만이지. 10년만인가. 까마득한 첫만남을 더듬거렸다. 기억하고 싶었지만 기억할 거리도 없는 그런 사이였다. 정국이와 나는.
" 정국아, 밥 먹어야지. "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건 달리 없었다. 취미 축에도 끼지 못 하는 책을 들고 와서는 몇 장 넘겨보다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문득 시선이 닿은 정국이 팔에 주사바늘이 가득했다. 너는 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있기에 이 세상과 등을 지게 된 걸까. 아줌마는 벌써 5년째 너를 그리워하고 계셨다. 너를 곁에 두고 안아주기에도 부족했을 그 시간을 허무하게 보냈다며 여전히 자책하고 계셨다. 네 손을 잡았다. 너는 이렇게도 따뜻한데 대체 왜.
" 정국아, 학교 가야지. "
타버린 정국이네 집을 갔다 왔다. 정국이와 친한 형은 이미 떠나버렸다고 했다. 새카매진 집에서 남은 건 낡은 노트 한 권뿐이었다. 먼지와 잿가루가 쌓여 있는 걸 애써 털어 가져왔다. 전정국. 석 자 이름이 삐뚤하게 적혀 있었다. 너는 이렇게도 커버렸는데 네 글씨체만큼은 그대로구나. 노트 첫 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멋진 윤기 형이 사랑하는 정국이에게 준 노트. 더이상은 읽으면 안 될 것 같아 노트를 덮어 정국이 베개 옆에 올려두었다. 아주 오랜 꿈을 부디 너의 사랑하는 형과 함께 하기를.
" 정국아. "
너는 언제쯤이면 이 세상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을까.
책을 넘기고 있었다. 늘 보던 장이었지만 보고 또 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고 또 보던 그 장을 넘기려고 할 때즈음, 정국이 눈가에 조그맣고 투명한 게 반짝거렸다. 조금 더 가까이 보았을 때 정국이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손을 올려 그것을 닦아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국이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듯 했다. 눈을 조금씩 끔뻑거렸고 입을 달싹이길래 호흡기를 떼어냈다.
" 정국아, 정신이 들어? "
정국이 눈이 나를 향했다. 허공에서 닿은 시선이 맑았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깨어난 기분이 어때, 정국아. 사람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놀란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정국이의 손이 올라와 내 볼을 스쳤다. 다시 떨어진 정국이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날 기억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아. 다만, 난.
다시 돌아와준 너에게 참 고마워.
00-1
" 형, 이거요. "
" 인마, 갖고 싶은 걸 고르랬더니 이딴 걸 고르냐. "
" 이거 갖고 싶어요. "
17세, 여자에 관심이 많을 나이에 정국은 만난 지 고작 몇 개월 된 윤기에게 맑은 미소를 지으며 노트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정국과 노트를 번갈아보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은 윤기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혀를 차며 점퍼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만 원짜리밖에 없는 걸 확인하고는 바지 주머니를 더듬거리던 윤기가 이내 뒷주머니에서 오백원짜리 동전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는다. 가게 아주머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보고는 노트를 안고 해맑게 웃음을 짓고 있는 정국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사내새끼가 무슨 노트야, 노트는. 공부도 안 하는 게. "
" 일기 쓸 거예요. "
" 야, 일기는 아무나 쓰냐? "
" 형도 쓰잖아요. 저도 쓸 거예요. "
" 웃기네. "
2010년 9월 9일
윤기 형이 노트를 사줬다.
기분이 좋다.
윤기 형이 처음으로 사준 선물이다.
윤기 형에게는 아직 말을 못 했는데 형은 참 멋진 사람이다.
형 사랑해요.
2015년 9월 9일
잠에서 깼다.
오랜만에 연필을 잡아서 그런가 글씨가 이상하다.
예전에 일기를 쓸 땐 윤기 형이 몰래 보려고 해서 방문을 잠그고 썼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전정국의 일기 끝.
아 맞다 형 사랑해요. 많이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