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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장마는 지겹지도 않나. 어떻게 매년 와. 매년. 기울어진 우산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신발 코에 툭, 떨어졌다. 아이씨. 양말도 젖겠네. 물이 안튀게 조심조심 걷느라 느려진 발을 바쁘게 옮기기 시작했다. 이왕 젖은 몸 한시라도 빨리 이 눅눅한 기분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라도 맞으며 날려버리고 싶다. 분명 그랬는데. 우지호? 우지호 너 맞지? 눈치없게 어깨를 탁 치며 아는 척하는 표지훈 때문에 다 망했다.
에어컨은 커녕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튀기는 물방울 하나 막아 줄 곳도 없는 어느 건물 처마로 날 이끈 표지훈은 속도 좋게 하하, 웃고는 반갑다며 말문을 틔웠다. 표지훈이 내 주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라면 훨씬 전, 그러니까 표지훈이 내 검지 손가락보다 살짝 크게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알고있었다. 그래도 못 본 척 괜히 얼굴을 숙이고, 괜히 우산을 기울여서. 신발 앞코까지 젖어가며 널 피했는데. 눈썰미 좋으신 표지훈은 내 노력을 모두 수포로 만들었다. 갖가지 욕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애써 감추며 해맑은 표지훈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던졌다. '난 너를 만나는 게 상당히 껄끄러워' 라는 의미가 내포된 그 미소는 무참히 씹혔다. 내 잘못이지.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던 표지훈을 잊고있었다. 어색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표지훈은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우리의 고교시절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그 때 송민호랑 니랑 나랑 엄청 붙어다녔잖냐. 기억하지?-어. 기억해. 송민호, 니 이름이 왜 안나오나 했다. 눈을 꾹 감고 한숨과 함께 긍정의 대답을 내뱉었다. 어떻게 잊겠어. 송민호를. 새학기가 시작되고 다시 학교로 나온 날. 표지훈과 송민호는 무슨 생각이였는지 그 날부터 나를 죽기 살기로 따라다녔었다. 1학년도 그렇다고 완전히 2학년이라고 불리기도 뭐한 1학년 겨울방학을 시작하는 날, 얼마없는 문과 남자반에서 표지훈과 송민호 그리고 나는 처음 만났다. 미리 2학년 반을 모이게 한 자리에서 이 새끼, 저 새끼 찾아가며 반갑게 인사하는 친구들 사이에 살갑게 인사를 건네던 그 둘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내 인생 최악의 상황 5초 전이라고. 그 때 난 낯설었던 그 얼굴들을 기억에서 제외했어야했다. 쓸데없이 기분이 좋았던 그 날만 생각하면 난 아직도 땅을 치고 후회한다.
-안녕 우지호
누군진 모르겠지만 꽤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둘의 얼굴을 확인했다. 표지훈, 송민호, 깔끔히 고정된 이름표엔 그렇게 써있었다. 그래 안녕. 답지않게 밝은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찾아앉았다. 알고보니 처음 본 그 둘은 앞으로 지겹도록 볼 짝과 뒷자리였고 . 그리고 그 앞은 먼저 와서 제 눈치만 보고있는 김유권이고. 방학식만 끝나면 김유권이 피자 산댔는데... 싼 걸로 대충 때우면 진짜 약속이고 뭐고 도움의 '도'자도 없는 줄 알아라. 이 용의주도하지 못한 새끼 그거 하날 못 숨겨서 걸리고, 끙끙거리면서 짝사랑만 하고있냐. 쯧쯧거리며 두 줄 앞에 앉은 김유권의 머리통에 시선을 뒀다. 어제만해도 당당하더니 막상 오늘 이민혁을 보니 걱정이 되는지 자꾸만 힐끔힐끔 돌아본다.
입에 걸려있던 웃음을 지우고 턱을 괴었다. 톡톡- 습관처럼 책상을 두들겼다. 솔직히 김유권 혼자만의 비밀을 이민혁한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제가 친구 짝사랑에 재를 뿌릴만큼 몰상식한 놈도 아니였고 아웃팅이 되는 순간 어떤 식으로 무너져가는지 알고있으니까, 그런 제 생각을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눈치를 보는 김유권에 마음이 점점 답답해졌다. 당당할 땐 언제고 왜 저래? 심지어 복도에서 민혁을 만났을 땐 우물쭈물하다가 인사하곤 도망쳐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민혁은 김유권 머리나 쓰다듬어주고 있고. 민혁은 확실히 다정했다. 쓸데없이 아주 많이. 김유권 좀 그만 홀려요, 선생님. 교무실을 향하는 민혁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2학년 담임은 학생들이 다 모인 시간이 한참 지났을 때야 들어왔다. 앞문으로 걸어들어 온 민혁은 날 발견했는지 환하게 웃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답한 나는 허, 하는 의미없는 탄식밖에 입밖에 내지 못했다. 김유권은 당황했는지 눈만 이리저리 굴리다 날 쳐다봤지만 나도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였다.
"작년에 내가 가르쳤던 애들도 몇몇 보이네. 한번도 본 적 없는 애들도 있고. 이민혁이고 문학인 건 알고있지?"
아-. 여기저기 탁식이 흘렀다. 확실히 좋은 선생님이긴 하지만 남자보단 여자애들한테 더 인기가 많은 스타일인데. 어쩌다 남자반 담임이야. 교사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텐데. 남자애들 탄식을 들었는지 민혁이 슬쩍 웃는다. 여선생님 기대했으면 꿈깨라. 나 아니였으면 너네 조구현 선생님이 담당했었으니까-. 그제서야 애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럴만도하다 작년까지 학생부장, 그것도 엄청 독했던 선생님이였으니까.
"방학식이라 긴 말은 안한다. 일단 난 처음 담임 맏는 거라서 걱정되는데 알아서 잘 할거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터치는 안할 거야. 보충부터는 지금 모인 이 반에서 조례랑 종례랑 다 할 거고 개학하고나서 자리는 지금 앉아있는 자리 그대로야. 다 앞에 써있는대로 앉은 거 맞지? 보충 시작 날에 보자. 이상"
종소리와 함께 교실에서 나간 민혁의 모습에 유권이 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기본으로 하루에 한번씩 보는 데도 모자라 조례 종례까지 이민혁이라니. 공부는 되겠나 모르겠네. 김유권만 살피는 내 눈 앞에 핸드폰이 불쑥 들어섰다. 번호 알려줘. 표지훈이였다. 뜬금없는 말이였지만 짝이잖아, 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 하며 폰을 받아들었다. 보통 첫날부터 이랬던가. 번호를 꾹꾹 찍으면서도 뭔가 이상한 느낌은 없어지질 않았다. 나중에 보자 우지호. 인사를 건네는 말도 꽤나 다정한 말투라서 한번 더 당황하고. 이미 우르르 나가버린 교실에서 빠져나가는 표지훈 뒤로 나도나도 나중에 봐! 하며 붕붕 손을 흔드는 송미노도 못지않게 이상했다. 불길한 느낌을 뒤로하고 김유권의 어깨를 툭툭 쳤다.
"괜찮냐?"
아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김유권은 꽤나 멘붕상태로 보였다.
아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이민혁이라니! 이민혁이 담임이라니! 피자를 앞에두고 김유권이 씩씩거렸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피자를 집어들었다. 아, 진짜 어쩌지? 이제 개학하면 막 상담 이런 것도 일대 일로 할 텐데. 듣고 있냐? 응 듣고 있어. 건성으로 대답하며 피자를 베어물었다. 맛있다. 공짜라서 더 맛있다. 개새야! 퍽-하고 뒷통수를 강타당했다. 그제서야 조금 아까웠지만 피자를 내려놓고 김유권을 바라봤다. 혹시나 들키기라도 할까 걱정이 잔뜩 붙어 울상이였다.
"야, 그만 걱정해. 그렇게 울상으로 돌아다니면 누구든 눈치챈다. 피자나 먹어. 너만 가만히 있으면 절대 안걸려. 어제는 무슨 상관이냐고 당당하다고 하더니 아웃팅 될까봐. 겁나냐?"
징징- 핸드폰이 울렸다. 표지훈이였다. 핸드폰을 뒤집었다.
"일단 이민혁이 어떻게 행동하든 내 앞에서 하는 것처럼 행동해. 괜히 수줍은 여고생마냥 안절부절 하지말고. 아까 아침에 인사할 때도 엄청 티났어. 병신아"
징징- 또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송민호였다. 둘 다 그렇게 안생겨서는 엄청 산만했다. 어쩌다보니 셋이 단톡방을 만들었는데 확인을 안하니 계속해서 문자를 보낸다. 우리 오늘 처음 만난 거 아니였나. 낯가리는 성격은 어디가고 난 벌써 둘에게 욕을 먹였으며 둘은 아랑곳 않고 친목을 다져갓다. 그러자 지친 나는 둘의 대화를 방관하기 시작했고. 놓고있던 피자를 들어올려 한입 물었다. 앞에는 수심에 찬 짝사랑남이 하나, 핸드폰엔 처음 봤는데도 미친 친화력으로 카톡을 멈추질 않는 이상한 또라이 두명. 어쩐지 아까부터 불길하다 했다.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들기며 절망에 잠겼다. 이 와중에 피자는 맛있네.
안녕하세요? 글잡이 블락비 가뭄이네요.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