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에도 늦게까지 내일 있을 전투에 관한 회의를 한 후, 막사로 돌아온 나는 가슴을 단단히 압박하고 있던 붕대를 풀고서 자리에 누웠다.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나게 될까.
빗소리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막사 안에는 촛불만이 흐릿하게 흔들거렸다. 적국의 황태자가 직접 전장에 나온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피바람을 몰고 다니고,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남자라고 했다.
전정국.
"어쩌면 잠이 드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겠네..."
갑자기 몰려오는 두려움에 이불을 끌어당기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대신 전쟁에 나오길 선택한 후로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없었는데.
같은 날에 태어난 나와 오라버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똑같았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성별이 달랐다는 것? 약간의 시간차이를 두고 먼저 태어난 오라버니 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순간 죽을 뻔 했다. 부정탄다는 이유 하나로. 아버지는 가진 게 많았던 만큼 불안함도 컸던 거겠지.
하지만 어머니가 울면서 필사적으로 말렸고, 어머니를 끔찍하게 사랑하던 아버지는 칼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건진 대신 나는 가장 조그맣고 구석진 방에서 죽은 듯이 살아야만 했다. 어머니도 내가 죽지 않도록 애썼던 것이 많이 눈치가 보였는지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아버지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방을 방문하는 정해진 몇몇 시녀들을 빼고서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고, 성 밖으로도 나갈 수 없었다. 어쩌면 한없이 우울하게 자랐을 나에게 힘이 된 것은 나와 같이 태어난 오라버니 뿐이었다.
머리는 좋지만 몸이 허약한 오라버니는 승마나 무술 수업이 있는 날이면 내게 찾아와서 대신 가주면 안되냐고 징징거리곤 했다. 그러면 나는 혀를 차며 창문 앞에 똑바로 서서 내가 하는 거나 똑똑히 보라며 어깨를 으쓱이며 방을 나갔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내가 가여워서, 혹은 미안해서 나에게 기회를 주는 거였다고.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었기에, 나이가 들어 검도 제대로 들 수 없는 아버지 대신 전장터에 나갈 오라버니의 자리에 내가 남장을 하고 나가기로 결심한 거였다. 오라버니에게만 몰래 통보한 후 나간 내 소식을 전해들었어도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못하겠지. 여자가 전장에 나갔다는 게 알려지면 가문의 수치이니까. 아니면 좋아할려나? 골칫거리가 없어졌다는 소식에.
아무튼 그렇게 결정해서 나온 전쟁터에서 운이 좋았던 건지 지금까지 나는 잘 살아남았다. 잘 살아남은 것뿐만이 아니라 꽤 중요한 직책까지 맡고 있으니 잘하고 있는 거겠지? 비록 나를 남자로 착각하고 있긴 하지만 김태형이라는 친구도 생겼고 말이다.
'그렇게 싸고도시는 아드님이라 처음에는 아니꼬왔는데, 보니까 전혀 아니더만. 비실이.'
.....날 자꾸 비실이라고 말하는 건 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방에 틀어박혀서 꽃잎이나 뚝뚝 따대며 욕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검을 휘두르고 활을 쏘아대느라 팔이 약간 굵어진 것도 같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체질 때문인지 굳은살도 안 생기고 항상 얇았었는데. 기분탓이면 좋을텐데 말이지. 그래도 난 여잔데, 굵어지면 좀 그렇잖아?
돌아가면 오라버니한테 팔 주무르라고 시켜야겠다. 시녀는 절대 안 돼. 직접 시킬 거야. 조금만이라도 힘 쓰는 일이 있으면 울상이 되는 오라버니의 얼굴을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앞으로 네가 이끌어나갈 위치를 올려놓고 왔으니까, 나한테 평생 잘하라고....해야지.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흐려져서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꼭 살아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안좋은 생각하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단 한번도 진 적이 없고, 그가 발걸음을 한 곳이면 초토화가 된다는 황태자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채 눈을 감았다. 모든 건 잘 해결될거야. 나는 촛불을 후 불어 꺼뜨린 채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 *
- 퇴, 후퇴하라!
전날보다도 더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에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아군은 누구고, 적군은 누구일까. 어느쪽으로 기세가 기울은 것인조차도 알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나에게 달아드는 화살을 피해 검을 휘둘렀다. 하늘은 시커맸고, 매섭게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 사이로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 화, 황태자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의 표식인 금색 머리장식이 길게 휘둘렸다. 멀리서도 황태자의 주위만 급속도로 허물어지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많이 죽였으면 비가 세차게 퍼붓는 날씨에도 얼굴이 피로 뒤덮여 본 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적을 마구 베어넘기고 있는 황태자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와의 거리는 꽤 있는 편이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내가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덤비는 것은 바로 죽음을 뜻한다는 것.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세운 전략을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든 황태자를 제지하고, 조금이라도 살아돌아가려면. 나는 말의 옆구리를 세게 걷어차 황태자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어디를 가는 거 - !
나를 부르는 김태형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이미 나를 제지하기에는 늦었을걸. 빠른 속도로 점점 가까워지는 황태자의 모습을 보며, 비에 미끄러지려는 검을 다시 고쳐 잡았을 때였다.
[ 쿠르르릉.. ]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내 뒤에서부터 땅이 갑작스럽게 꺼지기 시작했다. 히히힝!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제서야 오늘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기반이 약하더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비가 이렇게 퍼붓고 몇 천명이 서 있는 이 정도 무게면, 지반이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고.
'황태자와 붙어서 이길 수 없다면, 지형을 이용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최소한 저승에 갈 길동무를 만들죠 뭐.'
김태형이 제안한 것이었다. 그렇지 비실아? 툭, 하고 치며 씩 웃었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긴 한데,
"내가 그 길동무가 될 줄은 몰랐다고-!!"
마지막 말은 쿠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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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라 아직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네요..
처음이라 미숙하고 잘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쓰고 싶어서 올려버렸습니다ㅠㅠ
사극물이라기보다는 동양 판타지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주시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