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하니, 일단은 그렇게. 사실 그다지 믿기지는 않지만."
전정국이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은인이라고? 생명의 은인이라는 건가. 별로 안 믿긴다고 굳이 뒤에 덧붙인 말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듣기에는 썩 괜찮았기에 나는 흠, 하고 긍정의 표시를 했다.
내가 값진 사람이 된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어두운 어린 시절 속에서도 아무리 밝게 자랐다고 해도 이런 은인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듣는 것은 정말로, 처음이였으니 말이다. 큼, 하고 괜시리 헛기침을 한 후 다시 나뭇가지를 고쳐잡자 바로 전정국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방법이 틀렸어."
"응?"
"조금 더 나뭇가지를 일직선으로 세운 후, 다시 해 봐."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내 손에 들려있는 나뭇가지를 가리키는 행동에 나는 톡 쏘아붙였다. 이게 뭘 안다고. 고귀하게 자라신 몸이라 불 붙이는 것은 할 줄도 모를 테면서.
"뭘 안다고?"
"지금까지 했던대로 하고 있었으면 알지 않나? 연기만 나는데 불이 안 붙는거."
"........"
정곡을 쿡 찌르는 말에 나는 눈을 치켜뜬 채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귀신이네, 이 자식.
사실 아까부터 깨어 있어서 내가 헛짓거리 하고 있던 거 계속 쳐다보았던 거 아니야? 하지만 곧이곧대로 그 말을 들어 행동하면 왠지 지는 기분이라 나는 나뭇가지를 그에게 내던지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태자님이 직접 하면 되겠네."
"그러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어깨가 이 모양이라."
".........윽."
"친히 치료까지 해 줬는데, 섣불리 움직이다가 상처가 벌어지면 은인이 고생을 또 해야 되지 않겠어?"
말은 또 잘하네. 딱히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내던졌던 나뭇가지를 다시 주워들었다. 그리고 전정국이 말했던 대로 조금 더 똑바로 세운 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얼마쯤을 말없이 집중하고 있자, 지금까지 고생한 것과 달리 잠시 후에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해냈다!!"
환호성을 지르는 날 보고 전정국은 피식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내뱉었다. 내 말이 맞지?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서 그 와중에 나무는 잘 골라왔네. 그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불이 잘 붙는 나무라 운이 좋았어. 다른 걸 가져왔더라면 계속 해도 불씨는 커녕 연기도 안 났을거다.
"멍청한 것 같지만 운이 좋아 다행이네."
".....후...."
"뭐냐?"
"아무것도."
얄미워 죽겠네. 저걸 진짜 한 대 칠 수도 없고. 나는 주먹을 꾹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전정국은 그런 내 심경은 눈치채지도 못한 건지, 시선을 슥 내리더니 무신경하게 덧붙였다.
"불씨 꺼진다."
"안 돼!!!!"
잔뜩 노려봐주고 있던 나는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가까스로 피운 불씨가 꺼지지 않게 재빨리 마른 나뭇잎들에 옮겨 붙도록 했다. 이 짓을 또 할 순 없어!!!!!
필사적으로 후후 불어가며 고생한 끝에 하룻밤은 무사히 보낼 수 있을 만큼 어느정도 불길이 커지자 나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불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전정국의 목소리가 휙 날아왔다.
"은인, 설마해서 물어보는건데 말이야."
전정국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칼 끝에 물고기 세 마리를 죽 꿰어 타오르는 불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설마, 이게 끝이야?"
"그대는 먹을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십시오."
"형편없구만."
"뭐?"
화가 치밀어 쏘아붙여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못 들은건지 전정국은 내 말을 무시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진짜.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나는 참기로 했다.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한동안은 타닥타닥하고 타오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언제 익어, 나는 불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물고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점점 맛있는 냄새가 나서 견디기가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 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것도 엄청 크게.
"어디서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 거 같은데."
"..........."
"은인은 못 들었어?"
전정국은 웃음기를 굳이 숨기지 않은 채 실실거리며 물었다. 내가 대답할 줄 아냐, 나쁜 놈아. 이제는 제법 어두워져 얼굴 색을 구분할 수 없는게 다행이었다. 큭큭거리며 혼자 웃던 전정국이 웃음을 조금 거둔 채 다시 물었다.
"배고파?"
"........."
"다 익은 것 같은데."
물고기를 꿰어두었던 칼자루를 집어든 전정국이 한 번 돌리며 살피더니 한 입 베어물고는 중얼거렸다. 다 익었네. 그리고는 생선을 하나 빼어 나에게 먼저 건네주었다. 아직까지 창피함이 남아있었지만 배고픔이 더 시급했기에 나는 낼름 받아든 채 구운 생선을 먹기 시작했다. 배고파서 그런지 더욱 맛있었다.
순식간에 한 마리를 먹어치우고 하나 더 먹으려 손을 뻗은 나는 텅 빈 나뭇잎을 보고 당황했다. 뭐야, 내 생선 어디 갔어? 당황한 채로 시선을 들어올리자 구운 생선을 냠냠 맛있게 먹고 있는 전정국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이미 다 먹어치운 한 마리 생선 분량의 가시가 남아있는 것도. 순간 열이 뻗친 나는 왁 소리를 질렀다.
"왜 네가 두마리를 먹는데?!"
"그야 잘 먹어야지 상처가 빨리 나으니까."
"잡은 건 나잖아!!"
"빨리 먹은 사람이 임자지."
"야!!"
나는 그 순간만큼은 전정국이 황태자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진심으로 분노를 담아 크게 야, 하고 소리질렀다. 정말 너무한거 아냐? 물고기를 잡아온 건 난데, 지는 한 것도 없으면서. 그것도 엄청 힘들게 잡은 거라고. 얻어먹은건 자기면서 왜 허락도 없이 두 개나 먹어!!
나는 정말로 억울했다. 아직 배가 채워지지 않아서 욱한것도 있었다. 앞 뒤 가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댄 나는 스릉, 하고 무거운 것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나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전정국이 무표정으로 검을 집어든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 맞다. 아무리 적군이라고 하더라도 얘는 황태자였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큰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겠지. 있더라고 해도 그런 간이 부은 짓을 한 사람은...
소름이 끼쳤다. 망했군, 입 잘못 놀렸다가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두 눈을 꾹 감고서는 이를 악물었다.
첨벙-.
"......?"
하지만 각오했던 고통은 닥쳐오지 않고 그 대신 얼토당토 않는 곳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눈을 슬그머니 떴다. 그리고서는 입을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전정국이 칼끝에 두 마리의 물고기를 꿴 채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정국이 모닥불이 피어있는 자리로 돌아와 다시 불에 생선을 구울 때까지도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무심하게 내뱉었다.
"익으면 먹어."
"아....."
"배고프면 더 잡아오고."
"아니, 괜찮아......."
민망해진 나는 입을 다문 채 애꿎은 생선만을 탓했다. 성이름... 그냥 나가 죽자.
* *
"생긴 것보단 많이 먹네."
"뭐.. 배고팠으니까."
사실 전정국이 두 마리를 잡아온 후로도 배가 차지 않은 슬그머니 '한 마리만 더...'라며 히, 웃어보였고 그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물고기를 잡아왔었다. 총 4마리를 먹어치운 나는 만족스럽게 배를 만지작거리며 자리에 드러누웠고 평화로운 순간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생긴 건 한 마리만 먹어도 배불러 할 것 같이 생겼는데."
"뭐래...하암."
배고픔도 가시고 따뜻하겠다, 슬슬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 나는 하품을 크게 한 번 했다. 내 하품소리에 전정국은 슬쩍 눈을 주더니 입을 열었다.
"은인은 왜 살아?"
"무슨 소리야?"
"아니, 살아가는 이유가 뭐냐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나를 죽이려던 아버지, 나를 외면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어머니, 나를 가여워하는 오라버니. 나의 가문에서 나는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거의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공식적으로는 몸이 약해서 한 번도 외부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가엾는 딸. 오라버니와 쌍둥이인 것을 아는 외부인은 그 누구도 없으니까.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럼 나는 왜 사는 걸까.
"모르겠어."
"나랑 비슷하네."
"응?"
"왜 사는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살아있어야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려가니까."
나는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옆모습이 문득 허전해보인다고 느꼈다. 황태자의 지위에 올라있는 그가, 저러한 말을 내뱉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을 틀어쥐고 있을 그가, 나중에는 한 나라를 다스리게 될 사람이 저렇게 모든 일과 관련이 없다는 말을 내뱉고 있다는 게. 잠시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랑은 다르네."
"....왜지?"
"약속했거든, 살아돌아가기로."
나는 오라버니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다고.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그러니까 지금은, 살아돌아가는 데에 집중할 거야."
내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모르는 체 했다.
짧은 대화 끝에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아, 주변은 곧 벌레들이 간간히 우는 소리만으로 가득했다. 일정한 울음소리에 나는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졸려... 반쯤 감긴 눈 사이로는 쏟아질 듯한 별들이 보였다. 예쁘다... 눈이 거의 다 감겼을 때, 전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에 빠지기 직전이라 그의 목소리는 몽롱하게 들렸다.
"자?"
"으음, 말 시키지 마...."
적군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긴장을 풀고 잠들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엄청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 잘 자네.
* *
저절로 눈이 떠졌다. 원래 남장을 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렸기에 주로 동이 트기 전에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어나보니 주변이 완전히 밝아 있었다. 헉,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전정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는 가슴에 묶여있던 붕대를 확인했다. 다행히 풀어지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한 번 더 단단히 묶은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얜 대체 어딜 간 거야?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봐도 머리털 한 가닥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 앞에 익힌 생선이 들어왔다.
..어제와 똑같이 네 마리.
"...날 진짜 식신으로 보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내가 적게 먹는 편은 아니긴 하지만 어제는 정말, 조금, 많이 배고파서 그랬을 뿐이고! 속으로 울분을 토해냈으나 네 마리였던 생선이 줄어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날 리 없었다. 나는 얌전히 생선을 집어들었다.
"일어났네?"
부스럭,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수풀에서 전정국이 나타났다. 나는 우물거리며 고개를 돌렸고, 그는 내 손에 들린 생선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 때 나는 생선을 또.... 네 마리째 먹고 있는 중이었다. 괜히 억울해진 나는 생선을 반쯤 남기고 내려놨다. 남은 생선을 보더니 그가 말한다.
"왜, 다 안 먹고."
"배불러."
"흠."
전정국은 못 믿는 듯 계속해서 날 바라보다가 내가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속아주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저걸 확 죽여 말어?
"하도 안일어나서 과식으로 죽은 줄 알았어."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돼."
"그런 것 같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내가 생각했던 황태자의 이미지와 많이 다른데. 속으로 전정국을 구해준 것을 백 번쯤 후회하고 있을 때, 그가 날 불렀다.
"은인, 잠깐 이리와봐."
"왜?"
"이게 꽉 안 묶여서."
가리키는 곳은 어제 내가 치료해준 상처였다. 붕대 대신으로 다른 곳에서 잘라낸 것 같아 보이는 긴 옷자락이었다. 그에게서 옷자락을 받아들자 그가 뒤돌고서는 옷을 반쯤 내렸다. 뭐, 뭐! 갑자기 눈앞에 자잘한 근육으로 잘 짜여진 등판이 드러나 내가 당황해서 가만히 있자, 그걸 모르는 전정국은 약간 짜증난 목소리로 재촉했다.
"다시 잠든건가?"
"알았다고요, 알았어."
아무리 사내들과 같이 전장을 누비고 다녀도 벗은 거- 등뿐이라곤 해도- 를 보는 건 익숙해지지 못한 터라, 당황했다. 사실 전정국을 치료해줄 때도 차마 그의 옷을 들추지 못했던 나다. 내가 당황해서 상처를 감아주다가 실수로 붕대 옷자락을 한 번 놓치자, 그는 어떻게 받아들인건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부러운가? 부러울 만도 하겠지. 은인은 말라 빠져서 근육도 없게 생겼는걸."
"놀리지마."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나는 남자다, 난 남자다를 되뇌이며 무사히 일을 끝냈다. 마지막에 날 놀래킨 벌로 힘을 주어 꽉 매듭을 지은 건 당연한 거였고 말이다.
"윽."
"다 됐다."
"지금 복수한 거 아니지?"
"아닌데."
전정국이 고개를 돌려 노려보며 하는 말에도 태연하게 대답한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전정국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곧 상의를 다시 끌어올렸다.
- -
차차 전개 빠르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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