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어나는 계절을 나보다는 한 번 더 겪었단 말이네요. 그렇죠, 뭐. 그러면 혼기이지 않나요? 쌍생아인데 혼사는 무슨... 그리고 어차피 별로 남자에 관심도 없어요. 집안에서 뭐하고 살았어요, 그 오랜 기간 동안. 그러게요, 저도 저 자신이 궁금해지네요. 그래도 딱히 바깥 세상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어요. 처음부터 그렇게만 살아왔으니까, 궁금하지도 않고 나갈 필요성도 못 느끼고.
주제가 무겁지 않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차를 홀짝였다. 전정국은 다과를 손끝으로 건드리면서 자신이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저 태도를 보아하니 유심히 듣는다기보다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는 것 같았지만... 중간에 내 출신지가 담길 뻔한 화제도 등장했으나 적당히 얼버무리며 잘 넘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까지 잡아둘 셈이지. 정말 밤새도록 이야기만 할 참인가. 슬슬 긴장감도 풀리고 열심히 놀리던 입도 아파질 시기였다.
"전쟁에 왜 나왔는지는 말 안해주나요?"
"명을 어길 자신이 없었거든요. 오라버니가 나가야 하는데, 몸이 약하고 칼도 못 집는 게, 나가면 딱 화살받이 될 참인데 그걸 어떻게 눈 뜨고 봐요."
"그래서 직접 나왔다? 그런 생각하기 쉽지 않을텐데. 자신있었나 봐요?"
"보다시피 그 전장통에서 살아남아 여기에 앉아있는 걸로, 괜찮지 않을까요."
당돌한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전정국은 흐응, 소리를 내며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의 눈빛을 받아내자, 전정국은 입꼬리를 끌어당기고는 등받이에 누우며 팔짱을 꼈다.
"검술에 꽤 자신이 있다, 이건가요."
묻는 말에 나는 그가 해보인 것처럼 단지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나는 꽤 실력이 있었다. 처음에 배치받은 막사로 갔을 때 다들 날 무시하고 안좋은 평판으로 수군거렸지만, 첫 번째 전투에서 바로 수군거림은 들어갔고 몇 번의 전투를 통해 내 실력을 인정받았다. 물론, 여기서 허점은 적이라는 데에 있지만....어쨌든. 그 대표적인 예로 김태형이 있었지. 처음에는 완전 적대적이었다가 나중에는 먼저 말 걸고 친해지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순간 떠오르는 친우에 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걘 살았으려나. 내가 앞쪽에 있었으니 아마 충분히 피했을 것이다. 잘 살아있을 거야.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전정국의 말이 툭 날아왔다.
"하긴, 머리는 그닥 좋진 않았던 것 같으니 그거라도 잘해야죠."
"예?"
"솔직히 절세미녀처럼 예쁘지도 않으니 검술이라도 잘해야지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었어요. 아, 은인이 여자니까 이건 오히려 단점으로 쳐야 하나."
지금 내 머리랑 외모를 동시에 깎아내린 기분이 드는데. 미묘한 표정으로 전정국을 쳐다보자 그는 능글맞게 웃어보이며 말을 정정했다.
"농담입니다. 아니, 사실 진담. 아니, 농담."
"........"
"........"
"........"
"사실 진담."
"...놀리시는 거죠, 지금."
"그렇게 느꼈다면 어쩔 수 없고요."
아오 씨 진짜. 차마 성을 내거나 노려볼 수도 없어서 화를 삭이려 고개를 숙인 채 탁상 아래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열아홉이나 되면서 유치하기 짝이 없다. 화를 어느정도 삭인 후 고개를 들다가 다시 전정국의 얼굴을 보자 열이 뻗쳐오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자 또 물어온다.
"화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난 좋은데요, 뭐."
응? 순간적으로 치고들어온 말에 나는 고개를 바로했다. 전정국은 차가 반 정도 남아있는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모금 마시고서는 방금 전 내가 들었던 게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솔직한 모습이 난 좋다는 거였습니다."
"..........."
두근. 진지한 말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약간 당황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방황하느라,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괜히 두근거렸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까도 말했듯이 내 취향은 아니라 착각은...좀."
"착각 안 했거든요?!"
잠시나마 두근거렸던 내가 후회되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헙, 하며 입을 막자 정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창피함에 얼굴로 훅 열이 끼쳤다. 혼자만 태평한 전정국이 얄미워서 나는 조금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계속 전.하.의.취.향.이.전.혀.아.닌.저.와 말하실 건가요."
"나는 더 말하고 싶은데, 은인은 재미없나 봐요."
"아, 그건 아닌데요... 전하께서 피곤하실까봐요. 다친 데도 있으시고..."
방금전까지는 놀려대며 나를 열받게 만들었으면서 저렇게 아쉬운 눈빛을 하고 날 보는 전정국을 보니 또다시 화났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대체 이 짧은 시간 사이에 날 설레게 만들었다가, 화나게 만들었다가 다시 들뜨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별로 피곤하지는 않네요. 피곤해요?"
"그건 아니지만..."
"그러면 더 있죠."
오랜만에 일과 관련이 없는 대화를 하니까 재밌고 편해서요. 덧붙이는 말에 나는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저 자리는 태어날 때부터 온갖 영광된 지위를 가지게 됨과 동시에 떠맡아야 하는 일도 많을 테다. 항상 얼마나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조금 안쓰럽게 느껴져서 보고 있자 왜 그런 표정이냐고 물어온다. 나는 그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올 말은 다 나온 것 같아서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정적 속에 있다가는 날 보는 전정국의 눈빛에 말라죽을 거 같아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싸움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직은 잘 모릅니자만, 결국에는 항상 그랬듯이 이기는 걸로 끝나겠죠. 하지만 아무리 은인이 검술을 잘 한다고 해도 다시 전쟁터에 가도록 허락하지는 않을 겁니다. 전쟁터는 여자가 나갈 곳이 아니니까요."
"아...."
"아쉬워도 어쩔 수 없어요."
"그다지 아쉬워한것은 아닌데. 그런데 저, 궁...."
"아, 궁 안을 구경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됩니다. 가보고 싶은 데 있으면 가보세요."
"그게 아니라...."
기회만 슬쩍슬쩍 엿보다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는 기회인거 같아서 말을 꺼냈는데,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대답을 해준 그의 말에 뜻밖의 수확(?)을 얻었지만 나는 내가 원래 말하려던 말을 했다.
"그럼 전 고향에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내 조심스러운 말에 전정국은 생각치도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눈치였다. 손끝으로 장난치고 있던 찻잔에서 완전히 손을 뗀 그는 양 손을 깍지낀 채 나에게 질문했다.
"돌아가고 싶어요? 여긴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인데."
"당연히 제가 전하와 같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매우 황송하고, 또 좋지만 그래도... 어차피 전쟁터에도 나갈 수 없다고 하면 고향에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지 않나, 해서..."
"안 돼요."
"....왜죠?"
"그냥."
"...네?"
그냥, 이라는 말에 담긴 의중을 전혀 파악할 수 없어서 눈을 가늘게 뜨자 덧붙인다.
"아무튼, 지금은 안 돼요."
"왜요?"
"재밌으니깐."
우스꽝스럽게 변했을 내 얼굴을 보던 전정국이 손가락 끝으로 내 입술을 기분나쁘지 않게 톡 치며 말했다.
"나중에 보내줄테니, 튀어나온 입 넣어요."
"제가 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항의하자 또 발뺌하는군, 이라는 표정으로 날 보던 그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똑똑 소리에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다가, 그의 앞에 앉아있는 날 발견했는지 발걸음이 멈추는 소리도 들렸다.
"죄송합니다, 혼자 계셨던 줄 알고..."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폐하, 라는 말에 귀가 쫑긋하고 섰다. 적나라의 현 황제라고 하면 한때 폭군정치를 해서 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으나, 지금은 병이 들어 거의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황태자-전정국-에게 일을 위임한 상태라고. 황제긴 하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 없는 상태라 볼 수 있었다.
"지금?"
"예."
"어쩔 수 없군."
전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그를 쫓아서 시선을 올렸다. 그는 멀뚱거리는 날 보고서는, 미소지으며 짧게 통보했다.
"난 잠시 갔다오겠습니다. 어차피 별로 시간은 안 걸릴 테니, 여기 있으세요."
"알겠습니다."
"차도 다 마신 거 같은데, 필요하면 더 내오라고 하죠."
그리고선 장단색 옷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전정국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덩그러니 큰 방 안에 혼자 놓여진 나는 한동안 멍청하게 탁상 위로 양 손을 탕탕거리며 퉁기면서 놀다가, 방 안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감상하다가, 그것도 질려서 푹신하고 마침내 기다란 의자 위에 드러누웠다. 말이 의자였지, 거의 침대 수준이었다.
"빨리 갔다온다면서, 길어지나 보네...."
언제쯤 돌아오나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하지. 나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위기감도 없고, 이 곳이 내 나라인듯 마냥 편했다. 사실 따지고보면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이 내 나라이든 아니든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전정국을 죽이려고 했던 과거도, 내가 오라비를 대신해서 현국의 대장으로 싸워서 그랬던 것이지 전정국 자체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사람들을 위해 싸우려고 했던 거지, 내 나라를 위해 싸우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지금 '내 사람' 사이에 들어온 것 같은 전정국을 두고, 나는 예전처럼 냉정해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내 나라에 늦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겠지...
멍하니 누워서 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슬슬 잠이 왔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이미 차도 다 마신지 오래였고, 방 안은 따뜻하고 조용해서 잠이 잘 왔다. 자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반쯤 떠있던 눈이, 완전히 감겨버렸다.
- -
황제 앞에서는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들 얼굴을 하며, 아버지를 위로하던 정국은 황제가 있는 방을 나오자마자 바로 싸하게 얼굴을 굳혔다. 굳혀진 표정 위에는 냉기가 서렸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서서히 죽음이 다가오니 두려워서 찾는 모습이란. 정국의 옆으로 다가온 석진이 말을 걸었다.
"전보다 더 악화되셨습니다."
"걱정할 게 많으니 악화될 수 밖에요.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 뿐인데, 과연 죽고서도 원하는 대로 잘 이끌어 줄지가 걱정되는 거겠죠."
"저 상태라면 올해를 넘기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쯤은 예상하고 있었어요. 이번 전쟁이 끝나면 확장된 영토를 다지는 것과 동시에 잡음이 날 수도 있는 내부 상황을 정리하는 게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안에 담긴, 현 황제의 죽음이 거의 앞으로 다가왔다는 의미를 석진은 모르지 않았다. 즉위 후 어린 황제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압박을 가해올 것이었다. 난폭했던 현 황제와는 달리 유한 성격인 정국은 어린 시절부터 그들의 손에 이리저리 치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예전보다 압박이 덜해진 것은 그러한 손들을 어느정도 쳐내주던 석진의 가문과, 전쟁터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던 정국의 양면적인 모습 덕분이었다.
"이제 주무시러 가십니까?"
"그러기 전에, 할 일이 남아있어서요. 단장도 오늘만큼은 일찍 들어가서 쉬지 그래요. 내일부터는 더 바빠질 텐데."
정국이 건넨 말에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어요, 저도 늙어서 몸이 예전같지 않네요. 누굴 걱정하느라 정신적 피로도 많이 쌓였고.. 은연히 정국을 탓하는 석진의 말에 정국이 허, 하고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괜히 약한 척 하지마요. 누구보다 냉정한 인간이면서."
"냉정해도 힘든 건 힘든 겁니다."
"그러던지...."
석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정국은 문을 나갔다.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져 이미 달이 하늘 중천에 떠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으려나.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 알았다면 침소로 안내하라 할걸. 정국은 방 안에 혼자 남겨져있을 그녀를 떠올렸다. 점점 걸음이 빨라지는 정국을 가만히 바라보던 석진이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바쁘셔서 걸음을 빨리 하십니까."
"왜 자꾸 따라오세요,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서 이러는 거면 충분히 인사는 다 한 것 같으니 이만 단장도 갈 길 가세요."
"혹시 아까 데려온 그 아이 때문이십니까?"
"......."
석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정국이 발을 천천히 멈췄다. 김석진이 말한 '그 아이'는 성이름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멈춘 정국의 등을 보던 석진이 충고했다.
"오늘이야 시각이 늦어서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내일 돌려보내는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누군지 전하께서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아무리 그 아이가 전하를 구해주어서 그러시는 거라고 하셔도 충분한 포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거라고 보는데, 굳이 그렇게 신경쓰시는 일을 모르겠습니다."
"..........."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정을 주지 마세요. 믿는 것은 더더욱 안 되고요."
석진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정국은, 곧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져가는 정국을 바라보던 석진이 한숨을 쉬었다. 누구보다 사람을 경계해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자신조차도 경계하는 전정국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누구보다 정에 굶주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도, 정 때문에 정국이 크게 상처받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혹시나 독이 될까봐.
- -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정국은 긴 의자 위에 누워 곤히 잠든 그녀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이 시각까지 얌전히 깨서 자신이 오기를 기다릴 리 없었다. 아까 나갔을 때 봤던 두 눈동자에는 피곤함이 가득했었으니까.
옆에 다가온 정국은 잠에 빠진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눈길을 확 끌 만한 특출나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수수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계속 눈이 갔다. 정국은 위에 겹쳐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자고 있는 그녀의 위로 덮어주었다. 많이 피곤했던 건지, 미동도 없이 자고 있는 걸 보니 깨워서 다른 곳에서 자게 하는 것보다는 그냥 여기에서 재우는 게 나을 듯 싶었다.
"........."
정국은 그녀의 옆에 앉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고서는 한동안 조용히 지켜보았다. 정말 잘 자네. 가볍게 다물린 양 입술에 시선을 주던 정국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한 번 쓸었다. 손 끝으로 전해지는 보드라운 감각에, 입술을 쓸어보던 정국은 천천히 손을 떼었다.
"....오래 붙잡아두고 싶은데, 왜 사라질 것 같지."
정국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석진의 경고는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다. 김석진은 자신을 그 때의 그 소년으로 보고만 있지만, 자신은 이미 자랐다. 하지만 김석진이 말했던 것들 중에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충분한 포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거라고 보는데, 굳이 그렇게 신경쓰시는 지 모르겠다.
"난 모르는 건가,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정국은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조용히 잠에 든 그녀의 모습만을 바라보았다.
- -
자면서 나도 모르게 흘린 침을 닦으며 몸을 일으킨 나는 찌뿌둥한 몸을 물어내기 위해 한 번 기지개를 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옷에 무슨 소린가 하며 시선을 주었다. 아,
"이거 전정국이 걸치고 있던 옷 같은데."
전날 밤에 전정국이 계속해서 입고 있던 거라 확실했다. 자고 있던 날 깨우지 않고 그냥 옷만 걸쳐주고 간 건가. 들렀더니 자빠져 자고 있는 날 보고 한심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너무 피곤했을 뿐이고, 어차피 전정국이 돌아왔어도 딱히 할 말이 없었을 거 같고.
"그렇다고 해도 또 없네."
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방 안에는 전정국의 머리털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바쁜가... 그동안 긴장감 없이 풀어져있던 그의 모습만 봐서 그런지 머릿속으로는 분명히 바빠서 없겠거니 해도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리고, 전정국이 아주 중대한 잘못을 한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배고파.....!"
아니 날 그냥 놔두고 나갔을 거면 최소한 밥상은 차려주고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정말 너무하네! 어제 먹다가 남은 과자 하나를 발견하고 먹어치웠지만 과자 하나로 배가 차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배려심이 철철 넘치면 뭐해, 이런 사소한 거 생각을 못하는데.
주린 배를 쥐고 열불내던 나는 가만히 있어봤자 해결될 게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일단 여기를 나가기로 했다. 어제 기억으로는 아무데나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으니, 아무데나 들어가서 먹어도 되겠지. 순식간에 몇 개의 과정을 뛰어넘은 나였으나 이상한 점은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나가기 전에, 내 머리상태가 엉망인 거 같으니 그냥 묶는 게 낫겠다.
내가 밤새도록 있던 궁을 나오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몇몇 발견할 수 있었다. 밖에 나오니까 어제와는 다른 풍경이 또 눈앞에 펼쳐져 있어서, 나는 배고픔 때문에 밖에 나왔다는 사실조차 잊고 궁 안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런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가끔 느껴졌지만 전정국의 허락도 있겠거니 하고 무시하기로 했다. ...나 너무 태평한 것 같지.
넋을 놓고 정원들 사이를 지나며 풍경들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저 쪽에서 흰 색과 오묘한 푸른 색이 감도는 궁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다른 궁들을 지나쳐와봐도 저렇게 오묘하고 예쁜 색을 본 건 처음이라, 나는 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말 아름답다....."
무엇으로 만들었을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색이었다. 궁전 자체로는 막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묘한 색이 감도는 색이 신비감을 주고 있었다. 다른 궁들로는 간간히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여기는 사람도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곳 같았다. 안 쓰는 곳인가. 들어가봐도 되려나? 고민을 수없이 하고 있다가 들어가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거기 너!"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말이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나는 화들짝 놀라고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날 부리고 있었다.
"저요?"
"그래, 거긴 왜 기웃거리고 있나? 얼른 제자리로 가지 않고."
나를 제지하는 말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나를 보고 눈썹을 들어올렸다.
"뭐야, 칼은 왜 없나?"
"아, 그게...."
"아. 혹시 인원 보충으로 들어온 건가? 그래서 헤매고 있었나 보군. 따라와. 거기는 네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나는 아니라고 답해주고 싶었지만 어느 새 그 남자는 제 할말만 하고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는 혹시 다 자기 할말만 하고 사라지는 취향인가? 전정국도 그렇고 김석진도 그렇고, 이 남자도..다들 그러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무시하고 내 갈길 가고 싶었지만, 내 발은 남자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 대략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였다. 대련하고 있거나 장애물들 베어넘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연마장인듯 싶었다. 자.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돌렸다.
"일단 임시로 써라."
나에게 내밀어진 검을 보면서 멀뚱, 눈을 굴렸다. 일단 줘서 받긴 받았다면 뭘 하는 건지, 도통. 남자는 그게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나에게 그것만을 주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정말 당황스럽네. 한 고비를 넘으니까 또 한 고비가 나오고. 그 한 고비를 넘으니까 이젠 아예 황무지가 나왔다. 답도 없는 긴 황무지가. 그래도 다시 손에 쥔 검의 감각은 반가운 터라 한 손에 꽉 잡은 채 연마장 안으로 들어갔다. 딱히 무엇을 한다는 생각은 없었고, 대충 상황을 보고 빠져나갈 참이었다.
구석에 검을 벽에 기대어 놓은 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흝어봐도 검을 내려치는 자세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실력자들인듯 해 보였다. 하긴, 여기가 어딘데 어중이떠중이들이 오겠다마냐는. 그 중에서도 내 눈을 끄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대 일로 대련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양쪽에서 들이치는 검들을 유려하게 피하고 정확한 곳만을 노리는 자세가 깔끔했다. 이 대 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밀린다는 느낌 없이, 오히려 두 명을 몰아붙인다는 말이 적절했다. 그리고 결국 이긴 것은 한 명 쪽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집중하고 있던 나는 대련에서 이긴 남자를 보고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대단하네.."
내가 있는 곳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걸어가 물통을 집어들고 마시는 남자를 눈으로 쫓았다. 역시 대장님! 이길 수 없네요. 웃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물을 마시던 남자를 주시하던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날 보더니 물음표가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다. 앗, 나가야 된다는 거 까먹었다. 나는 진짜 왜 이러냐.... 자책하고 있는 사이 다가온 남자는 나를 슥 흝더니 한 마디 뱉었다.
"신입?"
무표정으로 날 보던 남자는 나에게 검을 집으라는 행동을 취했다. 그리고서는 뒤를 돌더니 한 명을 지목했다. 지목당한 사람이 일어나서 검을 집어들고서는 아까 남자가 대련했었던 곳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뭐야 이거. 예감이 좀 안 좋은데. 눈썹을 찌푸리는 사이, 남자가 간결하게 말했다.
"실력을 보는 데에는 직접 검을 맞부딪히는 것 만한게 없지."
음....전 신입이 아닙니다만.....?
"뭐해? 가지않고."
절대 눈빛에 쫄아서 말을 들은 것은 아니다. 에휴, 한숨을 쉰 나는 어차피 긴장감 없이 진행될 것을 알기에 얌전히 검을 집어들었다. 실전에서 적들을 베어가던 나다. 남자 앞에 걸어가서 똑바로 선 나는 검을 천천히 꺼내들었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나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자와는 다르지. 반짝, 빛을 받아 칼날이 짧게 빛났다.
"......!"
단 오 합 안에 결정난 승부였다. 물론, 나의 승리. 떨어뜨린 상대의 칼을 보고 있던 나는 칼을 도로 집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날 대결하게 만들었던 남자가 나를 가만히 주시하더니, 곧 나에게 다가와 턱짓을 했다.
"집어넣지 마."
"......."
"준비되었으면, 선공격을 하도록."
그리고 자세를 취하는 모습에 나는 이 사람이 조금 전 싱겁게 끝나버린 상대와는 아예 다른 상대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사람의 눈빛은, 나처럼 전쟁터를 다녀본 사람의 눈빛이었다. 나는 검을 고쳐잡은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데 공격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고, 또 신중해야 했다. 한동안을 남자의 행동을 보던 나는 그가 빈틈을 보이자 바로 찔러들어갔다.
챙-.
"빈틈을 보여주니 바로 달려드네."
내가 공격을 너무 안 하니까 일부러 빈틈을 주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씩 웃고서는 내 칼을 막고있던 것을 재빨리 쳐내고서는 내 옆구리를 노렸다. 다 보이는데, 나도 웃으며 그의 칼을 막아냈다.
서로가 서로의 행동이 어떻게 나올 지 예측이 가능하니 승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길어지고 있었다. 남자도 처음에 지었던 웃음을 싹 지운 채 진지하게 나와의 대결에 임하고 있었다. 전쟁에서처럼 긴장감이 오가는 대결 속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을 때였다.
"박지민, 그만!"
어디선지인지는 모르지만 김석진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언제 다가온 것인지도 모를만큼 빠르게 내 목 바로 앞에 다가온 칼날이 멈추었다. 그에 반해, 내 칼끝은 남자의 어깨 쪽을 노리고 있는 상태였다. 패배를 느끼고 실망감과 후회가 들 무렵, 내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남자가 재빨리 칼을 거두고서는 내 뒤를 향해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내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어디 갔나 했더니, 이런곳에 있었습니까."
"전ㅈ..., 전하."
내 손에 아직 들려있던 검을 빼앗은 전정국은 그것을 옆으로 내던졌다. 그가 이 곳을 찾아올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말을 더듬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매우 화난 표정이었다. 전쟁터에서 보던 그 얼굴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심장을 쫄아붙게 만들 만한 얼굴이었다. 전정국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대결하고 있던 남자를 돌아보고서는 꾸짖는 어투로 말했다. 남자, 박지민, 가 서둘러 말을 꺼냈으나 막을 순 없었다.
"전하, 저는,"
"소식 못 들었습니까? 이 자는 내 목숨을 구해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모습을 발견한 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내 체면은 어찌하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은인은,"
무서운 속도로 까인 남자를 불쌍하게 쳐다보고만 있던 나는 내 차례가 돌아오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전정국은 한바탕 퍼부을 자세였으나, 한껏 움츠린 나를 보고 일단은 말을 아끼기로 한 것 같았다. 대신, 쌩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일단 나오세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킨 채 김석진에게 눈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채 돌아섰다. 그래 내가 뭘 바라고 했겠니.... 나는 체념한 채 전정국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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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까도 말했듯이 내 취향은 아니라 착각은...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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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가 시험인데 이러고 있네요.....ㅠㅁㅠㅋㅋㅋㅋㅋㅋㅋ어차피 공부 안할거 한번 길게 달려보았지만....
왜....제 머릿속과는 달리 전개는 빨리 나가지 않을까요....ㅠㅠㅠㅠㅠ어흐흑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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