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정리 下
권순영을 좋아한다고 느꼈던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느 순간부터 없으면 보고 싶고 허전하고
또 다른 여자애랑 있을 때 질투가 나는 게
아, 내가 권순영을 좋아하는 구나를 느끼게 했다.
권순영을 좋아하면서
설렜던 날도 당연히 많았다.
그중 하나는
바로
마법의 날이었는데,
요즘 들어 생리통이 점점 심해져서
아침부터 죽을 고통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학교에 일찍 도착해서 책상에 엎드려 있었는데
짝꿍인 승관이가 방금 교실에 도착했는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걱정스레 물어봤다.
"너봉아 오늘 어디 아파?"
"어.... 나 오늘은 엎드려있을게 선생님들한테 잘 말해주라"
"응 알겠어 걱정 말고 얼른 쉬어!"
"고마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시 나는 책상에 엎드리게 되었다.
"김너봉!!!"
아...권순영.....
오늘 아무런 생각 없이 학교에 도착해서
누워있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에
권순영에게 문자로 '나 먼저 간다.'라고 보낸 뒤
핸드폰을 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저 자식을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괜히 더 몸이 아픈 거 같았다.
"너봉이 아파 건들지 마"
"김너봉 아파?"
다행히 승관이가 바로 앞에서 권순영을 막아주고 있는 것 같았다.
부승관 짱....bb
"응. 진짜 아파 보이더라 괜히 오늘 너봉이 건들지 마"
"어디 아픈데?"
"그거 같아...그거"
"뭐 그게 뭔데"
"아 그거! 여자들이 하는 거 있잖아. 배 엄청 아파 보이던데"
"...아"
"알면 빨리 너 자리로 가. 나도 너 상대하기 피곤해"
자는 척하며 둘의 이야기를 듣는 건 꽤 흥미로웠다.
또 말 중간쯤에는 승관이의 귀가 빨개졌을 게 분명했다.
귀엽단 말이지
어...권순영도 그랬으려나 조금..이 아니라 많이 궁금했다.
다행히 점심시간까지 자고 일어나니 훨씬 좋아졌다.
아침에 먹는 약의 효과가 좋은듯했다.
"이거 먹어"
"...?"
권순영이 나에게 던져준 건
평소 지겹게 빵 사 오라고 던졌던 돈이 아니라 (같이 가기 싫은 척하면서 맨날 같이 갔다.)
초콜릿과 약이었다.
"나 약 먹었는데"
"그럼 나중에 먹던지"
"엉 땡큐"
"초콜릿도 이따 먹을게"
"지금 먹어"
"입맛 없어 이따 먹는다니까"
동시에 권순영은 내 손에 있는 초콜릿을 가져갔다.
"아 가져가지 마! 이따 먹을 거라니까...."
내가 안 먹는다고는 말 안 했는데...
예상외로 권순영은 초콜릿의 껍질을 까고 있었다.
"너 지금 나 안 먹는다고 바로 너가 먹겠다는거냐? 치사한 놈...."
"아 해"
"...너 지금 뭐 해..?"
"먹으라고.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알겠어 내가 먹을게 이리 줘"
"이거 먹으면 줄게"
드디어 권순영이 미쳤구나 싶었다.
먹지 않으면 절대로 굽히지 않을 그의 의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얼떨결에(?) 권순영 손에 있는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나 방금 좀 개 같았는데....?
또 하굣길에서도 권순영은 이상하리만큼 자상했다.
"춥냐?"
"아니 별로?"
춥냐는 말에
별로라고 말하는 순간
권순영의 눈썹이 찡그려졌던 건 착각이겠지..?
"다 열고 다니면서 뭐가 안 추워"
"진짜 안 춥다니까...?"
갑자기 나를 바로 앞에 마주 보게 하더니
겉옷을 아주 꽁꽁 잠가주는 게
당황스러워 온몸이 굳었다.
"됐다. 이러고 좀 다녀라. 얼굴도 가리면 더 좋겠네"
"..죽을래?"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나보다.
"다 왔다. 잘 가"
서로 아웅다웅하며 걷다 보니
벌써 집 앞에 도착했다.
"응. 너 들어가자마자 자라"
"아 알겠다니까. 누구보다 빠르게 잠들겠음"
지겹도록 자라고 하는 권순영에
귀찮다는 듯 알겠다고 대답했다.
권순영은 또 뭐가 의심스럽고 못 미더운지
자신의 집 앞에서 우리 집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또왜.."
"들어가 얼른"
"너는?"
"나도 들어갈 건데?"
하며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학교에서부터 날 챙겨주는 권순영이
이상하고 어딘가 무섭기도 했지만
많이 귀여웠고 꽤 듬직했었다....ㅎ
그래서 또 나는 권순영이 더 좋아졌다.
이 정도면 병인데....
*
D-day
"오늘 너희 집 간다."
"안돼. 우리 집이 너희 집이냐?"
"너 보러 가는 거 아니야. 우리 장모님 보러 가는 거야."
"정신 나간 놈... 우리 엄마는 너 같은 사위 절~대 안 둘걸"
"나 같은 남편 절~대 안 두겠다고는 말 안 하네?"
"...자꾸 장난할래??"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혹시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오늘따라 더욱 주체 못 하게 뛰는 가슴도 오늘따라 미웠다.
"왜. 너 사실 나 좋아하지."
"착각도 병이래 순영아."
"그럼 우리는 완벽한 친구네? 베스트프렌드?"
"..."
당연히 대답은 하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게 친구라고 말해버리는 권순영 때문에
당연하게 그가 나를 친구로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와 닿았다.
아 울기 싫은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보야 항상 티는 엄청 나면서 왜 말을 못해"
"...너 알고 있었어?"
"뭐. 네가 나 좋아하는 거?"
"..."
"너봉아 내가 왜 모른 척했을 거 같아?"
"거절하기 미안해서..."
이미 권순영이 알고 있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
눈앞이 흐려졌다.
아 죽어도 권순영 앞에서는 안 울려고 했는데
"권순영. 넌 나랑 친구 사이까지 끊어질까 봐 모른 척한 거지?"
"...야"
"그럴까 봐 일부로 숨기고 있었어. 들킬까봐 조마조마해 하면서
근데 너는 사람 마음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어?"
"지금 이게 장난 같아?"
"그럼 이유 없이 나한테 왜 물어본"
순간이었다. 권순영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살짝 닿아 떨어진 것은
"지금도 장난같냐"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눈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네가 맨날 하고 싶다던 연애 그거"
"..."
"할 사람 맨날 찾지 말고"
"..."
"나랑하자. 그게 제일 편할걸"
라며 씩 웃는 권순영의 모습은 얄밉게도 내 마음을 간질거리게 했다.
"내가 너 좋아한다 해서 사귀어 주는 거야?"
"왜? 그런 거면 안 사귀게?"
"당연하지. 나 혼자 좋아하는 건 취미 없어"
당연히 장난인 거 알지만 좋아한다고 말도 안 해주는 그런 권순영이
조금은 미워서 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야"
"...왜"
"나도 마음에 없는 사람이랑 연애하는 그런 취미 없다."
"...말은 잘하네"
"나 잘했어? 그럼 아까 했던 뽀뽀 다시 할까?"
친구에서 연인이 된다는 것은 원래 이런 걸까...
오늘따라 권순영이 능구렁이 같은건 착각인가....
"미쳤냐? 우리 친구에서 연인 된 지 5분도 안 지났어"
"그게 뭐가 중요해. 너 입 나온거 집어넣어야 할 거 아니야"
"순영아...? 지금 밖이야.... 정신 차려"
"너봉아 나 말 안 한 거 하나 더 있는데"
"...뭔데"
권순영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는 게 지금 제일 무섭다.
"나 튕기는 거 받아주는 것도 취미 없다."
"하지 마 이리 오지 마. 진짜로 하지 마."
"이리와 오빠 힘들다."
우리는 드디어 지겨운 친구의 관계를 정리했다.
밀땅 |
늦게 와서 죄송해요ㅠ 너무 급하게 끊어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네요..(울뛰)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암호닉♥ |
홉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