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
w. 정국학개론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아침 수업부터 3연강에 지겨운 수업들뿐이었지만 견딜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전정국의 영향이 컸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왼손목에 찬 낡은 손목 시계를 열 번은 확인한 것 같다. 끝나자마 동방으로 달려가야지. 생각은 곧 행동이 되었고, 도착한 동방 앞에서 달리는 중에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거울은 없었지만 대충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확인한 후 시원한 마음을 가지고 동방 문을 열었다.
" 누나 왔어요? "
전정국이다. 그리고 옆엔.
" 아, 안녕하세요. "
책상 위엔 찌개 그릇이 두 개, 공기밥이 두 개, 그리고 익숙한 반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호석 오빠와 내가 자주 시켜먹던 곳에서 시킨 게 분명하다. 책상 끝에 덩그러니 있는 책자를 보아하니 맞는 것 같다. 익숙한 음식들과 익숙한 전정국, 그리고 그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낯선 얼굴 하나. 날아갈 것 같던 마음은 어디 갔는지 돌멩이 하나를 안고 있는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들떠서 잔뜩 솟아올랐던 어깨가 점차 가라앉았다. 입가를 맴돌던 뜨거운 숨 역시 가라앉았다. 가방끈을 꼭 쥐고 둘 맞은편에 앉았다. 전정국이 낯선 얼굴을 향해 웃고 있었다.
" 누구야? 처음 보는데. "
전정국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낯선 일이었다. 꽤 과묵한 편인 아저씨 앞에서는 병아리처럼 입을 움직이는 게 익숙했는데, 이상했다. 생각을 해 보면 전정국과 함께 있을 땐, 내가 아저씨만큼이나 과묵한 편이었던 것 같다. 질문 하나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색한지, 평소와 다른 억양이 튀어나갔다. 낯선 얼굴을 향해 있던 전정국의 시선이 비로소 나에게 닿았다.
" 아, 맞다. 누나, 여기 새로 들어온 부원인데 저랑 같은 과예요. "
" 동아리 모집 기간 끝났잖아. "
" 얘가 하도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제가 호석이 형한테 부탁했죠~ "
" 아. "
내가 원하는 그림은 이게 아니었는데. 아니, 적어도 내가 원하는 그림엔 타인이 없었다. 같은 과라더니 군기가 바짝 잡힌 얼굴로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낯선 얼굴은 저를 이진솔이라고 소개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바짝 머리를 묶은 모습이 어쩐지 나와는 확연히 달랐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가끔 웃을 때도 입을 크게 벌려 호탕하게 웃는다. 하 선배를 볼 때는 그게 예뻐 보였는데, 이 애를 보니 이번엔 이게 예뻐 보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있는데도 눈치 보지 않고 웃는 그 애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가 있는데도 나는 신경쓰지도 않고 그 애에게만 눈길을 주는 전정국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태형이 들어온 건 내가 동방에 들어온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달려온 건지 상기된 얼굴로, 등에는 검은색 기타집을 매고 있었다. 옷이 흐트러진 건 알고 있는지, 느릿하게 걸어온 김태형이 기타집을 내려놓으며 내 옆에 앉았다. 전정국이 반가운 듯 소리내어 인사했고, 이진솔은 내가 왔을 때와 같이 제 이름을 소개했다. 대충 시선을 교환한 김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 야, 안녕. "
" 어, 뭐… 응……. "
김태형이 아프지 않게 내 팔을 쳤다. 웬일로 인사를 하네.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눈을 돌렸다. 전정국과 이진솔이 숟가락 껍질을 뜯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찌개류답게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게 이유 모르게 구역질이 느껴져 숨을 참으며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공기밥에 코를 박던 전정국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아마 그 옆에 있던 이진솔의 시선도 닿은 것 같았다.
" 냄새가 좀 나서. 괜찮지? "
전정국이 예의 그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환히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동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정확히는 전정국의 옆자리에 있는 이진솔을 발견한 순간부터 낯설게 느껴졌던 전정국이 이제서야 내가 아는 씨걸 같았다. 애써 웃음을 참으며 걸음을 돌려 의자에 앉았는데, 이진솔이 팔을 쓸어내린다. 경찰행정학과는 반팔이 과 내력인지, 이진솔 역시 전정국과 똑같이 남색의 반팔티를 입고 있다. 얇은 팔뚝을 마찰시키는 모습이 추운 것 같았다. 나만 본 게 아닌지 전정국이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흘낏 보았다.
" 누나, 얘 추운 것 같은데 닫아도 돼요? "
" 아, 응… 추우면 어쩔 수 없지. "
" 아, 저 괜찮아요! "
" 괜찮긴 개뿔. 너 감기 한 번 들면 심하게 드는 거 내가 모르냐. "
둘은 생각보다 훨씬 친해 보였다. 낄 자리도 없었고, 낄 분위기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그 자리와 그 분위기를 만든 것 같았다. 전정국이 밥을 마저 씹고 일어났다. 창문을 닫으러 가는 것 같았다.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에 전정국에게 닿아 있던 시선을 애써 떼어냈다. 전정국이 창문을 잡는 소리가 들렸을 때 우울감이 밀려와 휴대폰을 만지작댔다. 낡은 창문이 싫은 소리를 내며 움직일 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야, 닫지 마. "
고개를 돌려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기타집에서 일렉을 꺼낸 김태형이 굳은살이 박혀 있는 손가락으로 코드를 잡고 있었다. 이진솔의 시선이 김태형에게 닿았고, 아마 내 뒤 어디쯤에서 창문을 닫고 있던 전정국의 시선도 그랬던 것 같다. 김태형은 시선의 이동 없이 다시 입을 움직였다.
" 추우면 옷을 입든지. "
" ……. "
" 네 뒤에 있는 옷은 관상용이냐? "
김태형이 고개를 살짝 들어 맞은편에서 숟가락을 꼭 쥐고 있는 이진솔에게 눈을 두었다.
*
" 진짜 짜증 났다니까요. 여우처럼 전정국 옆에 딱 붙어서 있는데…, 아, 맞다 아저씨, 전정국이 걔예요. 저번에 저한테 이상한 질문했던 걔! 아, 그리고 사실 걔가……, 아니다. 이건 나중에 말할게요. 때 되면 차차 말할게요. 아무튼 전정국도 좀 그래요. 평소에는 누나, 누나 하면서 잘만 쫓아다니더니 자기 친구 왔다고, 와…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아저씨, 듣고 있어요? "
" 어어, 듣고 있어. "
" 안 듣고 있는 것 같은데. "
" 아냐, 듣고 있다니까. "
" 안 듣고 있는 것 같은데! "
아무래도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분주하게 노트북을 두드리는 모습에 품에 끌어안고 있던 쿠션을 쇼파 위에 내팽개치고 아저씨에게 바짝 붙었다. 내가 입을 다무니 세상이 다 조용한 것 같다.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다 들린다. 아저씨는 시계 고장나면 바로 알겠다.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며 쇼파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계속해서 묻는 내가 지겨웠던 건지 어느새 입을 꾹 다물어버린 아저씨에게 더는 하고 싶은 말도, 할 말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이상으로 입을 연다면 아저씨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아저씨 일이 끝날 때까지 입에 지퍼 잠그고 기다려야지.
" 그래서. "
아저씨가 노트북을 닫은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노트북만을 향하던 시선이 그제서야 내게 닿았고, 그게 또 신나서는 몸을 일으켜 쿠션을 다시 끌어안았다.
" 전정국인가 뭔가, 걔 좋아하는 거야? "
" 아, 뭐야. 아니거든요. 성격 진짜 이상해. 제가 걔를 왜 좋아해요? "
" 요즘 걔 얘기만 하잖아. "
" 아니거든요. 저, 그, 그 뭐지, 그, 김태형 얘기도 했어요! "
" 그래, 근데 전정국 얘기를 제일 많이 하잖아. "
" 아, 아무튼 아니에요……. 진짜…… 내가 아저씨 좋아하는 거 알면서… "
아저씨는 그랬다. 내가 호석 오빠와 처음으로 대면하고 아저씨에게 호석 오빠에 대해서 구구절절 길게 이야기를 할 때도 호석 오빠를 좋아하냐 물었다. 처음에는 나를 떠 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저씨를 좋아하는 내 마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싶은 건 아닐까. 그래서 확신을 가진 후에는 우리 사이에 어떤 진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저씨는 극구 부정하는 내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 그 이상을 어떤 것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때 느꼈었다. 아저씨는 정말 순수하게 나를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돌멩이를 삼키다 걸린 듯 목과 가슴이 답답했다. 한숨을 쉬며 쇼파에 다시 누워버렸다. 아저씨의 손이 곧 내 이마에 닿았고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나른했다. 쿠션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
" 아, 미쳤나 봐. 아저씨, 왜 안 깨웠어요! "
" 업어가도 모르겠던데. "
" 지금 나가면 지각인데. 아아, 미쳤어. 아저씨, 저 집 갈게요! "
" 아침이라도 먹고 가지. "
" 그럴 시간 없거든요~ 이거 다 아저씨 때문이야! "
일어나니 열 시였다. 수업은 열한 신데.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데만 10분이 넘게 걸렸다. 대충 얼굴만 씻고 나가야겠다 싶어 허둥지둥 가방을 챙기고 신발을 신었다. 어제처럼, 아니, 늘 그랬듯이 아저씨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컵을 들고 내 앞에 섰다. 얼핏 부엌을 보니 물통에 담긴 물 색깔이 갈색빛이다. 아저씨 내가 준 거 넣고 물 끓였구나. 삐져나온 웃음을 애써 집어넣으며 가기 전 마지막으로 아저씨 허리를 끌어안았다. 옷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섬유유연제 냄새에 입꼬리를 올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 점심은 꼭 챙겨 먹어. "
" 당연하죠. 호석 오빠랑 먹기로 했, "
입을 움직이며 문을 연 순간 밖에 서 있는 낯설지 않은 사람에 의해 말이 끊겼다. 그때 우리 집 앞을 서성였던 사람 같은데. 그때와 똑같이 온통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색 모자를 쓰고, 검은색 마스크를 끼고 있다. 눈이 마주쳤고, 또 그때와 같이 눈이 살짝 흔들린 것 같았다. 마주친 순간 빠르게 시선을 피한 그가 내 뒤를 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눈빛에 멍해져 가만히 있다, 뒤를 돌아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아저씨의 시선이 올곧게 내 뒤를 향해 있었다. 차갑지고, 따뜻하지도 않은 낯선 눈빛에 어색하게 웃으며 발을 움직였다.
" 학교 끝나면 바로 올게요… "
아저씨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오고가는 시선에 방해되지 않게 허리를 살짝 숙여 움직였다.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그렇게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집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을 때쯤, 옆집 문이 닫혔다. 그 후로 발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아마,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한 그 남자는 아저씨의 집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아저씨 친구였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익숙한 눈. 손을 모아 물을 받으며 그 눈을 생각했다. 수상한 것 투성이였는데. 어느새 따뜻해진 물로 얼굴을 적셨다. 왜 그 눈이 익숙했을까. 손 안에서 비누를 굴렸다. 익숙할 이유가 없는데. 손을 비벼 가득해진 거품을 얼굴에 묻혔다. 눈을 질끈 감아 생각했다. 어디서 봤지, 그 눈을. 다시 따뜻한 물로 얼굴을 적셨다. 탁한 비눗물이 내려갔다.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고 방으로 들어가 스킨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문득 옮겨진 시선.
오래 묵혀두었던, 애써 치우지 않았지만, 엄마와 오빠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얻은 후로는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던 가족사진. 무심코 시선이 닿은 크지 않은 가족사진에서 나는 그 눈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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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예요 여러분! 크리스마스가 지나기 전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역시나 오늘도 부족한 글 끄적이고 갑니다....... BGM~ 스탠딩 에그 - Nobody Kno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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