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없이 발을 굴렸다. 날 선 돌멩이들에 의해 택운의 맨 발이 핏덩이로 얼룩져 엉망이 되어간다.
노을이 진 어두운 산은 더 이상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다. 온갖 짐승들의 터이자, 끝 없는 어둠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창백한 택운의 피부가 달빛에 투명하게 비추어진다. 마치 달나라의 선녀 '항아 (姮娥)' 와 흡사한 자태에, 종달새 조차도 고개를 조아리고 날개를 퍼득여 멀리 날아간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하늘길을 따라 내리는 비는 이내 점점 굵어져 택운의 여린 몸을 때려온다.
숨을 허덕이며 질척한 바닥에 주저 앉은 택운이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교차해서 팔을 감쌌다. 그러나 내려가는 체온을 막을 수는 없었다.
멍한 택운의 눈동자에 잔상이 스친다.
재향의 주름 진 손가락, 재환의 해사한 입꼬리, 원식의 다정한 목소리, 상혁의 다부진 허리.
세찬 바람이 옷 속을 헤치고 지나 간다. 이미 푸르딩딩 해 진 택운의 입술이 꾸욱, 깨물렸다.
이대로 있다면, 난 죽어.
힘이 들어 가지도 않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후들후들 떨리는 발걸음으로 비에 눅눅해진 흙 길을 다시 걸었다.
미끌거리는 차에 택운이 종종 넘어진다. 희었던 의복은 어느 새 갈색의 흙탕물로 범벅이 되어 추잡한 형상을 띠고 있다.
.
.
온 몸을 찌를 듯이 침범 해 오는 추위, 피로함.
택운의 눈이 별안간 흰자를 보이며 넘어 가 버린다.
그에 애써 지탱 하고 있던 다리가 풀려 버리고, 택운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진다.
그 지점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벼랑이었다.
탁, 탁. 꽤나 거센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진 택운의 몸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은 채로 빗 속에서 식어 간다.
그렇게.. 온기를, 빼앗기고만다.
**************************************************
"청하 님, 이미 도망 친 것 같습니다."
".. 쯧, 거의 다 잡은 노릇이었는데."
날렵한 흑마를 타고 밤 길을 헤치며 어딘가를 두리번 거리는 훤칠한 사내.
황성의 군주를 보필 하는 자, '청하靑河 (푸른 강을 닮았다 하여 붙여짐.)' 이홍빈. 그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백사슴을 쫓고 있던 참이었다.
뺨 옆으로 흘러 내리는 한 줄기의 땀에 홍빈이 신경질이 난다는 듯 거칠게 이마를 쓸어 올렸다.
"이토록 행동이 굼떠서 되겠느냐? 한낱 사슴에게 맥을 못 추는 꼴이란!"
"...황공 하옵니다, 청하 님."
역시나, 자신들에게로 애꿎은 불똥을 튀기는 홍빈에 아랫것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홍빈의 말도 안 되는 역정을 받아 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일이었기에.
돌아가자.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읊조린 후 거칠게 말의 머리를 돌린다.
되는 일이 없없다. 황성으로 돌아 가게 되면 입가에 경련이 나도록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하겠지.
오로지, '태양'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참, 웃기는 노릇이군.
홍빈이 자조적인 비웃음을 지었다.
이랴..!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 흑마는 얼마 가지 않아 속도를 늦춰 버린다.
그에 또 짜증이 난 홍빈이 소리쳤다.
"달리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이랴!"
주인의 말을 무시 한 채 비에 젖은 눈동자로 유심히 한 곳을 응시하는 흑마.
홍빈의 짜증 섞인 눈이 자연스레 함께 그 곳을 향한다.
...무엇이냐, 저건..?
하얀 옷을 입고 쓰러진.. 저것은 선녀인것이냐.
"청하 님!"
"여봐라, 저것이.. 무엇이냐?"
"..예? 저것이라함은..."
홍빈의 수족, 기량은 홍빈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형체가 선명 해 진다.
기량은 혀를 차며 홍빈에게 아뢰었다.
"벼랑에서 떨어 진 자 같사옵니다."
"..."
홍빈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스르륵 말에서 내렸다.
그 것에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가자, 알 수 없는 느낌이 온 몸을 휘감았다.
하얀 얼굴에, 고운 몸 선이 틀림 없이 계집 인 줄 알았건만, 머리카락이 짧은 것을 보아하니.. 이 자는 사내 인 것인가.
홍빈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이 자를, 말에 태우거라."
"...예?"
"백사슴 대신, 좋은 것을 얻었구나."
홍빈의 입가가 비틀려져 올라간다.
어쩌면 당신의 마음에 들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것 마저도 빼앗으려 하실 겝니까?
태양.. 아니, 나의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