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鳶)
w. 레이니무드
초여름 더위가 한가득 내려앉을 날 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센터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 가야할 거리에 한, 반쯤 걸었을 무렵 제훈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뭇잎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바람을 타고 공중에서 날고있었다. 손차양을 만들어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연이라는 걸 깨달았다. 멈춰있던 제훈은 다시 센터로 걸음을 옮겼다.
센터는 백색의 건물이었다. 그 뒤로 펼쳐진 녹음이 꽤나 잘 어울리는 배경이 되었다. 다시 올려다 본 하늘에 연이 없었다. 제훈은 고개를 떨구고 센터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사무실 앞에 다다랐다. 누구에게 말을 붙여하나 망설이며 제훈은 사무실 앞을 잠시 서성거린다. 인기척을 느낀 여성분이 제훈에게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묻는다. 제훈은 머뭇거리다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아! 여성분께서 이해했다는 작은 탄성을 내보인 뒤 들어와 잠시 앉자 계시라고 말한다. 여성분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제훈은 쭈뼛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두번째 방문이라 아직 낯설기만한 주위를 잠시 둘러본 뒤 제훈은 구석에 놓인 의자를 살짝 끌어다 앉는다.
몇 분 가량을 그렇게 앉아있던 제훈에게 아까의 여성분이 다시 다가왔다. 여성분은 원장님께 얘기들었다고 말하며 종이를 건넨다. 제훈은 종이를 받은 뒤 가만히 그것을 훑어보았다. 그리 많지 않은 아이들의 사진이 붙어있고, 그 옆으로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었다. 제훈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천천히 바라보며 눈에 담았다.
"제훈씨, 아니, 제훈선생님께서 가르치실 아이들이에요."
"아, 네."
"아이들 얼굴이나 이름은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몇명 안되지만, 다 착하고 순수한 애들이에요."
그래보여요. 대답은 속으로 삼키며 제훈은 다시 아이들의 얼굴을 차근차근 바라봤다. 잠시 사라졌던 여성분이 손에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아들며 제훈이 말했다. 잠시 눈에서 보고있던 종이를 뗀 뒤 제훈이 묻는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제훈의 말에 여성은 김우림이라고 말한다.
"좀 있으면 아이들 하교시간이니까 곧 올거예요."
제훈은 우림에게 교실이 어디냐고 묻는다. 우림은 1층 오른쪽 복도 끝 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커피, 고맙습니다. 제훈은 우림에게 목례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사무실은 3층에 있었기에 제훈은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1층에 도착한 후 우림의 말대로 오른쪽 복도 끝으로 걸어간다. 도착한 복도끝에는 갈색 나무문 하나가 있었다. 제훈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린다. 문안 속 교실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의해 꽤 밝았다. 제훈의 눈에 양쪽으로 3개씩 마주보게 붙어있는 책상과 화이트보드가 보였다. 제훈은 책상에 가까이 다가가 화이트보드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화이트보드 옆 창문 밖으로 아까 지나온 마당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던 커피가 식어가는것도 모른 채 제훈은 교실을 돌며 아이들의 손길이 닿은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누구세요? 벽에 붙어있는 종이 속 색칠된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훈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본다. 낯이 익은 얼굴. 아까 우림이 건넨 사진에서 본 아이였다. 아이는 제훈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책상으로 걸어간다. 제훈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제훈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형형하다. 호기심일 수도 있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의 의미일 수도 있었다.
"어... 저는, 새로운 선생님이에요."
"선생님이요?"
"그러니까..."
제훈은 날듯말듯한 기억을 되새기며 아까 보았던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리고 곧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곤 말한다.
"승훈이랑, 다른 친구들한테 재밌는 얘기도 들려주고 공부도 가르쳐 줄 선생님이야."
선생님이요? 승훈의 말에 제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승훈은 메고 있던 가방을 벗은 뒤 책상 위에 올린다. 제훈의 눈에 아까 올려놓았던 커피가 보인다. 승훈 역시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제훈은 성큼성큼 걸어가 커피를 손에 들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승훈이 묻는다. 제훈은 차게 식은 커피를 전부 들이킨 뒤 종이컵을 버리러 교실 뒤쪽으로 향한다.
"선생님은 똑똑하니까."
친화를 위한 제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농담이었다. 하긴, 선생님들은 다 똑똑하다고 할머니가 그랬어요. 승훈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순진한 아이를 도리어 놀리게 되버린 제훈은 멋쩍은듯 마른 기침을 한다. 열린 문으로 아이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조용하던 교실이 일순간에 떠들석해진다. 승훈과 달리 다른 아이들은 제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듯했다. 이름표는 붙어있지 않지만 아마 암묵적으로 정해진듯한 자신들의 자리로 가 앉는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이어간다. 제훈은 어영부영 계속 서 있느니 자신을 소개하려는 심산으로 화이트보드를 향해 걸어간다. 화이트보드에 다다르자 그제서야 아이들은 제훈의 존재를 인식한듯 했다.
"안녕 얘들아.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여러가지를 할 선생님이야."
"선생님이요?"
꽃이 달린 머리끈으로 길게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가 묻는다.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공부도 알려주신데. 승훈이 제훈을 대신해 말했다. 제훈은 벌써 승훈과의 유대감이 생긴듯해 마음이 조금 들떴다. 오늘은 뭐해요? 사진으로 봤던 또 다른 아이인 형준이 묻는다. 벌어진 입사이로 빠진 이 자리가 보였다.
"오늘은 친구들이랑 선생님이랑 처음 만나는 날 이잖아? 그래서 선생님 이야기 하나를 준비해왔는데, 들어볼래?"
"네!"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릴적 할머니가 살고있는 시골에 놀러가 잠이 들기전 할머니가 해주시던 얘기가,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고 어설프긴 했지만 그땐 왜 그렇게 무섭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는지. 그리고 얘기를 듣는 제훈을 보며 할머니게 왜 그렇게 즐거워 하셨는지. 제훈은 준비해온 이야기가 담긴 공책을 꺼내들며 아이들을 바라본 지금에서야 어렴풋 하게라도 알 수 있을것만 같았다. 할머니를 떠올리며 제훈은 노트의 표지를 손으로 한번 훑는다. 그리고 공책을 편다. 어젯밤 빼곡하게 적은 글이 보인다. 제훈은 목을 가다듬은 뒤 글을 읽어 나간다.
옛날 어느 마을에 톰이라는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어요. 톰은 키가 작았고 머리가 갈색이었으며, 얼굴에 주근깨가 많았어요. 동네아이들이 톰을 보면 딸기라고 놀려댔지만 톰은 신경쓰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톰은 자신의 주근깨가 바닷가에 있는 반짝이는 모래알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래알은 아름답게 반짝거리니까요. 하루는 톰의 아버지가 톰에게 연을 만들어 주었어요. 톰은 신이나 연을 들고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어요. 톰은 천천히 연을 손에서 놓았고, 연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아요. 톰은 연과 연결된 줄을 잡고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연을 올려다 봤어요.
"우리도 얼마전에 연 만들었어요!"
말을 하며 형준은 손으로 연을 날리는 시늉을 해보인다. 제훈은 형준에게 웃어보인 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목에 맨 머플러가 까슬거렸다. 지금은 4월이었고 왜 따뜻한 날에 머플러를 해야만 했는지는 어젯밤 엄마의 물음이 원인이었다. 엄마가 작년 크리스마스 때 제훈에게 선물한 머플러였는데, 원체 머플러는 커녕 목도리도 하고 다닌적이 없는 제훈이라 받은 그대로 옷장속에 넣어놓고 까맣게 잊고있었다. 거실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엄마가 서랍장위에 놓인, 역시 작년 크리스마스에 꺼내놓아 아직도 놓여있는 산타클로스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제훈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훈아, 엄마가 사준 머플러 잘하고 다니니? 본 기억이 없는데. 엄마의 물음에 결국 제훈은 다음날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어쩔 수 없이 머플러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몰래 제훈의 방을 뒤져서라도 포장도 안 뜯은 머플러를 찾아내리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에.
머플러를 풀어 가방에 넣을까도 생각했지만 선물 받은 머플러를 아무렇게나 가방에 넣어 구겨지게 만들만큼 모진 사람은 못됐기에 제훈은 그냥 불편해도 참았다. 강의실에 들어서 둘러보니 빈자리가 별로 없었다. 수업시간에 딱 맞춰서 온 결과였다. 제훈은 두리번거리다 눈에 먼저 띈 가장 왼편 중간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앞에 앉아있던 미정이 돌아서더니 말했다.
"우와, 선배님 그거뭐예요?"
미정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남에게 관심을 보였다. 어디까지나 그것이 깊지 않은 옅은 호기심에 불과하다는 걸 제훈은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가끔씩 많은 사람들 있는데, 미정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렇게 자신을 가리킬때면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훈은 주목받는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 그냥. 제훈은 얼버무리며 상황을 넘어가려 했다. 다행히 미정은 더 이상 물어오지 않았다. 제훈은 가방을 책상옆에 건 뒤 책을 꺼냈다. 머플러때문인지 목뒤가 자꾸만 간질거렸다. 제훈은 머플러를 풀기 위해 목뒤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무언가 손을 스쳤다. 머플러의 감촉이 아니였다. 뒤를 돌아보니 허공에 손 하나가 멈춰 있었다. 조금 더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따. 제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쪽손으로 머플러를 잡아 당겨 완전히 풀어냈다. 그런 뒤, 머플러를 가지런히 접어 책상 한쪽에 올려두었다.
강의실에 들어온 교수님은 교탁앞에 멈춰섰다. 손에 들고 온 출석부를 펼치더니 말했다.
"첫 수업 때 말했는대도 중간에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던데, 오늘부터는 수업 시작할 때 한번. 끝날 때 한번. 두 번 출석 부를 거니까 중간에 도망가면 얄짤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