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예쁘게 불어왔다. 잔잔한 강물 위로 꽃잎이 떨어져 흘러갔다. 익숙한 나무다리를 건너 파란 지붕을 지나쳐 우리가 예전 했던 담벼락 낙서들을 손으로 짚으며 도착한 그곳은 여전했어. 마당에 피어있는 꽃들도, 한쪽에 놓여있는 나뭇더미도 너와 같이 이불빨래를 했던 붉은 대야도 모두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어. 후, 마루에 먼지를 털어내고 앉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어. 유난히 높고 예쁘더라, 마치 너처럼. 너를 닮은 봄이 왔어, 네가 너무 보고 싶은 봄이 왔어 승관아.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너무 많이.
한솔아! 들려오는 소리에 한솔이 이어폰을 빼고 돌아보자 승관이 손을 붕붕 흔들며 한솔에게 다가왔다. 같이 좀, 가자니까. 숨을 몰아쉬는 승관의 등을 무심하게 쓸어내려 주면서 손을 꼭 잡아준 한솔이 말없이 앞을 바라봤다. 헤에. 잡힌 손을 내려다보던 승관이 바보처럼 웃고 한솔이 그에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버스 왔다 가자. 응! 1014번, 버스에 올라타 항상 비어있는 두 자리에 앉아서 창가를 바라보는 승관의 옆모습을 한솔은 빤히 바라봤다. 익숙한 동네의 골목을 지나 학교로 향할 때, 햇빛에 더욱이 밝은 갈색으로 보이는 승관의 머리도, 웃으며 창밖을 구경하는 승관도 항상 예뻤다. 늘, 언제나. 승관이 고개를 돌리다 저를 보고 있는 한솔의 시선과 마주함에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한솔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마주 잡은 손으로 흘러드는 온기와 서로의 정적을 채워주는 심장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 시간이 멈추기를 바랄만큼.
한솔과 승관의 사이는 묘했다. 정말로 말 그대로 그저 묘했다. 친구라는 이름에 갇혀버린 감정이 아직은 서로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었다. 한솔은 승관이 자신의 옆에 있는 게 당연했고 승관 역시 그랬으니까. 늘 같은 패턴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옆에 있다는 건 언제나 암묵적인 약속과 비슷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승관이 끼던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었을 때, 한솔아 하며 웃어주었던 그때에 한솔은 깨달았다. 자신은, 승관을 좋아하는 거라고.
짝사랑은 힘들었다. 그것도 좀 많이. 생각했던 거 보다 쉽지 않았다. 말을 하지도 못하고 다가서지도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서 승관을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게, 한솔의 입장에선 많이 힘들었다. 어딜 가나 사랑받던 승관은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받고, 또 사랑받고. 한솔은 그런 승관의 모습에 혼자 마음 졸여했었다. 바보같이.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매미가 시끄럽게 울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한솔의 무릎을 베고 누워 책을 읽던 승관이 책을 내려두며 한솔을 빤히 바라봤다. 내 얼굴 뚫리겠다. 한솔의 작은 말에도 부스스 웃음을 지은 승관은 가만히 손을 들어 한솔의 볼을 감쌌다.
"솔아"
"왜"
"좋아해"
아무렇지 않게, 툭 말을 던져오는 승관의 행동에 당황한 건 한솔이였다. 좋아해, 좋아해? 나를? 한솔이 살짝 벙 쪄있자 승관은 손을 내려 한솔의 손을 마주 잡았고 바깥이 다시금 매미소리로 시끄러워질 때 말을 이었다. 좋아해, 한솔아. 정말로, 많이. 좋아한다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승관은 그렇게 속삭였다. 심장이 쿵쿵 거리며 리듬을 만들어내고 몸을 숙인 한솔은 승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입술 새로 서로의 온기가 흘러들었다. 그저 철없는 아이에 장난스러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친구라는 이름 안에서 잠들어있던 마음이 깨어나 서로의 마음속으로 피어오른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된 입맞춤이었다
짧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둘의 손은 여전히 꽉 잡은 채였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서로의 눈빛을 써가며 조심스레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내려간 사랑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지만, 승관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마음이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곤 했다. 사랑스러운 그 아이의 눈빛이 좋았으니까. 사랑스러운 그 아이의 행동이 좋았으니까, 아니 그냥. 그 아이가 그만큼 많이 좋았으니까. 한솔의 세상 속 중심은 승관이었다. 한솔의 하늘도, 해도, 달도. 모두 승관이었다. 그것은 승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끔 여자아이들이 흘리듯 한솔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괜히 제가 온 신경이 집중되곤 했다. 어차피 내 사람인데, 어차피 내 옆에 있을 사람인데.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다. 한솔이 떠난다면 제 자신이 무너져 내릴 거 같았으니까. 한솔은 자신에게 전부였으니까.
시간은 금세 흘러 둘을 '어른'이라는 길로 인도했다. 또한, 아주 작은 변화까지도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승관과 한솔의 꿈이 정반대이듯 둘의 의견도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했다. 한솔은 밝히고 싶어 했고 승관은 숨기고 싶어 했으며. 승관에겐 한솔 하나만이 필요했지만 한솔에겐 승관이 아닌 다른 아이들도 필요했다. 집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승관의 모습이 질렸고 자신에게 웃으며 먼저 다가오는 여자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제 행동이 승관에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알면서도, 한솔은 조금씩 변해갔다. 승관에게 점점 신경 쓰는 시간이 줄어들고 서로 마주 앉는 일이 줄어들면서 서로의 마음은 천천히 식어갔다.
-나랑, 놀러 가자 솔아.
처음으로 먼저 말을 꺼내온 승관이었다. 한솔은 한참이나 제 핸드폰에 띄워진 문자를 바라봤다. 승관의 번호가 맞는지도 한참을 확인했다. 그리고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야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밀번호 키가 쉽게 풀리고 열린 문으로 들어온 승관은 한솔을 바라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가자, 놀러. 한솔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 되게 좋다. 그러게. 늦은 여름의 어느 날이어서 그런지 날은 매우 좋았다. 비가 올 것 같지도 않았고 해가 그렇게 쨍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과 적당히 내리쬐는 햇빛. 둘의 손은 그저 약속이라도 한 듯 맞물려있었다. 둘 사이로 다시금 정적이 흐르고 공원을 한참 걷고 나서야 승관이 웅얼거렸다. 꽃 냄새, 되게 좋다. 한솔이 말없이 승관을 바라봤다. 살짝 내려 깐 눈과 조금 긴 속눈썹 그리고 남자치고 붉은 입술. 이 꽃 뭘까 솔아. 승관의 질문이 떨어지고 한솔은 시선을 돌려 꽃을 바라봤다. 글쎄, 모르겠다. 무미건조한 한솔의 말에도 그저 옅게 웃은 승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해는 조금씩 저물어 어중간한 하늘의 중턱에 걸리고 몇 바퀴나 공원을 걷던 둘의 걸음 역시 멈춰 섰다.
"솔아"
"응"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어"
"...."
"...."
"뭔데"
둘의 시선이 마주하고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한솔이 말을 잇자 승관이 말없이 한솔의 손을 놓았다. 손이 풀리고 급격히 식어가는 손에 한솔이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아서, 다 알 것만 같아서, 그래서. 한솔아. 한솔의 생각을 멈추고 승관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 그러지 마. 있잖아. 말하지 마, 부승관. 헤어지자. 전하지 못할 말이 한솔의 안으로 삼켜지고 끝내 말을 마친 승관은 한솔에게 여전히 웃어 보였다. 바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벙긋대던 한솔의 입은 다시금 꾹 닫혔다.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냥, 그랬다.
"그게, 다야?"
".....응"
"...."
"...."
"그래, 그만하자"
한솔의 대답이 떨어지고 서로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바닥에 버려지고 나서야 한솔은 승관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승관에게서 멀어진 한솔이 사라지고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며 웃던 승관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떨어져 신발코를 적셨다. 소리 내어 울지 않는 방법을 알아버려서, 승관은 소리 내서 울 수가 없었다. 혹시나 바람에 흘러간 소리가 한솔에게까지 들릴까 봐, 그렇다면 혹시나 한솔이 저를 버리지 못하고 남아있을까 봐. 그래서, 마음껏 소리 내 울 수가 없었다. 그저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숨죽여 우는 방법밖에 승관에게 남은 건 없었다. 그 흔한 안녕이라는 말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그 시간이, 그 1분 1초가 금방이라도 끊어질듯한 밧줄 위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승관의 세계는, 한솔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저 밑으로.
독방에 끄적였던 작은 글 다시 질질. 요새 너무 바쁘네요 하는 것도 없이... :( 댓글들 항상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내 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