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업자 윤기 × X고딩 00 헛웃음이 나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안의 모든것을 때려부셨다. 그것도 자신이 평생을 살았던 집을. 표정 변화 없이 책을 읽고 있는 여자애 앞에 가서 섰다. 당황하지 않고 무시하는 저 뻔뻔함. 왜 이렇게 예쁜 딸을 숨기고 사나 했네. 뒷조사 들어간 게 다행이지. "무슨 책이냐, 그거?" "책은 아니고 탈무드예요." "탈무드? 아가들이 읽는 거 아냐, 그거." "절 아가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하이고.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딱 듣기 좋다. 의자 밑으로 내려오는 하얀 다리를 죽 흝었다. 흐음. 턱을 괴고 책을 읽는 모습을 빤히 관찰했다. 사락, 종이 한 장이 넘어갔다. 책끝을 지탱하는 손가락이 곱상하다. "담배 줄까?" "미안하지만 전자담배밖에 안 펴요." 미안하다라. 자신을 낮추지도 않고 나를 높이지도 않았다. "이거 시가인데." "시가를 물면 턱이 아프거든요." 책에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올라와 내가 문 시가에 머물렀다. 나는 부러 연기를 뿜었다. "이름." 사실 이름은 다 알고 있었다. 000. 이름을 모르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000은 야실스럽게 웃었다. 제니퍼 로렌스요. ……이런 장난에는 어떻게 받아쳐 줘야 하나. 볼을 긁적였다. 000은 책을 덮더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며 나를 저격하는 말을 했다. 나는 그저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내뿜으면서 필터를 으득 물었다. 왜인지 모르게 이가 간질간질거려서였다. "유리조각 튀었어요. 밟지 않게 조심해요. 신발 신어서 다칠 일은 없겠지만." "……너 내가 누군지 알긴 하냐." "사채업자밖에 더 되겠어요." "너무 뻔한 질문이었네. 그럼 내가 너 어디로 데려갈 것 같냐?" "장소는 딱히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럼? 내 물음에 000은 탈무드를 꽂아넣고 답했다. 그냥 팔려 간다는 것만 알면 되는 거잖아요. 뭐가 중요해. 000의 목소리를 소름끼치게 담담했다. 밥 먹었냐는 물음에 밥 먹었어요, 하고 대답하는 것처럼. 존댓말과 반말이 무난히 어우러진 말투는 일반인한테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말투였다. 깨진 유리조각이 바닥에서 반짝거리고, 자신의 부모가 피떡이 된 환경에서 나올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옮겨 털었다. 타들어가던 담배가 재로 우수수 떨어져 흩날렸다. 그것이 담배에서 나온 재라는 걸 몰랐다면 예쁘게만 보였을 텐데. 담뱃재라고 안 이상,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가 주름이 생기도록 눈을 찌푸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사채업자치고는 질문이 많아요." "……그래서, 기분 나빠?" "속을 보이지 말란 소리였어요. 그쪽과 저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잖아요." "……왜지?" "그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말들을 나눴다고 말벗이 되는 건가요?" "내가 본 피해자 중에서는 가장 현명하고 똑똑한 것 같아서." "피해자라니. 난 그쪽들이 양심도 없을 줄 알았는데. 최소한의 양심은 있나 보네요." 최소한의 양심이라. 그 모서리 부분이 닳고 닳아 이제는 있는 줄도 모르는 그거. 000은 힐긋 나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조금 놀랐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이름 같은 거, 흥미도 없을 줄 알았더니. 담배를 지져서 끄고 답했다. 민윤기. "쓸데없이 이름만 예쁘네요." "칭찬이냐? 고마워." "꽤 긍정적이기도 하고." "사람 탐색하는 거 좋아하나 봐?"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라면서, 나에 대해 알아 가려는 눈치네. 내 말에 000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솔직히 말예요, 그쪽 내 스타일이거든요. 본능은 어쩔 수가 없나 봐. 나는 피실거렸다. 절로 새어나오는 웃음은 어떻게 숨길 수가 없었다. "키스할까." 시선이 엉켰다. 조금은 탁한 눈빛들이 오고 갔다. 눈도 마주치고, 얼굴도 마주치고. 곧 있으면 입술도 마주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