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Boy!
: 교복과 벌점.
<오늘의 정국이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짧은 편지도 있어요. 아마 정국이를 응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조금이나마 공감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여자주인공의 시점에서 넣어봤습니다. 정국이를 애정하시는 분들에게도 조금이나마 힘을 드리고 싶었구요.>
03
02 화
Final Sentence
여자 경찰관이 내 손에 쥐어 준 건, 면봉이었다. 더 이상 바보 같이 울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또 다시 바보가 되는 건, 싫었다. 스스로 몇 번이고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고 손에 면봉을 쎄게 쥐었다. 경찰서에 도착한 이래로 계속해서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친 건. 괜찮아. 라고 입모양을 벙긋거리는 남자였다. 그리고 어느새 남자의 검은 집업이 내 무릎에 덮여 있었다.
귀를 닦아낸 면봉을 경찰에게 건내고, 남자와 눈을 맞췄다. 나도 좀 전의 남자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고마워요.
경찰서 내에서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근처 길목을 알아내 CCTV를 분석하기로 했다. 경찰이 내게 다가와 면봉에 묻은 남자의 타액과 비교 할 만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바보같이 남자에게 끌려다녔던, 내가 뭐 남자의 손톱을 자르길 했을까 아니면 남자의 다리 털을 뽑기를 했을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괜시리 무릎에 덮여진 남자의 검은 집업만 움켜쥐었다. 그 때, 한동안 말이 없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있어요."
남자의 말에 경찰은 네? 하고 되물었고, 나 역시 고개를 들어 남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나도 없는게, 저 남자한테 있을리가 -
남자는 언제부턴지 굳게 말아쥐고 있던 제 왼주먹을 폈다. 그리고는 옆의 경찰관에게 물었다.
"이거 이렇게 쥐고 있었는데 괜찮을까요? 그, 다른 먼지나 그런거 안들어가게 하려고 이렇게. 아. 지금 이것보다는 조금 약하게 쥐고 있었는데."
내 자리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제 손을 크게 펴보였다가, 이렇게- 하며 제 손을 다시 있는 힘껏 움켜줬다. 그러더니 이내 곧 짧게 탄식하며 조금은 느슨하게 주먹을 풀어냈다. 정작 남자의 손 안에 들어있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손에 무언가 있긴 있는 듯, 경찰관이 잠시만요. 하고는 집게핀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남자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무언가를 조심스레 집어냈다. 뭐야. 안보이는데.
"머리카락이에요. 그 현장에서 바로 달려가서 뽑았는데 - 이것도 돼요?"
"되구 말구요. 남자 분이 침착하게 행동하셨네요. CCTV 분석해서 여성분이 제출하신 증거랑 이거 비교하면 될 것 같아요."
남자는 경찰의 말에 큰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경찰이 그에게 '잘하셨어요.' 하니.
남자가 해사하게 웃었다.
경찰서를 벗어난 시간은 열 시가 막 넘은 시간이었다. 본의 아니게 남자의 시간을 뺐은 것 같아, 경찰서를 나서자마자 남자에게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나도 미안해요."
"그 쪽이 뭐가 미안해요. 다 제 잘못이ㅈ."
"그게 왜 그 쪽 잘못이에요. 그 새끼 잘못이지."
"..."
"그리고 그 쪽한테 그 상황에서... 바보라고 한 거 미안해요. 뭘 잘했냐고 한 것도."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다. 전부 다. 내 예상을 빗나갔다. 내 사과에 본인이 미안하다고 받아치는 것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준 것도.
귀 끝이 붉어진 채,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지만 또 진실된 어투로.
바보라고 한 거 미안해요. 뭘 잘했냐고 한 것도.
그리고 그 뒤에 붙어 온 말까지.
그 쪽이 바보라서 그런 일 당한 거 아니에요. 그 쪽이 잘못해서 당한 일도 아니고. 내가 말이 심했어.
하마터면 이 남자 앞에서 또 주저 앉아 울어버릴 뻔했다. 오늘 처음 본 남자 앞에서 운 건, 한 번으로 족했다. 나는 최대한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서로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도, 그 쪽도."
남자는 내 말에 그래요. 그럼. 하고 답했다. 이제 어떻게 남자와 헤어져야 하나 얕은 고민에 빠져있는데, 남자가 내 쪽으로 한 걸음 걸어왔다. 이건 또 무슨 행동이야. 예측 가능한 범위가 없는 남자다.
남자는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무릎에 두 손을 짚고는 나와 눈을 맞췄다.
근데, 그 '그 쪽'말고 '전정국'한테는 미안해해야 되는데.
남자는 '전정국'이라는 이름에 강세를 주었고, 동시에 한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 쪽 이름이 '전정국'이에요?"
"네. 김탄소 누나."
누나? 누가.
여기에 대화를 나누는 건, 남자랑 나 뿐인데. 난 내 앞의 남자. 그러니까 전정국한테 물었고, 그 전정국은 내 질문에 내 이름으로 답을 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아까 진술서 쓸 때 슬쩍 봤죠.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서 놀랐고."
스물 셋이 또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닌데.
"그럼 그러는 그 쪽은 몇 살인데요?"
뭐 스물 둘이라도 되나? 아 근데 또 밝은 데서 자세히 보니 스물 둘? 스물 하나? 그 어디쯤으로 보이는ㄷ.
"저 학교 늦었어요. 나 교복도 못 갈아 입고 가야 돼."
학교. 교복.
스물 셋에게는 충분히 낯선 단어다. 저 단어가 익숙한 나이는 십 대지. 나이 앞자리 1인 애들. 그럼 저 남자가 학ㅅ, 학, 학생? 앞자리 1에 넥타이 매고, 출석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는? 컴퓨터 싸인펜으로 오엠알 카드 채우는? 학생이라고?
"벌점도 2점이나 받을 거예요."
정신 못차리는 내 앞으로 브이를 해보이며. 이 점 하고 말한다.
"집업은 누나가 가져가요."
남자는 정말 늦었는지, 제 손목 시계를 한 번 보고는 뛰어가며 말했다. 집업은 누나가 가져가요. 나는 여전히 남자가 학생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학생이면 열... 열... 그 다음 숫자는 뭘까. 뭐지? 홀수? 짝수? 7은 넘겠지? 중학생은 아닐거야. 중학생 일 수가 없어. 그래.
이미 남자가 중학생이면 어쩌지라는 결말까지 다가간 나를 깨운 건, 당사자. 그 남자였다. 남자는 달리던 제 몸을 뒤로 돌려 나를 바라봤다.
집업 두 손에 들고 가라는 거 아니에요.
남자는 제 손으로 허리에 무언가를 묶는 듯 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묶으라고. 다리에 뭐 잔뜩 묻었어요.
나는 남자의 말에 내 다리를 내려봤다. 다리에는 여전히 날아가지 않은 검은 재들이 묻어 있었다. 괜히 반바지를 입어가지고.
그리고 여기서 보니까 너무 짧아. 바지가.
꼭 묶고 가요.
마지막으로 꼭 묶고 가라는 말을 끝으로 남자는 제 갈 길을 향했다.
현재 03
어떻게 하면 내 새끼가 미성년자에서 완벽히 벗어났다는 걸 알릴 수 있을까. 현수막이라도 걸어야 하나. 내 나름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을 때, 저 멀리서 정국이가 내 이름을 불러온다.
"탄소야!"
저 교복이 마지막 교복이라는 사실이 괜히 코 끝을 찡하게 만들었지만, 그 동안 나를 죄여오던 무언의 죄책감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나도 이제 술 같이 마실 수 있는 남자친구 생겼다!
"정국아! 졸업 축하해 - "
정국이에게 달려가 나름 밤새워 만든 꽃다발을 두 손에 들려주었다. 집에서 볼 때는 나름 봐줄만 했는데, 여기와서 완전 예쁜 꽃다발들 보니까 얘 기죽었나... 왜 이렇게 쭈글쭈글해. 정국이는 그런 내 속내를 알았는지, 꽃 너무 예쁘다. 하고 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나도 양심이 있는지라,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예뻐어 - 사올 걸 그랬어.
"아니야. 이 꽃도 예쁘고, 이 꽃도 예뻐."
정국이가 꽃다발을 들어
이 꽃도 예쁘고
그리고 내 이마에 살풋 입을 맞추고
이 꽃도 예뻐
나는 애꿎은 정국이의 허리만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정국이의 교복 주머니에 몇 장을 날렸는지 모를 편지를 넣어두었다.
그래도 여자친구가 작간데!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
남자친구에게 편지 한 통은 적어줘야 내 남자친구 기 살지.
TO. 정국이에게
사랑하는 정국아. 너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해.
너의 십 대의 마지막과 이십 대의 시작을 함께 할 수 있음에 너무너무 감사해. 어디서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나한테 왔을까. 매일이 신기하고 그래. 나는.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아무것도 아닌 나는 너 덕분에 모든 게 가능해졌어.
또 너 덕분에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많이 부족한 누나인데 - 너가 그래도 점점 괜찮은 누나로 만들고 있어.
역시 최고야. 전정국.
앞으로 너의 길에 내가 오래 함께이길.
너보다 빠르게 걷지도, 느리게 걷지도 않을게. 약속해.
빨리 좀 가자고 칭얼거리고, 천천히 가자고 조르지도 않을게. 이것도 약속해.
넘어져서 아프다고 울지도 않을 거고, 달래주지 않는다고 화내지도 않을 거야. 이것도 약속할게.
그냥 너랑 똑같이 왼 발, 오른 발 내딛고
네가 멈추면 나도 멈추고, 네가 달리면 나도 달릴게
넘어져도 네 손 잡고 일어설게.
화가 나도 네 웃음에 다시 사랑할게.
너는 그냥, 내 옆에만 있어주면 돼.
그리고 이건 너보다 4년 더 많이 살아 본 인생 선배로 하는 소린데 -
생각보다 힘든 일도 많을 거고, 네 뜻대로 안되는 일도 많을 거야.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 살아보니까 원래 그렇더라.
근데 그래도. 내 편이 하나 있다는 게. 그게 진짜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이야.
나는 그 편을 만나기까지 이십삼 년이 걸렸어. 완전 힘들었겠지?
그런데 너는 십구 년 걸렸으니까. 나보다 덜 힘들거야. 부럽다 - 전정국.
마지막으로 네가 하는 모든 일들을 응원할게. 정국아.
매일매일 세상 모든 축복이 너에게 갈 수 있게,
그렇게 기도할게!
사랑해. 내 뮤즈야.
FR. 탄소가.
*
안녕하세요. 겨울 소녀입니다.
스토리 진행이 너무 더딘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지만, 소중한 아이로 소중하게 쓰는 이야기인만큼. 차근차근 이 둘의 이야기를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의 편지는 원래 콘티에 없었는데 - 오늘의 정국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 넣어봤습니다.
늦었는데, 다들 좋은 밤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