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숨겨왔던 치부를 남이 알게 되었을 때.
사실 그 치부가 별 거 아닌 것이라해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연기하고, 거짓말까지 쳐가면서 숨기려 했던 것을 남이 우연히 알았다면. 있지도 않은 쥐구멍을 파서 들어가기라도 해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 큰 거짓말로 치부를 치부가 아닌 것처럼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해맑은 강아지마냥 웃고 있던 모습은 어디로가고, 엄마한테 혼나 풀이 죽은 어린애마냥 고개를 푹 숙이며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김태형 앞에서 더 큰 거짓말을 치기에는 내 양심이 찔려서 뭐라 못 하겠고, 이걸 말해야하나, 하지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김태형의 말로 인해 그냥 결심을 내렸다.
“그 분께서, 공적인 자리 아니면 자기 이야기 좀 그만해달라고 하시면서.. 그냥 좀 화나신듯한 투로 말씀 하셨거든요.”
“..그니까 말해줘요, 이 사람이랑 무슨 관계에 있는 지.”
그래, 김태형 한 명 알게 된다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 일은 없을테니까. 나는 일단, 내 앞의 진중한 눈빛을 보내는 김태형을 믿기로 했다.
쇼윈도 드라마 05 :: 너의 시간에는 내가 없다
*
앞자리 숫자가 2로 바뀌고, 뒷자리 숫자가 그를 뛰어넘는 시기가 지날수록, 누군가에게 위로 ㅡ 혹은 그 비스무리한 연민의 감정을 받는다는 상황 자체에 이질감을 느꼈다. 철부지였던 여고생 시절에는 화가나면 울고, 억울하면 울고, 친구와 싸워도 울고, 그 우는 나를 달래주는 친구들의 존재가 어찌보면 당연한 상황이였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가 치밀거나, 억울하다거나하는 이유로 눈물을 내보이는 것 자체가 '어른스럽지 못하다' 라는 인식을 주어서였기 때문일까, 나는 어떠한 못마땅한 이유에 대해 감정을 소비하는 것 자체가 나잇값을 못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로 맡고 싶었던 배역을 신인이라는 이유로 뺏겼을 때도, 대본 리딩현장에서 나이 지긋한 감독님에게 꼽을 당해도, 주위의 동정심이 싫어서 자기 방어를 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며, 괜찮아? 하는 말투가 소름돋게 싫었다. 그러한 말에 넘어가, 그치. 내가 이렇게 동정심을 받을만큼 나는 불쌍한 년이야. 내 자신을 인식하는 게 싫어서.
전정국과의 관계에 입을 다문 것이 이러한 이유였다. 지금 이 상황은, 누가봐도 내가 너무 불쌍한 상황이지않나. 나를 싫어하는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나. 나를 증오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의 연기된 모습을 사랑하는 나를, 누가 가여워않을까. 그를 좋아한다고 내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그의 여동생은 정혜는 내게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넸지만, 나는 그 어린 아이의 진심을 모른 체 했다. 단지 내 체면을 위해서. 나를 증오하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그 모순적인 제목이 나를 무너뜨리게 했으니까.
아이처럼 울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술로 새벽을 지새는 날이면 목을 놓아 울고 싶을 때가 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쏟아버린 눈물과 비대할만큼 거대한 상실감이 나를 잡아먹을 것이란 걸 너무도 잘 알았다. 내가, 이렇게 불쌍한 년이구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어서 혼자 술이나 마시는 처지가, 내가 생각해도 존나 불쌍해서, 내가 나를 인정할 것 같았다.
허나 전정국의 새까맣기만한 검은 눈은, 그 속내를 알 수 없을만큼 내 사적인 감정의 출입을 입구부터 봉쇄해버렸는데, 그와는 달리 따뜻함을 주는 갈색 눈동자에 동해 꽁꽁 닫혀있던 입에서 그간의 은밀한 비밀들이 술술 새어나왔던 것 같다. 말을 하면서도 나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김태형의 얼굴을 보는 게 괜히 또 싫어 고개를 자꾸만 숙였다. 내가 그렇게나 받기 싫어했던 동정심을 받는 것 같아서.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로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내 상황에 이입해 동정의 말들을 뱉어낼 상황이 싫어서. 불쌍하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냐. 하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 아ㅡ. 내가 그렇게 불쌍한 존재구나. 하고 자기인식을 하게 될 걸 아니까. 정리하자면 나는 또, 남아있는 것이 더 신기한 내 손톱만큼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아등바등 대는 중이었다. 뻔히 불쌍해보이는 상황에서, 동정심을 유발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나 혼자만 나는 아직 괜찮다며, 그 누구도 나를 위로해주지 말라며 내 주위에 벽을 치고 있는 게 내 상황이 아닌가. 나는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결별설 뜨기까지는 얼마나 남았는데요?”
“…아마, 일 년 넘게 남았을 거예요.”
“아…. 아직 많이 남았구나.”
그렇죠. 아무래도 기업가랑 엮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얼버무려지는 말 끝에 김태형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만 있었다. 내 예상과는 반대로 동정의 말을 담은 어떠한 위로도 없이. 내 말을 전적으로 들어주겠다는 건지, 위로를 해주겠다는 건지 어떠한 의도도 모르겠을만큼.
허나, 신기하게도 김태형은 남들과는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래서 꽁꽁 숨겼죠. 남한테 이렇게 들키는 것도, 직접 위로 듣는 것도 싫어서.”
“….”
“그니까 나한테 거짓말 한 거잖아요. 그거 알아요? 여주씨, 거짓말 진짜 못 하는 거.”
나의 조그만 눈빛의 변화도 알아차렸고, 모르는 척 하지만서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농을 던지듯 툭 내던지는 그의 말에 어물쩡하게 상황을 마무리시키려는 나를 보면서 그는 그 미묘함을 소름돋게도 알아차렸다.
“솔직히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 때부터 둘이 안 사귀는 구나, 이런 건 아니였지만 여주씨도 항상 그 분 이야기 하는 거 꺼려했잖아요. 사적인 자리에서도. 남들 같았으면 내 애인이 어쨌네, 저쨌네하고 남들한테 알려주지 못해 망정인데.”
“그래놓고 방송에서만, 인터뷰에서만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렇게 말하고 다니니까 내가 의심을 안 할수가 없죠. 안 그래요?”
“..그냥,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오늘 전화하는 거 들어보니까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 그렇다고 애틋한 관계는 더 더욱 아니고. 그러니까 여주씨만 속으로 앓고있는 거잖아요. 남들한테 말할 처지도 못 되고, 설령 말 한다해도, 여주씨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게 걱정이 되서. 보여주기식으로 연애하는 것 뿐인데, 내가 이렇게 나오면 상대방은 나를 설레발친다고 생각 할 거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밉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여주씨는 왜 이 사람이 날 이렇게 싫어하나 억울하기도 할 것 같고, 그니까 더 우울하고, 계속 혼자있고 싶어지니까 오늘도 나한테 거짓말 치고 집 가서 술 마시려고 했죠.”
아… 어, 어.. 네에. 추궁하듯 묻는 투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 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김태형은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이였다는 게 실로 놀라웠기도 했고,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이상으로 날 너무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아니, 이 정도면 진짜 나중에 점집 하나 차려야 되는 거 아닌가.
“괜찮아요, 왜 처량하게 술을 혼자 마셔요. 마셔도 나랑 마시지.”
“….”
“어, 같이 마시는 건 좀 위험하려나. 그래도 공식적으로 임자있으신 분인데.”
“...”
“아, 농담이에요. 농담. 아무튼, 앞으로는 혼자만 앓고 있지 말기로 약속해요. 오늘처럼 거짓말치고 집에서 혼자 고독하게 있지 말고. 알았죠?”
“….”
“대답 안 해줘요?”
..네. 내 말을 끝으로 그는 말하는 내내 어두웠던 표정을 풀고는 이제서야 좀 트인 웃음을 지어주었다. 풀어지는 표정에 나도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척박한 연예계 생활에서 몇몇은 그런 말을 한다. 화려한 겉모습 뒤로는 모두들 누군가의 경쟁의 대상이 되고, 안 그런듯 하지만 남을 헐뜯고, 비난하느라 바쁘다고. 별난 사람들도 많아 쉬쉬하는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는 마당에 내 고민을 툭 터놓고 말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오히려 남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힌다는 것은 온전히 비밀을 소유한 자의 손해가 되기도 한다며. 그런 이유를 바탕으로 깊은 연인을 두지 않는 나에게 오늘의 일은 큰 이변일수도 있겠다. 그냥, 김태형이라는 성격을 가진 배우가 연예계에 있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였다. 모두들 자기 자신의 이익이 먼저일 이 바닥에서, 그와 같은 사람도 볼 수 있구나. 순수하게 자신의 동료를 위해서 내 시간을 내줄 수 있는 사람. 국민의 관심을 위해서가 아니고, 온전히 나를 위로해주려는 목적으로. 그런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니고, 배우 김태형이라는 게.
치부를 밝힌다, 혹은 숨겼던 비밀을 알려준다. 라는 문장은 무언가 다른 긴장감을 전해주는 능력이 있다. 혹여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단지 누군가에게 나의 치부를, 혹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던 과거의 행위에 대해 나도 모르게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게도 할 수 있기도 때문일까. 따라서 꽁꽁 숨겨왔던 진실의 무언가를 누군가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일 때, 비밀을 전달해주는 그 상황 속에서 어디서부터 시작인지도 모르는 긴장감이 내 몸을 감싼다.
하지만 이는 별 것이 아닐수도 있다. 숨겨왔던 비밀을 밝힌다고 할 때, 비밀을 밝히는 과정에서 흥미를 돋구는 것은 비밀을 알게되는 상대방의 미묘한 표정 변화이며, 이에 끝을 맺는 것은 상대방의 '반응'인데, 이는 사실 그의 반응에 따라 별 게 아닐수도, 혹은 더 큰 파장을 낳을수도 있다. 아마 나의 상대는,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김태형이였어서 크게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내 말을 들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눈치가 빠른 게 이유의 전부는 아닐테고, 놀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일들은 연예계에 허다했으니까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쇼윈도 커플. 이의 사례는 나와 전정국이 처음이 아니라는 소리다. 연예계 엑스파일이니 뭐니, 이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도 보여주기식 연애를 하는 연예계 커플에 대해 보도를 한 적이 있는데 과장된 부분이 많아 오해를 산 프로그램이기 하지만서도 백퍼센트 과장은 아니였다. 단지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더욱 자극적인 내용으로 짜고 쳤다는 게 문제였지, 그 본질은 아예 틀린 소리는 아니였다는 말이다. 기업가와 배우의 열애설은 대부분 이렇게 쇼윈도 커플로 이어지는 경우가 꽤 많다. 물론 국민은 모른다. 몇몇의 연예계 기자, 혹은 증권가 찌라시를 주도하는 기업가 고위직 간부들만 알 뿐, 그게 또 여차저차해서 퍼지면 여럿 연예계 종사자들에게까지 퍼지는 거고, 그러다 결별설이 나는 것이고.
그렇게 전정국과 나도 기자들과 연예계 종사자들에 의해 발목이 잡힐 듯 했지만, 고맙게도 그럴듯하게 포장이 된 이유가 '정혜'의 존재였다. 내가 정혜랑 친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였기에, 우리 둘의 관계를 토대로 나와 전정국의 사이가 발전한 줄만 안다. 그 바탕이 된 나와 정혜의 관계 조차도 나의 지원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아무도 모를 것이고. 쇼윈도 커플이라는 게 겪어보기 전까지 사실은 별 거 아닌 줄 알았다. 근데, 직접 겪어보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는 말이 뼈저리게 와닿는게, 나는 항상 누군가의 지시로 대중 앞에서 연기를 해야하는 존재였고, 대중을 속여야하는 임무를 위해 그 누구에게도 내 처지를 쉽게 말하지를 못 했다. 마우스 투 마우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이 가장 빠르고, 신빙성도 제로인데도 가장 암묵적으로 신뢰하질 않나. 그러니 속으로 더욱 더 숨기고, 움츠리는 수 밖에.
가상 연기의 상대자가 전정국 같지만 않았다면 그래도 마음고생은 안 할텐데,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게 된 이상 어떻게 마음 고생을 안 하고 베기겠는가. 그것도 나를 극도로 싫어하는 전정국을.
‘그 분께서, 공적인 자리 아니면 자기 이야기 좀 그만해달라고 하시면서.. 그냥 좀 화나신듯한 투로 말씀 하셨거든요.’
정혜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일이였나보다. 내가 걱정되었던 정혜는 전정국에게 어떤식으로든 좋게 말하려했을텐데, 그게 또 아니꼬왔던 건지 전정국이 노발대발하며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을 보면 그는 또 나를 이렇게나 싫어하는 구나, 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표정만 봐도, 말투만 봐도 나에 대한 증오감을 얼만큼 나타내는 지 아는 것은 이제 식은 죽 먹기였다. ..근데 그게 이렇게 전화까지 할 만큼 화낼 일인가. 괜히 삐뚤어진 마음이 자리를 잡는다. 그럼 자기가 좀 착하게 굴던지, 나쁜 새끼야..
더 좋아한다는 사람이 진다는 말이 있다. 언제나 그 말은 옳고, 또 옳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지금도 그의 욕을 하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그에대한 미안함이 피어오르는 게 그 이유라면 이유겠지. 나는 눈곱만큼도 신경도 안 쓸 그를 수시로 생각하며, 그가 내비춰준 가상의 다정함을 나는 또 기다리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족할 것 없는 연기에서 비춰주었던 그의 다정함이, 사실은 그의 내면일지도 모른다며. 언젠가는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 그 만개한 미소를 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또한, 그러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
“야, 왜 이렇게 죽을 상이야. 오랜만에 만나놓고 이러기 있기냐?”
“바쁘다니까 꼭 만나야한다던 새끼가 누군데, 미친놈아.”
그건 인정. 하면서 시치미를 뚝 떼는 정호석에 혀를 내둘렀다. 이 새끼는 오랜만에 만나도 변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제일 신기하다. 서로 현생에 치여사느라 만나자, 만나자하면서도 나는 작품 때문에, 정호석은 곡 작업 때문에 눈 코 뜰 쌔 없이 바빠서 항상 미루고는 했었는데, 며칠 전에 자기가 낸 음원이 1위에 차지했다면서 축하 기념으로 만나자고 했던 게 이제서야 만나게 되었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서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연락을 하는 친구이면서도 이제 막 높은 평가를 받게 된 래퍼 겸 프로듀서인데, 밝고 활발한 성격인지라 나랑은 완전히 대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어떻게 둘이 친구냐며 굉장히 놀란 기색을 비치고는 했는데, 그건 진짜 나도 궁금. 어쩌다가 얘랑 이렇게까지 친해졌는지 나도 잘은 모르겠다.
아무튼, 정호석은 그 간의 길고 길었던 내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이다. 내가 정혜에게도 껄끄러워서 못 말했던 그 동안의 속사정을 정호석에게나마 털어놓고는 했었는데, 내가 전정국과 쇼윈도 커플로 보일 것 같다고 말을 했었던 그때에도 정호석은 그냥 ‘그래? 들키지않게 조심해라, 저번에 그 어떤 여자도 걸려서 아직도 복귀 못 하고 있잖어.’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확실히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애라 그런지, 일반인보다는 더 내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아직까지도 내가 정호석과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인 것 싶기도 하다.
“그래서, 김태형이 네 전화를 대신 받았다고?”
“..응.”
“그래서?”
“그 사람한테 온 전화라는 거야, 그 사람이 나인줄 알고 막 화난 말투로 사적인 자리에서 자기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말을 했대.”
“….”
“이것도 김태형씨가 필터링 해준 거였을 걸. 알잖아, 그 사람 말 더 심하게 하는 거.”
일부러 나 더 상처받으라고.
“….”
“내가 봤을 때는, 정혜가 대신 말해준 것 같은데.. 그게 또 자기 심기를 건들였나봐. 하던 일 때려치고 나한테 전화한 거 보면.”
다른 여자랑 자고 왔다는 것도 보여주는 남자인데, 나한테 그런 말 하나 못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치?
“너는 그 사람이 왜 좋은데?”
글쎄, 그걸 알았다면 내가 아직도 그를 좋아하고 있을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야, 잘 생각해봐. 너는 아직도 전정국 생각하고 있지? 그렇게 속으로 밉다, 밉다하면서도 결국 그 사람 생각하고 있잖아.”
“….”
“근데 그거 아냐? 그 새끼는 너 신경도 안 써, 등신아.”
“….”
“막말로, 지금도 호텔에서 다른 여자 끼고 놀고 있을 지도 모르지. 너가 이렇게 감정낭비할 시간에.”
“정신차려, 이여주.”
“너가 어쩌다 그런 사람한테 코가 꿰인지는 몰라도, 네가 아는 전정국의 모습은 현실에서는 있지도 않아.”
사뭇 진지해진 정호석의 표정에 그냥 입만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였다. 다, 맞는 말이다. 하나라도 잘못된 말이 있으면 그런 게 아니라며 꼬투리를 잡으려했는데도, 그러할 여지를 주지도 않고 옳고, 또 맞는 말만 한다. 정호석의 말대로 진짜 그는, 새벽달을 비추려는 이 밤에 다른 여자랑 지금도 밤을 새워가며 욕정을 풀 수도 있는 것이였다. 다시 말해, 나의 하루에는 그가 빼곡했지만, 그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만 버텨.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일년만 참으면 너도, 전정국도 아무런 관계도 아닌 것도 잘 알아두고.”
“너는 너대로, 전정국은 전정국대로 돌아가는 거야. 이제는 아무런 접점도 없이. ”
나는, 할 수 있는 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뿐이였다.
*
14개월. 그와의 계약이 완료 될 때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14개월 남짓한 시간에서 우리는 완벽한 연기를 보여야했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는 함께 있었다. 물론 자의는 아니였다. 그의 아버지의 지시로, 우리는 움직여야했고,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도 불편한 자리를 함께 한다. 이 자리는 언제나 바랬고, 바래왔던 순간이지만서도 너무나 막막하고, 언제나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그가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
입이 떼어지질 않는다. 전에 같았으면 우리 사이에 싹트는 불편함의 기류를 잠시나마 없애보려 조금은 억지로라도 웃으며 말을 이어가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에서부터인지 그에게 말을 꺼내기가 너무도 어려워졌다. 사적인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그만 하라고 했을 때부터, 아니. 아마 그가 내게 뭉게진 립스틱을 보여줬을 때부터인지도 모른다. 무섭도록 당당하고, 뻔뻔한 표정을 볼 때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온갖 문장들이, 단어들의 조합이 마치 폭탄이 되어 내 멘탈을 산산조각 낼 것 같다.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시한폭탄의 파급력은 원체 엄청나질 않은가, 젠틀한 표정으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가슴을 쿡 찔러 파고들게 할 말들을 만들어냈다.
목적은 단 한가지였다. 내 기분이 나빠지라고. 더 더러워지고,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라고. 자기를 보면서.
어린 신데렐라를 미워하는 새언니 마냥, 그는 항상 그래왔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했던 나의 말들은 더욱 미움이 배가 되었고, 그 반대도 역시나 똑같았다. 결과도 항상 똑같았다. 변수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는 나를 싫어한다. 최후의 결론이였고, 최선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그에게 내가 익숙해졌나보다. 내가 무언가 말을 하면 그는 나의 말을 잘라먹어 자신의 말을 하거나, 내 말을 들은 체도 안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부러 나는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도 전과는 다른 나의 모습에 나를 흘끔 쳐다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 어쩌면 그에게는 이런 나의 모습이 더 편하고, 오히려 더 보기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신경 쓸 것도 없는 지금 이 상황이, 그에게는 보다 더 나은 현실이겠지.
“이여주씨.”
그래서 그런지, 전정국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진짜 깜짝 놀랐다. 이러다간 오늘 내내 말도 안 하고 집에 가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갑자기 불러서는 이제 또 막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 눈빛이 또 무서워서 눈을 마주칠 생각도 못 하고, 그의 눈도 아닌, 애매한 볼 위치를 살며시 쳐다보다가 바로 고개를 거두었다.
“사람이 부르면, 대답이라도 해주셔야되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네?”
“저번에 전화로 말씀을 드렸는데, 시끄러워서 잘 안들렸을 것 같아서요.”
“..뭐를,”
“사적인 자리에서 제 이야기 하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그 상대가 제 여동생이건, 누구건 간에 제가 없는 이여주씨 사적인 자리에서 제 이야기가 나오는 자체가 거북하거든요.”
안돼, 아직은 눈물이 터지면 안된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릎 위로 올린 손에 더는 힘이 안 들어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쥔다. 아니, 안되는데…. 아직은 울면 안되는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나는 또 새엄마 앞에서 혼나는 신데렐라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 한 방울이라도 새어나오지 않도록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멍청하진 않으시잖아요, 어떤 사람과는 다르게.”
어떤 사람.
‘..정국씨, 그, 그래도. 정국씨 저 여자랑 사귀는 거 아니잖아. 응? 정국씨, 나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결혼? 내가 당신을 사랑했어서 이루어진 절차라고 생각해? 웃기는 소리하지마.’
‘….’
‘너네 가족이 그렇게나 환장하는 돈 때문에 장단 맞춰준 거 아니야.’
‘….’
‘당신처럼 머리에 든 것도 없고.’
‘….’
‘돈에 눈이 먼 여자한테 어떻게 마음을 줘. 당신이 생각해도 상식적이지가 않잖아. 그렇지않아?’
그리고,
‘미안.적어도 여주씨한테 이런 모습 보이면 안되는 건데, 잘 안되네요.’
그때와는 현저히 다른 그의 온도차까지. 나는 땀으로 가득 찬 주먹을 못 이겨, 어젯밤 그를 만난다고 어렵게 고른 원피스의 끝자락 자꾸만 쥐었다, 폈다하며 나의 불안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깊게 나오는 뜨거운 한숨은 덤으로.
“선을 넘지 마세요. 저는 이여주씨한테 살갑게 대할 마음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습니다.”
“이여주씨랑 저, 실제 연인사이도 아닌 거 그 쪽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니까, 그렇게 동정심 받으려는 표정도 짓지 말아주시죠. 괜히 제가 범죄자 된 것 같거든요. 계약서가 만들어준 인연이고, 계약이 끝나면 이여주씨랑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닌 겁니다. 그니까, 좀.”
“….”
그만, 제발. 그만 그 입을 열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귀를 막고 싶다. 저 뒷말이 궁금하지도 않았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제발, 입을 떼지 말아줘. 제발….
“설치지 좀 마세요.”
기어코 입이 열리고, 폭탄은 터졌다.
그리고, 더불어, 내 눈물도 터져버리고 만다.
폭탄이 터지고 난 후의 잿빛의 세상, 잿빛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나는 그것들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가라앉는다. 것보다 더, 우는 모습을 들켜서는 안되었다. 아랫 입술이 터지도록 깨물었다. 피가 베이고, 혀 끝으로 피 비린 맛이 난다. 아프다, 아니, 아픈 것보다 쓰라리다. 마치 내 가슴 한 켠이 그랬던 것처럼. 아릿한 가슴 한 쪽이 퍼져나와 통증으로 번진다. 나는, 그대로 깊이 가라앉았다.
*
독자님들! 잘 지내셨어요? 이제야 저는 좀 살 것 같네요 하하..^^..
역시 현생이라는 게 제일 무서운 것 같아요ㅋㅋㅋㅋ 여주와 호석이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현생에 치이느라 이제야 글을 부랴부랴 씁니다!
이번 편은 정국이가 진짜 제일 못된 나쁜놈으로 나왔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항사진을 쓰니까 더 몰입이 되어서 다른 때보다 더 잘 써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항상 제 글 추천하고, 추천 받고 오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려요ㅠㅠ 저번 4화때 댓글 100개 넘어가서 저 진짜 현실 입틀막... 너무 감사합니다 독자님들....♡
저는 또 이번주를 마무리하고, 꾸준히 글을 쓰고 다음주에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독자님들 너무나 사랑합니다 ㅠㅁㅠ
아 오늘의 bgm은 이소라님의 tears입니다! 좋은 노래니까 많이 들어보시는 것을 추천할게요!
♡핑슙/루이비/혬/오전정국/앰플/꽃길/민트/오호라/방소/라온하제/030901/짐짐/계피/나의별/0103/윤기꽃/망개쿵떡집/비림/모찜모찜해/분홍빛/몽총이덜/밀짚모자/맴매때찌/크슷/랄랄랄랄랄/태태마망/설레임/골드빈/망고마이쩡/내사랑꾸기♥/배고프다/의대생/우유/비림/후니/둥둥이/991211/안돼/나의별/강변호사/가온/0765/chouchou/겁남이/광어회/보라도리/전정국오빠/침쿵/온별/10041230/정닺뿌/또또/코코팜/추억/이요니용송/줍줍/짐인이오빠/가위바위보/윤기야밥먹자/은갈칰/공대생/뾰로롱♥/태구리/젤리/망개다/닻별/냄듀/굥기요정/뀨기/감귤/윧/쇼드/강여우/꾸끼워니/뷔티뷔티/짐절부절/목소리♡
암호닉 신청 항상 받고 있으니 언제나 신청해주세요! 감사해요 다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