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회하나?
- 뭘요?
- 그 날을.
- 내가 왜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광적인 웃음소리에 웅장하던 목소리는 침묵을 지켰다. 내 반응에 당황한 눈치였다. 웃어제끼던 나는 뚝, 멈추고 답했다. 처음에는 당신을 욕했거든요, 왜 하필이면 그 애를 내 남매로 만들어서 나를 괴롭게 만드는지.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나, 그래서 당신이 날 괴롭히려고 날 망가뜨릴 남자를 보냈나. 나는 킬킬 웃었다.
- 지금은, 충분히 감사하고 있어요.
- ..........
- 기회를 준 것에.
- ..........
- 물론, 그게 당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나란히 붙은 대학은 통학하려면 통학할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그러기에는 길바닥에 내다 버리는 시간이 아까운 정도였다. 박지민은 자취를 하겠다고 했고, 나도 그를 따라서 자취를 하겠다고 했으나 엄마가 반대했다. 지민이는 몰라도 나는 안 된다고. 대학가라고 하더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며 기숙사를 신청하라는 말에 마지못해 따랐다.
기숙사에 들어가는 날이다. 원하는 자취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집을 떠난다고 마음이 설렜다. 마지막으로 빼두었던 물건들을 집어넣는 와중에 내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박지민이었다.
"신났네?"
주방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직 떠나기에는 시간이 남았다. 아저씨는 일을 나가서 엄마가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저씨 대신, 박지민이 내 짐들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박지민은 아직 들어갈 날짜가 안 되어서 집에 머물러 있다가, 이틀 뒤에 자취방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가방이 완전하게 닫힌 것을 확인한 나는 쪼그려앉은 자세 그대로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받아내던 그는 몸을 돌려 주방을 확인하더니, 곧 허리를 숙여 내게 키스해왔다. 뜨거운 살덩이가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배덕감과 황홀경을 동시에 느꼈다. 한 지붕 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란.
키스를 마친 박지민이 침으로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말끔히 닦아냈다. 준비 다 했니? 차 키를 든 채 물어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날아왔고, 나는 소매로 키스의 흔적을 닦은 채 방을 나왔다.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대학 강의는 고등학교 때와 느낌이 달랐다. 아직 교복입은 학생이던 때, 어른들이 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만 믿고 올라왔더니 올라오자 하는 말은 다 자신의 힘으로 하라는 말들 뿐이다. 실제로 우리가 인형처럼 어른들의 말을 들은 건 몇 개월 전밖에 안 되었을 뿐인데, 갑자기 책임감과 자립심을 운운하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첫 주라, 수업이 빨리 끝난 나는 강의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날 잡은 것은 한 손이었다.
"어, 김여주? 너도 여기야?"
김태형이었다. 수능이 끝난 뒤로 나는 의도적으로 모든 애들과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김태형 또한 이 학교에 붙은 지도 몰랐다. 김태형은 몹시 반가운 눈치였다. 이렇게 보니 반갑다! 수능 망했다느니 하더니만, 결과는 괜찮았나 보네! 따닥따닥 달라붙는 김태형을 달고 나는 강의실을 나섰다. 박지민이 학생회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저 혼자 반가워서 떠드는 김태형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받았던 내용 그대로 기다리고 있던 박지민이 나를 보고 걸어온다.
"는... 박지민 아냐?"
김태형은 내 집이 재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박지민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태형은 박지민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다, 씩 웃었다.
"둘이 사이 좋아졌나 보네. 말은 안했어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찬바람을 쌩쌩 일으켜가지곤..."
안타깝게도 김태형 또한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호적상의 남매가 단순히 의견 차를 좁히고 화해했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굳이 정정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나는 간단하게 동조해주고서는 김태형을 보냈다. 사라져가는 김태형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박지민에게 조용히 말했다.
"김태형, 같은 학교더라."
"그러네."
"쟤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아."
어느 새 사라진 김태형을 빼고서는 캠퍼스 안은 온통 우리 사이를 모르는 사람들 천지였다. 박지민은 내 허리에 제 손을 올리고는 대답했다. 응, 김태형 조심해야겠다.
* *
신입생들은 술자리에 자주 참석해야 한다. 아웃사이더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보통 그래야 했다. 사람들과 맞부딪히는 게 싫었기에 나는 웬만하면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선배들에게 끌려나가는 박지민 때문이라도 술자리를 빠지지 못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서 적당히 다른 여선배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휘어지는 눈웃음, 어머 너 진짜 귀엽다- 하는 목소리들.
"그럼 여주는 남자친구 있어?"
선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내게 집적대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 그런 기대감은 단번에 망쳐줄 의향이 있었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네, 있어요. 그러자 남선배는 무안한 표정을 짓더니 그래 여주는 예쁘니까 당연히 있겠지! 하고 괜히 옆 동기를 치며 웃어댔다. 어색하게 웃어보인 나는, 같은 맥락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지민아, 사귀는 사람 있어?"
박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마도 남자 선배에 대답을 하던 내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젓가락으로 찌개에 담겨있던 콩나물을 건진 채 아작아작, 씹어들어갔다. 여선배가 턱을 괸 채 박지민의 대답을 재촉했다. 빠알리이. 애교 부리는 저 년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박지민이 빨리 답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들고 있는 젓가락을 그 여자한테로 던질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네."
"진짜아? 얼마나 사귀었는데?"
"별로 안 됐어요."
"흐응... 동갑? 연상? 아니면, 연하?"
"동갑이에요."
대답을 하는 내내 박지민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아닌 딴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여선배가 손을 들어 박지민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저 씨발 년이.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박지민의 얼굴을 잡은 채 뭐라뭐라 달콤하게 속삭이는 꼴을 보고 있자 열이 뻗쳐올랐다. 저 손을 안 쳐내는 박지민도, 거지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속이 좀 안좋아서, 산책 하고 올게요."
벌떡 테이블을 일어난 내 뒤로 박지민의 눈동자가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게를 나왔다. 밖에는 우리같은 술판을 벌이는 곳이 많아서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기 싫은 나는 어두운 골목길 쪽으로 빠져들었다. 발등으로 애꿎은 벽을 찼다. 왜 그년의 알랑거림을 다 받아주고 있는데. 탁탁탁, 달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를 홱 잡아 돌리는 손길에 박지민이 왔음을 알았다.
"화났,"
"좋아?"
".........."
"아주 좋아 보이던데."
날선 내 대답에 박지민은 말이 없었다. 가까이에 있는 박지민에게서는 술냄새와 향수가 붙어나왔다. 나는 박지민의 옷을 잡은 채 노려보다가, 박지민을 내버려두고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그 안에서 초코우유를 사서 걸어나왔다. 박지민은 충실한 개처럼 고새 이 앞까지 따라와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던 나는 주저없이 우유를 뜯고, 박지민의 옷에 우유를 부어버렸다. 그가 고개를 내려, 젖어버린 제 옷을 쳐다보았다. 난 조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젖은 옷 입고선 더 못 있겠다, 그치."
박지민은 갈색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꼴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더니, 내게로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팔목을 홱 낚아채 거칠게 키스했다. 뒷목을 움켜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도 그다지 허용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다리가 제멋대로 풀려 쓰러지려는 것을 알아채고, 그가 강하게 붙들었다. 우리들이 키스하고 있는 장면을 누가 발견하면 어떡하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뿐이었다.
옷이 엉망이 된 박지민은 술자리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포기하지도 않고 옷 갈아입고 와아, 하는 여우가 눈꼴이 시려웠지만 아까보다는 참을 만 했다. 박지민이 나간 것을 확인한 후, 나도 잔뜩 취한 척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여자 기숙사는 남자 출입 금지다.
박지민은 내 기숙사 방을 들어올 수 없었기에, 내가 그의 자취방으로 가야 했다. 그 나잇대의 또래 남자애들과는 달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을 보고선 나는 좀 놀랐다. 방은 두 사람이 머물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 *
대학생활은 꽤나 즐거운 편이었다, 거지 같은 과제만 없다면. 그 날도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박지민의 자취방으로 가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을 때였다.
"오랜만."
바닥에 배를 대고 노트북을 하고 있던 김태형이 고개를 들어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더니 그렇게 내뱉었다. 생각치 못한 불청객에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박지민이 방문한 나를 발견했다. 여전히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김태형의 뒤통수를 쏘아보던 나는 날선 질문을 내뱉었다.
"왜 지민이 자취방에 왔는데?"
"과제 때문에. 같이 하기로 했거든. 그런 너는 왜?"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김태형이 대답했다. 거지같은 과제새끼 같으니. 박지민과 단 둘이서 영화도 보고 놀려던 알찬 계획을 세운 나로서는 엿같은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답 없는 나의 모습에 김태형이 눈을 도륵 굴려 올려다봤다. 김태형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던 나는, 툭 하고 말을 뱉었다.
"가족인데 놀러오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가."
입 밖으로 가족이라는 말을 내뱉는 것도 이제 아무렇지 않아졌다. 뻔뻔한 내 대답에 김태형은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고 뒤에 박지민을 돌아보며 그런다. 니네 정말 친해졌긴 친해졌구나? 예전 같으면 학교에서 쌩까고 남남처럼 살았을 텐데. 시간 많이 지났네, 김여주가 박지민을 가족이라고 챙길 줄도 알고.
나는 침대에 누워서 박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다가 주제와 맞지 않는지 창을 끄고서는 바로 다른 링크를 클릭한다. 그의 어깨 너머로 나는 박지민이 무엇을 하는 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노트북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두드렸다. 전송.
- 카톡.
[ 언제 끝나 ]
박지민의 노트북에 내가 보낸 메세지가 떴다. 박지민은 나를 흘끔 돌아보더니 답장을 보냈다. 내 핸드폰에 새로운 창이 떴다. '모르겠어'. 입을 비죽인 나는 손가락을 두드렸다. '바쁜 거 아니면 나중에 하면 안 돼?' 박지민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답을 보냈다. 그리고 단호하게 대화창을 닫고서는 자료조사를 이어갔다. 대화창을 닫았다 이거지? 조금 삐져버린 나는 연달아 카톡을 쏘아보냈다.
- 너
- 내
- 가
- 이
- 제
- 우
- 습
- 지?
"야, 카톡 좀 보던가 아니면 소리를 끄던가 해."
방 안에 연달아 울려퍼지는 카카카카카톡 소리 때문에 김태형이 신경질을 냈다. 박지민과 마주보고 있는 채로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의 노트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카톡을 확인한 박지민이 나를 잡고서는 일으켰다. 김태형의 눈동자가 잠시 우리에게 따라붙었다가 이내 노트북으로 쳐박힌다. 문을 닫고 나온 박지민을 마주한 나는 싱긋 웃고서는 그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왜 무시해. 빨리 끝내던가, 아니면 김태형 내보내던가 해.
"이따 와. 제출일이 얼마 안 남아서 그래."
"싫어."
".........."
"재밌는 거 하려고 왔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팍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박지민은 도발적인 나의 행동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눈동자를 굴려 그를 올려다본다. 이제는 굳이 그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입을 열어 박지민에게 말을 야실스럽게 흘렸다.
태형이이...
내보내에.
후, 숨결을 불었다. 박지민이 웃으며 그의 몸에 붙어있는 내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한 시간 뒤에 와.
* *
나는 착하니까, 한 시간 뒤에 오라는 그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아까와는 달리, 바닥에 배를 붙이고 엎드려 노트북을 하던 김태형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문을 닫으며 그에게 물었다. 과제는? 다 끝났어? 박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제출일 별로 남지 않았다며, 그러면서 오라고 한 거야? 순전히 그를 놀리기 위한 발언이었다. 학점이고 뭐고 버리고 나랑 놀자고 제안한 건 내 쪽이었으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어서 미뤘어."
"뭔데?"
박지민이 웃었다.
"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손을 들어 밤보다도 더 새카맣고, 우리들의 속처럼 검은 박지민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모발이 나의 손 끝에서 돌아다녔다. 어쩌면 이렇게도 위험하고 아름다울까. 나는 새삼 그의 존재에 대해 감탄했다. 혈관을 돌아다니는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잔잔하게 떨리며 박지민을 향해 역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그 누구보다 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차가운 얼굴을 하고 나를 향하는 손은 뜨거웠다.
지민아, 너는 아름다워.
만일 흑요석을 가공하여 얇게 실을 만들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내 이마를 간지럽히는 그의 머리칼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보석으로 눈을 만들 수 있다면, 이런 눈동자를 하고 있을까. 속이 너무나도 깊어 내 모습조차 거의 비치지 않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때, 문이 덜컥 열렸다.
"핸드폰을 놔두고 와서 찾으려 왔..."
조금은 귀찮은 목소리로 내뱉던 김태형은 방 안의 풍경을 보자 얼어붙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박지민의 시선이 김태형에게로 향했다. ...씨발. 나즈막히 읊조리는 박지민의 욕설을,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도저히 발뺌할 수 없는 증거들이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 멍하니 서 있던 김태형의 입이 마침내 열려졌다.
"미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너네 지금 뭐하고 있는 건데. 김태형이 이를 아득 갈았다. 나는 날 일으켜주는 박지민의 손을 잡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연스럽게 행동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김태형은 더욱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우리들을 바라보는 김태형의 두 눈동자는 경멸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핸드폰을 두고 왔다고.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핸드폰을 찾았다. 책상 모서리에 놓여져 있는 김태형의 핸드폰을 그제서야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놓고 간 김태형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김태형은 두고 간 핸드폰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건지,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었다. 미쳤어, 미쳤다고. 일렁이기 시작하는 김태형의 주변 공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김태형에게 다가가려는 박지민을 부드럽게 저지했다. 그리고 날 노려보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태형,"
"너희 가족이잖아."
"태형아,"
"가족이라며. 피 안 섞였어도, 가족이잖아, 남매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들고 있던 그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나는 김태형이 어떤 남자애인지 알고 있다. 갓 성인이 된 남자아이. 그의 주변에는 치근대는 여자애들이 많지만 정작 김태형은 여자를 겪은 적이 없다. 저런 반응을 보면 안다.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남자애 하나쯤 내 뜻대로 휘두르는 방법은 쉽다. 결론을 내린 나는 김태형을 벽에 밀어붙였다. 내 손을 뿌리치려는 김태형의 손을 억누르고, 미소를 지었다. 뭐하는 거야 미친년아.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돼."
눈웃음을 지으며 김태형의 옷자락에 손을 댔다.
* *
김태형은 공범자가 되었다. 그는 박지민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나는 제대로 미친년이었고, 박지민 또한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미친 사람들 사이에 말려들은 김태형은 정상적인 사람에서, 점점 비정상적인 루트를 타게 될 것이었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김태형이었다. 왜애. 나는 야실스럽게 미소지었다. 김태형이 고개를 홱 돌렸다. '미친년'. 나즈막한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온다. 흐흥. 나는 재미가 있었다. 손가락을 톡톡, 건드려 박지민에게 연락을 보냈다.
[ 지민아 ]
[ 뭐해? ]
답이 도착했다.
[ 걔 신경쓰지 말고 수업 들어 ]
뒷문을 돌아보았다. 문에 길게 난 유리 사이로 박지민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박지민은 인기가 많았다. 여자애들이 치근댔다. 그는 그년들을 쳐내지 않고, 그저 웃으며 받아주고 있었다. 처음대로였다면, 나는 질투에 눈이 멀어 그런 여자들 중 하나의 뺨을 때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박지민의 얄팍한 술수 따윈 알고 있었다. 질투는 무슨.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옆에 앉아있던 선배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목소리 톤을 한 톤 높여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부드럽게 웃고 있던 표정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너무 웃겼다.
넌 날 못 이겨.
아슬아슬한 사이가 이어진다. 아니, 이미 경계선을 넘은 건 한참 전이고 그저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했다. 박지민의 방에 들어앉아 있을 때마다, 종종 어떤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엄마와 아저씨가 남남이라면 우리는 굳이 이런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될 텐데. 둘이 이혼하면... 진동소리에 이어지던 생각을 멈췄다. 액정에 비치는 엄마라는 글자를 죄책감에 물들어졌다.
김태형이 달라졌다.
나를 볼 때마다 미친년, 미친년 하던 소리는 언제부터 사라져 있었다. 경멸스럽던 눈동자도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그 애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알 수 있었다. 뭐든지 처음을 잊기에는 힘든 법이지, 그렇지 태형아?
김태형 또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여자애들의 관심 따윈 어찌되든지 간에 상관없다는 듯 싸가지없게 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알고 있던 김태형은 저러지 않았는데. 콩알보다 더 작게 느껴지는 그를 망쳐놓은 것에 대한 미안함. 나를 바라보는 김태형의 두 눈동자는 오묘했다. 나는 저 애가 무슨 심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김태형은 내가 그에게 다시 한 번 키스해주길 원했다.
"해주면, 안 말할게."
나를 벽에 밀어붙인 채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김태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딴으로는 협박거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엄마에게 고자질을 했을 거라면 애시당초 그 날 보자마자 바로 연락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와서 '해주면, 안 말할게'라고? 김태형은 내가 매섭게 치고 돌아서도 이르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키스따위야 가엾은 태형이에게 해 줄 수 있지... 그러나, 나는 눈앞의 애를 놀리고 싶어졌다.
"정말 키스만으로 돼?"
김태형에게 물었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김태형의 팔을 잡아내렸다. 태형아. 나는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천천히 굴렸다. 내 손가락을 따라 김태형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입을 열어 하고싶은 말을 뱉었다.
"미치려면 제대로 미치고 와."
어줍잖게 하려고 들지 말고.
그리고 그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 *
학기가 끝났다. 그 말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뜻했다. 나는 집으로 별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집에 들어가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행동하지도 못할 테니까. 엄마와 아저씨의 눈치를 보면서, 네 개의 눈들을 피해서 몰래 키스해야 하니까. 소파에 퍼져 있는 채로 티비를 바라보았다.
박지민은 방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굴려 2층을 바라보았다. 누구랑 통화를 하길래 나를 두고 그렇게 오래 하니. 박지민은 여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이전과는 좀 더 색다른 관계를 원했다. 보통 그렇지 않은가. 똑같은 패턴만이 반복되면 쉽게 질리는 법이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지민이 질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나와 그 사이가 조금 더 아름답고 역겨운 관계가 된다면 족했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김태형은 개마냥 내 주위를 빙빙 돌아다니곤 했다. 내 눈길을 받고 싶어서 안달난 애였다.
"뭐해?"
신호음이 두 번이 채 가기도 전에 연결음이 끊어졌다. 나는 태연한 척 말을 걸었다. 아니, 심심하면 만날까- 해서 전화했지. 어 나 약속 없어. 언제 만날래? 지금?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좋아. 30분 뒤에 보자.
내게 눈이 멀어버린 애를 만나러 나가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10분이면 족했다. 내가 사거리 앞을 나갈 때 세수하고 양치하는 시간, 6분. 아주 최소한의 예의로 4분을 더 준 것 뿐이었다. 그렇게 대충 나왔는데도 김태형은 눈에 띄게 좋아했다. 영화를 보러 가고, 길가를 거닐면서 구경하고. 마치 데이트를 나온 것마냥 행동하는 애였다. 순전히 김태형의 착각이었다.
나는 뭐 살게 있다고 둘러대고 나왔기에, 박지민이 언제쯤 나를 찾으러 나올까 궁금했다.
"있잖아."
머뭇거리던 김태형이 입을 열었다. 나는 연락없는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의 생각을 읽지 못한 김태형은 말을 이었다. 나랑 사귀는 거 어때.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김태형을 올려다봤다.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더니 덧붙였다.
"떳떳하게 밝힐 수 있잖아, 사귄다면."
"........."
"너도 알고 있잖아, 계속 걔랑 그렇게 있을 순..."
"김태형."
나는 차갑게 말을 끊어냈다. 김태형이 우뚝 섰다. 나는 비소를 지었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 그런 말할 자격 없다?"
"........."
"지랄하지 말구,"
마중나온 박지민을 발견한 나는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김태형의 어깨를 툭, 툭 치며 답했다.
"생각없이 받아먹기만 하면 돼. 가끔, 이용도 당해주고. 너 그런것도 좋아하잖아?"
김태형과 있던 날 본 박지민의 눈은 날카로웠다. 지민아, 왜 그런 표정이야? 넌 웃는 게 예쁜데. 물론, 내가 안 좋아하는 네 표정은 없지만. 살근살근 쏟아지는 내 말에 그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밖으로 쏟아지는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때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지금은 아니지 않아?"
나는 입을 비죽였다. 김태형이랑 공유하기 싫어. 박지민이 화난 어조로 말했다. 네가 계속 전화만 받고 있어서 그랬어. 내 말에 박지민의 눈썹이 약간 내려갔다. 집에만 있지 말고 같이 어디라도 놀러 가야 숨통이 트일 거 아냐... 그의 눈썹이 또 내려갔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박지민은, 김태형과 비슷했지만 그와는 달리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내 등 뒤에서 따갑게 느껴지는 김태형의 시선 따윈, 어찌되든 좋았다.
* *
친척의 결혼식에 갔다. 사람들은 엄마가 데려온 새 남편을 보고 잘 됐다며 축하해주었다. 이혼하기 전, 친가 사람들과는 달리 외가 사람들은 친절했다. 최소한 대놓고 사람을 내리까지는 않았다. 여주네, 그리고 이쪽이 지민이? 우리들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어른들의 칭찬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휴 우애 좋다. 정말 친남매들 같다. 죄송하지만, 내게는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식이 시작되었다. 신랑 입장... 사회자의 말에 따라 박수를 쳤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신랑이 떳떳하게 앞에 섰다. 뒤이어 신부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얗게 끌리는 웨딩드레스, 얼굴을 곱게 가리고 있는 면사포. 신부는 흰 드레스를 입고 신랑에게 도달하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내가 눈을 감았다 뜨자,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단상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박지민, 그리고 그런 박지민을 향해 걸어가는 나. 면사포가 쳐져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신부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리라. 그의 앞까지 도달한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박지민이 내 면사포를 걷고, 신부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엄마의 목소리를 닮은 비명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오직 신랑, 신유한만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하겠습니까?"
주례에 정신을 차렸다. 박지민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엄마와 아저씨의 금슬이 좋은 이상, 우리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식장을 나갔다. 복도에는 한두명의 사람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탁탁탁,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의자에 앉아 얼굴을 묻었다. 거지같아, 진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내 앞에 멈추어 선다. 박지민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먼저 갈래?"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안 좋아 집으로 가던 도중, 내려서 길을 걸었다. 길바닥이 이지러졌다. 나는 박지민을 붙들었다. 머리 아파... 내 말을 들은 그는 제 손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우욱. 헛구역질이 났다. 뭔가 이상했다. 평소와는 달리 몸이 무거운 것 같기도 했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집안이 뒤집어졌다. 엄마는 충격을 받다 못해 실신했다. 사고친 딸, 애아빠는 누군지 끝내 모른다. 우리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박지민도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파탄나버린 가정을 그래도 볼썽사납게라도 이어붙이고 싶으면, 입을 다물라. 애 아빠라고 둘러댈 사람을 생각해야 했다.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다. 나는 거의 통곡하는 엄마에게 간신히 내뱉었다.
"...김태형이에요."
통보를 받은 김태형은 나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이내 동조했다. 죄송합니다. 그 한 마디에 엄마는 뒷목을 잡으셨다. 모르는 놈도 아니고, 예의바르다며 칭찬한 적 있는 애라니. 김태형의 집 또한 발칵 뒤집어졌다. 두 집안이 서로 모여서 어떻게 할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나는 내 옆에 앉아있는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애도 이제 제대로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하겠는가.
"넌 나랑 결혼해."
"........."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불렀다는 건, 나를 그정도로는 생각하고 있었단 증거겠지."
내뱉어지는 김태형의 목소리를 들었다. 박지민의 이가 까득, 물려졌다. 당장이라도 사실대로 토해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먹을 꽉 쥔채 참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바닥 안의 혈관이 터져 피가 고였다.
양가는 빠르게 의견을 모았다. 결혼을 시키자는 방향으로였다. 답지않게 듬직한 척을 연기하는 김태형의 모습에 엄마도 결국은 한숨을 쥔 채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나는...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나를 외면했다.
하루하루가 지나고, 결혼식이 가까워진다. 박지민은 내게 손을 대지 못했다. 겉으로는 아버지인 김태형의 시선을 의식해서였을까. 나는 내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뭐든지 간에... 그냥 말하고 볼 걸 그랬나. 그러나 이미 문제는 해결되어버렸고, 나는 그에 따라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 결혼식이었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닫혀져있는 박지민의 방문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가, 곧 무언가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박수 소리가 들린다. 나는 양 손을 모은 채 얌전히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곧 있으면 입장할 시간이다. 먼저 신랑이 입장하고, 그 다음에 내가 입장하겠지. 가슴이 무거워졌다. 나는 치렁치렁한 면사포를 쓴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그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김태형인가... 고개를 들어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나는, 미친 사람처럼 웃어버리고 말았다.
신랑의 예복을 입은 채, 웃고 있는 박지민. 그가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결혼, 잘 하자. 그리고 닫히는 문. 사회자의 말이 시작되고,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든다. 저 소리는 잠시 후면 경악에 찬 비명소리들을 내뱉겠지.
아아, 우리는 나락으로 같이 갈 수 있는,
어긋난 영혼의 동반자.
같이 가 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