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이동으로 재업합니다
원래 글에 있었던 흑백 움짤과 간단한 묘사를 모두 삭제했습니다
"엄마, 아저씨랑 재혼하기로 했어."
그때의 난 고3의 수험생이라는 신분을 가진 예민한 시기였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라면 모두들 한 번쯤은 겪고, 성질을 부리고 예민함을 토로하더라도 그럴 수 있겠거니 하고 이해해주는 분위기.
저녁 8시쯤이었다. 밥상머리에 앉아있던 엄마가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하다고 느꼈던 때였다. 엄마는 내 눈치를 보더니 그렇게 말해왔다. 수저를 들고 밥 한 숟갈을 입에 넣던 나는 그 말을 듣고 2초간 엄마를 바라보다가, 곧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반응에 긴장하고 있던 엄마의 표정이 풀어지더니 이것도 먹으라며 고기 반찬을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내가 결혼하지 말라며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으나 생각외로 유순한 내 반응에 한시름 놓은 눈치였다.
재혼을 반대할 생각은 없다. 나는 엄마가 재혼할지도 모른다는 걸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이혼한 뒤로 가만히 집에 있던 엄마가, 몇 개월 전부터 곱게 꾸미고 밖에 나갔다 들어오시기를 반복했으니까. 엄마는 늙어서도 추하지 않고 그 나잇대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기에 나는 엄마가 아빠같은 사람은 빨리 잊어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기를 바라던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날, 엄마가 재혼한다고 말을 꺼냈던 날, 접시를 깨부수며 그러지 말라고 악에 받쳐 소리 지를 걸. 엄마는 내가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에 들어왔는데 굳이 지금 결혼하고 싶냐고. 엄마는 그렇게 딸도 이해해줄 수 없냐고 못된 자식을 자처하며 난동을 부릴 걸.
"인사해, 여긴 지민이야. 박지민. 너랑 동갑이구."
나는 탁자 가장자리를 짚으며 돌아다니는 그 애의 손가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라 치기에는 작은 손,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여자와는 다른 느낌의 손. 돌아다니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까닥.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날 바라보는 박지민의 새카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느꼈다.
"안녕."
아, 거지 같다.
Lust, Caution
세상에 남녀가 서로 만나는 계기는 얼마나 많을까. 전세계에 존재하는 인구수만큼 많이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 만남들은 대부분 따지고보면 '평범한' 범주 속에 속할 것이다. 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 경우가 아주 지랄맞게도 독특하니 말이다. 나름 평화로웠던 내 마음을 뒤집어 놓은 그 남자는, 호적 상에 올라버려 나와 남매 관계가 되어버렸으니.
아저씨와 함께 있는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엄마에게 하는 아저씨의 행동을 찬찬히 지켜보던 나도 아저씨가 꽤 좋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빠와는 다른 사람이다, 아저씨는 엄마를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씨발 엄마와 달리 나는 하루하루 좆같은 기분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여주 왔어?"
수험생 신분이라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오자 반겨주는 것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응. 나는 고개를 까닥이고서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주스를 들이키고, 내려두었던 가방을 다시 들고서는 계단을 올라갔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단독주택이었다. 엄마가 아저씨랑 재혼하기 전에는 아파트에 살았지만, 재혼한 뒤에는 육교 건너편에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그 주택마을을 산책할 때마다 나는 이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온 지금은,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수건 다 떨어져서."
박지민 때문이다.
나는 뚝뚝 물이 떨어지는 손을 한 채로 내 앞에 내밀어진 흰 수건을 바라보았다. 박지민은 받으라는 듯 수건을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밀었다. 나는 조금은 쌀쌀맞게 수건을 잡아챘다. 홱. 박지민의 손을 치고 지나간 흰 수건이 펼쳐져 흔들거렸다. 내가 손을 다 닦을 때까지 박지민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화장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그의 옆을 지나쳐, 내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이어 하는 수험생.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울에 비치고 있는 내 등 뒤의 풍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검은 인영이 우두커니 서서 앉아있는 날 바라보고 있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느껴지지 않은 척 책장을 넘겼다. 사각. 샤프가 밑줄을 긋고 지나가는 소리.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박지민은, 결국 아무런 말도 걸지 않고서 방 앞을 떠났다. 터벅터벅. 복도를 지나가는 박지민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까부터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활자들은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고, 걸음을 걷는 박지민을 상상했다. 내딛는 발은 체구에 비해 컸다. 달칵. 그의 방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지민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닫혀있는 갈색 문. 이 안에서 박지민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잘 때를 제외하고서는 방문을 열어놓고 있는다는 걸 그간의 행적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잘 준비를 한다면 아마 입고있던 티셔츠를 벗고,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겠지. 아니면 그마저도 벗고 잘 지도 모른다. 나는 손을 뻗어 닫혀있는 갈색 문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내 머릿속의 외설스러운 생각은 점점 틈으로 비져나오고 있어, 그에 반응하여 더운 숨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거기서 뭐 하니?"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시선을 돌렸다. 1층에 있던 엄마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엄만 자려고?"
"응. 공부도 좋지만 너무 늦게 자지 말고."
"알았어."
다행히도 엄마는 큰 의문을 가지지 않은 건지 안방으로 들어가셨다.나는 여전히 닫혀 있는 박지민의 방문을 본 후, 내 방으로 가기 위해 뒤돌아섰다. 한 발짝.
달깍. 귓가에서는 박지민이 있는 방의 불이 꺼지는 환청소리가 들려왔다. 두 발짝.
방 안에 서린 어둠 안, 닫힌 방문 앞에 곧게 서서 문을 가만히 바라보는 박지민의 환영이 그려졌다. 세 발짝.
잔잔히 가라앉는, 검은 눈동자.
* *
이 시기의 고 3은 방학이 없다. 형식적으로는 있긴 했다. 그러나 말로만 방학이지, 실제로는 매일 학교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교실은 학기중처럼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간간히 보이는 빈 자리는, 수시에 합격한 아이들이다. 나와서 시끄럽게 떠들어 분위기를 흐리느니 차라리 안 나오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는지 선생님들도 빈자리를 지적하지 않으셨다. 김태형은 그런 애들이 부럽다고 했다. 학교 안 나오고 집에 있을 수 있으니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김태형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박지민을 알고 지낸 것은 반 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는지, 성적이 잘 나오는 지 몰랐다. 그러나 수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아, 그래도 공부라는 걸 하는 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박지민의 학교가 내가 다니는 학교처럼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괜찮은 건지는 몰랐지만, 내가 아침 일찍 학교를 갈 때마다 여유로이 닫혀있는 샤워실의 문을 보고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와 한 공간에 있으면서 남매를 연기하느니, 학교에 와서 짜증과 긴장에 찌든 애들을 대면하는 게 훨씬 낫다.
"비 온다."
김태형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툭툭 때리고 지나가는 비는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일기예보에서는 분명히 오늘은 그저 흐릴 것이라고만 했다. 멍청한 기상청, 맞추는 게 하나도 없어. 그래도 집에 갈 때면 비는 멈출 거였다. 하루종일 오지도 않겠지.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집에 가기 위해 중앙 현관으로 내려와 밖을 보자, 비는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아니, 아까보다 더 줄기차게 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려버린 것 같았다. 비 쩐다. 장난 아닌데? 우산이 없는 것은 김태형도 마찬가지라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중얼거린다. 가방 젖으면 곤란한데... 이 빗줄기 속에서 우산 없이 간다는 것은 문제지와 자습서들을 다 버리겠다는 말과 동일했다. 공부에 관심 없어 보이던 김태형도 이제 수능이 슬슬 가까워지자 조바심이 났는지 평소라면 그냥 뛰어갔을 것을 포기하고 가방을 놓기 위해 교실로 올라갔다. 나는, 그런 김태형의 등을 바라보다가 현관 바로 앞까지 발을 옮겼다. 원래 이렇게 비 오는 날에는 엄마가 마중나오곤 했는데, 오늘은 안 보이네. 바람이 들이쳐 금세 들이치는 비를 맞고 있던 나는 빗줄기 사이로 발을 내딛었다. 괜한 반항심에서였다. 아저씨랑 행복하다고 해도 나는 챙겨줘야지...
빠르게 젖어드는 머리칼로 기둥 하나를 지났을 때, 검은 우산이 씌워졌다. 나는 내게 우산을 씌워준 사람을 확인했다. 박지민이었다.
"엄마 대신 내가 왔어. 우산 안 가져 갔다고 해서."
'엄마'랜다. 생각해보면 박지민은 처음부터 이랬다. 자신을 낳지도 않은 여자를 두고 쉽게 엄마라고 불렀다. 보통 재혼 가정 아이들은 새 아빠나 새 엄마를 그렇게 편하게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을 텐데, 박지민은 우리가 한 집에 살게 되는 그 날부터 바로 내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다. 나는 아직까지도 아저씨를 아저씨라 부르고 있는데도.
엄마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남매라는 사실이 되살아나 토할 것 같았다. 나는 박지민을 무시하고 우산 밖으로 걸어나갔다. 물바닥을 튀기며 내 옆으로 빠르게 다가온 박지민이 다시 우산을 씌워주려 했지만, 내가 그 우산을 쳐냈다.
"....감기 걸려."
"그래서?"
"아프면 안 되잖아."
"아파도 내가 아픈 건데?"
"........"
"그런데 왜 네가 신경 써? 꼴에 가족이라 그래? 엄마가 아저씨랑 재혼하지만 않았더면 몰랐을 타인인데?"
한껏 예민하게 굴었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내 말에 박지민은 대답 하나 하지 못했다. 그는 새로운 가족이 된 나를 잘 대해주려고 애썼지만, 나는 번번히 그의 호의를 쳐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박지민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홀로 남아있는 박지민을 남겨둔 채 집으로 걸었다.
차가운 비를 쫄딱 맞으며 20분 동안 집을 걸어왔으니 감기가 걸린 것은 당연했다. 엄마는 펄펄 끓어오르는 내 열을 재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 외출해있어서 지민이한테 부탁했는데, 길이 엇갈렸나 보네. 엄마는 우리가 길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한 줄로만 알았다. 나는 그러한 엄마의 오해를 잡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아파서 어떡하니."
"목, 아파..."
침을 삼킬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다. 엄마는 앓는 소리를 듣더니 한숨을 쉬시면서도 물을 가져다 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엄마는 내게 물을 주려 아래층에 갔다가 다시 위층으로 올라올 필요가 없었다. 물잔을 든 박지민이 방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지민아."
"아빠가 찾으시던데요. 여주 간호는 제가 할게요."
"그래? 고맙다."
엄마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나를 부탁한다는 말을 맡긴 채 방을 떠났다. 싫어, 가지 마 엄마. 나는 속으로 소리쳤지만 엄마는 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몸에 열이 끓어올랐다. 내 앞에까지 걸어온 박지민은 들고 있던 잔을 내밀었다. 건네준 잔은 노란 빛을 띄고 있었으며, 잔에 하얀 김이 어려 있었다. 꿀물이야.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 아플 때는 따뜻한 게 좋다고 해서."
나는 건네준 잔도 쳐낼까 잠시 고민했으나, 그보다는 목 상태가 더 좋지 않았기 때문에 얌전히 받아들었다. 꿀물을 삼키는 내내 박지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빈 잔을 가져간 그는 자그마한 탁자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서는 날 내려다보았다.
"가."
"........"
"가라니까?"
목이 아파 크게 소리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박지민은 나가기는 커녕,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파서 그런지 난 지금 너무나도 예민했다. 몇 뼘 떨어져 있는 박지민의 체온조차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침대보를 통해 전해진다. 숨이 가빠졌다. 열로 인해 더운 숨을 색색거리던 나는, 단순히 아파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었다. 박지민은 내 상태를 모른 채 앉아서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훅, 가까워져 제 이마를 내 이마 위에 갖다댔다. 열을 재려는 의도라는 것을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심장이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박지민이 닿았던 이마를 떼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신경 쓰이지."
"........."
"그래도, 이제 가족인데."
"........."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박지민이 몸을 바로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세 문장들이 빗속에서 쏘아댔던 문장에 대한 답이라는 걸 알았다. 가족, 이라는 말에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무거워졌다. 방금전까지 미친듯이 뛰어대던 심장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손으로 내 이마를 다시 짚어본 박지민이 땀에 젖은 내 머리칼을 정리했다.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손은 머뭇거리지 않은 채 곧장 떨어졌다.
"아프지 마."
"........."
"걱정되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박지민은 방을 나갔다. 박지민이 방을 나간 후에도 나는 한참동안이나 남겨진 그의 잔상을 바라보았다. 아프지 마, 걱정되니까. 오로지 가족으로서만 말했던 문장일까, 마주쳤던 눈동자는... 조금 달랐던 거 같은데. 착각...인가.
이제 서서히 자리잡아가는 새 가족의 틀에서 나만 겉돌고 있었다. 박지민은 엄마의 새 아들 역할을 충실히 잘 해내고 있었고, 나도 아저씨의 딸 노릇을 어느정도 하고는 있었지만 박지민과의 남매 역할을 수행하진 못했다. 나 빼고 모두가 익숙해져가는 가족놀이 따위, 깨뜨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박지민이 나에게 잘해줄 수록, 나는 그 애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 났다.
왜 나만 이래?
나만 비정상이야?
내보일 수 없는 감정을 숨기고 있느라 신경은 더 날카로워졌다. 엄마와 아저씨는 그것을 나날이 가까워져가는 수능 탓이라고 여겼다. 지민이는 수시 잘 붙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여주도 지민이랑 같은 대학 붙으면 좋겠다, 그러면 서로 잘 챙겨줄 수 있지 않겠니? 아마도 그렇겠죠.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의 목소리와 아들 노릇을 하는 박지민의 살가운 목소리.
박지민과 눈이 마주친 나는 계단을 붙잡고 발을 있는 힘껏 쿵쾅거리며 올라갔다. 내 심경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발울림에 엄마와 박지민의 대화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수능, 수능. 수능만이 탈출구였다. 제발 박지민이 붙은 대학은 안 가야지. 나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반드시 다른 대학으로 가서 독립할 거다. 이 집구석을 나가서, 박지민을 벗어나서, 그래서...
"아,"
뚝, 하는 소리에 시선을 내리니 마구잡이로 그어댄 샤프 덕에 연습장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 *
달력의 한 장이 넘어갔다. 푹푹 찌던 날씨가 어느 정도 가시고 있었다. 그 말인 즉슨 수능이 좀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빨리빨리, 빨리 시간이 지나가서 시험을 보고, 발표가 나오고, 결과가 나오고, 박지민이랑 다른 곳에. 미친 사람처럼 어두워진 밤길을 걸으면서 나는 그 생각만을 되뇌였다.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였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뒤를 돌아 두 집을 지나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둑어둑한 길을 밝히는 가로등 사이, 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그 곳에 박지민이 서 있었다.
후우, 하얀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박지민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붉은 담뱃불이 점처럼 톡,톡, 아래로 떨어진다.
박지민이 담배를 폈던가? 나는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그의 앞에서 오감이 예민해지는 나의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흡연자의 체취는 맡은 적이 없었다. 지민이는 정말 착하지, 보통 아이들처럼 욕도 안 써, 행실도 바르고.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행실이 바르다고?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담배를 피우는 박지민이라면, 아닌데.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자, 조용해도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건지 박지민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돌려진 고개는 불청객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담배연기를 후, 내뿜는다. 날아가는 담배연기를 뒤로 하고 박지민은 내게 걸어왔다. 걸어올 때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담뱃불도 흔들, 흔들.
"늦게 왔네."
아무렇지 않게 건네지는 박지민의 말투.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담배 필터를 입에 물었다. 양 볼이 움푹 파였다가, 도로 돌아온다.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흡연을 하는 게 들켰는데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나는 세 발자국 떨어져 있는 박지민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담배,"
"........"
"아저씨한테 이를 거야."
박지민은 내 말에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물고 있던 담배를 빼, 손가락 사이에 끼워넣는다. 그리고 두 눈으로 나를 주시한 채 느릿하게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숨결이 담겨있는 하얀 연기가 밤하늘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박지민에게 달려들어 그 담뱃불로 나를 지져주면 안 되냐는, 미친 소리를 내뱉을 것 같았다. 중증이었다. 박지민은 담배를 든 상태 그대로 두 발자국을 더 옮겼다. 바로 앞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던 박지민이 상체를 굽혀 내 귀 가까이에다 답했다.
"...마음대로 해."
그리곤 내 뒤에 있는 돌담 위에 담배를 지져 껐다.
나는 아저씨에게 박지민이 담배를 핀다고 고자질하지 못했다. 물론, 엄마에게도였다. 두 사람은 박지민이 일탈을 즐기고 있는 것은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후로도 종종, 집에 올 때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곤 했다. 가로등이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던 박지민은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돌담에 담배를 지져 끄고서는, 부탁했다. 핸드크림 좀 빌려주라. 몇 번 했다고 익숙해진 박지민은 이제 반복적인 부탁 없이 자연스럽게 나의 가방에서 핸드크림을 꺼내 제 손 사이사이 꼼꼼히 발랐다.
집으로 같이 들어가는 박지민의 뒷모습에는 거의 다 사라져가는 담배향과 내 핸드크림 향이 섞였다.
...왜 그와 내가 남매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성도 다르고, 피 한 방울도 같지 않은 남남인데.
남남인데 왜 남매로 묶여 있는 거지?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다. 벗어나고 싶다, 벗어나고 싶어.
50일이 남았다. 열려 있는 박지민의 방문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어디 놀러라도 가겠다고 집을 나갔으면 좋을 텐데. 막 씻고 나오던 박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물기 어린 짙은 머리카락, 팔뚝을 타고 돋아난 핏줄, 굳게 닫힌 입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어... 제발.
나의 기도가 하늘에 도달했는지 시험일이 되었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날짜였지만 나는 평소에 생각해둔 대로 차분히 시험에 임할 수 없었다. 잘 보고 와. 아침에 나가던 내 뒤에 대고 말해주던 부드러운 음성이 귀에 떠돌아다녀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듣기평가마저도 두 문제나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첫 시험부터 실수를 하고 나자 연달아 다른 과목에서도 실수를 내버리고 말았다.
"괜찮아, 괜찮아, 잘 한 거야, 잘 했어."
"그래, 잘 한 거야. 그간 고생했다."
엄마와 아저씨는 번갈아가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내 안색이 어두운 것이 시험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기분도 전환할 겸, 끝났으니 다 같이 외식이나 할 갈까? 엄마가 제안했다. 나는 거절의사 없이 따라나섰다. 박지민은 내 반대편에 앉아 있어, 고개를 들면 그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배치였다. 음식을 먹는 내내 입으로 먹는 건지, 코로 먹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식사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건물 안의 화장실을 들를 수밖에 없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위액이 쓰려서 눈물이 나왔다. 먹은지 얼마 안 된 음식이 도로 나오는 꼴은 보기 싫어서, 눈을 감은 채 된통 토해냈다. 뒤따라 들어온 엄마는 정신없이 토하고 있는 내 등을 쓸어주며 걱정했다. 먹었던 것을 거의 쏟아낸 뒤에서야 구역질을 멈춘 나는 빨개진 눈가를 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나가자 박지민과 같이 서서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아저씨가 다가와 괜찮느냐고 물어왔다. 안 좋은 표정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박지민의 표정을 확인했다.
"괜찮아?"
"........."
"손 줘봐."
박지민이 내 손을 잡아채더니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그가 힘주어 어느 지점을 세게 누르자 아, 하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여기야? 박지민의 손이 더 강하게 그 부분을 압박했다.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파닥거렸지만, 박지민은 놓아 주질 않았다. 입 밖을 비집고 나오려는 아픔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손을 움직이고만 있었다. 손을 마사지 해주던 박지민이 내 손을 놓아주었을 때즈음은, 집에 다 도착해 있었다.
드륵, 창 문을 열었다. 추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새어들어왔다.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밤공기에 입김이 새어나왔다. 창문을 잡고 있는 손은 빠르게 온기가 식어가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저씨는 잠이 들었다. 박지민도 문이 닫혀 있었던 걸로 보아, 자고 있을 것이다. 이 집에서 깨어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나는 밤공기를 폐 깊숙히 들이마셨다. 그동안 해왔던 게 끝났으니 자유로워졌어야 할 때가 맞을 텐데, 여전히 숨이 막히고 있었다. 박지민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가족이잖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열려진 2층 창문을 통해 망설임 없이 밖으로 뛰어내렸다.
* *
창문 바로 밑에 수목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걸 까먹었다. 어차피 2층이라 뛰어내려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알고 있었지만 충동적으로 저지른 댓가는 컸다. 나는 운 좋게, 아니 운 나쁘게 발목에 금이 간 정도로 끝났지만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뛰쳐나온 엄마는 그보다 더 크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환자복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는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엄마는 대학 그런 거에 별로 상관 안 해, 우리 여주가 그저 건강하고, 소중한 딸로 남아있기만 하면 되니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엄마는, 아마 내가 수능을 잘 보지 못하여 성적에 비관하여 이런 행동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나는 그깟 성적이 어찌되든지 간에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놓아두는 편이 나았다. 내가 투신한 진짜 이유를 말한다면 엄마는 지금보다 더 새파래진 얼굴로 나를 볼 것이 분명했으니까. 나는 그저 눈을 감은 채 엄마의 목소리를 견뎌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걱정어린 말을 하던 엄마는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병실을 나갔다. 여보, 심한 건 아니래요, 일주일 정도면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병실 문이 닫히자 통화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엄마일까? 그러나 발소리를 들은 나는 엄마가 아니란 걸 알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박지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내 옆에 멈추어 선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힐난하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네가 그런 눈을 해? 박지민은 시선을 내려 기브스를 하고 있는 내 발목을 쳐다보았다. 그 애가 내 얼굴이 아닌 곳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뚫어져라 그의 옆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기브스에서 시선을 떼고 내게로 고개를 돌린 박지민이 말을 뱉어냈다.
"너, 그런 짓 하지마."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날선 어조였다. 어라, 반응이 다르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물었다.
"왜?"
박지민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곧, 대답을 내뱉었다.
"나는 훨씬 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으니까."
어떤 맥락인지 잘 모르겠다. 내 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인 걸까. 나는 박지민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그 애는 이런 행동에도 날 저지하지 않았다. ...뭔가 보일 것 같았다. 나는 깍지 낀 박지민의 손을 천천히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깍지를 풀고, 그의 손가락에 내 입술을 묻었다. 이 때도,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나는 박지민과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대다가, 이를 세워 손등 사이를 깨물었다. 눈썹이 찌푸려진다. 나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툭, 떨어진 그의 손은 그의 입가로 올라갔다. 박지민은 내 눈을 마주하면서, 붉은 혀를 내밀어 방금 내가 깨물은 곳을 핥았다.
병실 문을 나가는 박지민의 뒷모습을 보던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비로소 저 애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 *
퇴원하고 난 후 집에 돌아온 나를 엄마와 아저씨는 그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대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대학에 대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전과 비슷하게 집에 하루종일 있었지만 또, 전과는 달랐다. 집이 더 이상 갑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날, 박지민의 마음을 눈치채고 난 이후로, 그동안 내 목을 조르던 손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언제쯤 이 시한폭탄이 터질까 궁금했다. 살얼음판을 딛고 있는 이 다리가 언제 차가운 강물 속으로 처박힐까. 엄마는 장을 보러 나가신 걸 알고 있다. 박지민은 열린 방문 안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다. 나는 샤워기 아래에서 쏟아지는 물을 맨 몸으로 받아냈다. 젖어들어간 속눈썹을 깜박이며, 벽 너머에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언제 그가 본모습을 드러낼까, 궁금해졌다. 실은 말만 그렇게 하고 박지민은 이 순조로운 두 사람의 재혼생활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지민은, 먼저 선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내가 넘어야지.
나는 커텐이 쳐져 있는 욕조 밖으로 몸을 뺐다. 다 쓴 클렌징 폼을 잘라내기 위한 용도로 상비해두고 있던 가위를 집어들었다. 욕실을 밝히는 전구는 총 3개가 있었다. 나는 가위를 든 채, 제일 오른쪽에 있는 전구를 향해 있는 힘껏 찔렀다. 바깥에서 가해진 힘에 연약한 전구는 속절없이 깨지고 유리조각 파편들이 흩뿌려졌다. 따끔, 볼이 베인 감각이 느껴져 바로 욕실로 들어온 후 비명을 질렀다.
"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다급한 얼굴로 문을 열어젖힌 박지민은 커텐으로 몸을 반쯤 가리고 있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겁먹은 목소리로 깨뜨린 전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샤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구가 깨졌어...! 만들어낸 상황을 설명하고 있던 나는 가위를 원래 자리에 놓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박지민은 깨진 전구를 확인하더니, 내 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발 조심해! 다급하게 소리친 내 목소리에 바닥을 대충 확인하고 바로 앞으로 다가온 그는 손을 들어 내 볼을 쓸었다.
"피 나."
그렇게 심하게 베인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의 손에 피가 길게 배어나와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으로 내 볼을 쓸었다. 손바닥 가득 피가 묻어나왔다. 당황스러웠다. 떨어져내리는 샤워기에 손을 대충 씻고 얼굴도 씻어내려 하는데 박지민이 내 팔을 잡아챘다. 마른 수건으로 피가 묻어나오는 볼을 닦아낸 박지민은 쏟아지는 샤워기를 끄고, 걸려 있던 가운을 내게 내밀었다. 샤워 가운을 다 입은 나는 박지민의 손을 잡은 채 조심조심 화장실을 걸어나왔다. 가위는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많이 베인 건 아닌 모양이다."
그때까지 지혈을 해 주던 박지민은 수건을 떼더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깨끗하진 손으로 아린 볼을 더듬더렸다. 육안으로 상처를 확인하지 못하니 박지민의 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상처난 곳을 만졌다 확인하니, 아직도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박지민이 손으로 내 상처 부근을 쓸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피가 새어나오고 있는 살결을 핥았다.
36.5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살덩이가 피를 닦아낸다. 나는 눈동자만 옆으로 하면 바로 마주할 수 있는 박지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순간이지만 그의 눈동자가 붉게 타오른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그가 몸을 떼자, 나는 다시 손으로 상처를 짚어 확인했다. 배어나온 피는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니?"
장 보러 갔다 돌아온 엄마는 화장실 앞에 서 있는 우리 둘을 보고 그렇게 물어왔다. 박지민이 대답했다. 여주 샤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구 하나가 깨졌대요. 세상에! 전해들은 엄마는 놀라 바로 윗층으로 올라오셨다. 많이 안 다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쓸어내린 엄마는 일단 옷부터 입고 상처를 치료하자고 했다. 내 방으로 걸어오는 내내, 욕정어린 눈동자가 진하게 따라붙었다.
잠재적 가정 파탄자들. 박지민, 그리고 나.
정시 결과가 나왔다. 수능은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받아본 성적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으니 오히려 모든 게 좋게 돌아갔다. 나는 박지민과 같은 대학에 붙었다. 합격 결과가 나온 날, 그간 약간 무거웠던 분위기는 모두 날아갔다. 잘 됐다, 지민이랑 같은 학교 붙었으니 서로 잘 챙겨줘도 되구. 엄마의 말을 듣던 나는 박지민을 쳐다보며 웃었다. 집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고 있던 주범인 나의 발목이 다 낫고, 대학 합격 걱정까지 사라지자 우리 가족은 1박 2일로 놀러가기로 했다.
펜션에 도착하고 나서 구경을 한 후, 흰 테이블보가 놓여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 나는 맨발로 박지민의 허벅지를 툭, 툭 건드렸다. 물을 마시고 있던 박지민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엄마와 아저씨는 테이블보 밑의 상황을 모른다. 나는 좀 더 안쪽을 건드렸다. 박지민은 피식 웃었다. 엄마는 아저씨와 대화하고 있느라 우리들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박지민이 입모양으로 그랬다.
하지 마.
왜? 나도 입모양으로 소근거렸다. 그리고 짖궂게 안쪽을 한번 더 건드렸다. 박지민이 말을 전달했다.
너, 그러다 큰일 나.
그의 말을 읽은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구한테? 너한테? 어떻게 큰일 나는데? 결국 웃음이 새어나갔다. 엄마와 이야기하고 있던 아저씨가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여셨다.
"둘이 이젠 많이 친해졌나 보네."
"그러게, 솔직히 걱정했었는데 잘 노는 거 보니 마음이 놓인다."
엄마는 그 말에 동조했다. 두 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셨다. 나도 따라 웃었다. 박지민도 웃은 채 별다른 말꼬리를 잡지 않았다. 물잔을 들어 들이키는 목젖이 도드라져 보였다. 박지민은 물을 마시는 내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를 발가벗길 듯한 시선에 나는 앞에 놓인 방울 토마토를 집어들어 입술 사이에 물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고, 나는 꼭지를 똑 따버렸다. 맨들맨들한 방울 토마토를 혀로 굴리는 나를 지켜보는 눈.
펜션은 방이 세 개 있었다. 가족과의 첫 여행이라고 나름 좋은 방을 잡은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온 엄마와 아저씨는 하하호호 거리시며 말을 주고받으시더니 이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셨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엄마랑 같이 나가는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마음 놓고 산책을 다녀올 수 있게끔 하는 말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빠랑 어디 가려는데?"
엄마는 아저씨를 '아빠'라 부르는 내 말에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럴 만했다. 그 동안 나는 아저씨를 단 한번도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 아저씨를 부를 때면 항상 저기, 잠시만요, 라고 불러댔던 나를 알기에 아저씨 또한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이전부터 항상 아빠라고 불렀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굴었다.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던 엄마를 대신하여 아저씨는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엄마랑 주변 좀 산책하고 올게."
"응. 조심해서 갔다 와요."
나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처음으로 보여주는 내 호의에 아저씨는 감동받은 모습이었다. 저 사람은 내 마음따윈 모르겠지. 나는 산책을 나가는 그들을 배웅했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 박지민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박지민은 창가 옆에 앉아 있었다. 그 뒤로 어둡게 내려앉은 가지들이 흔들거렸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온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박지민 또한 펜션을 나간 두 사람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최소한 한 시간은 들어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 이 안은,
우리 단 둘 뿐이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걸린 흰 달이 일렁였다. 어두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달빛 뿐이었다. 달빛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쩌적.
우리들이, 평탄하던 가정에 금을 만들었다.
* *
-곧 올라올, 下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