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척이며 눈을 떴다. 사부작거리는 비단 이불을 걷어내렸다. 얇은 흰색 한복에 둘러싸이고 보드라운 비단에서 일어나는 아침이 점점 익숙해진다. 눈을 뜨면 어떻게 알았는지 화장실에 다녀와서 씻고 오면 방에는 아침상이 차려져있다. 상을 가지러 오는 건 족제비고. 그렇게 이틀 정도 지났나, 딱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처음엔 족제비가 상을 치우러만 와도 움찔거렸는데 이젠 뭐 아무렇지도 않다고나 할까. 내가 족제비씨같은 종류의 수인들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았는지 고개만 꾸벅이며 목례를 하곤 재빠르게 나오곤 했다.
"저기요."
말을 건 건 처음이었다. 족제비는 눈에 띄게 움찔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네. 말씀하세요. 하고 내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권순영씨 말이에요."
"……."
"아직도 화 많이 났어요?"
족제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집주인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게 원칙인 걸까. 그렇다면 끝내주게 충실한 하인들을 두셨군. 양손으로 상을 들어올리며 미닫이문을 열자, 그 사이로 흰 여우가 쫑쫑쫑 걸어 들어왔다. 정말 하얀 여우가. 털이 복슬복슬하고 조그만 아기여우였는데 도도하게 들어와 족제비씨의 다리를 비켜지나가 내 앞에 섰다.
...귀여워. 복슬복슬한 털은 꼭 손을 넣어 헤집어도 손틈 사이로 빠져나올 만큼 풍성하고, 무엇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진짜 만지고 싶다.
"뭐에요? 여우도 키워요?"
"……."
족제비씨는 당황한 눈빛이었다.
"비싼 여우에요?"
"아, 저기 그게…."
족제비씨가 내 앞의 여우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지금 내가 여우를 어떻게 할까봐 걱정하는 건가.
"에이, 안 잡아먹어요. 무슨, 여기 여우면 저보다 셀 거 같은데. 구미호에요?"
족제비를 힐긋 보고는 여우를 향해 손을 뻗자 약간 내 주위를 맴돌던 여우가 품에 안겼다.
"아, 뭐야! 저 심심한 거 알면서 왜 안 줬어요."
입을 비죽 내밀고 족제비를 타박하자 족제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닌데. 나또한 어색하게 웃으며 '장난인데, 뭘 그렇게 까지.'하고 손사레를 치자 평소와 다름없이 목례를 꾸벅하곤 문 뒤로 사라졌다.
"여우야."
여우의 뒷덜미를 손으로 간지럽혔다. 여우는 기분이 좋은 듯 머리를 부르르 떨며 내 팔에 부비작거렸다. 아, 귀여워서 코피날 것 같아. 등을 쓸다가 내려가 꼬리를 쥐자 여우가 급하게 꼬리를 빼냈다.
"왜? 기분 좋은데."
여우가 낮게 갸르릉 거렸다. 하나도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꼬리를 빼내며 내게서 떨어졌던 터라 다시 여우를 품에 안고는 말을 이었다.
"심심해."
"……."
"권순영씨가 나때문에 화났나봐."
"……."
"돌아가고 싶지, 근데 상처 줄 생각은 아니었단 말야."
"……."
"많이 화났나봐, 보러 오지도 않고."
사실 내가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어. 말 통하는 사람이라곤 여기서 족제비랑 권순영 씨밖에 없는데 족제비는 무섭단 말야. 혼자있는 거 안 좋아해, 여기선. 무서워. 그리고 또, 외로워. 입에 거미줄 칠 것 같아. 짜증나, 의지할 사람은 권순영밖에 없어서.
여우를 통해서 괜히 하소연을 한다. 여우는 말 없이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볼 뿐이다. 이내 내 배에 앞발을 올리고 몸을 일으켜 내 턱을 핥는다. 말하면서 울었던 모양다.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여우를 떼어냈다. 아무래도 이대론 안되겠다. 몸을 일으켰다. 여우가 내 발목 근처에서 날 올려다본다.
"이씨, 말할 거야. 권순영씨한테."
"……."
"..말실수 해서 미안합니다, 라고."
사실 아직도 말실수인지는 모르겠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거짓은 아니니까. 그래도 왜인지 모르게 내 돌아간다는 말이 그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고쳐먹었다. 돌아갈 땐 가더라도, 몰래 가야지. 상처주기전에 떠나버려야지. 오늘같은 표정을 보고 돌아가면 울적해질 것 같으니까. 이기적이라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게 맞는 거니까.
요계 5
"…어라."
호기롭게 문을 열고 나오긴 나왔다만, 일단 집이 졸라 크다. 길게 이어지고 꺾인 복도도 그렇고 도통 어디가 권순영씨 방인지 알아야 가든 말든 하지. 족제비씨나 다른 수인들을 찾기도 어렵다. 분명 들어온 첫날에는 엄청 많았던 것 같은데. 아, 혹시 저자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마물에게 그런 일을 겪고 내 주변의 수인들을 모두 물린 건가. 내 생각보다, 나한테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기도 하다.
손등을 덮는 옷소매를 끌어올렸다. 권순영씨, 누가 이기나 두고 봅시다.
"……."
내가 이렇게 길치였다. 내가 분명 이 방을 아까 지나쳤는데, 왜 또 다시 여기지. 아니면 비슷비슷해서 다른 방인데 헷갈리는 건가. 공간속의 혼란. 혼돈의 카오스. 뒤죽박죽이 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 졸라 빡쳐 진짜. 두고보자. 내가 만나기만 하면 정강이부터 걷어차고, 어?"
두려움이 밀려든다. 목소리가 떨려온다.
"그리고, 또, 흐으, 주먹으로 명치도 때릴거고."
눈가가 뜨거워진다.
"만나기만 하면, 만나면,"
"만나면?"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오늘은 빨간 쾌자를 걸친 그가, 내가 온 집을 뒤져가며 찾던 그가 서있다. 울컥, 속에 담겼던 무언가를 누군가 끓이는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넘칠 것 처럼 무언가 끓는데 그를 보니 결국 넘치는 것 같다. 툭, 속에서 끓어넘친 것이 쏟아져나온다.
"왜, 이제 왔어요?"
"……."
"나 무서웠, 단 말이야."
물기젖은 목소리가 힘들게 말을 이어간다.
"무서워서, …잠.도 못 자고. 말, 붙일, 것도.. 끄.."
결국 히끅거리는 숨에 말이 막힌다. 그럼에도 그는 목석처럼 가만히 우는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무언가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와서 달래주기를 바라나, 가만히 있는 그가 야속하다. 화나기 전에 그라면, 내가 울 때 어떻게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울었던 적이라곤 돌아가지 못 한다는 걸 알려주었던 그때 뿐인 것 같으니.
..아, 아니다. 저자에서 마물에게 놀랐을 때. 그는 가만히 답호속에, 품속에 나를 넣어 달래지 않았었나. 비적비적 그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있던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그런 그에게 양팔을 뻗었다.
"..권, 순영씨."
"……."
"안아주세요."
그의 표정을 보고 싶은데, 알 수가 없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저 대충 그가 입은 빨간 쾌자와 흰 머리칼의 형태만 보일 뿐이었다. 삘간 쾌자가 다가온다. 그의 향이 훅 끼친다. 예전처럼, 밑을 단단히 받치곤 날 안아들고는 서툴게 내 등을 토닥인다.
"울지마."
"……흐,"
"……."
머뭇거렸던듯 잠시 후에 그의 손이 어설프게 뺨을 감싸쥔다. 엄지 손가락을 내어 내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며 눈물을 훔쳐낸다. 따뜻한 손길에 그동안 쌓인 서러움을 풀겠다는 듯 여전히 히끅거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리광을 부릴까."
"……."
"아기같이."
아플 때 마냥 어리광을 받아들인다. 그게 제 역할이라는 듯 서툴게 고쳐안아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하고는 여전히 손으로 내 등을 토닥인다.
"아가."
"……."
"미안해."
너에게 못되게 굴어서 미안하다. 꾸밈없는 마음이 전해진다. 나는 사과할 기회를 그렇게 놓친다. 내 숨이 끅끅 거려서 말을 꺼내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그가 먼저 사과를 했기 때문에도 그렇다. 결국 그의 비단 천에 얼굴을 묻고 숨을 진정시키는 것,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토닥임을 받으면서, 그의 어깨죽지를 쥐면서 그렇게. 위로를 받고 외로움을 달래는 것 뿐.
"아가, 어떻게 해야 울음을 그칠까."
"……."
"등놀이 하러 갈까."
.
.
.
마침 오늘이 등놀이 날이라고 했다. 그에게 안겨 히끅거리며 숨을 고르고나선 그의 품에 안겨 방까지 왔다. 창피해서 그의 가슴에 파묻은 얼굴을 떼지 못했다. 아마, 권순영씨가 몇번 내 코밑에 손을 넣어 숨쉬는 걸 확인한 걸 보니... 뭐... 잠.. 자는 줄... 알았겠지…. 귀끝까지 화끈거리는 기분이다. 하여튼 도착해서 그가 약간 몸을 흔들어 날 깨웠다. 잠에서 일어난 척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내보였다. 아마 내가 헐리우드 진출을 했다면 디카프리오보다 오스카상을 더 빨리 받았겠지.
씁쓸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내려왔다. 그가 손을 튕겨 족제비를 부르더니 무언가 가져오라고 시키는 눈치였다. 잠시 후에 권순영씨가 족제비에게서 받아들인 옷을 내게 건넸다. 사부작거리며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게 좋은 비단이다. 물음표를 띈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턱짓을 하기에 곱게 개인 비단을 풀었다. 연분홍색 치마에 벚꽃잎이 수놓아진 흰 저고리.
"..예쁘다."
"다행이다, 맘에 든다니."
"..고맙습니다."
아까의 마음을 전부다 담았다. 차마 숨이 차서 전하지 못했던 말과,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까지.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고 올게요!"
애써 분위기를 밝게 만드려 높은 목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종종 걸음을 걸었다. 옷을 갈아입자 거울은 보지 못했어도 몸에 착착감기는게 분명 예쁠 것이다. 옷이 날개라고 했으니.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그가 옅게 웃는다. 내가 보는 눈이 영 없지는 않은 모양이야. 툭툭 내뱉는 말이 정겹다. 말없이 그의 앞에 서자 그가 날 안아든다.
"아니 무슨, 시도 때도 없이 안아들어요?"
당황해 높아진 목소리로 묻자 그가 옅게 웃는다.
"널 데리고 이 집을 나가려면 반나절을 걸릴거다."
"……."
뭐, 맞는 말이니까. 비정상적으로 빠른,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것 같은 속도로 그를 따라 집을 나섰다. 약간 비탈진 언덕을 채 넘어오기 전에 저자가 내려다 보이는 장소에서,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색색의 연등이 일제히 하늘 위로 향한다.
"아, 늦었다."
"그러게요."
그가 품에서 날 내린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옆에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별이 박힌 남색의 커튼 위로 연분홍색, 노란색, 푸른 색의, 색색의 등이 하늘에 별마냥 수놓인다. 입을 벌리고 와아,하며 처음 서울 여행을 가서 지하철을 탔던 나처럼 정신을 못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이따 저자도 갈거죠? 네?"
꺾였던 고개를 그에게 돌렸다. 일순간 따듯하게 입술에 무언가 닿는다. 짧게 닿은줄로만 알았는데 깊게 맞물린다.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당황해 내 양손을 꽉 쥐고 멀뚱히 받아들이자 가지런하게 감았던 그의 눈이 떠진다. 애틋하게 맞물린 입술처럼 두 눈이 맞물린다. 한 쪽은 애틋한 모양인데, 상대방에 비친 내 눈은 어떻게 비추는 지 모르겠다. 눈은 맞물리고, 입술은 떨어진다.
여주야, 아가, 난 네가 내 곁을 떠날까봐 두렵다. 옷을 돌려주면 선녀처럼 떠날까, 등놀이를 보여주면 등처럼 떠날까, 내님은 나를 떠날까.
한쪽만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밤하늘에 날린 등이 바람을 타고 휩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