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아홉 아저씨 박지민
♥
열 아홉 너탄
가끔 (inst) - crush
[ 01 ]
01
" ..아저씨! "
오늘도 그 사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아저씨 또 담배 피워요? 담배 냄새 되게 별론데. 그러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담배를 아무렇게나 비벼끄곤 꽁초를 쥔 손을 제 몸 뒤로 숨기었다. 이미 다 봤는데 말이지. 어, 되게 늦게 오네요. 마침 방금 담배 생각나서 나와봤는데. 잿떨이에는 이미 두세개의 담배 꽁초가 놓여있었다. 항상 아저씨가 마시던 고 카페인이라고 소문난 편의점 커피까지 함께. 무서울 만큼이나 고요한 밤이였다. 벌써 고된 하루가 지나가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시각이였다. 어둠이 가라앉은 도시는 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한 아파트 복도에서 연약한 빛을 내며 켜진 비상등이 나란히 마주 선 둘의 얼굴을 밝히었다.
" 담배 생각나서 방금 나왔는데, 마주칠 줄이야. 얼른 들어가요, 늦었는데. "
우연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그는 여전히 우연이라고 말한다. 네, 들어가야죠. 아저씨도 얼른 들어가세요. 아, 오늘도 좋아해요. 아저씨! 거의 매일같이 마주칠 때마다 하는 말이였다. 열번 찍으면 안 넘어 올 나무 없댔는데. 아저씨는 요지부동인 듯 했다. 벌써 백번은 넘게 찍은 것 같은데. 넘어 오기는 커녕, 그럴 기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항상 고백같지 않은 고백들을 늘어놓으면 그는 멋쩍게 웃었다. 아까 나를 마주쳤을 때처럼, 그런 멋쩍은 웃음. 그 웃음의 의미를 나는 아직 모르겠다. 지금은 싫다는 쪽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러진 않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얼굴을 더 보고 싶어서 뚫어져라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의미 모를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잘자요, 내일 또 봤으면 좋겠어요. 차마 내뱉지 못 한 말을 혀밑으로 꾹 삼킨 채 열었던 문을 닫았다.
02
아저씨는 나보다 무려 열살이 많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10살이라는 텀은 내게 아저씨로 향하는 길의 너무나도 큰 장애물이였다. 나는 열아홉, 아저씨는 스물 아홉. 맨날 아홉수라고 놀리기도 하는데, 아저씬 그럴 때마다 나를 고삼이라 놀렸다. 아저씨를 처음 본 건 내가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였다. 따스한 봄바람이 찾아들던 그 해 봄이였다. 아저씨는 603호로 이사를 왔다. 나는 601호였고. 이사온 날에는 맛있는 시루떡을 돌려야한다며 우리집에 찾아왔을 때. 그 때, 나는 흔히 말해서 첫눈에 반해버렸다. 사실 처음에는 내 또래이거나, 나이가 있어도 나보다 많아도 세살 정도 많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열살이라니. 지금도 도무지 스물아홉으로 보이지 않았다. 교복만 입혀 놓으면 누가봐도 정말 학생인 줄 알정도로.
그 때부터 좋아했다. 우리 엄마에게 살갑게 대해주고, 지나가던 동네 꼬마 남자아이에게 사탕을 건네줄 정도로 친절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오시는 어르신 분들을 지나지치 못 하고선 갖춰입은 정장이 무색하게 무거운 짐을 대신해서 가뿐히 들어드렸다. 맘씨 좋은 총각이네-, 하며 칭찬을 들으면 부끄러운지 하하, 하고는 작게 웃었다. 그게 좋았다. 또, 반달 같이 곱게 휘어 접히는 눈. 웃을 때가 가장 멋있었다. 언제나 항상 내 앞에선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사실 특정하게 '나' 앞에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 아무나한테 그렇게 잘 웃어주겠지만. 거의 2년, 3년 정도 혼자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솔직하게 좋다고 말을 해도 아저씨는 그저 웃었다. 할머니께 칭찬을 받았던 그 때처럼. 사실, 이제는 좀 지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남한테도 말 못 하고 혼자서만 꾹꾹 눌러왔어서 그런지. 그게 요새 점점 더 힘들기도 하고. 근데 그런 지친 마음이 아저씨만 보면 풀렸다. 밉게.
" 학교 안 늦었어요? 지금 15분인데, 30분까지 등교잖아요. 버스시간은 8시 정각 아니였나? "
아저씨는 여전히 내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저 사람좋은 미소에 내가 빠져들었건만, 저 미소는 모두에게나 적용되는 기본값이었다.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저녁 늦게 나가는 우리 엄마와 마주쳤을 때도, 저런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엄마가 말해준 기억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그래, 결국 나만 이렇게 오해하고 혼자 좋아하는 거지, 항상.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이왕 늦은 김에 천천히 준비하자 싶어 천천히 준비하고 평소에 급해서 꺾어신기 바빴던 신발도 제대로 차려 신고 나오자,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저씨가 있었다. 나이스, 오늘 하루도 운이 좋겠구나. 마냥 좋아하다가도 아차, 싶었다. 오해만 더 깊어지겠구나. 이루어질 확률 제로인 짝사랑만 깊어지겠구나.
" 완전 늦은거죠. 그래서 그냥 천천히 걸어가려구요. 택시비도 없고. "
" 아, 그럼 아저씨가 오늘 하루 기사해줘야겠네. 따라와요. "
" ..엥? 저 태워주신다구요? 회사는요? 회사 지각하잖아요. "
" 회사랑 학교랑 얼추 가까우니까 괜찮은데, 타요. "
03
넓은 뒷자석을 두고 조수석에 앉자니, 아저씨가 불편해할 것 같고, 또 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뒷자석에 앉자니, 아저씨가 자길 불편하게 느낀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졸졸 아저씨 뒤를 따라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어쩌지, 진짜. 조수석 문과 뒷자석 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타이밍에 아저씨는 조수석의 문을 벌컥하곤, 열었다. 지금 멀뚱히 서있는 거, 열어달란 거 맞죠? 얼른 타요, 이러다 늦겠다. 붉어오는 볼이 미웠다. 이것도 모든 여자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겠구나. 아무나, 조수석에 태우고선 사람 좋은 미소만 짓겠지.
" 안전벨트 했죠? 아, 혹시 안전벨트도 매줘야해요? "
그러고선 아저씨는 짓궂게 웃었다. 아니거든요! , 무거운 가방을 몸 앞에 두고선 안전벨트를 맸다. 백미러를 통해 반짝이는 눈이 마주쳤다. 귀끝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출발할게요. 여유롭게 웃으며 아저씨는 핸들을 쥐었다. 차가 금방 속도를 내며 달렸지만, 과속 방지턱 앞에서는 슬금슬금 속도를 줄였다. 덕에 차가 단 한번도 덜컹거리지 않았다. 운전도 잘 하는구나. 봄 날씨에 알맞은 흰색 셔츠가 잘 어울렸다. 아침 햇빛을 받아 검은색의 머리가 반짝였다. 귀에는 눈에 띄는 피어싱이 달려있었다. 그런 거 달면, 회사에서 뭐라 안 하나. 곁눈질로 오늘 아저씨의 스타일을 보며 별 생각을 다 했다. 항상 뿌리던 향수와, 오늘은 좀 더 열심히 매만진듯한 머리, 핏이 사는 흰 셔츠와 검은 바지. 마무리로 손목시계까지. 반짝거리는 피어싱이 조금 미스였지만, 매우 매우 여자들의 환심을 살 만한 스타일이였다.
" ..아무나 조수석에 막 태워주고. "
" ..응? 뭐라고? "
학교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아저씨는 그 말을 제대로 못 들은 듯 고개도 함께 내쪽으로 꺾었다.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가버렸다. 입을 앙 하고 다물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였고 나는 그걸 손가락으로 쓸어담고 있었다. 진짜 못 들었나? 제발 못 들었길. 차가 부드럽게 멈추자마자 안전벨트를 풀었다. 아저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저씨는 내 쪽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로 가까이 맞닿은 얼굴에 귀 끝에만 있던 뜨거워지는 느낌이 얼굴까지 퍼졌다. 놀라 얼굴을 급히 뒤로 뺐다. 감사하다구요 ! 오늘도 좋아한다고, 그 말이였어요! 차마 맬 시간이 없었던 가방을 재빠르게 들고선 차에서 튀어나왔다. 조수석의 창문이 지잉 하고 열리더니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무나 안 태워주는데 특별히 태워준거야, 늦으면 곤란하잖아. 늦지 말고 학교 잘 갔다와요. "
아까도 말했지만, 붉어오는 볼이 미웠다.
04
" ..정국아. "
" ..콜록, 뭐 , 너 또, 뭐. 돈 빌려달라고? 야, 나 돈 없어. "
?
얼굴에 물음표가 띄어졌다. 아, 뭔소리야. 그게. 전정국은 숟가락으로 밥을 허겁지겁 퍼먹다가 숟가락을 입에서 빼고선 그럼 뭔데, 나 왜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 라며 되물었다. 고삼들이 유일하게 한가하다는 점심시간이였다. 전정국은 얼른 밥 먹고 곧 있을 축구대회 연습하러 가야 한다며, 내 앞에서 허겁지겁 급식을 마시듯이 먹고 있었다. 중학교때부터 꾸준하게 봐오던 친구이자, 현재는 1년도 채 남지 않은 고삼인생을 함께 보내고 있는 동지였다. 김태형과 정호석이랑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도 다 전정국 때문이고. 무엇을 할 때든지 생각이 많은 나와는 달리 전정국은 생각이 짧아 항상 몸이 먼저 나갔다. 걱정거리도, 고민거리도 딱히 없어 유난히 밝아서 아직 아저씨의 정체는 얘기하지 못 했다. 얘가 그 사람이 누군지 보고싶다고 할까봐도 있고, 도저히 나이차이가 열살이라는 말은 못 하겠어서.
" 너, 너. 만약에 진짜 너 이상형인 사람이 있는데. 진짜 너무 이상형이고, 너가 오랫동안 좋아했어. 근데, 나이차가 많이 나. 그럼 어떻게 할래. "
" .. 갑자기 뭔 터무니 없는 질문이야. 나이차이가 대충 몇 정도인데? "
" .. 어, 한 열살? "
" 뭐? 열살? 야, 열살이면 지금 나랑 초등학교 2학년이잖아. 잡혀간다, 미쳤냐? "
" ..아니! 위로 말이야. 그러니까 스물 아홉. "
" 야, 그래도 내년이면 그 여자는 서른일 거 아냐. 미쳤지. "
그래, 내가 미친거지. 조용히 입을 꾹 다문 채 밥만 먹었다. 그건 근데 왜 물어봐? 뭐, 누가 너 마음에 든대? 그게 근데 스물 아홉 아저씨야? 생각이 짧을 줄만 알았는데 전정국은 눈치가 빨랐다. 스물 아홉 아저씨는 맞는데, 상황은 정반대야. 차마 내뱉지 못 한 말을 밥과 함께 삼켰다. 뭐래,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주변 사람이 그렇다고.
05
점심시간마다 전정국은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저게 잘 하는건가. 응원석이라고 학교에서 대강 만들어놓은 돌계단에 앉아 전정국 공 차는 모습을 한참 보고있으면, 항상 1학년이든 2학년이든 3학년이든, 게다가 선생님들도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물론, 여자들. 무릎에 턱을 괴고 전정국이 열심히 운동장을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내 눈에는 한참 모자라보여도, 남들 눈에서는 다른 가보다. 전정국이 빠른 슈팅으로 공을 골대 왼쪽 구석에 정확히 쳐박자마자 여자애들이 꺄악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저런 모습만 봤으니까. 운동장에서 땀 흘리며 축구하는 멋진 모습. 내 앞에서는 항상 미적분 기초문제도 못 풀어서 끙끙대는 모습과, 롯데리아에서 돈 계산을 제대로 못 해서 어버버하는 모습, 약속시간에 한참 늦게 나와 뒷통수에 자리잡은 까치집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대는 모습. 그런 덜 떨어지는 모습만 보여줬다.
" 야 김탄소. 나 방금 좀 잘했지? 방금 애들도 대박이라고 했다. "
" ..그렇게 물어도 나 축구 잘 몰라서, 대답 잘 못 해줘. 알지? "
" 야. 이건 축구를 모르는 사람들도 보면 두팔 벌려 감탄할만한 플레이야. 알아? "
미안, 모르겠다. 턱 밑까지 흐르는 땀을 손목으로 대충 닦는 전정국을 보자니 괜히 땀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야 나 간다, 저기 밑에 여자애들이 니 좋다고 꺅꺅 대는데 가서 손짓이라도 좀 해줘라. 전정국과 대화하는 나를 뚫을 듯 쳐다보는 여자애들을 향해 턱짓하자 전정국이 그쪽으로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다말고 다시 나를 보았다. 야, 왜 가. 그럼 나도 올라갈래, 오늘은 그만 하고. 굳이 같이 올라가겠다고 수돗가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뛰어온 전정국의 얼굴엔 여전히 붉은 열기가 가득했다. 아저씨를 보고 얼굴이 붉어진 나 같이, 빨개진 원인은 다르지만 결과물을 같았다. 붉으스름한 얼굴. 아저씨가 보았을 내 얼굴이 상상이 되어 고개를 저으며 전정국이 항상 나에게 맡기는 흰 타올을 건네자 그는 목에 두르고선 대충 얼굴의 물과 땀을 닦았다.
" 너가 내 매니저해야지. 먼저 올라가면 슈퍼스타 전정국은 타올 누구한테 받냐. "
" 단미네, 단미. "
" ..어? 단미가 뭐야.. 나 그런 말 처음 듣는데, 야 너 또, 나 지네나라 언어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라고 놀리지 마. "
" ..단단히 미친놈이라고. "
" ..야, 그게 무슨. "
06
전정국은 야자를 안 했다. 보충은 학생의 기본이라며 선생님이 거의 반강제로 시켜서 하긴 하는데, 얘가 보충 수업마다 하는 짓은 엎드려서 퍼자기, 혹은 휴대폰 게임이였다. 지긋지긋했던 보충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이 책을 챙겨 나가시기도 전에 전정국은 나 먼저 간다, 학교에서 잘 썩어. 하며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매고선 재빨리 나가버린다. 석식은 이 학교 대대로 밥이 맛 없어서 안 먹고, 김태형과 정호석 셋이서 학교 앞 편의점에서 허기를 대충 달랬다. 김태형은 공부 때려치고 연기자 오디션 보러다닌다며 자기관리를 위한 저지방 우유를 저녁식사 대용으로 마셨고, 정호석은 한국인은 밥심이라며 카카오 캐릭터가 그려진 빵을 집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며. 하여간에 나는 항상 저녁에는 식성이 좋았다. 컵라면, 김밥을 집어들고 마지막으로 고 카페인 커피로 유명한, 아저씨가 매일같이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까지 집어들었다. 한껏 품에 안고 계산대에 내려 놓고선 야무지게 빨대까지 챙겼다.
" 석식은 안 먹어요? "
딸랑하고 문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아, 설마. 고개를 돌리자 금세 퇴근이라도 한건지 아침에 비해 조금 풀어진 넥타이를 삐뚤게 맨 아저씨가 서있었다. 석식은 신청 안 했어요? 하긴, 나 학교 다닐 때도 석식은 맛 없었다.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몇번 쓰담더니 계산대에 놓인 내 음식들을 대신 카드로 계산했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엥, 왜, 이, 아니 왜 이시간에 여기에 있어요..? 나의 물음에 싱긋 웃으며 글쎄, 오늘따라 편의점 음식이 먹고 싶었나. 하며 검은 비닐봉지에 내가 고른 음식들을 담으며 나에게 건넸다.
" 아 참, 이 커피 카페인 많이 들어서 몸에 안 좋은데. 이건 내가 마실게요. "
" ..아니, 여기에 그것도 이시간에 왜 있어요? "
" 그냥, 오늘따라 편의점 음식이 먹고 싶어서 와봤는데. 어제 그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다 끝나서 오늘은 일찍 퇴근했어요. 됐죠? "
검은 비닐봉지에서 커피를 쏙 빼낸 아저씨는 새로 딸기맛 고양이기계 캐릭터 우유를 집어오더니 계산했다. 그러고선 계산한 딸기우유를 내 비닐봉지에 도로 넣어주었다. 이러면 됐지. 아직 시험기간도 아닌데, 커피 너무 많이 마시지마. 내 머리를 두어번 통통 치더니 커피 잘 마실게요, 야자 열심히 하고. 하며 편의점을 나섰다. 어버버 거리며 계속 제 자리에 서있자, 편의점 앞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김태형과 앉아있던 정호석이 재빠르게 내 손을 붙잡고 끌고 나갔다.
" 누구야? 개멋있다, 진짜. "
" 오, 야 어려보이는데 차도 있어. "
" 야, 차도 좋은거네, 미친. 김탄소, 대학생 사귀냐. "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옆집 사는 아저씨야. 직장인이고. "
직장인이라는 말에 둘은 믿기지가 않는 표정으로 우리 또래 같다며 차를 타고 떠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입 벌리고 쳐다보았다. 야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얼마나 멋있냐. 정호석이 카카오톡 캐릭터 빵 봉지를 뜯어 스티커부터 확인하며 말했다. 아, 망했어 또 라이언이야. 라이언에 관련된 거라고 하면 죄다 김남준 그 못된 자식이 쌔벼가는데. 호석이 테이블에 머리를 쾅 하고 박으며 말했다. 김태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아저씨를 찬양하기 바빴다. 나중에, 저 아저씨 또 마주치면 나랑 인사시켜주기다 김탄소, 근데 아무리 봐도 우리랑 나이 비슷해 보여, 많아 봤자 대학생인줄. 김태형의 속사포 같은 말을 듣다가 공감했다. 하긴, 스물 아홉이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린 외모이긴 하지.
07
오늘도 늦은 시각에 귀가하는 길이였다. 가로등도 하나둘씩 커졌고, 내가 걷는 길은 유난히 어두웠다. 으, 괜히 으스스한 느낌에 몸을 한 번 떨었다. 이럴 때만 되면 아저씨랑 통화하면서 집에 가는 상상을 했다. 현실은 뭐, 전화번호도 없지만. 이래서 내가 포기하고 싶다는 거다, 이래서. 몇년을 좋아해서 얻은 수확은 '오해' 뿐이였다. 아저씨도 어쩌면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오해, 말이다. 적어도 좋아한다면 번호라도 따겠지. 번호 따기 시도는 이미 예전부터 계획해왔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려니 두려웠다. 좋아한다는 말은 어물쩡거리면서 넘길 수 있겠지만, 번호를 달라는 말은 '싫다, 좋다' 가 확실히 구별되는 물음에다가 아저씨는 일하느라 바쁠텐데 번호를 알아도 뭐해. 그리고 번호를 알고 연락을 하면 뭐해. 어차피 모두에게나 그럴텐데.
여러 하찮은 생각들을 하다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이였다.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데, 엘리베이터가 얄궂게 먼저 올라가버렸다. 어, 뭐야. 아 좀만 일찍 뛰어올 걸. 한 없이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멈췄다. 순간 심장이 두근 하고 멈춘 듯 했다. 설마, 설마. 6층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밤 늦게 마트에 잠깐 다녀오는 옆집 어린 꼬마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밤늦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일찍이 주무시는 우리 엄마일수도 있고, 아니. 둘 다 말이 안 됐다.
" 어, 이제 오나봐요. 어제랑 비슷한 시간이네. "
설마가 사람잡는다더니.
08
" 아이스크림, 맛있죠? 나 어렸을 때부터 이 아이스크림 엄청 좋아했던 것 같네. "
밤늦게 잠시 집 앞 편의점에 들리러 가는 길이였다는 아저씨를 따라와버렸다, 엉겹결에. 아저씨가 아이스크림 사주겠다며 따라오라고는 했는데, 그 말을 하고선 납치범의 정석인 멘트를 해버린 것 같다고 자기는 그런 사람 아니라며 혼자 북치고 장구를 쳤다. 나 데려가라고 해도 안 데려갈 거 뻔히 아는데. 아저씨에게서 알싸한 술냄새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아저씨와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물론 학교 얘기가 전부였지만. 학교 야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라는 둥 고리타분한 질문들에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대답했다. 그러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쿡쿡 웃던 아저씨는 가방 들어주겠다며 무겁지도 않은 내 가방을 한쪽 어깨에 짊어졌다. 편의점에 도착해서 아저씨는 그렇게도 피우지 말라는 담배 한 갑과 평소에 즐겨마시는(오늘도 마신) 고 카페인 커피와 내 몫까지 두개의 딸기맛과 우유맛이 합쳐진 아이스크림을 골라집었다.
" 딸기맛 좋아하시나 봐요. "
" 응, 딸기 엄청 좋아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
계산을 끝마치고선 아직은 쌀쌀한 봄날의 밤을 걸었다. 아저씨는 갑자기 아까도 그랬듯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잘생긴 얼굴을 왜 숨기는건지, 특히 웃을 때가 그렇게 매력적인데. 아저씨를 올려다보며, 왜요? 하고 물었다. 아침에 차안에서 너 되게 딸기 같았는데, 진짜. 라며, 아침의 낯 부끄러운 일들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아, 하고 고개를 푹 숙이자 아저씨는 내 가방을 다시 한번 고쳐 들며 #탄소야, 딸기씨 없는 딸기 같아요. 라고 얼빠지는 소리를 했다. 이거 지금 칭찬인거지. 그것도 엄청나게? 얼굴이 또 다시 딸기가 되는 것 같았다. 딸기씨 없는 딸기.
09
" 뭐하다가 이제 와? 야자가 너무 늦게 끝나는 거 아냐? 우리 딸 너무 위험한데. "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의 특유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분명 잘 것이라 예상했던 엄마는 헤어밴드를 낀 채 팩중이였다. 엥, 엄마 왜 안 자?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였는데, 엄마는 엄마 자면 뭐 하려고? 라며 의심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그냥. 갑자기 아까 일이 생각이 나서 제자리에 서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엄마가 보기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건지, 공부가 많이 힘드냐고 걱정스레 묻는 엄마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방안의 따스함보다 아까 아저씨와 함께 있을 때 느꼈던 따스함이 더 따뜻했다, 지금의 내게는. 침대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아까 일을 생각하는데. 지금 이거 집 앞 데이트? 너무 앞서나갔나. 그래도 좋았다. 아저씨와 편의점도 갔다와보고. 앞으로는 아저씨가 사준 이 아이스크림만 먹어야지.
" 엄마 나 앞으로는 딸기맛 요맘떼만 사줘. 그리고 나 딸기 먹고싶다. 요새 딸기철이잖아. "
" 안 그래도 요새 딸기철이길래, 낮에 마트 가서 사왔지. "
교복에서 잠옷으로 대충 갈아 입었다. 아, 맞아. 이 참에 번호도 물어볼 걸. 오늘 같은 날이였으면 줬을텐데. 아, 아쉽다. 아쉬움에 입맛을 쩝 하고 다셨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 갑자기 들떠버렸다. 화장실에서 꼼꼼히 세안을 할 때도, 딸기맛의 아이스크림이 여전히 입에 남아있어 양치를 차마 하기 아쉬울 때도, 아저씨가 떠올랐다. 나 혼자만 하는 오해가 아니길, 제발. 속으로 절을 하며 빌었다. 자칫하면 깊은 상처가 남을 오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짝사랑은 더욱 빠르게 깊어져갔다.
" 엄마, 나 딸기 닮았어? "
" ..뭐? 누가 그딴 소리를 해? "
" ..어, 어떤 우리반 남자애가! "
" 뭐? 우리딸이 이렇게 예쁜데, 너가 딸기를 닮아? 내가 당장 월요일날 학교에 가서, "
" 아, 그런 거 아냐. 엄마. "
..아, 칭찬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10
유난히 할 일 없는 주말이였다. 전정국은 곧 있을 축구대회 연습으로 바빴고, 김태형은 자신이 소속된 연극부가 머지않아 공연이 있다며 공연연습에 바빴다. 또, 정호석은 오늘 자신이 좋아하는 힙합 레이블 콘서트 날이라며 일찌감치 호들갑을 떨며 바빴다. 아, 나만 이렇게 할 짓 없이 있는구나. 탄식아닌 탄식을 하며 침대에 벌러덩하고 누웠다. 공부는 하기 싫고, 한숨 자자니 방금 일어났고. 아저씨한테 딸기 가져다가 줄까? 간만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행히(?) 엄마가 어딜 나간 듯 했다. 부엌쪽 베란다에 가자 신선한 딸기가 박스채로 쌓여있었다. 아싸, 이왕 줄 거 많이 줘야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딸기를 깨끗이 씻어 칼로 꼭지까지 열심히 잘라내었다. 한눈에 봐도 빛깔이 고운 게 퍽 먹음직스러웠다. 그릇에 가지런히 담아 야무지게 그릇에 물기까지 닦아냈다.
" 와, 김탄소. 시집 가도 되겠다. "
혼자 감탄을 하며 딸기를 하나 맛 보았다. 달았다. 많이 달아서 절로 웃음이 났다. 평소보다 더욱 단 것만 같은 딸기맛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딸기 다듬다보니 신경을 못 쓴게 있었는데, 바로 몰골이였다. 물기 묻은 손을 씻고 거울을 흘깃 쳐다보니, 웬 거지꼴을 한 여자가 서있었다. 아, 큰일났다. 화장실로 향해 황급히 뛰어가 대충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나왔다. 아, 딸기 저렇게 오래두면 안 되는데. 얼굴에는 나름 꾸민다고 비싼 돈 주고 산 파운데이션과 마지막 자존심인 눈썹 , 생기를 돋우기 위한 틴트까지 발랐다. 머리도 대충 말려 가지런히 빗었다. 향수도 물론, 잊지 않았다. 향수도 딸기향으로 살까 싶어졌다. 그릇을 두손에 쥐고 대충 신발을 질질 끌으며 신고 나왔는데, 생각해보니까. 집에 아저씨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아파트 복도를 걷는데,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밖이 뛰어노는 아이들로 시끄러웠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아무도 없는 듯 반응이 없었다. 아냐, 못 들은 걸 수도 있어. 다시한번 문을 똑똑똑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선 벨을 누르자 익숙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문이 작게 벌컥 열렸다. 누군지도 안 물어보네요, 아저씨. 작게 열린 문 틈사이로 아저씨 얼굴이 빼꼼하고 나왔다. 검은색의 머리는 까치집으로 산발이였고 눈도 아직 제대로 못 뜬 아저씨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열었던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
..나, 이거 지금 거절 당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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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 박지민 아저씨와 두근거리는 망상하는 글입니다 ^ㅁ^
부족한 필력이지만 부디 재밌게 읽으셨기를 바랍니다 !
포인트는 아직 걸지 않았어요 ! 댓글 반응이 괜찮다면 열심히 써서 오겠습니다..
아직 셤기간이라서, 아마 다다음주 쯤에 2편이 올라올 것 같아요 ㅠㅁㅠ
암호닉 신청해주시면 제 사랑을 양껏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