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정국에 뷔 예보
탄소는 주먹을 꼭 쥔 채 멀어져가는 정국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다 몸을 틀어 윤기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탄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국에게 수많은 상처를 줬을 윤기가 미웠고, 그걸 알고 있었던 제 자신도 싫었다. 그 때 그만하라고 말렸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아니, 결국은 똑같은 인간일 텐데 더 미워했으려나. 당장이라도 뛰어 가 정국을 잡고 싶었다. 탄소에겐 아직 그럴 용기가 부족했다. 근데, 근데.
" 난 가끔 궁금해. 전정국이 날 더 증오할까, 널 더 증오할까. "
" ……. "
" 넌 어디에 걸어볼래? "
탄소는 윤기의 말을 듣다 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윤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오늘도 여전히, 저를 두고 떠나버린 정국이 보고 싶었다. 텅 빈 집 안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텅 빈 집 안에 혼자 두는 부모를 원망했다. 그렇게 살게 만든 원인이라 생각했다.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 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렸건만, 결국은 또 다시 혼자였다. 무서웠다. 다시 혼자가 되는 건. 불이 꺼진 집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땐 그대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현관에 등을 기대어 흘러내렸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휴대폰을 꺼내들어도 연락을 취할 사람이 없었다. 그 누구도, 저를 보듬어 줄 사람이 없었다. 문득, 아까 전 윤기가 내뱉던 말이 생각났다. ' 네 덕에 호석이만 존나게 쳐 맞았잖아. 애들 보는 앞에서 쪽팔리게. ' 그 말이 떠올라 아무런 생각없이 전화를 걸었다. 유일한 친구라 믿었던 놈이었다. 전화 연결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멎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 …우리 지랄견이 먼저 전화거는 날도 있네. ]
" 괜찮냐. "
[ 뭐가? 나야 늘 괜찮지. 안 괜찮았던 적 있었나, 내가. ]
" 민윤기 생긴 건 안 그래도 주먹 매운 건 나도 알거든. 치료는 제대로 했고? "
[ 기어이 갔네. ]
" ……. "
[ 나 아직 아무한테도 말 못한 얘기 있는데. 들어줄래. ]
" 뭔데. 취중진담은 사양이야. 술 주정 받아주는데 능력없다, 나. "
[ 너도 나도 존나 철없이 학창 시절 보내고 있잖냐. 정신 차려야지, 하고 뒤돌면 담배 빨고 오토바이 타고. 이미 그게 습관이 되서 고칠 수가 없나 봐. 진짜 고쳐야 되는데. ]
" ……. "
[ 나는 그냥 약한 애들 데리고 노는 모습 보고 있으면 늘 신기했어. 그냥 어떻게 저렇게 쳐 맞고만 있나, 싶어서.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잘못했다고 비는 것도 웃겼고. 존나 약았지. 그 중 하나가 전정국이었는데 걔는 존나 특이 케이스였다? 애새끼가 쳐 맞으면 아프다고 질질 짜던가 아님 살려달라고, 미안하다고 빌던가. 그것도 아니면 아파서 신음 정도는 흘릴 줄 알았는데 그 새끼는 늘 지 입술만 꾹 깨물고 악바리로 버티고 있는 거 있지. 나 보면서 존나 신기했다니까. 근데 민윤기는 그게 싫었나 봐. 그래서 죽어라 팼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으로. 결국 뭐, 전정국이 이긴 것 같아. ]
" 정호석. "
[ 전정국 얘기 듣기 싫지? 민윤기가 너한테 그 때 일 얘기해주고 전정국한테서 잠수탄 거 알고 있었어, 대충. 전정국이 우리 찾아왔었거든. ]
" ……찾아와? "
[ 어. 찾아와서 너한테 무슨 얘기했냐고 묻더라. 우리한텐 일절 말이라는 거 해본 적도 없는 새끼가. 너 떄문에 말을 걸더라, 우리한테. 나 그때 그 새끼 목소리 처음 들어봤잖아. 좋더라, 목소리? ]
" 이런 상황에도 장난까고 싶냐, 넌. "
[ 그때도 민윤기한테 얼마나 쳐 맞았는데, 걔. 그 때 유리에 얼굴 쓸려서 그런가 신음 소리도 처음 들어봤다. ]
" 얼굴이 쓸려? "
[ 그거 상처 심하게 났을 텐데. 못 봤냐. 아, 그리고 이건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 ]
" ……. "
[ ……민윤기가 전정국 손목 그었어. 깊게는 아니었어도 그것도 흉터 생겼을 텐데. 나 그거 떄문에 한동안 잠 못 잤잖아. ]
" 야, 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금? "
[ 나 이번에 민윤기한테 존나 쳐 맞아보니까 전정국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느꼈다. 그걸 어떻게 3년동안 버텼는지 모르겠네…. ]
" 호석아. "
[ 나 진짜 너무 쓰레기처럼 살았더라. 그걸 이제야 느껴버렸어. ]
" ……. "
[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렇게 살지 말자, 탄소야. ]
전화 너머에서 호석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눈물로 얼굴이 뒤덮인 탄소는 아무런 말 없이 휴대폰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을 그 작은 행동들이 아팠다. 쓰렸다. 그때 널 피하지 말고, 미안하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해줬더라면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그 생각들이 탄소의 머릿 속을 헤집었다. 과거의 자신을 타이르고, 미성숙했던 자신을 채찍질하며 하루가 멀다하고 아파했다. 그리고 여전히, 전정국이 보고 싶었다.
* * *
탄소는 책상에 엎드려 있는 정국의 앞으로 다가갔다. 체육 시간이라 텅 빈 교실 안에 둘 뿐이었다. 탄소는 그를 깨우려 차마 손을 뻗어 깨울 수도 없었다. 어제 저를 보며 지었던 표정이 자꾸 눈 앞에서 아른거려서. 어젯밤 통화 속의 호석이 말했던 정국의 모습들이 자꾸 그려져서. 뻗으려다 만 손이 허공에서 맴돌다 뒤를 돌려고 할 때, 정국이 몸을 일으켰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한참이나 말이 오가지 않았다. 정국의 눈을 주시하던 탄소의 시선이 정국을 뺨을 향했다. 왼쪽 뺨에 있는 작은 흉터에 눈쌀을 찌푸렸다. 아무런 말 없이 탄소를 바라보던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 증오한다며 욕이라도 해주길 바랐건만, 하다 못해 원망스러운 눈빛이라도 보내길 바랐건만. 정국은 탄소를 무시하려 들었다.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 나 할 얘기 있는데. "
" ……. "
" 정국아. "
" 내 이름 부르지 마, 시발. "
" ……. "
" 이번엔 또 무슨 개수작이 부리고 싶은데. 아가리 털지 말고 좀 꺼지라고. "
탄소의 입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탄소의 멱살을 잡아챘다. 탄소가 전학온 첫 날 잡아챘던 것처럼 헛웃음치며 저를 농락할 줄 알았으나, 저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너무 슬퍼서. 금방이라도 제 앞에서 눈물을 떨굴 것처럼 굴어서. 정국의 손아귀는 점점 힘이 풀렸다. 손이 떨어지기도 전에 손목을 잡아챈 탄소가 손목을 살폈다. 그러다 제가 확인하려는 걸 확인하지 못한 것인지 다시 오른쪽 손을 잡아챈 탄소가 교복 소매를 위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보인 상처에 결국 탄소는 무너졌다. 그걸 바라보던 정국이 손목을 뿌리쳐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한 걸음 뒤로 밀쳐진 탄소가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 ……너 뭐야. "
" 나 때문에 그런 거지, 어? 내가, 내가 너 그렇게 만든 거지. 그치. "
" 김탄소. "
" 어떡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
" 어, 너 때문이야. 몰랐냐? 왜 이제와서 몰랐던 척이야. 시발, 역겹게. "
정국의 몸이 얕게 떨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떨구고 있는 탄소를 보고 있자하니 속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여전히 제 자신 때문에 우는 탄소를 볼 자신이 없었다. 정국은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랐던 거지? 모든 걸 잃고 무너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똑같이 무너지는 걸 바랐을까. 그런 걸 바란 거라면 지금의 탄소의 모습을 보며 복수를 성공했다고 웃어야 할 텐데, 왜 자꾸 가슴이 미어지는 건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더 원망스러운 건, 제 앞에서 우는 탄소에게 손을 뻗어 눈물로 범벅이 된 그 얼굴을 닦아줄 수도, 팔을 뻗어 품에 안아 울지 말라며 다독일 수도 없었다.
" 미안해. 미안해, 정국아. 내가 너 좋아해서 그래서 미안해…. "
" ……. "
" 다시 네 앞에 나타나서 미안해. 염치없이 너 찾아와서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
" 김탄소. "
" 나는, 나는 있잖아. 말도 없이 나를 버리고 간 네가 미웠어. 내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가버린 네가 미웠어. 내가 얘기 할 때까지 미안하다고 말 할 때까지 날 기다려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그렇게 버리고 가버린 네가 미웠어. 그런데도 자꾸 네가 보고 싶은 거 있지. 그래서 무작정 너 보러 왔는데, 자꾸 나 버리고 간 네가 생각나서, 미워서 못나게 굴었어. 정작 나는 너한테 남긴 상처가 이렇게 많았는데, 난 바보같이 이제야 그걸 알았나 봐. "
" ……. "
" 이젠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다시는 너 찾아오지 않을게. 네가 아플 거 내가 대신 다 아플게. 그러니까, "
" ……. "
" 너는 이제 아프지 마, 정국아……. "
결국 정국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너무 늦어버린 고백이었다. 조금만 더 서둘러 했더라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까. 조금은 더 순탄하지 않았을까. 둘은 또 다시 서로를 자책했다. 탄소는 제 할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눈물로 가려진 시야 사이에서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정국이 보였다. 왜? 왜 우는데? 내가 다시 꺼져준다고 그래서, 행복해서 우는 거야? 탄소는 처음보는 그 눈물이 정국이 제 눈물을 보는 것만큼이나 아파서, 낯설어서, 서러워서. 둘은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며 수없이 참아왔던 눈물을 토해냈다.
" 이기적인 년. "
" ……. "
" 예나 지금이나 지 멋대로 내 눈 앞에 나타나서 지 멋대로 사람 마음 다 흔들어 놓고선. 뭐? 다시 꺼지겠다고? 말이야 늘 쉽지, 넌. "
" ……정국아. "
" 넌 어떻게 늘 네 생각 밖에 못 해.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시발. "
" ……. "
"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그 말보다! 네가 더이상 내 옆에 없다는 게, 그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게 얼마나 아팠는데. 얼마나 죽고 싶었는데! "
" ……. "
" 넌 또 왜 네 멋대로 사라지겠다는 건데, 왜……. "
둘은 멀고 먼 길을 돌아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더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 피했지만, 더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 서로를 마주해야 했다. 결국 견디지 못 해 터진 부분이 평생 아물지 못 해도 좋았다. 곪아서 더 아파져도 좋았다. 둘은 뜨거운 여름을 지나고, 쓸쓸했던 가을을 지나, 차갑던 겨울을 이기고, 다시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플 것을 알았지만, 또 다시 서로를 앓았다.
사랑이었다..
* * *
드디어 여주와 정국이가 서로에게 속마음 제대로 들어냈어요! 이제 윤기와 파이트 뜨는 정국이도 써야 하고.. 할 일 산더미 ㅎㅎ...
지민이와 여주도 써야 되고,, 정국이의 부모님도 써야 되고.. 참 일을 많이도 벌려 놨네 *^_^* 일 벌리기는 신입니다, 제가 ^^;;;;
아 구리고 진짜 저번 화도 봐주신 우리 독자님들 최고야! 댓글 넘 귀여웠어 다들!!! 나 씹덕사로 죽이려고 환장을 하셨나 봐 즌말.
암호닉 신청 받는 곳에서 질문하시는 것들도 하나같이 넘 귀여워짜나요ㅡㅡ? 내가 아주 심장이 아파 죽어버리는 줄 알았네! ㅎㅅㅎ
이제 여주랑 정국이 알콩달콩 할 일만 남았어여.. 얼른 쓰고 싶어 죽겠다 ㅎ 아마 20화가 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ㅎ
쨋든 전 도깨비가 끝나서 너무 슬퍼요. (우럭) 이제 뭘 본담.. 보이스로 갈아타야 하는 걸까..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