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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논두렁에 앉아 얼어 붙은 개울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쯤 집에 가려나. 일 년에 단 두 번 오는 시골집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반갑기는 커녕 벌써 모든 기운이 빠지는 듯 했다. 모이기만 하면 싸우는 집안 식구들은 대체 왜 굳이 명절은 챙기겠다고 바득거리는 걸까. 정말로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어른들의 싸움은 줄곧 아이들에게까지 불똥이 튀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어린 아이들은 저들끼리 손을 잡고 근처 약수터로 향해 분위기가 나아질 때 쯤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 오빠들은 자기들끼리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 노래방이나 피시방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수험생이 된 나는 그저 집을 벗어나, 그 근처를 방황할 뿐이었다. 물론, 수험생 이전에도 나는 계속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붕 떠 있는 존재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왜 그런 아이들이 있지 않나. 혼자 있어 버릇해서, 혼자가 편해진 아이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다가오지 않고, 그것에 익숙해져 버린.
내가 딱 그런 아이였다.
시골에 올 때마다 내게 말을 붙이는, 내 옆에 털썩 앉아 버린 지금 이 녀석만 뺀다면.
**
언제부터인가 집안 싸움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내 곁에서 조잘조잘 떠들어대며, 낯선 시골길을 안내해주는 녀석이었다. 마을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는 나와 동갑이고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학교를 다닌다. 또 이곳에서 작은 태권도를 운영하시는 아버지와 초등학교 방과후 발레수업을 하시는 어머니와 함께 산다.그리고 그들 가족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듯 하다. 아이와 함께 지나갈 때면,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했으니.
처음 녀석을 봤을 때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으니까, 우리의 정의 할 수 없는 관계는 꽤나 길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여기서 정의할 수 없는 관계라는 건, 일방적으로 한 명만 묻고 답하는 관계이다. 어릴 적부터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자꾸만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 아이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아이의 모든 말에 대꾸해주지 않으며, 혼자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아이는 그런 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그 숲으로 가면 호랑이가 나온다더라. 저 길로 가면 말 농장이 있다. 식의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는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를 주전부리를 손에 쥐어주며, '다음 겨울에 보자. 혹은 다음 가을에 보자.' 식의 먼 약속을 저 혼자 하고는 사라졌다. 아이가 쥐어준 주전부리들은 언제나 아이의 체온을 가득 담고 있었기에, 눅눅하고 잔뜩 바스라져 있기 일수였다. 나는 그것을 먹지도 않으며, 꼭 서울에 가지고 올라가 책상 밑 두번째 서랍에 그것들을 모아뒀다. 명확한 이유는 없다. 그냥 그랬다.
녀석의 키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나와 격차를 벌려갔다. 심지어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에는 어느새 나보다 머리가 한 개 하고도 반 개가 더 올라갈 정도였다. 또한 남자 아이 치고, 작은 몸통도 제법 다부진 몸으로 변해 있었다. 목소리도 전보다는 훨씬 낮아졌다. 녀석의 그런 변화를 알아챈 나는 그 순간부터, 그 녀석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나보다 한참이나 덩치 큰 아이가 내 옆을 따라다니며, 자꾸만 제 이야기를 늘어두는 게. 전과 다름없이 해사하게 웃는 그 웃음이 멋쩍었다. 심지어 기껏해야 일 년에 두 번 보는 그 녀석은 오랜만에 보는 나를 어제도 봤던 사람처럼 대했다.
오늘 역시 대뜸 '안녕.' 이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내 옆에 앉아 버렸으니. 한결같이 종 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아이는 내 옆에 앉음과 동시에 제 겉옷으로 보이는 점퍼를 내게 덮어주며 물었다.
"춥겠다. 그거 너 해."
작년 추석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진 녀석이었다. 나는 곁눈질로 아이의 행색을 살피며, 조금 더 남자다워진 아이의 손에 시선을 멈췄다. 그리 큰 손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 손보다는 클 듯 싶었다. 아이는 그런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우리 앞의 돌맹이 하나를 주워 개울로 던졌다. 단단히 얼어 있는 개울이 돌맹이를 튕겨내자, 아이는 또 한 번 돌을 던졌다. 그렇게 한 다섯 번 쯤 반복했을까. 녀석이 던진 돌에 개울 구석이 깨져갔다.
"저 두꺼운 얼음도 깨졌는데."
"..."
"넌 대체 언제쯤 깨지려나."
"..."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아이가 방금 깨트린 얼음판을 바라보았다. 곧 이어 아이의 시선이 거둬지는 듯 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한테 답을 바란 적은 없었는데. 나는 아이가 덮어준 점퍼 아래로 감춰진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괜시리 손장난을 했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다.
"목소리 좀 듣고 싶다. 팔 년째인데."
"..."
아이와 내 시간이 벌써, 팔 년이나 된 모양이었다. 오래도 됐네. 하긴 초등학교 사 학년 쯤에 처음 만났다고 치면, 벌써 열아홉이니까. 그 정도 됐겠다. 나도 참 나다. 그 시간동안 답 한 번을 안 한 거야? 우리 둘 다 대단하네. 나는 제법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과 녀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시간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늘 그랬듯이 흘러간다.
"공부는 잘 돼? 서울 학생들은 여기 애들보다 공부도 더 많이 하겠지?"
"..."
"나는 그냥 열심히 하고 있어. 고등학교 올라가는 그 해 설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
"문과는 완전 내 스타일 아니라고 했었는데. 쨌든 그래서 이과 선택하고, 수능도 이과 쪽으로 보려고."
"..."
"진로는 생각해둔 게 있기는 한데, 나중에 말 해줄게. 되면."
"..."
"너는?"
"..."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문과와 이과 중에 골라야 한다는 것을 내게 알았냐며, 자신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큰 일이 났다고 칭얼거리던 녀석이었다. 나는 이공계 쪽과는 거리가 먼 머리 탓에 자연스레 선택이라고 할 것도 없이, 문과였다. 하지만 이 대답 역시 속으로만 삼켰다. 그때 그렇게 그 날 하루 종일 문과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더니, 결국은 이과를 갔었구나. 그때 이후로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나눠본 적이 없어서 몰랐었네. 나는 아이의 말을 곱씹으며,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다 살풋 웃음이 흘러나올 뻔 한 걸 겨우 참아냈다. '진로'라는 단어에 다시 마음이 가라 앉았기에, 웃음을 감추기에 수월했다. 꿈이 없는데, 나는. ...이 아이는 있구나. 나는 순식간에 가라앉은 마음에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너네 집 오늘은 되게 빨리 조용해졌다."
아이의 말이 맞았다. 집 바로 앞의 논두렁이라, 집 안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었는데. 분명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덮어준 점퍼를 건네주며, 옷가지에 묻은 풀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아이의 말마따나 팔 년의 시간 동안 감춰왔던 목소리를 조심스레 가다듬었다. 성인이 되면 이곳에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완벽히 독립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사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이따금씩 술에 취한 부모님께 손찌검을 당해왔다. 두 분 역시 내가 성인만 되면, 이혼 절차를 밟겠다며 고함 지르기를 수차례였다. 그래서 모든 과거와는 인연을 끊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살아갈 생각이었다. 부모와 가족이라는 울타리 쯤은 없어도 그만이었다.
"...고마웠어."
아이는 내 옷을 받아 들다가, 어색하게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에 놀란 듯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는 금세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제 허리를 굽혀, 나를 바라봤다. '뭐야. 너 목소리 되게 예쁘잖아.' 하며. 나는 아이의 칭찬에 붉어진 얼굴을 천천히 들어, 처음으로 아이의 단정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선한 눈이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어딘가 그의 목소리를 닮은 눈빛이기도 했고. 나는 오늘이 마지막일 아이에게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줄 생각이었던 것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아이를 만날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탓에, 내 시선은 언제나 아이의 손 끝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의 손에는 덕지덕지 대충 붙여진 반창고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이 학년 무렵 때부터, 아이의 손에 굳은 살과 작은 생채기들이 생겼던 것 같다. 그 전까지는 그냥 작고 흰 손이었으니까. 나는 서울에서 샀던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반창고 박스를 건네고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덕, 덕분에 마냥 싫지는 않았어... 정말로."
그리고는 아이가 무어라 채 입을 떼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으로 뛰어갔다. 동시에 집에서 나오는 부모님과 마주쳤고. 그들은 타이밍 좋게 돌아온 내게 얕은 욕지거리를 뱉고는 차에 타라는 말을 던졌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엄마와 아빠의 말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빠는 신경질적으로 기어를 풀며, 시골 골목을 빠져나가기 위해 핸들을 돌렸다. 창문 너머로 나를 응시하는 아이가 눈에 담겼다. 녀석은 무어라 말을 붙이려다 들리지 않을 걸 눈치챈 건지, 제 손에 들린 반창고 박스만 흔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 앉은 시골 골목길에서, 해사하게 빛 나는 단 하나였다.
아이의 웃음은.
**
[한국대학교 신입생 OT]
꿈이 없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미래에 생길 꿈에 성적이 걸림돌이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성적에 맞춰 온 대학교와 학과였다. '언론정보학과' 나도 내가 이런 과를 올 줄은 몰랐네.
처음 입학 사실을 접했을 때는 정말로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이제야 희망이 보였다고 해야 할까.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지난 날의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OT부터 참석하며, 지독한 낯가림의 성격을 던져보려 했다. 비록 지금도 신입생 환영회를 알리는 현수막 밑에 혼자 서 있을 뿐이었지만.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대체 누가 어느 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었다. 그중 내게 손짓하는 무리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그들에게 걸어가기까지 지나치게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어제 밤 아빠의 손찌검으로 생채기가 잡힌 오른뺨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오른뺨을 가리며, 괜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강당을 살피는 내 시야의 끝에 걸친 얼굴이 하나 있었다. 때마침 보기 좋게 그 얼굴도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 순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일 년 사이 더욱 어른스러워진 아이가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의 주변은 역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원래 그런 아이였다. 나 같은 사람에게조차 친절하고 다정했던, 그런 녀석이었기에. 나는 황급히 등을 돌려, 도망을 모색했다. 우선, 그 아이가 여기에 있는 것부터가 내 계산에 없었다. 분명, 반창고를 쥐어준 그 날이 마지막이었어야 하는데. 나는 황급히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고는 이곳을 벗어나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 돌림으로, 그 계획은 무너졌지만.
"여기 입학했어?"
"..."
"진짜로?"
"...응."
"나 진짜 이거 꿈 아니지? 얼굴 좀 보자."
아이는 마냥 반가운 건지, 내 양볼을 조심스레 감싸고는 저와 시선을 맞추게 만들었다. 아이의 시선이 닿은 곳은 내 눈보다, 그보다 아래인. 내 오른뺨이었다. 나는 서둘러 아이의 손길을 벗어나며, 튕겨나 듯 뒤로 밀려났다. 아니. 내가 뒤로 도망간 거지만.
"아버지가 그랬지."
"..."
"다 알아. 너네 할머니네 집 소문이 마을에 얼마나 많았는데."
"..."
"그렇다고 아직도 ㄸ, 아니다. 잠깐만 가까이 간다?"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훌쩍 내게 다가온 아이가, 생채기를 어루만지다가 사뭇 인상을 구기고는 제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이의 손에 자리 잡고 있던 상처들은 어느새 흉터로만 남아 있었다. 그때 말한 꿈 이룬건가. 이 학교에 이번에 입학한 걸까. 어느 과일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선견지명이 대단하네."
아이의 손에 낯설지 않은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저걸 아직도 들고 다녀? 녀석은 내가 좋아하던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데일밴드를 뜯어 내 오른뺨에 조심스레 붙여왔다. 아이의 손길을 피해 몸을 뒤로 빼자, 내 허리를 다른 한 손으로 단단하게 잡은 녀석이 말했다. '움직이면 안 돼. 이거 아끼는 거라 두 개는 못 써.' 나는 이번에도 애꿎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아이의 끈질긴 시선을 피했다. 강당 한 가운데서 신입생 둘이 이러고 있으니,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결국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아무렇지 않는 녀석과는 다르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다 됐다."
"...고, 고마워."
"잘 어울리네."
"..."
"나 무용학과야."
태권도와 발레를 하는 부모님 피를 물려 받은 모양이었다. 손에 상처들도 무용을 하면서 다친 것들이었나. 그쪽으로는 무지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는 설마 그게 끝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뭘 더 바라는 거지? 나는 손장난을 치던 손을 아이의 눈 앞으로 가져가, 조심스레 엄지를 치켜 세워보였다. 아이는 제게 엄지를 치켜 세우는 나를 보자마자, 그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잡으며 내게 제 이마를 맞대오며 웃었다. 또 눈꼬리가 잔뜩 휜, 그런 웃음이었다.
"최고라고?"
"...어."
"그래. 고마워."
"...응."
나는 지나치게 가까운 아이의 얼굴에 고개를 돌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가까운ㄷ. 하지만 나보다 빨랐던 건, 아이의 물음이었다.
"너는 무슨 과야?"
"...언론정보."
"와. 뭐야. 너가 더 멋지다."
아이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로, 내 과가 더 멋지다며 한껏 칭찬을 늘어 놓았다. 그리고는 제가 있던 무리로 나를 데려갔다. 또 한 번 당황한 나는 가지 않겠다며, 발에 힘을 준 채로 제자리에서 버텨냈다. 여전히 우리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아이들이었다. 녀석은 마주 잡은 두 손을 더욱 단단하게 잡고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여전히 단정한 눈빛이었다.
"이제 어른이잖아."
"..."
"그때보다 훨씬 근사해. 지금 너."
"...그, 그래도."
"그때도 근사했는데, 지금은 더 반짝반짝 예뻐."
"..."
"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할 거야."
"..."
"내가 그랬던 것처럼."
"..."
"나 서울 잘 모르니까, 여기서는 너가 내 서울 친구야."
"..."
"내가 해줬던 것처럼, 길 알려주고. 그런 거 다 해줘야 된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아이는 유해진 내 표정을 눈치챈 건지,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나는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다시 자신들의 무리로 돌아가, 우리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벌써부터 타오르는 듯한 얼굴을 아이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얘가 그랬던 것처럼.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 나는 아이의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되새겼다. 친구. 다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 어느새 도착한 아이의 무리는 잠시동안 정적이 감돌다가, 이내 곧 떠들썩 해졌다.
"뭐냐. 박지민?"
...맞다. 박지민.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분명 들었던 이름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안녕!"
"..."
"나는 지미니, 지민이야! 박. 지. 민!"
"..."
"너는 이름이 뭐야?"
"..."
"너 대따 조용하다. 우리 엄마가 완전 좋아하게써."
-
지민이었다. 녀석의 이름은. 기억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아이의 이름이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벅찬 이름이었다. 지민이. 지민이. 박지민.
"누구야?"
"친구."
"오. 학교 친구?"
"음, 고향 친구?"
"고향 친구?"
"응. 되게 오래 봤지. 구 년 됐나."
"오. 이렇게 예쁜 친구도 있었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안녕. 나는 김태형."
자연스럽게 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녀석, 지민이었다. 사실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 지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의 이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민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내가 이상했는지, 마주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내게 인사를 건넨 자신의 친구를 소개 시켜주었다. 얘는 김태형. 나도 오늘 처음 봤는데, 친화력 대박이야.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내 귀에 속삭였다. 못 믿겠지만, 나보다도 더 대박. 동시에 지민이 무리 친구들은 우리의 마주 잡은 손과 귓속말을 들먹이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오오. 둘이 뭐야? 정말 친구야? 분위기는 아닌데?
"나는 노코멘트."
지민이가 적당히 대답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붉은 얼굴을 잔뜩 숙이고 있었고. 하지만 지민이는 적당한 대답 대신, 더욱 곤란한 대답만 남기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황한 내가 저를 빤히 올려다보자 시선을 피하며. 나는 점점 커지는 환호소리에 차마 답하지 못하고 쭈뼛이기를 반복했다. ...뭐라고 말해야 돼. 진짜 이런 관심 너무, 힘든데.
"탄소 목소리 되게 귀해."
"그게 뭐야."
"목소리 들으면 깜짝 놀랄 걸. 되게 예뻐서."
...더 말 못하겠잖아. 아니, 얘 내 이름 어떻게 알아?
빨간 지붕 할머니 |
"빨간 지붕 할머니!"
지민은 실내화 주머니를 돌리며, 빨간 지붕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궁금함에 며칠 동안 잠을 설친, 그 질문을 건넸다.
"할머니 집에 오는 여자애 이름이 뭐예요?" "누구 말하는 것이여." "그 이짜나여. 머리 양갈래 하고, 이번에 파란색 치마 입고 온 애요!" "...탄소 말하는 거여?" "탄소?" "응. 탄소." "이름 짱 예쁘다. 누가 이름 해줬어요? 탄소?" "이 할미가 지었지." "우와. 할머니 짱."
지민은 그날 하루종일 탄소의 이름을 되뇌었다. 혹여나 잊어버릴까. 제 부모님과의 저녁식사에서도
"엄마. 탄소 이름 예쁘지요?" "탄소? 그게 누구야?" "히히. 그건 비밀이야!" "뭐야. 아들 여자친구 생겼어? 여보!" "진짜 우리 지민이 애인이라도 생긴 거야?" "...으음. 아직은 아니야." "그럼 언제 애인 되는데?" "...그건 나도 잘 몰라. 너무 조용히 하고 예뻐서, 내가 조금 힘들어."
11살. 탄소가 파란 치마를 입고 온 그 추석.
조용하게 예뻐서 힘든 지민의 짝사랑이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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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겨울 보충 수업. |
"야. 박지민. 이번 설에 뭐하냐?" "바빠." "어차피 할 거 없으면, 피씨방 갈래?" "안 돼." "아. 왜."
이번 대답은 지민을 대신한 다른 친구였다.
냅둬. 저 녀석 혼자 영화 찍잖아.
무슨 영화?
있어. 견우와 직녀도 아니고,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짝사랑 상대.
에?
우리도 이해가 안 된다. 순정남이야. 순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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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이번 글은 올릴까 말까 고민 엄청 하다가... 쓴 게 아까워서... (회피) 엉엉. 설날에 올리고 싶은데, 글을 수정하면 설날에 못 올릴 것 같아서...! 상하로 나눠버렸어요.
망한 글... (저 이거 지울 지도 몰라요...!) 허허. 그럼 저는 창피하니까 이만 사라질게요! + 하 편은 ... 조금 더 생각해볼게요. (여자 주인공의 성격과 지민이의 첫사랑 시작 스토리가 과거로 또 들어가야 해서...) 으앙. 저는 몰라요...
다들 해피 설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