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꿀 + 애기 = 공주님
(Honey + Baby) = Princess
SPECIAL!
"꿀아. 일어나."
"... 더 잘래. 졸려어."
쏟아지는 잠에 절로 늘어나는 말꼬리였다. 희망이가 태어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럼에도 집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이틀 동안 제이슨네 어머니가 희망 이를 맡아주셨기 때문이다. 희망이 방에 페인트 냄새가 쉽게 빠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조용한 집이었다. 호석이는 잠투정을 하는 내가 웃긴 건지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웃다가, 제 품에 나를 안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직도 졸려. 내 꿀은. 하며.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났음에도 꿀이라는 애칭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그였다. 내가 싫다고 싫다고 - 그렇게 말했음에도. 꿀이라는 단어 자체의 어감이 별로였다. 괜히 막 꿀꿀이라고 놀리는 것 같고 그래서. 나는 내 머리를 받치고 있는 그의 팔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그러자 호석이의 몸이 약하게 뒤로 밀려났다. 아. 아파. 꿀아.
"꿀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그럼 허니?"
아. 진짜. 결국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몸을 돌렸다. 연애하기 전과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아무 사이도 아닐 때, 정호석은 대체 어디 갔어. 그렇게 차갑고 무심하고, 말도 못 걸게 카리스마 장난 아니던 정호석은 어디 갔냐고. 나는 한껏 입을 삐죽이며, 아들인지 남편인지 모를 호석이의 칭얼거림을 애써 무시했다. 아. 꿀아. 왜 등 돌려. 나 얼굴 보고 싶은데. 예쁜 얼굴 좀 보자. 응? 왜 그래. 나는 호석이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이불을 더욱 끌어당겼다.
"너 내가 꿀이 하지 말랬지."
"씁. 내가 너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
이불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묻고 있었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아랫입술을 물고서, 잇 사이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호석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화났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사실, 호석이는 유독 '야' '너' 식의 호칭을 싫어했다. 뭔가 가장 가까워야 할 우리가 너무 멀어 보여서 싫다고. 또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가족이 없었고, 친구라고는 남준 씨뿐이었으니. 나는 이불을 살짝 내려 눈을 빼꼼히 빼내, 호석이를 바라봤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호석이 품에 안기며 말했다. 미안해요. 호석아. 호석이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결에 붕붕 떠버린 내 앞머리를 헝클였다. 그 예쁘고 반듯한 손으로. 내가 못 말려. 진짜. 하면서.
**
"나. 이거!"
"안 돼. 감기 들어."
"...호석이가 안아주면 되는데?"
"...그래도 안 ㄷ,"
호석이가 말을 채 다 뱉기도 전에 그의 오른팔을 두 손으로 잡고 어깨를 흔들었다. 누가 보면 무슨 추태냐 하겠지만 내 나름의 애교였다. 이 이상한 애교에 호석이는 언제나
"사. 다 사. 초코맛? 저건 요거트맛도 나왔대. 내가 광고에서 봤어. 그것도 사."
넘어왔다. 지금 저렇게 아이스크림 통에 찰싹 달라붙어, 이것저것 담고 있는 걸 보면. 호석이는 제 옆에 빨간 카트를 끌고는 아이스크림 통을 돌아다니며, 종류별로 다 담는 듯했다. 으이구. 남편아. 나는 그런 호석이를 잡아 말리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고는 카트를 빼앗아 밀었다. 사실 그마저도 금세 내게 다가와 뒤에서 나를 안은 호석이가 다 민 거지만. 이곳은 작은 동네다 보니 마트에서 장을 보다 보면, 아는 얼굴들을 자주 마주치고는 했다. 지금도 호석이의 베스트 프랜드를 마주쳤고. 여기서 호석이의 베스트프랜드라 함은 우리 앞집의 올해 아홉 살이 된 리라를 말하는 것이었다. 리라는 호석이가 준 생일선물이 지독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주말만 되면 우리 집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내가 보기엔 이상하기만 한 괴물 애니메이션을 보며. 리라는 호석이를 발견하자마자 저 멀리서부터 뛰어와 안겼다. 내 등 뒤에 있던 호석이도 무릎을 굽혀 달려오는 리라를 안아들 준비를 했고. 등을 타고 전해지던 호석이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과장을 좀 보태서 냉기가 도는 듯했다. 아홉 살한테 질투하고 싶지는 않은데, 내가.
(리라는 다정한 핀잔 마지막 화에 나오는, 앞 집 아이였어요! 호석이가 괴물 피규어를 선물해준! 기억이 안 나시는 분들은, 다정한 핀잔 마지막 화를 참고해주세요!*)
"리라. 저번 주보다 키가 더 큰 것 같네?"
"삼촌이 준 우유 초콜렛 때문인가 봐!"
"아닐걸? 우리 리라가 편식 안 해서 그래. 예뻐라."
" 삼촌이랑 결혼하면 좋겠다. 이모. 부러워!"
... 나한테는 우유 초콜렛 안 줬으면서. 그리고 키 조금 큰 그런 걸 다 눈치채나? 저번 주랑 똑같아 보이는데. 내 눈에는. 내가 키 크는 건 눈치채나 몰라. 물론 클 리는 없지만. 그리고 지금 편식 저거. 왜 나 보면서 말해. 지금 나 시금치 안 먹는다고 저러는 거지? 그치? ...언제는 작고 귀여운 건 어떻게 예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리라야. 너네 삼촌이랑 결혼하면 좋은데, 안 좋아.
**
잔뜩 삐뚤어진 마음이 자꾸만 행동으로 튀어나왔다. 아홉 살한테 질투했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그는 마트를 다녀온 후로 말수가 적어진 내 눈치를 보다가, 욕실에서 젖은 머리를 털고 나오며 소파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왔다. 왜 그래?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속 편한 질문이었다. 사실 이 마음은 리라 때문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함께 놀러 간 꽃 축제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밝게 웃던 모습, 결혼한 남자라는 걸 모르는 마을 여자가 주고 간 러브레터 등의 이유도 더해진 탓이었다. 짜증 나. 짜증 나! 나는 호석이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소파 구석으로 가 몸을 웅크렸다. 내가 토라질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호석이는 제 미간을 찌푸려 인상을 쓰다, 내 쪽으로 걸어와 웅크린 내 몸을 단숨에 안아 들었다. 나는 순간 잃어버린 중심에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머리칼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 내려줘."
"뭐가 마음에 안 들어."
"... 몰라."
어느덧 침대 끄트머리에 나를 앉힌 그가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맞추고는 물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모른다는 답답한 답만 내놓았다.... 창피하게 어떻게 말해. 그는 그런 내 시선을 따라 제 눈동자를 같이 움직이다, 마음을 열지 않는 내 대답에 결국은 내 옆에 앉았다. 침대가 일렁였다. 말 안 해주면 몰라. 나는. 하며.... 이씨. 짜증 나. 정호석. 진짜.
"너 나 키 몇인 줄 알아?"
"내 어깨뼈에 딱 맞잖아. 구두 신으면 목쯤 되고."
"... 시금치는 어? 왜 안 먹는데! 내가!"
"흐물흐물한 게 맛없다며. 그래도 먹어야지. 희망이가 나중에 엄마는 저거 안 먹는데, 왜 자기만 먹냐고 하면 뭐라고 해."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는 그였다.... 이게 아닌데. 여기서 정호석이 말 좀 잘못해야 내가 그거 잡고 아닌 척 내 말을 늘어놓는데. 그리고 시금치 안 먹는 거에서 희망이를 들먹이는 게 어딨어! 진짜... 미워. 더 미워.
"모자 쓰고 다녀."
"갑자기?"
"씻지도 말고... 어... 머리도 그냥 길게 해!"
"뭐야. 싫어."
"아. 왜 싫어! 너는 왜 결혼해도 잘생겼냐고. 진짜 억울해."
결국 튀어나온 본심이었다. 나는 결혼하고 좀 못생겼는데. 희망이도 낳고 살도 좀 쪘고! 그런데 얘는 왜. 그는 내 말에 한동안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잠시 뒤에 제 콧잔등과 내 콧잔등을 마주대고 얕게 비비기 시작했다. 애가 하나 더 있네. 하면서. 나는 그런 그에 몸을 뒤로 빼며 하지 말라는 어름장을 두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는 건지 자꾸만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귀여워. 귀여워. 내가 잘생겨서 마음에 안 들었어?
"... 그래."
"아무리 그래도 아기한테 질투를 하냐. 이제 우리 희망이 엄마 아빠인데."
"... 아기한테 한 거 아니거든! 너 저번에 꽃 축제 놀러갔ㅇ, "
"그래그래. 우리 꿀이 이제 애기야."
"...뭐?"
"애기야."
"...나 애기 아니야!"
느닷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였다. 호석이는 내 마지막 말에 몸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웃고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빼왔다. 여기서 먹게?
"침대에서 먹으면 안 돼. 흘려."
"아니야. 애기는 그래도 돼."
"...하지 말라니까."
"아. 진짜 질투 좀 더 자주 해줘."
"질투 아니거든?"
"아. 해. 우리 애기."
"...아."
일단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먹고 말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 - 하고 입을 열었는데, 아이스크림을 뜬 스푼을 제가 먹고는 내게 입맞춤을 해오는 호석이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하면 놀라잖아..."
"애기니까 내가 먹여줄거야."
...저 한 통을 다?
* 애기, 공주님 *
"아빠!"
"응. 왜요?"
"엄마는 아빠랑 나이가 친구지요?"
"그렇지요."
"근데 왜 엄마는 애기해요? 애기는 희망이보다 어린이잖아요."
"엄마는 아빠한테 애기니까요?"
"왜 애기 하는데요? 나이가 부자인데. 엄마는..."
"그런 게 있어요. 나중에 희망이는 좋아하는 사람 뭐라고 할건데요?"
"희망이는... 엄마요!"
"응?"
"엄마가 제일 예쁘니까 엄마라고 할거예요! 좋아하는 친구한테!"
"...그건 안 돼. 아들. 호칭이 이상하잖아. 공주나 뭐 그런 거 해요. 차여. 엄마라고 하면."
"...공주는 엄마꺼예요."
"아들. 엄마 공주야?"
"네에. 엄마는 공주님이에요. 이것봐요!"
"이건 뭔데?"
"유치원에서 디즈니 공주님이를 그려보라고 했는데. 내가 그렸어요!"
"아들. 앞치마 맨 디즈니 공주님이 어딨어."
"엄마요!"
* 여보, 세요. *
"아빠! 엄마랑 희망이랑 저기 무꼬기 구경했는데"
"그랬어? 물고기 봤구나. 최고네."
"긍데 어떤 남자사람이 와서 엄마한테 막 띠리링 줘써요!"
"...띠리링을 줬어?"
"응! 여보세요 줬어!"
"...엄마 어딨어요. 아들?"
"엄마 부엌에서 요리해요! 냠냠 만들어!"
* 시금치 왕자님 *
"공주님은 시금치 안 먹어요?"
"응. 엄마는... 음. 이거 먹으면 아야해요!"
"헤엑! 공주님 그거 저 주세요! 희망이가 다 냠 하께요!"
"...남편보다 낫네. 아들이."
"다 들려. 애기."
"아. 집에 여자는 나 하나인데, 공주에 애기에. 난리 났네. 진짜."
"공주님! 저 주세요!"
"아들. 애기가 먹게 두세요."
"...이거 먹어주는 사람 왕자님 시켜줄게."
"엄마! 희망이가 왕자님이 하께요!"
"...아들 아빠도 조금 주세요. 시금치."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오늘이 〈다정한 핀잔> 200일이에요! (혼자만의 기념일...)
여전히 다정하게, 잘 살고 있는 다정이들입니다!
다들 오늘 하루가 조금 더, 다정하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