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04
분명 도와주겠다고 했다. 정재현이 그랬다. 정말이다.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그런데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거죠?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네? 김도영 자리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고 있는 정재현을 가만히 째려보았다. 구겨진 내 얼굴에도 불구하고 정재현은 무표정을 일관했다. 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시민 쌤이 너 찾으시던데."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2교시 끝나고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는데 깜빡했다. 방금 교실에 들어온 이민형이 내게 말했다. 교무실에 갔다 온 것 같았다. 얘도 보면 생긴 거랑 다르게 임시 반장 역할을 착실하게 잘 하는 거 같단 말이지.
"저… 선생님?"
"시민아 이거 보건실에 갖다 놓고 올래?"
"네에…."
제가 왜요? 하는 물음을 차마 뱉진 못하고 선생님이 주시는 종이뭉치들을 들고 교무실을 나섰다. 생각해보니까 오늘 내가 주번이네.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드르륵- 문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안 계시네… 보건 선생님의 부재에 터벅터벅 걸어 종이뭉치들을 책상에 올려두었다. 이러면 되겠지? 잔심부름을 끝내고 교실로 내려가려는 찰나에 커튼 사이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봐버렸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이 팔랑팔랑거린다.
"…."
"저기 괜찮아?"
"…?"
침대 위에서 남자애는 낑낑거리며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쳐다보는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과 의아한 듯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보려던 건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가…… 애써 올린 입꼬리가 어색함에 파들파들 떨렸다. 이제 정말 나가야겠다 싶어서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는데 낯선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혼자 못 해서 그러는데."
"응?"
"이거… 밴드 좀 붙여줄래?"
남자의 시선은 꽤나 큰 상처를 단 무릎에 향했고, 그 상처를 본 나는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얼굴이 환해졌다가도 이내 쑥스러운지 이름 모를 남자애는 얼굴을 붉혔다. 체육을 하다 다친 건지 입던 체육복 여기저기에 모래가 가득했다. 모래뿐 아니라,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가득했다. 히익. 짧게 놀란 내 모습에 어딘가 어색한지 녀석은 자꾸만 뒷목을 매만졌다.
"연고는 발랐어?"
"안 발랐는데. 발라야 돼?"
발라야 되냐니 당당한 녀석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랍 속을 뒤적거렸다. 이쯤 어디였던 것 같은데…… 아, 찾았다. 연고를 손에 들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무릎 위까지 바지를 걷어올린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냥 그 모습이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이태용, 체육복 가슴팍에 새겨진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봤는데 익숙한 이름인데….
"너 정재현 친구 맞지? 김시민."
"어?"
"신기했거든, 정재현이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둘이 친해 보이더라. 둘이서 같이 있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이태용은 그렇게 말했다.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은 것 같더니, 많이 아파? 개재현(개같은 정재현)이랑 내가 친해 보였다니 말이 너무 심한데……. 대충 붙여진 밴드를 떼어내고 연고를 발랐다. 그리고 새 밴드를 그 상처 위에 조심히 붙여놓았다. 이태용은 내 손이 떨어지자마자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야 왜 일어나? 내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이태용의 시선에 다시 어깨를 잡아 침대에 앉혔다.
"팔 아직 안 끝났어."
"여긴 괜찮은데."
"앉아있어."
앉아있어. 자꾸만 일어서려는 이태용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단호하게 말이 나갔다. 뭐, 입을 꾹 다무니까 조용하고 좋네. 바닥에 쓸린 건지 무릎만큼 꽤나 큰 상처에 눈살을 찌푸렸다. 으, 쓸릴 때 아팠겠다. 손으로 할까 하다가 면봉이 더 낫겠다 싶어 면봉으로 톡톡 상처를 연고로 조심스럽게 덮었다.
"다 끝났다."
"쉬는 시간도 끝났네."
"뭐?"
"미안. 나 때문에."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인데 너. 환하게 웃고 있는 녀석을 한 번 째려보고 서둘러 보건실 문 밖을 나섰다. 뒤에서 고마워! 하는 이태용의 목소리가 들린다. 교실로 뛰어갈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맙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었다. 그때 이후로 이태용은 부쩍 우리 반에 오는 횟수가 많아졌고, 이상하다 싶을 만큼 이태용을 자주 마주쳤다. 왜?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다.
"김시민 안녕."
"어? 이태용?"
내 앞자리에 앉은 이태용은 나를 쳐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너 요즘 우리 반 자주 온다? 옆에서 정재현이 시비를 걸어댔다. 뭐, 그때마다 이태용 님께선 무시를 시전하셨지만. 처음 만날 때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전에 급식실에서 봤던 이름 모를 아이가 이태용이었다. 그렇다는 건 도영이와도 친구라는 거겠지. 이제는 남자에게도 부러움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도영 지금 기분 안 좋아."
"왜?"
어제 형이랑 싸웠거든. 내가 도영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정재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형이 있다는 건 전에 들어서 알았는데 어떻게 싸웠길래 저렇게 표정이 안 좋아? 내 물음에 자기도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영이한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김도영은 왜?"
이태용의 물음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정재현의 말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라며 무척이나 궁금해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정재현은 갑자기 내 입을 제 큰 손으로 막아버렸다. 악, 뭐해? 너? 하는 눈빛을 정재현을 째려보니. 당황한 듯 쉬는 시간 다 끝나간다며 이태용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얼른 가라는 뜻이었다. 이태용은 정재현의 행동에 어이없어하는 것 같다가도 시계를 확인하고 제 교실로 돌아갔다. 이태용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내 입을 막고 있던 제 손을 떼어냈다. 미친놈 아냐 이거? 깊게 숨을 마셨다 내뱉었다. 손을 깨물 걸 그랬다.
"너 왜 그래?"
"이태용한테 말하지 마."
"뭐를?"
"김도영 좋아한다는 거 말하지 마."
짐짓 진지한 표정인 정재현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기도 했다. 그런 내 모습에 만족한 듯 씨익 웃더니 내 머리를 제 손으로 헤집었다. 김시민 착하네. 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글거리게 왜 이래? 머리를 비비던 정재현의 손을 탁- 쳤다. 내게 아프다며 찡찡거리는 정재현의 멱살을 잡아버릴까 했지만 그냥 내버려 뒀다. 정재현은 알아가면 갈수록 첫인상과 완전 정반대였다. 왕자님 이미지? 첫사랑의 아이콘? 개나 줘라. 퉤퉤. 그러고 보면 도영이도 첫인상과 정반대였다. 음, 아닌가.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또 다르니까 그 인상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고.
"김시민 안녕."
"어? 안녕."
급식실에서였다. 수영이랑 밥을 먹고 있는데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내 옆에 앉은 것인지 나를 쳐다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이태용의 모습이 보였다. 이태용이 내 옆에 앉았다는 건……?
"…."
"도영아 안녕."
"…."
"김시민 무시당했네."
알고 있으니까 그 입 좀 다물어줄래? 이쪽으로 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도영이의 걸음이 멈칫했다. 멈칫. 저번처럼 또 그냥 가버릴 까봐 나름 밝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래 기대도 안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 기대했다. 오늘은 인사를 받아줄까? 했는데. 오늘도 역시나였다. 저번부터 도영이와 눈이 마주치면 수도 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정재현에게 항상 놀림만 당했다.
"…."
도영이는 밥도 참 맛있게 먹는다. 나와 제일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은 도영이의 옆선만 가만히 쳐다봤다. 못 봐주겠네. 앞에 앉은 수영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가 못 봐주면 어쩔 건데! 어쩔 건데에!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는 참는데 익숙하니까.
"김도영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컥, 뭐?"
"계속 김도영 쳐다보길래. 아니야?"
"… 아닌데?"
갑작스러운 이태용의 말에 먹다가 체할 뻔했다. 아니 먹다가 체하길 바란 거지? 이태용의 말에 다들 하던 수저질을 멈추고는 묘한 눈으로 우리 둘, 아니. 나와 이태용 그리고 김도영까지 우리 셋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이거 정말 체하라는 건가… 나는 입안을 가득 채우는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도영의 눈치를 봤다. 아무렇지 않은 척인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도영이는 표정 없이 밥만 꼭꼭 씹어댔다.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거 같다. 맛있지…… 도영아 많이 먹어.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줄곧 도영이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뒀다.
"괜찮아?"
"응 괜찮아."
"얼굴이 안 괜찮은데?"
급하게 먹었나 아니면 눈치를 보면서 먹었던 게 화근인 걸까.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배를 움켜쥐었다. 식은땀이 뻘뻘 났다. 아무래도 체한 것 같은데… 안색이 좋지 않은 내 모습에 옆에서 같이 걷던 수영이가 걱정인 듯 걱정 아닌 저격을 내게 해댔다. 얼굴이 안 좋은데? 원래 안 좋지. 자꾸 옆에서 종알종알거렸다. 뭐라 말할 힘도 없기에 끙끙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이런 내 모습에 정말 아픈 거냐며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수영이었다. 아니. 아픈 건 아까부터 아팠습니다만?
"보건실 갈래?"
"괜찮아. 그냥 엎드려있을게."
"내가 동아리 때문에…."
"괜찮으니까 얼른 가. 늦었잖아."
평소보다 점심을 일찍 먹었다. 이유는 수영이의 동아리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1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수영이는 자기 때문에 일찍 먹어서 체한 거 아니냐며 걱정을 잔뜩 해댔다. 나는 애써 웃으며 수영이를 얼른 보냈다. 수영이가 속한 동아리에 문태일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무섭기로 아주 교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수영이한테 들은 것도 있고 뭐 아무튼. 교실을 나가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수영이는 많이 아프면 꼭 보건실 가!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갔다. 하여간 걱정은…… 나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조용하다. 지금쯤이면 다 급식실에 있겠네. 사람 한 명 없는 교실은 너무 한적하다. 그래서 좋았다. 아직도 울렁거리는 느낌에 식은땀은 그칠 줄 몰랐다. 뭐 잘못 먹었나. 그럴 리 없는데.
부스럭- 부스럭-
잠이 오지 않아 그냥 책상에 엎드려 눈만 감고 있었다. 터벅터벅. 누군가 교실을 들어온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꽤 가까웠다. 동아리가 일찍 끝났나. 수영이 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나는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리고 보이는 얼굴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프다며."
"… 어?"
"박수영이 걱정 많이 하던데."
"…."
"약 먹어 그럼 좀 나을 거야."
와다다 쏟아지는 동영이의 목소리에 순간 멍했다.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이거 때문이었구나. 책상 위엔 놓인 약과 물병 그리고 허쉬가 놓여있었다. 약만 먹으면 쓸 것 같아서. 머리 위로 들리는 낮은 음성. 도영의 것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도영이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귀가 발갛다.
"도영아."
"…."
"고마워."
"… 뭐야? 뭔데?"
뒤이어 교실에 들어오던 이민형과 정재현은 약간 놀란 눈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서 본다. 솔직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도 모르겠다. 싫어하는 애한테 약까지 챙겨주지는 않잖아? 그럼 안 싫어한다는 거…? 뭐야 그럼 내가 여태까지 오해했던 거야? 정재현은 왜 안 말해준 거야? 도와준다더니 이상한 놈이네. 부스럭, 나는 도영이가 챙겨준 약을 손에 꼭 쥐었다. 울렁거림이 멎은 것 같다. 앞으로 다가와도 된다고 꼭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날 하루는 온종일 싱글벙글했던 것 같다. 물론 옆에서 미친년 보듯이 보는 정재현도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정재현의 시비쯤이야. 오늘보다 내일 더 도영이와 친해졌으면 좋겠다.
어니언's
3편도 초록글이라니, 너무 감사드려요 독자님들... 댓글 하나하나 달아주시는 거 너무 감사드리고 너무 또 감사드리고... 읽으면서 내내 웃었어요. :)
독방에 언급 한 번 봤는데 진짜 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진짜 감사합니다! 왜 쓰다 보니 감사하다는 말 밖에 없는 거 같죠?
그나저나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합니다. 개학하고 어디 가고 막 바쁘다 보니까 컴퓨터를 이제야 켰어요. 앞으로도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개학하고 나면... (암담)
그래도 일찍 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항상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 댓글 달아주시고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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