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01
처음엔 그랬다. 나는 18년간 살면서 남자친구를 사귀어본 적도 없고, 짝사랑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으며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상태가 계속 이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3월, 누군가에겐 짧다면 짧고 길면 길었을 봄방학이 끝나고, 첫 등교였다. 올해 같은 반이 된 수영이와 반으로 들어가려던 중 저 멀리서 많은 여학생에게 둘러싸인 남학생 둘이 눈에 띄었다. 여학생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키가 있어서 그런 지 멀리서도 그 둘의 얼굴이 잘 보인다.
그리고 나의 짝사랑이자 첫사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으려나? 근데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뭐해?"
"잘생겼다…."
"정재현이 잘생긴 정도냐? 아주 왕자님이지."
"정재현?"
정재현이 누구야? 내 물음에 수영이는 정재현이 누군지 모르냐며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놀랐다.
"네가 보고 있는 애 이름이 정재현이라고."
"정재현…… 이름도 잘 생겼네……."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근데 이게 웬걸? 정재현. 그러니까 아까 복도에서 봤던 녀석이 자연스럽게 우리 반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물론 옆에 친구도 같이 들어왔다.
쟨 이름이 뭘까? 하고 생각한 찰나에 그 둘의 근처에 있던 여학생이 주뼛주뼛 상기된 얼굴로 재현이 옆에 있던 친구에게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건넸고, 그 친구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현아 이거……."
"어? 고마워."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여학생은 다름 아닌 재현이를 부르고 있었고 부름에 응한 건 내가 알던 재현이가 아닌 그 옆에 있던 친구였다. 이게 뭐지 싶어서 턱을 괴고 그 둘을 지켜보던 수영이에게 물었다. 누가 재현이냐는 내 물음에 박수영은 지금 선물 받고 있는 애. 라며 간단하게 답을 뱉었다. 내가 본 얜 저 아이가 아니었는데.
"쟤가 재현이라고? 그럼 그 옆에 있는 애는?"
"누구…… 설마 김도영?"
"…."
"…."
김도영. 박수영의 목소리가 본래 커서 그런 것인지 반에 있던 아이들의 이목이 전부 우리에게 향했고, 그 시선들 가운데 김도영, 녀석의 시선도 같이 섞여있었다. 짧게 마주친 시선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순간 정적이었던 교실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소란스러워진 교실 분위기에 안심하며 옆에 앉아있던 수영이의 어깨를 마구 쳐댔다. 아니, 거기서 그렇게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면 어떡해? 만약 김도영의 이미지가 좀 더 껄렁했다면 내가 김도영인데 왜? 하고 물었을 것 같았다. 나는 혹시나 그러면 어떡하나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데….
"근데 김도영은 왜?"
"그냥."
관심이 생긴 거 같아서. 짧게 뱉어진 내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며 진심이냐며 연신 내게 묻는 박수영에게 진심인데? 라고 말했다. 담담한 나의 대답에 수영이는 내 어깨를 흔들던 손을 스르륵 내렸다. 김도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믿기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왜? 궁금증이 일었다. 내 궁금증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지 수영이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김도영은 말이지."
일단 훈훈하게 생기긴 했는데 안 좋게 말하면 찌질하다고나 할까? 많이 소심하고, 낯도 되게 가려. 너랑 맞먹을 정도라고 할 수 있지. 아무튼 중학생 때도 지금도 여자친구 한 번도 없었던 걸로 알긴 하는데. 친하진 않았으니까 이 부분은 패스. 아무튼, 조금 이상한 애라니까? 아니. 내가 작년에 같은 반이었잖아. 청소시간이었나? 김도영이랑 당번이었거든? 근데 내가 선생님이랑 상담할게 있어서 조금 늦게 갔단 말이야 교실을. 그래도 많이 늦진 않고 한 5분? 길어야 8분 정도였으려나. 교실로 딱 들어가려는 찰나에 김도영이 교실에서 나오는 거야. 그리고는 한 마디 하더라. 청소 다했다고. 그래서 내가 미안해? 안 미안해? 어? 미안해서 빵이라도 사줄까 했는데 내가 말 걸려고 할 때나 눈 마주칠 때마다 흠칫 놀라면서 피하는 거야. 난 그때 처음 느꼈다? 내가 마치 벌레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 근데 그게 또 나뿐만 아니라 같은 반이었던 다른 여자애들한테도 그랬다는 거지.
와다다 쏟아지는 수영이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 얘기를 듣다가 웃음이 났다. 왜 웃냐는 수영이의 말에 나는 말했다.
러니까 여자친구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단 거잖아.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결론이 그거냐?"
"아니 뭐. 여자를 싫어할 수도 있지."
"너도 여자거든요?"
그건 그렇네. 박수영의 마지막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딱히 무어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으로 보이는 선생님이 늦어서 미안하다며 멋쩍은 듯이 들어오셨고,우리는 첫날부터 자리를 정하자는 선생님의 말에 제비뽑기를 진행했다. 맨 앞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임시 반장이 된 이민형이 뽑기통을 들고 교실 안을 차례로 돌아다녔다. 앞에서부터 한 명씩 종이를 뽑았고, 조금 떨어진 곳. 그러니까 김도영이 앉은 자리까지 이민형이 와있었다. 멀리 떨어져 앉아서 그런가 손에 쥔 종이가 몇 번인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앉을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안녕."
"아… 응."
10번, 창가 쪽 맨 뒷자리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내 옆에서 인사를 건넨 것은 정재현이었다.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게 누군가의 부러움의 시선인지 질투의 시선인지 알 수 없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정재현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서렸다. 그 모습에 조금 두렵긴 했지만 궁금한 마음이 더 컸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김도영 좋아해?"
"어?"
귀에 선 말에 놀라 교과서 정리를 하다 말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건데? 내 물음에 아니면 말고란다. 아님 말고. 슬쩍 옆을 보니 깊은 뜻은 없었던 건지 정재현은 하품을 쩌억 하더니 곧바로 책상에 엎드렸다. 도영이는 어디 앉았을까 하는 마음에 교실 안을 이리저리 눈으로 더듬었다. 도영이는 이민형이랑 앉았네.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아서 그런가 종종 이렇게 남남으로 된 아이들이 몇몇 보였다. 저기가 내 자리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에 김도영을 빤히 쳐다봤다.
"……."
"아."
또 마주쳤다. 마주친 도영이의 시선은 작게 흔들렸다. 그래도 아까와 달리 서로 눈을 피하거나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왜일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첫눈에 반한다.' 원래의 나였다면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첫눈에 반했다. 모순적이었다.
어니언's
첫 글입니다. 으악 되게 떨리네요. 아직 많이 미숙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