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술을 그렇게 퍼마시는 게 아니었다.
울렁거리는 속과 깨질듯한 머리를 냉수로 달래며 겨우겨우 걸음을 옮겨 거실 쇼파에 털썩 앉았는데
발치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어 호기심을 가지고 툭툭 차보았는데 그 무언가가 끄응, 옅은 신음소리를 낸다.
화들짝 놀라서는 서둘러 내 발치를 쳐다보았는데 거기에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배를 쥐어잡고 있는 김형태가 있엇다.
김형태가 왜 우리집에 있지? 어제 술자리를 가질때만 해도 분명히 김형태는 그 자리에 없었는데.
“...너 뭐야, 왜 여기있어.”
“으..그게 밤새 술 퍼마시고 꽐라된 사람 겨우겨우 집까지 데려다놓은 사람한테 할 얘기에요?”
“어?니가 나 데려다줬어?”
“그럼 누가 데려다줬겠어요. 자는 사람한테 전화해가지고 다짜고짜 장소말하고 끊은 사람이 누군데.”
아. 형태의 말을 듣고나니 밀려오는 쪽팔림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근데 왜 나는 김형태한테 전화했지? 전화번호부 들어가면 첫번째라서 그랬나.
까만 뒷머리를 긁적이며 하품을 하는 김형태에게 데려다줬으면 집에 갈것이지 왜 우리집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급하게 나오느라 돈도없지, 야밤이라 버스도 안다니지!!
형은 드럽게 무거워서 집에 데려다 놓는데만해도 힘 다 빠져서 걸어가지도 못해!
형 지금 되게 어이없는거 알죠?”
아..그랬냐..민망한 나머지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미약한 사과를 건넨 뒤
나 때문에 힘빠진 김형태를 위해 아침을 차리려 준비를 했다.
그 동안에 김형태는 쇼파에 이불을 두르고 누워 TV를 시청하시며 뒹굴뒹굴 놀기에 그지없었다.
솔직히 좀 얄밉긴 했지만 어쩔 수 있는가. 또 잔소리를 하면 어제의 불상사를 늘어놓으며 빽빽 큰소리를 칠게 뻔한데.
냉장고를 뒤적거려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식빵과 우유를 꺼내 식탁에 내려놓고
천장에서 발견한 스프를 끓여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련했다. 숙취해소로는 좀 빈약하긴 하지만..
상이 채워지자 좀비처럼 이불을 끌고 와 의자에 주저앉는 김형태.
“이불을 왜 끌고와!”
“춥단 말이에요!어제 에너지를 너무 낭비하느라 열기가 다 빠져나갔어요”
또 어제 일을 들먹이는 김형태를 노려보며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평소에도 좀 어색한 김형태와 나였기에 아침식사 내내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밖에 나지않았다.
아...어제의 내가 원망스럽다. 차라리 이럴 거였으면 브래드를 부르는 게 더 나았는데..
이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반이나 남은 스프를 싱크대에 버리고 있을거면 좀 더 있다가라는 말을 남긴채 침실로 들어갔다.
푹신푹신한 침대에 다이빙한 뒤 이불으로 내 몸을 감쌌다. 저절로 쏟아지는 잠....
“형, 자요?”
“.....”
“와, 진짜 너무하네. 나하고 놀아주지도 않고...”
내 단잠을 깨우는 김형태의 목소리. 이미 잠이 깨버렸지만 그가 앞으로 할 행동이 궁금해 잠든 시늉을 하고있었다.
내 머릿결을 쓰다듬는 김형태의 손길이 느껴진다. 어? 아침만 해도 죽일듯이 노려보더니..
잠깐의 침묵이 느껴지더니 계속해서 기분좋은 김형태의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 사실 형한테 전화왔을때 좀 기뻤어요 형도 나를 조금은 의지하는구나 하고.”
“.......”
“그런데 아침되니까 기억도 못하고, 실망이에요 진짜..”
“.....”
“뭐, 형의 그런 면도 좋긴 한데 계속 이렇게 신경 안써주면 삐질지도 몰라요.그럼 잘자요, 형.”
내 볼에 살짝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이상한 기분에 살짝 미간이 찌푸려진다.
달칵, 나를 배려했는지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고 김형태가 나가자 눈이 번쩍 떠진다.
그리고 손을 살며시 볼으로 가져가 본다. 아직도 김형태의 체온이 남아있는 듯 따뜻하다.
설마, 김형태가 나를...?아니야, 평소에도 나만 보면 툴툴거리는 김형태인데 그럴리가 없다.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보지만 그렇게도 잘오던 잠이 더 이상 오질 않는다.
할 수 없이 다시 거실로 나가려 했는데 김형태가 아직 나가지 않고 거실에 있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침실에 가만히 멍때리고 앉아있었던 몇 분.
내 집인데 왜 내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냐!!하는 쓸데없는 패기때문에 방문을 열고
거실으로 들어서자 쇼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김형태. 아 식겁했다.
“김..형태?침실에 들어가서 자..”
“아..형..형은 안자고요?”
“어..나는 잠 깼어..”
“아..그래요?”
이러면 안돼는데 자꾸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어색함. 눈치빠른 김형태라면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내가 이상한지 예리한 눈으로 나를 마구 훑어보는 김형태.
눈을 마주치면 금방 관통당할 것 같아 김형태의 눈을 피해 시선을 이리저리로 분산시켰다.
“형, 잘 때 뭐 들은 거 없죠?”
“어?뭘..뭘 들어?”
“...형.”
갑자기 김형태가 쇼파에서 일어나더니 팔을 뻗어 내 볼을 감싼다. 차가운 손의 느낌.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김형태의 얼굴, 김형태의 입술이 닿았던 볼이 뜨거워지는 듯 하다.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김형태를 밀쳐버렸다. 너무 세게 밀쳤는지 쿵 소리마저 났다.
“들었네. 하..”
“김형태..”
“그래요, 나 형 좋아해. 왜요 그냥 동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까 당황스러워?”
“...”
“왜 말 못해요.”
“김형태...나는, 널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김형태에게 분명히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내뱉었다.
김형태는 낮게 욕설을 읊조리더니 입술을 피가 날듯이 꽉 깨물고 거실을 나서 집을 나가버렸다.
띠리리, 비밀번호인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긴장감이 풀려버린 바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공허한건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