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김태형의 약점=귀여움에 약하다.
고등학교 때는 6층이라는 고층에서 1층이라는 저층까지 한 번에 왕복 몇 번을 해도 그렇게 피곤하지 않던데. 역시 대학을 진학하고 늘 술과 친구 먹었더니 체력과는 절교가 된 모양이다. 더불어 세상엔 처음 나와보는 것처럼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던 어린 여우 하나를 끼고 온 것도 한몫이겠지. 한 손에는 땅에 떨어진 멀쩡한 벚꽃이 난 가지를 들고 마트로 입성하는 탄소의 얼굴은 홍조를 가득 물고있었다. 진짜 오면서 얼마나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린 아이에게 봄은 호기심의 천국이자 보호자에겐 지옥이니라. 그렇게 선배가 읊던 망연자실한 말이 명언으로 들릴 줄은 상상을 못했는데.마트에 도착해 카트를 뽑자 그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칭얼거림을 겨우 잠재웠다. 안된다고 말하니 '나 슬퍼요.' 하는 표정으로 마트 안을 걷기 시작하는 저 여우를 보면서 생각했다. 정호석은 분명 덜컥 넣어줬겠지. 워낙 애교에 죽고 못사는 인물이니까. 핸드폰을 꺼내 사려던 물건을 읊었다. 옷, 과일, 슬리퍼. 슬리퍼는 오면서 있던 새로 생긴 문구점에 들러 사 신겼으니 됐고. 머리를 긁적이며 카트 손잡이를 밀었다.
입을 헤, 벌린 채로 마트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아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발을 빠르게 놀렸다. 제가 따라가려다 다시 돌아오는 발걸음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를 품에 안은 그대로 제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내려놓았다. 그에 맞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추더니 솜뭉치를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어쩜 자기와 닮은 눈이 땡그란 것으로 골라왔다냐. 나 이거! 눈을 반짝이며 올려다보는 이 순간은 정호석에게 감사를 보내기 충분한 장면이었다. 이런 코피 나는 아이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에게 주시다니. 아까 카트에 못 타게 한 것도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코 밑을 몇 번 문질러 본 후에야 다시 제게 내밀어진 인형을 잡았다. 이거? 물음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카트에 담는다. 히히. 기분 좋은 살랑거림이 들려오고 카트에 매달리는 여우를 보며 언젠가 정호석이 데리고 간다 하면 그 날로 정호석과 연을 끊어서라도 데리고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안 돼. 다쳐. 내려와."
딸기가 담긴 플라스틱 묶음을 카트에 담으며 말했더니 다시 쪼르르 제 옆에 붙어선다. 귀엽다. 진짜 귀엽다. 건들면 와앙- 울어버릴 것 같은 것이 분명 이 여우는 태어날 때 조물주가 귀여움만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이 귀여움의 집합체는 뭐란 말인가. 정말 두고 두고 나만 봐야지.
"쥬, 우리 이거 소시지도 사자!"
"알았어. 여기 담아."
또 배시시 웃으며 소시지를 가져와 카트에 조심히 내려놓는다. 콩콩 뛰며 제 주변을 알짱거리는 바람에 카트에 몇 번이고 발이 깔리려 했는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주의를 주긴 했지만 잔소리는 영 들으려 하질 않았다. 어째 저런건 정호석을 똑 닮아가지고. 괜히 얄밉게.
시식코너를 지나치려하자 제 팔을 힘있게 잡아끈다.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왜? 라고 물으니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햄을 가리킨다. ...분명 인터넷에선 과일만 준다고 어느 한 블로거가 그러던데. 제가 키우는 것은 여우가 아닌가. 종을 착각했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자 이잉, 어깨를 흔들며 앙탈을 부려온다. 아씨.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이걸 귀여워서 어떡하냐고.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잖아.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에 올라온 작은 조각 두어 개를 요지에 찍어 건넸다. 감사함니다-. 라는 말을 잊지 않고 햄을 입으로 직행시키려 하기에 다시 머리 위로 팔을 올렸다. 나 죠! 제 허리춤을 잡으며 소리친다. 기다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불어 식혀주니 잘 받아먹는다. 그게 뭐가 서럽다고 또 울려고 한건지. 그렁한 눈을 쓸어주었다.
반인반여우 키우는 김태형의 일지
W.메로우
"동생이 참 귀엽다. 늦둥인가봐요?"
"네?"
"아..., 아닌가요?"
마트 근처 옷가게에 들렀더니 상반되는 분위기에 눌렸다보다. 제 손을 꽉 잡은 채로 여자만 빤히 쳐다보는 것이 '나 긴장했어요.' 다. 상냥하게 웃으며 탄소의 볼을 쓰다듬으려던 손에 화들짝 놀라며 제 뒤로 숨는데 또 코피가 나진 않았나 코 밑을 확인했다. 그런 제게 늦둥이냐며 물어오는 직원이었다. 아, 생각을 해보니 나만 애가 여우로 변했다, 사람으로 변했다를 알지. 이참에 집에 가서 관계 좀 정해야겠다. 한 번 더 말을 걸어보려던 직원은 멋쩍게 웃으며 필요하면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곤 카운터로 걸어갔다. 뒤를 흘끔 돌아보니 금새 저 여자는 관심 밖인건지 옷을 찔끔 건들이며 경계만 하고 있었다. 이것도 귀여운 건 왜 때문일까.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할 정도로 위로 당겨짐을 느꼈다. 마음에 드는 거 있어? 인상을 찌푸리며 흰 바탕에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것을 꺼내든 탄소가 말했다.
"...이거 호비 옷장에 엄청 많은거."
"호비?"
호서기 쥬.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옷을 행거에 건다. 표정이 어둡다. 입을 삐죽이는 모양새가 조만간 호석을 불러 만나게 해줘야겠다 싶었다. 호석이가 보고 싶은건지 아님 자기를 휙 놓고 갔다는 거에 불만인건지. 저도 주위를 둘러보다 연분홍색의 티셔츠를 꺼냈다. 이건? 눈 앞에 흔들어 보이니 표정에서 구름이 걷히며 옷을 품 안으로 가져간다. 역시 김태형 안목 어디 안 갔다. 자아도취함도 잠시 바지 몇 개와 파스텔 톤의 티셔츠를 골랐다. 다 마음에 든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것에 바로 카드를 긁어버렸고.
분명 엄마한테도 연락이 갈텐데. 뭐라고 변명하지.
**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늘어지게 모로 누웠다. 밤새 게임을 한 다음 날보다도 힘들다. 차라리 매점을 십 여번을 왕복하는 것이 덜 힘들겠다. 힘든 것은 저만 그런건지 탄소는 거실을 뽈뽈거리며 오는 길에 사다준 달고나를 와작와작 깨물어 먹는다. 음음. 저 낯간지러운 콧노래도 함께.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옷가지를 꺼냈다. 한 번 빨아서 입혀야 하나? 빨래를 즐겨하지는 않는 저라 새 옷도 빨고 입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염색약이 독해 그냥 입었다가 피부에 뭐라도 나면 어쩌냐고. 키가 모델처럼 큰 여사친의 옷은 당연히 헐렁거려 오는 길에 몇 번이고 어깨를 올려주었는지 모른다. 그걸 생각하면 옷을 바로 입히는 게 맞는데. 괜히 여사친은 키만 멀대같이 커서. 생전에 도움이 안 돼. 한숨을 쉬며 옷 몇 개를 바로 빨래통에 넣었다. 몇 개만 입혀보고 가렵다던지 그런 증상이 나오면 빤 것을 입혀줘야지 싶어서. 바지 하나와 티셔츠를 집어들어 탄소를 불렀다. 찐득해 보이는 손을 잡아 물티슈로 닦아주었다. 그랬더니 바로 코로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는게 아닌가. 엑. 이상한 냄새.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는 바람에 물기를 제 옷으로 말려주었지만.
"이거 입고 나와. 사이즈 또 안 맞으면 바꿔야 하니까."
"응. 근데 있잖아. 분홍색은?"
실망한 눈초리로 닦달하는 게 귀여워 좀 더 골려줄까 하다가 바로 목소리가 울먹이는 바람에 빨래통에서 꺼내왔다. 그제서야 웃으며 옷을 훌렁 벗으려기에 그것도 막으며 방으로 데려갔고. 진짜 귀여워서 봐준다. 봉투를 뒤적거리며 장 봐온 것을 정리했다. 반쯤 끝냈을까 싶을 때 문이 덜컥 열리더니 경쾌한 발걸음이 들린다. 고개를 틀었다. 연분홍색이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렸다. 사이즈도 잘 맞고. 나중에 방은 온통 분홍색으로 꾸며줘야겠다 싶을 정도로. 인형은 쥐어준 적도 없는데 알아서 잘 찾아 품에 안아들고는 식탁에 털썩 앉는 것이 아닌가. 눈을 여러 번 깜박이는 게 진짜 여우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면 분명 저 뿐만 아니라 모든 남자를 홀렸을 것이 분명하다. 배고플까 씻어둔 과일을 한 움큼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것도. 과즙이 팍, 튀어 식탁을 어지럽히고 탄소의 팔을 타고 흘렀다. 또 끈적해진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칭얼거리려 하길래 얼른 수건에 물을 묻혀 닦았다. 뒤처리를 하는 와중에도 팔을 자꾸 빼려 하기에 제 진도 빠졌다는 것은 숨기지 않으련다. 아니, 끈적이는 게 싫다면서 안 닦으려고 하는 건 무슨 심보람. 겨우 과일 하나를 다 먹고서 소파로 우다다 달려가는 것을 보고는 식탁을 치웠다. 이러면 또 애 같은데. 고개를 저으며 아까 들었던 생각을 접었다.
사담's |
안녕하세요. 메로우 입니다. 분명 얼른 써서 글을 두 개 올려야지! 했는데...ㅋ 저는 역시 의지박약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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