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파의 증거
W.청설
3-1
상처 받은 이를 껴안기에 나는 너무 작다.
작은 나를 넘어서기에도 나는 너무 작다.
멀리 있는 사람이여,
나는 아직 너를 안을 수가 없다.
〈내 안의 나>
3-2
남준과의 점심시간은 계속 되었다. 딱히 탄소가 제재를 하지 않았음과 동시에 철면피라고 생각되는 그의 성격 때문이리라. 게다가 제 먹는 속도에도 참견했다. 빠르게 먹으려는 것이 보이면 바로 부드럽게 손목을 쥔다던가, 창문 밖을 가리키는 식으로. 이상하게 친화력이 좋은건가 싶다가도 생각을 깊게 하면 그 역시 탄소 외엔 학교 생활에 있어서 '친구' 라는 것을 그의 반경에 두지 않았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혹시나 제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들어맞을까봐. 급식실 안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그 자리만을 피했다. 벌써 3월의 반이 지나갔다. 아이들과는 여전히 말을 섞지 못했다. 태형이라는 아이가 그나마 저와 남준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애교스러운 강아지 역할을 했다. 가끔 점심도 같이 먹자며 탄소의 팔도 잡아왔다. 못 이기는 척 데려가 밥을 먹을 때면 탄소에게 이것 저것을 물어보느라 고역이었다. 말이 빨라 반은 기본으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 아이도 알 수 없는 아이의 범주였다.
풀떼기만 가득한 식판은 정말로 이 학교가 학생들을 초식동물 그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절로 생기게 했다. 온통 초록색이라 이제 초록색만 봐도 신물이 날 것 같았다. 손톱만큼 썰려 나온 샐러드 속 소시지를 찾아 젓가락을 뒤적였다. 아예 없음을 눈으로 확인 하고서야 팔을 내려다. 짜증나. 밥은 물론 다른 반찬들과 국도 아예 새 거라 해도 믿을 만큼 건들인 흔적이 없었다. 제 밥 위로 소시지가 툭, 얹어진다. 고개를 들었다. 먹으라는 듯 눈짓하며 남준이 다시 고개를 수그려 밥을 입 안에 욱여넣는다.
"아, 김남준 나는!"
"이모한테 더 달라고 꼬리 흔들던가."
태형이 탄소와 남준을 번갈아 쳐다보다 입을 크게 벌렸다. 체육 시간에 축구를 했단 그 답게 땀에 쩔은 머리카락 사이로 짙은 눈썹이 보였다. 남준이 무어라 웅얼거리는 것은 알아챘으나 그것이 어떤 문장인지는 음식을 씹는 볼 때문에 볼 수 없었다. 남준과 눈이 마주쳤다. 귀 끝이 붉었다. 태형이 안 먹을거면 제가 먹겠다며 젓가락을 들이밀자 남준이 제지했다. 탄소도 소시지를 밥과 함께 입으로 넣었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맛은 감질맛만 돋게 했다. 괜히 먹었어. 입맛을 다시며 식판의 잔반을 긁었다. 그 소리가 듣기 싫다며 탄소를 나무라는 태형을 가볍게 무시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음도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매점 갈래?"
앞에서 턱이 움직인다. 한참 답이 없는 제가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한 번 더 물어온다. 매점, 가기 싫어? 잔반을 모아 마저 국그릇에 담았다. 도둑 맞을까 무서워 지갑을 늘상 품에 지니고 다녔는데 그것이 이렇게 고마운 일이 될 줄이야. 저를 따라 식판을 들고 일어나며 탄소의 식판까지 쥐는 남준을 태형이 올려다본다. 나는? 꼭 비 맞은 강아지를 의인화 한다면 저 아이겠지. 남준은 탄소에게 등을 돌린 채로 또 태형과 대화했다. 소외감이 들었으나 그저 목 안으로 삼켰다. 티 내면 저 둘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겁이 났다. 그래, 탄소는 이런 위치였다.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 없는 애매한 관계. 그저 몇 개의 비밀의 시간을 보낸 사람이 남준이라고 그것에 취해 우쭐하면 안되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남준이 들고 있던 제 식판을 휙 뺏었다. 나 먼저 갈 테니까 얘기 끝나고 와. 그리곤 그대로 퇴식구로 걸어가 음식물을 버렸다. 한 데 뒤섞인 게 구역질 날 것 같아 숨을 멈췄다.
청각을 잃고 괜한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03. 관심[關心]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임.
또는 그런 마음이나 주의.
3-3
구역질을 동반한 멀미를 겨우 냉수로 진정시키며 급식실을 나왔다. 아직도 제 학년의 차례를 기다리는 1학년들이 저들 무리로 똘똘 뭉쳐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차라리 후각을 잃어버렸으면 좀 좋아. 다시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다. 바람을 이기지 못해 흩날리는 벚꽃잎들을 무심히 바라봤다. 허공을 꾸미다 무참히 떨어진 꽃잎들이 발에 채이고 밟혔다. 분홍빛을 잃어버린 것이 꼭 들어보지 못한 사춘기의 내 목소리 같았다.
갑자기 탄소의 팔을 끌어당기는 인력에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뭉그러진 꽃잎들을 쥔 탄소의 모습이 웃겼는지 남준의 뒤에서 킥킥 웃는 태형이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치마에 손을 닦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입 안 여린 살이 톡, 터지고 비릿한 옅은 피맛이 감돌았다. 태형은 남준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둘에게서 멀어졌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시선을 느꼈는지 뒤로 휙 돌아 윙크를 날린다. 그냥 꺼졌으면 좋겠다. 다시금 탄소의 팔을 잡은 남준이 급식실 반대편의 매점으로 이끌었다.
매점은 아이들로 들끓었다. 소리 없이 치이는 것은 버스나 지하철로도 충분한데. 이래서 가급적 벌점을 받더라도 버스 보다는 도보, 매점 보다는 편의점을 선호했다. 편두통이 도졌다. 여기서 눈이라도 감았다간 정말 넘어져 발들에 밟힐 것이 안 봐도 뻔했다. 출구에서 어물쩍거리며 고민했다. 들어가기 겁났다. 아, 어쩌지. 아직 학교 생활은 저와 맞지 않는다. 2주 가량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지갑에 땀냄새가 밸 것 같았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아이들이 탄소의 등을 밀었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안은 밖보다 훨씬 복잡했다. 찬기 가득한 냉장고를 열어 이온음료를 집는 손이 떨렸다.
"다 골랐어?"
"탄소야."
냉장고를 닫고 몸을 틀자마자 보이는 것은 남준의 가슴팍이었다. 또 다시 아이들의 손에 밀렸다. 덕에 남준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어버린 상태로 눈만 끔벅이다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아, 그. 눈이 마구 떨렸다. 손에 쥔 파란색 캔이 두 개로 보이다 한 개로 보이길 반복했다. 괜찮아? 탄소의 눈을 맞추려 고개를 숙이던 남준의 귀 또한 아까처럼 붉었다. 서둘러 질문에 응해주고는 지갑을 열며 자리를 피했다. 매점 벽에 붙어있는 거울 앞을 지날 때는 더욱 고개를 푹 숙이며 머리칼로 얼굴을 가렸다. 이제는 얼굴이 아니라 몸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자리에 태형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니였으면 분명 탄소 얼굴색으로 며칠을 놀려먹을 것이 뻔했으니.
정말로, 다행이다.
…다행일까? 차라리 그가 있었다면 이 분위기를 피할 자연스러운 구실을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져만 간다. 이래서 누군가가 제 인생사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김탄소 인생 존나 꼬인다, 그치.
3-4
…. 정적이 흘렀다. 원래 말을 잘 하지 않는 둘에겐 정적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지금의 정적은 한없이 어색하고 간지러웠다. 먼저 교실로 갔을거란 예상과 달리 남준은 신발코를 뭉개며 매점 앞을 지키고 있었다.
계단을 먼저 오르던 남준이 멈칫 하다 몸을 돌려 탄소를 내려다본다. 안 그래도 큰 애가 더 커져서 입모양을 비롯한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세 칸을 더 올라가 이번엔 탄소가 내려다봤다. 12시를 넘긴 햇빛은 따갑게 아이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탄소는 이 순간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쥐고 있는 음료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을 적셨다. 그것들을 털어내다 치마에 문질러 닦았다. 시선은 여전히 남준의 입이었다. 언제 무언가를 말할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준은 몇 번을 제 입술을 짓물었다. 하지 마, 그거. 탄소의 만류에도 계속 입술을 못 살게 굴며 눈을 도륵 굴리더니 한숨을 크게 내쉰다. 그리고는,
"영화 보러 갈래?"
"응?"
"이번 주에 영화, 보러 가자. 나랑."
또 다른 정적이 흘렀다. 순간 제가 남준의 입을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지 몇 번이고 재차 물었다. 영화? 그럼에도 남준은 꼿꼿하게 대답한다. 응, 보고 싶어. 너랑.
아직 남준은 모를 것이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몰라야 한다. 아직 제가 말을 안 했을 뿐더러 그가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영화. 망설였다. 자막을 필요로 하는 외국 영화라면 다행이지만 그 때 도서관에서의 남준을 떠올리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처녀작이 영화화 된다고 했었다. 기사 링크까지 복사해 탄소에게 보여줄 정도로. 그리고 그 작가는 저도 알고 있는 꽤 이름 날리는 국내 작가였다. 다른 것보다 더 기대된다며 설레하는 눈초리였다. 그런 영화를 저와 본다고?
가도 나는 무슨 내용인지 모를거다. 처녀작 아님 인터넷에 치면 나오는 줄거리나 읽고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이 다일게 분명하다. 이번엔 탄소가 입술을 말아물었다. 답을 기다리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 눈을 보고 어느 누가 남준을 영화관에 혼자 보내겠는가.
"김태형이랑은,"
"걘 싫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무조건 너랑 가고 싶어."
확고한 대답이 오히려 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목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에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망설이는 탄소를 보는 기다란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가줄거지."
"탄소야, 나랑 영화 보자."
김남준은 나를 너무 잘 알았다. 그것에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틀었다. 어느샌가 시원함을 잃어버린 이온음료가 미적지근했다. 제 팔을 안듯 잡고 무어라 말하는 입도 그저 넘겼다. 읽을 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나는 총 120시간, 5일의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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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입니다. |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잠시 미쳐서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준의 사진을 3개나 썼습니다. 점점 늘려가야겠죠? 사실 3화를 제일 쓰고 싶어서 이 연재를 시작했는데..ㅎ...ㅎ....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랄까요 그리고 그 다음으로 쓰고 싶은 화는 7화입니다.(비장) 마지막화도 너무너무 쓰고 싶어요. 소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거든요. 그리고 저번 화에서 제가 죄송함다...면목이 없네요ㅜㅜㅜ 암호닉은 늘늘 언제든 받고 있습니다! 질문도 받고 있어요! 나중에 큐앤에이도 할까 합니다.(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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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모니]님이신 독자분 댓글 한 번 남겨주실 수 있나요? 제가 분명 중복 암호닉이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암만 댓글을 찾아도 안 보이셔서 제 착각인지 아님 정말 겹치는건지 모르겠어서 확인 부탁드리려고요ㅠㅠ ++주말 잘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