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
w. 정국학개론
오빠였다. 내가 본 그 눈은, 분명 오빠였다. 그러니까 지금 옆집에 들어간 검은 남자가 내 친오빠라는 말이다. 들고있던 스킨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붉었다. 그토록 원망하고, 미워했던 오빠가 바로 옆집에 있다. 그것도 아저씨와 함께. 왜 아저씨와? 생각은 곧 꼬리를 물었다. 지난 번, 오빠가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던 때를 생각했다. 왜 아저씨는 그때 아는 척하지 않았을까. 왜? 내 앞이라서? 복잡한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
차마 아저씨네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문을 두드릴 수조차 없었다. 안에 아저씨와 함께 있을 오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동시에 아저씨가 나에게 보내는 동정의 눈길 역시 무서웠다. 아저씨가 왜 그동안 나에게 오빠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는지, 왜 그동안 거짓말을 했는지, 설명을 듣는 게 겁이 났다. 지금까지 아저씨가 내게 보였던 모든 다정한 모습이 거짓일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다.
동방은 오랜만에 비어 있었다.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소파에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고요하다. 창문을 닫아 바깥 소음까지 차단한 동방은 나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매우 조용했다. 생각이 많았다. 모처럼 시끄러워지고 싶은 날인데, 모처럼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인데, 오늘은 몹시 조용하다. 괜히 눈물이 터져나왔다. 뜨거워진 눈 위로 팔을 올리고는 얕게 흐느꼈다. 입술 새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가 부끄러웠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을 가져야 옳은 건지, 어떤 생각부터 해야 하는지,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인 이 상태가 싫었다. 엄마와 오빠가 날 버리고 간 것부터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오빠를 우리 집 앞에서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것도 아니면 오늘 아침 오빠가 아저씨 집으로 들어간 것부터? 아니다,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해야 하나.
한참을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있을 때, 동방 문이 열렸다. 아, 쪽팔려. 눈 위에 올려두었던 팔로 애써 눈을 문질러 눈물을 닦았다. 그래 봤자 눈은 이미 붉어졌을 게 뻔하고, 소매는 눈물자욱으로 진해져 있을 텐데.
" 누나, 울어요? "
역시 부질없는 짓이다. 그게 전정국 앞이라면 더욱이.
놀란 눈을 한 전정국은 다급하게 튀어와 내 앞에 쪼그려 앉는다. 소파에 누운 채로 전정국을 곁눈질하다, 힘겹게 일어났다. 전정국의 얼굴을 보니 울컥하는 마음이 덜하다. 잔뜩 잠겼을 목소리에 목부터 가다듬고 겨우 입을 열었다.
" 안 울었어. "
" 딱 봐도 울었는데. "
" …진짜. "
밑에서 내 얼굴을 올려다 보던 전정국이 손을 내밀어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말라 차가웠던 자리가 따뜻한 온기로 감싸진다. 말없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전정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 시선을 거둔다. 배려하는 듯이 내 옆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전정국은 제 옆을 탕탕 두드린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애써 눈물을 꾹 참으며 조심스럽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팔베개를 해 준 전정국이 내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한다.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도 다정해서, 그만 또 울어버렸다.
전정국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내가 더이상 울음이 나오지 않아 전정국 어깨를 살포시 두드렸을 때서야 전정국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 보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전정국을 올려다 보았을 때, 그제서야 전정국은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어주었다.
" 이제 안 아파요? "
" ……. "
" 처음부터 안 아팠다는 표정 짓고 있네, 지금. "
" ……. "
" 와, 지금 내 말 씹는 거? "
" …아니야… "
전정국은 내가 왜 울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어깨를 빌려주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주었고, 울음을 그친 후에는 물티슈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쓸데없이 매너가 넘쳐. 꿍얼거리며 눈물자국을 뻑뻑 지웠다. 전정국은 여전히 웃고 있다. 민망하니까 그만 웃어. 내 말에 전정국은 부러 입을 크게 벌리며 웃는다. 얄미운 마음에 어깨를 살짝 미는데, 문득 스치는 생각.
" 야! 맞다! 너! "
" 맞다! 나! 뭐? "
" 너 왜 말 안 했어? "
" 내가 뭘 말 안 해요. 나 말 안 한 거 없는데. "
" 너 왜 그때 그, 작년에… "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애써 꺼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말을 얼버무리는데, 그걸 안 건지, 전정국이 박수를 치며 내 말을 중간에 끊어버린다.
" 아, 그거. "
" 그래, 그거. "
" 기억났어요? "
" 내가 네 얼굴을 본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
" 나 마이 잃어버리고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요? "
" 아… 그건 미안… "
" 미안하라고 한 소린 아니고. 그래서 보답은? "
" 보답? "
괜히 사람을 미안하게 만드는 전정국의 말에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하며 사과하는데, 전정국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 보답을 요구하는 그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자 전정국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입모양으로 보답, 두 글자를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고.
" 되게 어이없는 소리 잘한다, 너. "
" 아, 설마 보답 없이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요? 내가 두 번이나 구해줬는데? "
" ……. "
" 에이, 설마. 내가 아는 누나는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
" 들어나 보자, 보답. 뭐. 뭘 바라는데? "
" 전 고전을 좋아해요, 누나. "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며 내게서 보답을 유도한 전정국은 눈을 찡긋거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가끔 이렇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예상치도 못한 어마어마한 말이 튀어나와, 어쩔 땐 얘가 천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냥 어리둥절하지만은 않은 채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 백설공주는 자기 목에 걸린 독사과를 빼준 왕자와 결혼했잖아요. "
" …그게 뭐? "
" 라푼젤은 성에 갇힌 자기를 구해준 왕자와 결혼했지, 아마. "
" 그러니까 그게 우리랑 무슨 관련이 있… "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전정국이 답답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어떻냐고 물으려는 참에 기이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러니까, 너, 지금.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 전정국이 개구진 웃음을 짓는다.
" 또 해 줘요? "
" ……. "
" 또 뭐가 있더라. "
" …야. "
" 잠자는 숲속의 공주? 걔도 왕자가 구해줘서 결혼하지 않았나. "
" …야, 너… "
말문이 막혀 제대로 된 단어 하나를 뱉지 못하는 나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연신 같은 웃음만 짓던 전정국은 또다른 예시를 가지고 와, 코를 찡긋 한다.
" …그러니까. "
" 결혼은 너무 이르고, 연애는 어때요, 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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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15년 12월에 마지막으로 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 10화를 연재했으니 1년이 넘어서 돌아왔네요. 친구가 종종 독방에서 저를 찾으시는 분들을 목격했다고 해서 다시 돌아오게 됐어요. 돌아오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만 요 1년 간 글이 그렇게 안 써지더라고요. 원래 아무런 계획이 없이 글을 쓰고, 써놓은 글에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서 끼워넣는 편이라 한 회를 쓸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뿜뿜 솟아야 하는데 1년 동안은 그게 많이 어려웠어요. 제가 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를 10화까지 연재했을 땐 저도 주인공 나이와 똑같은 21살이었는데, 저는 벌써 23살이랍니다, 여러분! 1년만이라 저를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셨을까 의문이지만 없더라도 제가 글을 쓸 수 있는 동안만큼은 글을 써 보려고 합니다. 이번 화를 쓰고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가 뿜뿜 하지 않아 많이 늦어질지라도 완결은 꼭 내고 싶네요! 혹시 제게 여전히 신알신을 해 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많이 늦어서 죄송하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적은 분량에 대해선 무릎 꿇고 손 들고 있겠습니다. (ㅠㅅ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