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해버려서 강과장 차의 조수석에 몸을 싣고 말았던 날, 그러니까 강과장이 나를 집에 데려다 주던 날,
그날 이후로 강과장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나름대로 씩씩하게 내뱉어본 인사에는 어쩐 일인지 맥아리가 하나도 없었다. 파이팅 넘치는 인사를 건네고 싶었으나 번번이 실패였던 거다.
강과장이 내 얼굴색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눈빛에 뭔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말았다.
"몸 안 좋아요?"
"예?"
"......"
"아, 아닙니다. 건강합니다."
"........"
그런 거라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솔직히 좀 울고 싶어졌다.
그날 일을 입 밖으로 꺼내기는 조심스러웠고, 그렇다고 꺼내지 않고 가만히 있자니 못내 어색하고.
물론 옹과장님만큼 부대끼는 시간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마음 한 켠이 불편한 게 계속 신경이 쓰였던 거다.
"저어, 그날 데려다 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그런데요, 과장님. 앞으로는 안 그래주셔도 괜찮습니다."
"......."
"신세지는 것 같아서요. 부담드리기도 싫고요..."
"신세나 부담이라고 생각했으면 제가 먼저 타라고 하지 않았을 거에요."
"......"
"굳이 제 차 타기 싫다면 계속 타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불편할까봐 그런 거라면 그건 아니니 오해 말고."
"....."
"가볼게요."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라 솔직히 좀 놀랐다. 그리고 그 내용 또한 적잖이 놀랄만하기도 했다.
매번 짧게 만나는 것 같으면서도 주는 임팩트가 지대하시다, 강과장님은.
그는 그런 말을 남겨두고 나를 지나쳐 갔다. 나 또한 오래 그 자리에 머무를 수는 없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자자, 공지할게요! 메신저로 쪽지 받아서 알고들 있겠지만 이번 토요일에는 전직원 등산 겸 야유회가 있어요.
이번에 저희 영업마케팅부서는 선발대입니다. 각자 준비해야 하는 물품은 나누어서 개인별로 공지했으니 확인하시고,
혹시 문의사항 있으면 쪽지로 주세요~"
한참을 뚫어져라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는, 일어선 채로 우리 부서원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옹과장님과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봤다.
[○사원 준비물: 얼린 물(500ml), 초콜릿/사탕, 카메라, (과장님과)즐거운 토요일을 보낸다는 기대]
그냥 '즐거운 토요일을 보낸다는 기대'였다면 주말인데 쉬지도 못하고 등산까지 해야 하는데 왠 헛소리를 하는 거냐며 화라도 냈을 텐데,
그 앞 괄호 안에 적힌 (과장님과)라는 말 때문에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성격이 원래 스윗하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금 확인하게 되니 그저 놀라울 따름.
이제 이런 게 생활이 되다 보니 놀라는 것도 남사스러운 일인 듯하다.
말을 마친 과장님은 나를 향해 싱긋 웃어보이셨다. 그 웃음이 어찌나 싱그러운지 그걸 본 내 얼굴에도 웃음이 떠오를 정도였다.
등산이라... 어쩌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
"하아, 하아, 아, 너무, 힘들어요!"
"○사원 제일 젊은데 왜 이렇게 못 따라와~? 신입의 패기를 보여줘야지!"
"하아, 아이고, 팀장니임, 먼저 가세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단 말 취소. 졸업 후 취준생으로 사는 시간에 제대로 한 번 운동을 해본 적이 없으니 이럴 수밖에.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정확히 30분만에 내 저질체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것도 오르기 힘든 길도 아니고 제일 걸을 만한 등산로인데 중턱도 못가서 숨이 밭아진 거다.
아아,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운동 좀 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지.
같이 출발했던 부서원들은 슬슬 나보다 앞서가더니 이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내 나이만큼 직장생활하신 부장님도 저렇게 잘 가고 계신데 제일 젊은 내가 이 정도인 건 굴욕이다, 굴욕.
그렇게 나는 속으로 굴욕을 외치며 숲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아이고오..."
잠시 자리에 멈춰 숨을 골랐다. 무심코 아침에 과장님으로부터 배부받은 바람막이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왠 쪽지 하나와 비타500이 들어있었다.
어쩐지, 좀 무겁더라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느라 고생했을 것 같아서.
산 오르다 지치거든 하나 먹어요.
빈 병 들고 다니기 무거우니 나한테 주고. ^^ -옹과장님]
OH OH 쏘 스윗 OH OH
오늘도 스윗하신 과장님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나 집 멀어서 일찍 일어나야 했던 걸 어찌 아셨는지.
역시 부서원 생각해주는 건 과장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뚜껑을 똑 따서 꿀꺽꿀꺽 비타500을 넘겼다.
"캬아-"
술 마신 것처럼 상쾌하게 캬아- 를 한 번 했더니 힘든 게 좀 가신 느낌이다.
내가 숨 고르느라고 써버린 시간만큼 다들 많이 앞장서서 걸어갔을 거라 생각하니 발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빠르게 했다.
-
올라가면서 속으로 쌍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힘들어서 말이다.
다들 앞장서서 가버려서 혼자 남겨진 나는 오르고 오르다 보니 신입 동기들을 만나서 어찌저찌 같이 오긴 왔다.
웃긴 건 부서 준비물로 챙긴 초콜릿과 사탕을 죄다 신입 동기들이랑 나눠 먹었고,
부서원들 찍으려고 가져온 카메라로도 신입 동기들을 찍은 거다. 근데 뭐 어쩔 수 없지. 다들 먼저 가버렸는 걸... 내 잘못은 아니야...
거진 정상에 다 오르니 점심 때가 훌쩍 지나 있었다. 부서별로 모여 미리 주문해서 가지고 올라온 김밥을 나눠먹고 있는데 우리 과장님과 팀원들이 보여 그쪽으로 갔다.
"○사원, 어디 있었어요?!"
"아, 과장님. 저 뒤쳐져가지고 부지런히 따라왔어요... 하하.."
"나는 중간에 오다가 혹시라도 무슨 일 생겼나 했는데. 별 일 없었죠?"
"네, 그럼요. 그냥 제가 저질체력이어서...."
과장님은 하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더니 내게 김밥 한 줄을 더 내밀었다.
힘들 텐데, 더 먹어요. 하는 말도 잊지 않으시고.
나는 김밥 두 줄 쯤은 가뿐히 비워낼 수 있을 정도로 배가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주저 않고 받아 먹었다.
"와아, 진짜 잘 먹는다."
"........"
정신없이 김밥을 먹는데 과장님의 감탄이 귓전을 때려서 슬쩍 눈치를 보게 됐다.
정말 잘 먹어서 놀란 것 같은 느낌에 내가 그렇게 잘 먹었나... 하고 머쓱해질 무렵,
과장님은 미지근한 물을 내게 내밀었다. 약간... 엄마 같기두 하구... 아빠 같기두 하구...
"천천히 먹어요. 체할라. ○사원 배 많이 고팠나보네."
"...힘들었어요...."
하하하, 하고 이번에도 크게 소리를 내어 웃는 과장님. 내가 그렇게 웃긴가...
별로 안 친한 사람들한테는 웃긴 캐릭터가 아니라고들 하던데. 그래도 재밌게 봐주시는 거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과장님이 주신 물을 받아 마셨다.
"과장님은 더 안 드세요?"
"○사원 먹는 것만 봐도 배 불러서."
"....혹시 과장님 더 드시려다가 저한테 양보해주신 건...."
"아니에요. ○사원은 맛있게 먹어주면 돼."
문득 김밥을 그다지 넉넉하게 시키지 않았다는 말이 생각났다. 저녁에 회식해야 해서 그런 거라고 했는데.
혹시 옹과장님 더 드실 걸 못 드시고 나한테 준 걸까봐 갑자기 미안해졌다.
나도 몰래 시무룩한 표정으로 옹과장님을 바라봤나 보다. 옹과장님이 손사레를 치셨다.
"그런 거 아니래도. 대신 ○사원이 초콜릿이랑 사탕 챙겨왔잖아요. 그거 먹으면 되죠."
".............."
내 표정이 더 시무룩해졌다. 오는 길에 신입 동기들이랑 죄다 까먹었는데.....
오는 길에 다 먹어버렸다고 이실직고 하니 또 스윗하게 웃으시는 옹과장님.
"○사원은 먹고 무럭무럭 클 나이라. 나는 이제 다 컸고."
스윗한 웃음에 심장에 약간 무리가 올 뻔했다는 건 비밀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옹과장님은 자기가 잘생긴 걸 아는 게 분명해. 본인이 스윗하고 젠틀한 걸 잘 아는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맨날 여직원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리 없어....
"소화 다 시키고 천천히 내려와요.
나는 부서원들 인솔해서 같이 내려가고 있을게."
옹과장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네에- 하고 대답했다.
내려가는 길도 혼자일 것 같아 외롭겠다고 생각하며 김밥을 감싸고 있던 은박지를 구겼다.
-
그렇게 혼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가 보니 영 심심해서 이어폰을 꺼냈다.
휴대폰에 이어폰을 연결시키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아무것도 안 들으면 괜히 귀가 허전해서.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내려가는데, 입사한지 얼마 안 된 내가 아는 사람을 찾아 내려간다는 건 어려운 일.
동기도 저마다의 부서원들끼리 내려가기 때문인지 통 보이지를 않았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그래도 공기도 좋고, 날씨도 맑다.
어느덧 취업을 해서 신입사원으로 이렇게 등산 겸 야유회도 오고 그런다는 게 왠지 꿈 같았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맨날 뜨는 불합격 통지에 울고 불고 했는데. 인생 참... 한 치 앞을 모르는 일이다.
운 좋게 성격 좋고 얼굴도 잘생긴 과장님 밑에서 일하게 되고,
운 좋게 친절한 신입 동기들 만나서 의지도 할 수 있고 이렇게 되었다는 게 감개무량했던 거다.
근데 그러다 탕비실에서 강과장을 만난 건 운이 별로 안 좋았던 일이었다... 는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아앗!!!!"
그 순간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넘어졌다.
올라갈 때보다는 내려가는 게 더 쉬워서 앞뒤로 사람이 많았는데,
넘어져서 아픈 것보다 쪽팔린 것 때문에 곧장 일어서지 못하고 엎어진 채로 잠시 있었다.
아아... 쪽팔려.... 어떻게 일어나지.... 하면서 주저하고 있는데,
"....일어나요."
익숙한 목소리가 쪽팔린 머리 위로 닿아왔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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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래간만입니다. 연재텀이 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길 줄은...ㅠㅠ 그래도 댓글 달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그러나 현실에는 이런 과장님들 없어.... 현실 과장님은 처자식이 있는 아저씨인 걸..... 눈물.... 여튼 지난 편 암호닉 [달빛] [불꽃] [수저] [강과장♥] [경찰차] [우유콩] [오월] [40745] [유자청] [감자도리] [128] [0226] [괴물] [리리롸롸] [영원] [짹짹이] [#0613] [포로리] [넌내희망] [금붕어] [담담] [어피치] [정없다녤] [1111] [히릿] [녤과장옹] [다녤맘] [일오] 이고요, 혹시 누락되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암호닉은 이제부터 편마다 받지 않고, 한꺼번에 공지해서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공지 따로 할 때 신청해주신 암호닉만 유효하고 그 외에는 따로 집계 안 할게요. 암호닉 정리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ㅠㅠ
여튼 성의 있는 댓글들 하나하나 다 읽어보고 있습니다. 좋은 댓글 써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힘이 많이 돼요. ㅎㅎ 이번 편도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면서, 저도 최대한 빨리 오려고 노력할게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글고 짤 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엉엉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