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요."
익숙한 목소리가 쪽팔린 머리 위로 닿아왔던 거다.
얼굴을 살며시 들어올리면서 함께 올라간 시야에 그 익숙한 목소리는 강과장임을 알 수 있었다.
으윽, 정말 너무 쪽팔린데... 내 쪽으로 뻗어진 그의 손을 잡지 않을 수는 없어 나도 손을 들어 맞잡았다.
그의 손이 주는 큰 힘으로 끌어올려졌다.
쪼그려 앉아 아픈 다리를 확인하니 한 쪽 다리는 가벼운 생채기만 났고, 한 쪽 다리는 피가 종아리뼈를 타고 조금씩 흐르고 있다.
내 다리를 본 강과장의 미간이 좁혀지는 게 느껴지고, 나는 쪽팔림 뒤에 밀려오는 통증을 견뎌내느라 좀 정신이 없었다.
"기다려봐요."
그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은 이미지인데.
그가 제 하얀 손수건을 내 무릎에 꾹 묶어주었다. 지혈이 될 수 있도록 조금 세게, 그러나 아플 만큼은 아니었다.
"버려도 되는 거니까, 신경쓰지 말고.
걸을 수 있어요?"
"...네, 네..."
그가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무릎을 조금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도 여자 치고 키가 작지는 않은 편인데 강과장은 그런 나보다도 더 컸다.
강과장은 내게 어깨동무를 하라며 어깨를 내어줬다. 나는 주변의 시선이 걱정되긴 했으나 지금은 어깨동무 아니면 업히지 않고서야 하산을 할 수가 없었다.
업히는 것보다는 어깨동무가 낫겠다 싶어 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가 굽혔던 무릎을 펴자 쑤욱 올라가는 키에 내가 좀 불편해지긴 했지만,
그의 팔이 내 허리에 감기면서 이내 편한 자세를 찾았다.
화들짝 놀란 나는 지레 긴장했다. 그는 그런 나를 눈치 챈 건지 작게 이야기했다.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려갈 때까지만 좀 참아요."
나는 그런 그를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있으니 좋은 향이 났다. 그의 차 안에서도 이런 향이 났고,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에도 이 향이 났다.
탕비실에서 그와 둘이 있을 때에도 이런 향이 났던 것 같다. 그 때에는 너무 당황해서, 어쩌면 기억의 미화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나와 그는 한 걸음씩 발걸음을 맞추어 내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내려갈 때 서둘러 내려가면 보는 눈들이 많을 것 같아 조금 느즈막하게 내려갔다.
나는 괜찮았지만 그가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걷다 보니 다리가 많이 아파져서 그에게 많이 기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말없이 묵묵히, 그저 그 자리에서 차근차근 나와 속도를 맞춰주었다.
"병원 가요, 꼭."
"아... 네. 과장님."
"오늘 차 가져왔어요, 나."
그 말인 즉, 본인의 차를 타고 병원을 가자는 이야기인지...?
나는 어떤 대답이 적절할지 몰라 말을 아꼈다. 감히 뭐라 이야기 하기도 어려운 상황.
대놓고 네! 하기에도 그가 주는 도움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버리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아니요! 하기에도 이렇게 그에게 의지해서 산을 내려와 놓고는 다 내려간 뒤에 입을 싹 닦는 것 같아서 그랬다.
차 가져왔다는 말을 끝으로 얼마 간의 정적이 흘렀다. 해는 뉘엿뉘엿 산머리를 넘어가고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나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걸 피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그와 눈을 맞춰버렸다.
아... 망했어.
"내가 ○사원한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건 맞는데,"
"......"
"그걸 너무 성급하게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으니,"
"......"
"○사원은 그냥 알고만 있으면 됩니다."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뭔가를 듣긴 들었고 이해를 한 것도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가 된 건지 안 된 건지 영 헷갈렸다.
저물어가는 해, 스쳐가는 선선한 바람, 그의 어깨를 감고 있는 나의 팔, 내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손이 모두 한 데 얽혀 있으니 볼이 뜨뜻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도 한 몫 했다.
산을 다 내려온 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옹과장님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모두 회식자리에 먼저 보내고, 본인은 걱정이 되어 여기 남아있었다고 했다.
왠지 한 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걸로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민망해졌다.
그리고 서로에게 어깨동무를, 또 허리를 껴안고 있는 우리를 보며 좁혀진 그의 미간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저 같은 부서지만 다른 팀의 과장 간의 기싸움이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옹과장님은 내 직속 상사로서 나를 챙겨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고,
본인은 본인이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였다.
물론 그건 절대, 절대, 절대로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다친 건 내 잘못이었고,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게 맞는 거였다. 끝까지 내 잘못인 일이었다.
"....고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과장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뒤엎었다.
옹과장님은 강과장님을 보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강과장님은 조심스레 내 허리에 감겨있던 팔을 풀었고, 본인 어깨에 올라가 있던 내 팔도 내려주었다.
나는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고, 여기에서 딱히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가 없어 그저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옹과장님은 아주아주 이야기하기 싫은 표정으로, 하지만 꼭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한다는 듯 얕은 한숨을 내쉬며 강과장님을 봤다.
강과장님은 옹과장님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고,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듯 고개를 그들의 반대편으로 두었다.
"○사원, 오늘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지금 부장님이 강과장이 ○사원 케어해주고 나는 빨리 회식 장소로 오라고 하셔서요.
마음이 놓이지는 않는데 일단 지시니까... 따라야 해서."
"아... 네, 과장님.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크게 다친 거 아닙니다.
늦으셨는데 얼른 가보세요."
"...네. 집에 들어가서 꼭 연락하고요.
...강과장, 잘 부탁합니다."
옹과장님의 어려운 말 앞에 강과장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사이가 안 좋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이 처음이라 신기했다.
옹과장님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본인 차의 전원을 켰고, 나는 자연스럽게 강과장의 차에 타게 됐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옹과장의 차를 보면서 그가 참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티는 안 냈지만, 왠지 부서원을 챙기지 못한 책임감으로 많이 시무룩해져 있을 것 같았다.
이따가 집에 가서 꼭 괜찮다는 메세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
".........."
강과장과 나 사이에는 또 적막이 흘렀다. 이런 적막이 흐를 때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문제는 강과장도 지금 만큼은 이 적막을 깰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내가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싶어서 그냥 아무말이나 던졌다.
"음악 틀어주세요, 과장님."
"......."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아 괜히 나댔나 싶어 금방 쭈구리가 되었다. 으으... 왜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작아지는가.... 엄마가 자주 듣던 옛 노래가 생각났다.
그는 고개를 돌려 흘긋 나를 바라보더니, 무슨 노래 좋아해요? 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본인의 휴대폰을 주더니 이걸로 노래를 틀으라고 했다.
그를 닮은 검은색 아이폰. 배경화면은 눈부시도록 흰색이고 앱은 보기 좋게 폴더별로 정리되어 있다.
성격 만큼이나 간단하고 군더더기 없는 것 같아서 휴대폰이 주인 닮았네, 하며 웃음이 좀 나왔다.
그는 평소에 어떤 음악을 들을까 궁금해져 음악 앱을 켰다. 재생목록에 가니 여러 장르가 보였지만 다수는 좀 댄서블한 흑인 음악들.
춤을 잘 춘다고 하더니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왠지 그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가 가장 최근까지 듣고 있던 음악을 틀었다. 경쾌한 사운드가 차 내부를 빵빵 울렸다.
"이거 말고."
"....네?"
"○사원 듣고 싶은 걸로. 평소에 듣는 노래."
"........"
내가 평소에 듣는 노래라... 나는 이런 노래 많이 듣는데.
그래도 이런 노래 저도 많이 들어요! 라고 하면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조금 다른 성향의 노래를 틀었다.
(*이 노래가 지금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이 노래입니다. XD)
"저는 힙합 좋아해서요."
"......"
그가 내 손에 들려있는 그의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요즘 출퇴근 때마다 듣고 있는 노래를 그와 함께 듣고 있다는 사실이 뭔가 간지러웠다.
평소에는 가사가 야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들었는데, 이렇게 듣고 있으니 뭔가... 야했다.
과장님이 가사에는 너무 신경쓰지 않고 들어주길 바라며 그를 쳐다봤다.
"병원 들렀다가,
밥은 집 근처에 가서 먹죠."
어차피 서로 집이 가까우니 그래도 되겠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무릎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주말이라. 일반 병원은 안 열었을 거고 대학 병원 가야 하는데.
배 고파도 좀 참아요."
네, 알겠습니다. 조용히 대답하고 창 밖을 바라봤다.
좋아하는 노래, 산바람보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차 안의 공기, 몸을 감싸 안는 향기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피곤했다.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만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직 해야 하는 일들도... 있었고.
-
짠-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잔이 부딪혔다.
병원에 가서 비싼 돈을 주고 응급처치를 했다. 제 카드를 선뜻 내밀어보이는 강과장을 향해 손사레를 쳤지만,
그는 한사코 본인의 카드를 내밀었다. 이제 막 월급 딱 한 번 받았을 텐데 무슨 돈이 있냐는 게 이유였다.
내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자 그럼 저녁을 사라고 말했고, 나는 저녁은 물론 사는 건데 병원비도 꼭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는 과장님의 계좌번호를 꼭 알아내서 입금을 해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같은 날엔 치맥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며 집 근처 치킨 가게에 왔다.
그는 짧은 거리라도 운전을 해야 하니까 가볍게 맥주만 조금 마시겠다고 했다.
그러면 나도 맥주로 하겠다고 말했고 500cc 두 잔을 시켰다.
"오늘 정말 감사해요. 과장님.
신세도 많이 졌고요."
"....."
"그래도 병원비는 제가 내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그건 꼭 드리고 싶어요."
"......"
"어쨌든 진짜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 있기는 하는 것 같았다.
치킨은 맛있었다. 서로 배가 고팠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치킨은 뼈만 남긴 채로 자취를 감췄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식사하는 건 처음이라 서로가 이렇게 잘 먹는 줄도 처음 알게 됐다.
어영부영 치킨이 담겨 있던 바구니가 바닥을 드러냈고, 우리는 맥주를 들이켰다.
'진짜 감사하다'는 내 말을 끝으로 맥주를 한 모금 넘기는 그. 맥주를 넘기는 시원한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굉장히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
"........."
그가 입에 가벼운 미소를 걸친 채로 나를 쳐다봤다. 이런 표정으로 눈을 맞추고 있는 건 처음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매일 내가 마주치는 그의 표정은 단단하고, 조금은 어둡고, 차가운 것들이었는데.
오늘은 분위기 때문인지,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였는지, 그가 더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과장님."
"......"
"과장님이 아까 말한 그 호감이란 거 있잖아요,"
"......"
"어쩌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빨리 입 밖으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친 무릎이 너무 아팠던 건가, 아니면 맥주 요만큼에 취해버린 건가, 아니면 이 분위기에 취해버린 걸지도...
어이없는 웃음 끝에 내심 진지함이 걸렸다.
"그래도, 치킨집에서는 아니야."
"....."
"......"
"그러면, 차 안은 될 수도 있겠네요."
약간 오기가 생긴 게 사실이다. 분명 후회할 텐데. 이런 얘기를 내가 했다는 거.
후폭풍이 있다면 그 크기 또한 감당할 수 없을 텐데... 내 내면은 나를 말리고 있는데, 어쩐지 뚫린 입은 가만 있을 생각을 안 했다.
"당돌하네. ○○○."
굳은 표정에서 나오는 낮고 진지한 목소리가 조금은 무서웠다.
그가 나를 ○사원이 아닌 ○○○으로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도 그는 어른이었다. 그의 눈에 나는 한참 어린 게 사실이었고.
내가 느끼는 감정과 그가 느끼는 감정이 백퍼센트 동일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혹여 내가 성급했던 걸까봐, 좀 주눅이 들었다. 무례했던 것 같기도 했다.
"........"
".........."
둘 사이에 또 한 번의 적막이 오갔다. 나는 목이 타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를 들었다 놓은 손을 가만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번에는 누가 적막을 뚫을까 싶었지만 차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제 손으로 내 손을 잡아왔다.
"...차 안은 될 수 있지. 얼른 와요."
그는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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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일단 안 그래도 연재텀 긴데 지난 주말에 못왔음에 사죄를 드립니다ㅠㅠㅠㅠㅠ 그치만 오늘 분량 낭낭히 해서 들고 왔으니 이해 부탁해여ㅠㅠㅠㅠㅠ엉엉 잘못했어요... 내용이 어찌 좀 맘에 드실지 잘 모르겠네요... 소재는 얼마든지 받고 있으니 적극적인 소재 신청 부탁함다!!!
어제 프듀 보고 셋쿠시한 옹과장과 강과장이 너무너무 뇌리에 콱 박혀버려서 진짜 행복한 하루를 보내써여... 그래서 글을 잘 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다 어제 보시고 천국 다녀오셨겠져? 저도 천국 여행 잘 했습니다.. 역시 좋은 곳이더군요.. 오랜만에 뵈니 쓸 데 없는 말을 많이 하게 되네여... 하하 죄송합니다.
지난 편에 귀하고 예쁜 짤들 주신 분들 넘넘 감사합니다! 주신 짤들 이번 편에 잘 활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든 좋은 짤 주시면 꼭 활용할게요>.〈!--!
그리고 암호닉 관련해서... 제가 지난 편에 안 받는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두 막 댓글에 신청해주신 분들이 계시는데, 저는 2, 3편에 정확히 언급된 암호닉만 지금까지 암호닉으로 갖고 있고, 공지 따로해서 암호닉 받을 예정입니다~ 그러니 댓글로 신청해주셔도 인정이 안 됩니당.. 꼭 기억해주세요!
그럼 남은 주말 제 글과 즐겁게 보내시길 바라겠고요!! 저는 댓글창에서 여러분들 기다리고 있을게요~! 시간 허락하는 한에서 답댓도 달아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