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다.
불편해.
등뒤로 느껴지는 노골적인 시선에
긴장감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다.
손을 의식적으로 바삐 움직여 타자를 쳤다.
탁. 타닥. 탁탁. 또 탁. 타닥. 탁탁. 어김없이.
아슬아슬함. 묘한 분위기가 내 솜털을 쭈뼛 곤두세웠던 것 같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입사한 첫날에 바로 마주친 그 시점부터 3일간, 계속, 쭈욱 도망다니던 나를 강다니엘이 포획했다고 볼 수 있겠지. 나도 내가 정말 대견했던 것 같다. 무려 일주일동안, 이 치밀하고도 똘똘한 인간을 내 주제에 따돌렸다니. 따돌린 것도 사실 아니지. 하루에 몇번이고 나를 붙잡고 얘기 좀 하자는 말을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뿌리치고 쌩까는건 따돌리는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는 쪽이 더 맞으니까. 그는 사실 그냥 내 태도를 받아들이고 며칠동안만 나를 기다린 건지도 모른다. 그는 인내가 없지만 필요할 때엔 정말, 뭔가 기다림에 도가 튼 사람 같았거든.
후우, 등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필시 그의 것이다. 뭔가 곧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었기에, 나는 또.
"커피 좀 타드릴까요 대리님?"
재빨리 도망가려 했지만.
"고라니."
"아침은 역...시 커피 없이는 힘든..."
"..."
대리님이 맞장구를 치려고 내 쪽을 보시려다가 흠칫.
"제가 빨리 타오겠습니다"
"고라니"
"..."
"3일이면 많이 기다려준 것 같은데."
"잠깐 나 좀 보지."
붙잡히고 만다.
어김없이.
회사에서 두번째
01
그리고 영이
-
붙잡혀 따라간 곳은 사내 옥상이였다. 쨍쨍한 햇발, 솔솔 부는 바람과 아침부터 시시덕대며 담배를 물고 있는 사원들. 강다니엘은 몇분째 말이 없다. 아니, 몇십분인가? 사람이 너무 긴장하면 알고 있는 일반적인 통념 같은데 흐릿해진다는데. 아. 생각들이 몰려온다. 뭔지 모를 위압감에 고개도 못들고 푹 숙여 옥상의 초록색 바닥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눈도 침침해지는 것 같고, 허리도 아파올라고 그런다. 게다가 나 아직 사원 조무래기라서 오랫동안 자리 비우고 그러면 짬도 안된 애가 벌써부터 빠졌다고 대리님한테 한소리 들을텐데. 행복한 회사생활은 용기 있는 자가 쟁취한다고. 강다니엘 따위한테 쪼그라들 필요 없다. 용기를 내자.
"이렇게 자리 비우면 제가 곤란해져요."
"..."
틀렸어. 난 지금 강다니엘에게 바람 빠져 쪼그라든 하나의 풍선 따위 같은 모습일거다. 첫날에는 2년 전에도 못쓰던 반말까지 찍찍 싸놓고는. 너도 참... 똑같구나
우리 사이에서 항상 휘둘리는 존재. 상대적으로 작은 존재. 항상 이랬었지. 갑자기 울컥하고 뱃속 조금 윗부분이 저릿하다. 마음이 아렸다.
"뭐가 곤란해져."
툭 던지듯 내뱉은 말.
"그냥 여기에 새로 부임한 젊은 과장이랑 새파랗게 어린 사원이 같이 자리를 비운다는거 자체가 부장님한테는 잘 와닿지 않으시겠지만요.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부담스러운 일이고 그렇거든요."
"이 부서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 없어."
"눈치 안봐도 된다는 말이야."
주먹을 꾹 쥐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너, 첫날에는 아는척도 잘하고 반말도 알아서 잘쓰더니 갑자기 왜이래?
사람이 일주일동안 꾸준히 말 좀 하자고 좋게 나오면 너도 한번쯤은 눈 딱 감고 들어줄 수 있는 거잖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야?"
눈물이 핑 돌았던 것 같기도 했다.
응. 정말 쉽게 생각하는 거. 맞다. 나는 2년동안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사라진 그를 수소문하는데 만신창이가 되었고, 내 주변에 남겨진 너무 진한 그의 흔적에 몇번이고 바닥을 드러내보였는데. 정말 어렵사리 추스리고 이제 좀 정상궤도로 들어가 그를 잊고 살기로 맘 먹었는데 또 집요하게 들어와 내 구석을 파고들고 헤집어놓는다. 지겹다기 보다는 무섭다. 앞으로 두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젠 어떻게 회복 같은 건 상상도 못할 것 같았거든.
"내 입장 모르면 말 말어.
나 아니면 안될 것 같이 굴던 사람이 갑자기 언질 하나 없이 없어졌는데 안미치고 배겨?"
"그건... 내가."
미안해. 강다니엘이 말했다. 어그러져 나온 세글자. 그에 대한 내 마음이 짐작도 못할만큼 너무 컸어서, 나조차도 감당 못하게 부풀어버린 그것을 나는 혼자서 억누르고 밟아버리며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것도 내 일부였다. 내 일부를 그렇게 원래 없던 것처럼 만드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이나 해본 적 있을까. 더이상 이 사람은 아니다. 한번 더 마음을 줘버리면 언젠가 다시 정리해야될 그것을. 나는 도무지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다짐했다. 다시는 이 사람과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나는... 너가 준비 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앞으로는 전처럼 그런 일도 없을거야."
그렇구나... 나는 그냥 그렇게만 대답하고 먼저 옥상을 나섰다.
-
그 이후로 나는 그와 놀라울만큼 잘도 지냈던 것 같다. 딱 직장 상사로 생각하고 선을 지켜 대하니 더이상 옛날처럼 볼 때마다 느껴지는 고약하고 복잡한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 녹듯 사라진 듯 싶었다. 앞으로도 이대로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라니씨, 오늘은 고생 좀 해야될거다. 아마"
"네? 무슨 말이에요 그게?"
동기 성우씨가 날 보며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라니씨네 부장님 환영회한다던데요. 덩달아 옆에서 고생 좀 하시겠어요."
아... 정말요? 난 넋 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다니까요. 전 이만 갈게요. 하고 냉큼 돌아서 가는 그의 동그란 뒷통수를 보고 난 생각했다.
망했구나... 하고.
-
퇴근시간이 재깍대며 잘도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6시. 답지 않게 오늘은 칼퇴근이다. 그럼 뭐해. 회식이 있는데. 나를 제외한 우리 부서에는 강부장이라고 불리는 강다니엘 그리고 성대리와, 정과장님 정도? 단촐한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성대리님과 정과장님은 강부장이 어린데 직급이 자기들보다 높다는 이유로 대하기가 힘들고 불편하다며 회식 장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둘만 쏙 달아났다. 나와 강다니엘만 남겨두고. 내가 아무리 괜찮아졌다지만... 이러면 위험하죠. 라고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강다니엘이 주차장에서 검은 세단을 몰고 내 앞에 멈췄다.
"타."
"..."
말 없이 앞문을 열어 조수석에 앉았다. 안전벨트도 매세요. 하길래 매려고 끈을 잡아당겼더니. 이게 왠걸. 정신사납게 마구 꼬여있었다. 내가 안전벨트를 매기 전까지는 출발할 엄두가 보이지 않는 차에서 어색함을 온몸으로 느낀 나는 허겁지겁 꼬인 끈을 풀려고 온갖 애를 다 썼다.
"풋."
뭐야. 웃은거야?
"이리줘."
내가 해줄게. 하며 훅 들어온 강다니엘의 상체에 나는 졸도라도 해버릴 것만 알았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거든. 내 코앞으로 온 셔츠깃에서 시원한 향수냄새인지, 담배냄새인지 모를 기분 좋은 향기가 훅 끼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 턱, 입술, 코, 그리고 눈까지. 당황한건지 흔들린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내 마음과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도 헷갈리는 통에 잠깐 헤롱거린 것 같았는데. 어느새 말끔히 풀려있는 안전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그도 다시 운전석에 제대로 돌아간 것 같아서 얼굴을 정면으로 돌렸는데.
"..."
"..."
정말 닿을 듯이 가까이 있던 강다니엘의 얼굴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는 그냥, 너무 놀라서 눈을 꼭. 감았는데.
"눈은 왜 감나."
"너한테 아무것도 안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너무 쪽팔려 용수철처럼 상체가 통 튀어나갈 뻔 했다. 나는 보이지 않게 마인드 컨트롤. 하나 둘 셋. 하고 안전벨트를 하고는 정자세로 앉았다.
그보다 방금 그의 사투리. 편안할 때만 가끔씩 나오는 그의 사투리에 나는 왠지 모를 향수와 안정감 같은게 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눈 녹듯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를 향한 내 그런 감정 같은 것들이 다른 것에 가려 잠시 숨어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울컥하고 내 마음 속에 잠깐 끼쳤다. 그랬던 것 같다.
- 칭찬은 고래도 춤 추게 한다던데. 어제 올린 글에 달린 댓글들이 절 춤추게 만들어 주신 것 같네요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글의 전개나 캐릭터 심리변화가 조금 미숙할 수도 있어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더 노력하도록 할게요
부족하더라도 많은 관심과 댓글, 응원이나 칭찬.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