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우연함에 대하여 04
로시에나 作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박지훈은 제 앞에서 눈물을 떨구고 있는 날 마주친 이상 영문도 모른 채 위로의 말을 건넬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제멋대로인 추측을 마친 새라와 그녀를 비롯한 반 아이들은 내가 박지훈과 무슨 대단한 사이라도 되는 양 착각할 게 뻔한 일이었다. 고작 몇 마디 말을 그것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섞었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나 많은 눈총을 받고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는 박지훈과 엮이고 싶지 않아졌다. 설사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 아무 일 아냐."
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고 자리로 돌아갔다. 장점이 될 줄 알았던 옆자리는 어느새 크나큰 단점이 되어있었다. 박지훈은 조용히 자리에 앉더니 나를 힐긋거렸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부러 숨길 필요는 없어."
"......."
"네가 힘들어하는 게 나 때문인 것 같아서 하는 얘기야."
만약 내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관련은 있을 것 같아서. 박지훈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정말이지 달콤한 유혹이었다. 말도 안 되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 상황을 박지훈에게 모두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만 같은 그런 희망이 마음 속을 간지럽혔다.
"그냥. 좀 오해가 있어서 그랬어."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이미 반 아이들이 돌아섰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만에 하나 박지훈이 새라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믿어준다는 보장도 없는 게 아니었던가. 늘 그런 식이었다. 깊은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남자 아이들에게 새라와 아이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이해하길 바라는 것. 그것은 명백한 무리였다.
"학년이도 별 얘기 안 했어."
"......."
"너랑 형섭이랑, 또 내가 닮았다던 그 사람. 다 친구였는데 사정이 있어서 못 보게 되었다며."
"여주야."
"닮았으면 헷갈릴 수도 있지. 다 괜찮아."
묘하게 잡음이 사그라든 교실은 그들이 내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증거였다. 반강제적으로 대화를 끝마지차 다시금 종이 울렸다. 박지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도 나만큼 답답하다는 증거겠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반에 있자니 여간 마음이 불편한 일이 아닌 게 꼭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하필 문과 반에는 그다지 친한 친구가 없던 터라 꽤 마음를 터놓는다고 말할 친구들을 보러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만 했다. 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일이라도 반에서 눈치를 보는 일보단 나을 텐데. 터덜터덜 이과 반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가장 친한 친구라 말할 수 있는 해수가 달려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이게 웬 일, 해수는 내 쪽으로 달려오더니 그 앞에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야, 김여주!!!!!!!!! 너 무슨 일인데, 어?"
뭐가? 하고 되묻던 순간 주학년이 말했던 소문이란 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게 설마 여기까지 퍼진 건가. 불안한 표정을 내비치자 해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학생이 안형섭이랑 싸운 이유가 너 때문이라며."
"야... 싸우긴 무슨. 그냥 좀 안 좋아보이긴 했어."
"무슨 일이야, 진짜."
"나도 잘 몰라."
"걔네랑 아는 사이였으면 말을 하지."
소문이 이렇게 부풀려진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분위기는 무척이나 냉랭했으나 내가 느낀 바론 둘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었는데. 이젠 날 사이에 두고 무슨 연유에선지 싸웠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는 것이었다. 제대로 파고 들면 내가 아니라 한예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일 텐데. 소문은 일파만파 입에서 입을 통해 커지고 있었고 그건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일 게 분명했다.
"아는 사이 아냐. 내가 걔네 친구를 닮았대."
"어?"
"그거 때문에 문제가 생길만큼 많이도 닮았나 봐."
"이 얼굴이 또 있다고?"
해수가 장난스레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픽 웃음이 터지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하기도 했다. 어, 대충 그래. 궁금증이 풀렸는지 해수는 이제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새라가 박지훈 좋아한단 말이야."
"박지훈이 누군데?"
"아, 전학생."
"벌써 이름 부르는 사이야?"
"장난칠 기분 아니라고 했지."
눈살을 찌푸리자 다시 시무룩해진 해수가 내게 이야기를 재촉했다. 응, 새라라면 너네 반 부반장. 그... 좀 피곤한 애잖아. 걔가 왜? 새삼 해수가 말하는 새라의 대한 특징들이 하나하나 공감이 가자 살짝 우습게 들리기도 했다.
"걔를 중심으로 반 애들이 단단히 오해를 했거든."
"아, 그래서 소문이 이상했구나."
"응. 박지훈이고 안형섭이고 그냥 걔네가 내 옆자리라서 더 오해가 쌓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해명할 기회도 없고. 들으려 하지도 않구."
애써 괜찮은 척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던 찰나 종일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해수가 불현듯 나를 껴안았다. 우리 여주 고생 많았겠네. 응?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내게 묻는 해수를 보며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응, 엄청 힘들었지. 그래도 너한테 얘기하고 나니까 좀 났다. 확실히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린 기분이었다. 한 번 마음을 털어놓고 나자 그제서야 내게로 달려오던 해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야, 해수야. 그런데... 나한테 이 얘기 물어보러 오고 있었어?"
"뭐가?"
"너 아까 나한테 뛰어왔었잖아."
"아. 그것도 있는데 맞아, 더 중요한 건 다른 얘기였는데 깜빡할 뻔했네. 야, 빨리 가까이 와 봐."
"어?"
해수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 무슨 비밀 얘길 하려고 그래. 내 말에 해수는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라며 더욱 더 우라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힌 뒤에 입을 열었다. 야, 너 오늘 안형섭 봤다며. 걔 좀... 다치지 않았어?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좀이 아니라 많이 다쳤던데? 팔에 깁스해서는... 아무튼 병원 간다고 오늘도 바로 갔어."
"그거 우리 한 학년 선배들한테 맞아서 그런 거래."
"어? 선배면 지금 다 졸업한 사람들이잖아."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는데. 안형섭이 뭘 좀 뒤집어쓴 것 같더라."
그냥 다쳤다고 해도 놀랄 정도였는데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지. 넌 그거... 어떻게 알았어? 왠지 들으면 안 될 법한 이야기를 들은 기분에 묻자 해수가 속삭였다. 내 옆자리 애가 선배들이랑 잘 알고 그런 부류거든. 솔직히 말해서 안형섭이 장난은 좀 많이 친다지만 내 생각에 남한테 피해를 줄 것 같진 않았는데... 걔네가 그런 얘길 하는 거야. 애초에 다 안형섭이 잘못한 일이 맞다면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어떤 선배... 아. 이름이 가물가물하네. 예린?
"야, 설마... 한예린?"
나는 화들짝 놀라며 해수의 말을 끊고 되물었다. 물음을 던지면서도 사실은 아니길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해수는 내게 어떻게 알고 있냐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한예린...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그녀와 관련된 일인지 나조차도 모를 일이었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맞아, 한예린 선배랬다."
"그 사람이 선배였다고?"
"그러던데... 그 선배가 그렇게 된 게 아무튼 안형섭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이 얘기지, 그냥 뒷담화더라."
"한예린이 어떻게 됐길래 그게 안형섭 때문이래?"
괜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사정이 있어서 이제 한예린을 볼 수 없다던 주학년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건 모르지. 약간 쉬쉬하던 분위기라서 엿듣는 것도 어려웠어. 해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볼 수 없게 된 원인이 안형섭 때문이라고? 머릿속의 정보들이 섞이다 못해 으깨질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안형섭은 내게 한예린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박지훈에게 그러지 말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학교에 왔던 것 같았는데... 박지훈의 입을 막는 게 그렇게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에 들러야 했을만큼 급한 일이었을까.
"그래도 엿들은 얘기니까 어디 가서 퍼뜨리진 말고."
"너 말고 이런 얘기할 친구도 없어."
장난스레 어깨를 밀치자 해수가 잔뜩 웃어댔다. 아, 그런데 알만한 애들은 안형섭이 선배한테 맞았다는 건 다 알더라. 이건 우리 반에서 어떤 남자애들이 싸우면서 거의 소리를 질러대서 소문이 웬만큼 났을 거야. 대신 그... 예린? 선배 얘긴 진짜 비밀이다. 엿들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던 사람 나뿐인데 들켰다가 우리 찍히면 어떡하냐구. 해수가 입술을 삐죽댔다. 나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마지막으로 해수와 헤어졌다. 머릿속은 여전히 엉킨 실타래로 가득찬 터였다.
한예린이 선배일 줄은 진짜 몰랐는데... 안형섭은 한예린과 예전부터 친구였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정작 예린 선배? 아, 그냥 불편하니까 한예린이라고 해야겠다. 아무튼 정작 사귀었던 건 박지훈이라고 했는데 왜 다시 못 보는 건 안형섭 때문이라는 말들이 떠도는 거지? 한숨이 끝도 없이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이 일에 깊게 말려들면 말려들수록 피해를 보는 건 결국 나 자신이지 않을까. 이기적일지도 모르는 생각 속에서 나는 한참을 거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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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은 5화에서 한 번 정리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