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4장 ; 예고된 심판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앉게 해준 원우 씨는 곧바로 의자 위에 있는 담요를 집어 다리 위에 덮어주곤 바로 앞에 무릎 한 쪽을 꿇고 앉아 다친 다리를 봐주었다.
물을 살살 붓자 흙먼지와 피가 씻겨 내려가면서 상처가 보였다. 으, 꽤 많이 쓸렸네. 많이 다치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며 자기가 다친 마냥 인상을 팍 쓰고 물을 붓는 모습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꽤, 매력 있단 말이지.
"웃어요 지금? 웃을 상황 아닌데."
"이 상황이 아니라 원우 씨가 웃겨서. 누가 보면 저 아니고 원우 씨가 다친 줄 알겠어요."
"……."
다시금 사라진 대화. 이제 숨이 막히진 않았다. 내가 너무 불편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 자체가 원래 이런 성격이구나, 하고 느껴져서. 따끔거리는 것을 참으며 정수리 구경을 하고 있자니 별안간 쾅- 하고 문이 열렸다. 꽤 격하게 싸웠는지 얼굴에 흙먼지를 묻힌 채 금발을 찰랑이며 오는 게 꼭 놀이터에서 놀다 온 꼬맹이스러웠다. 가만 보면 지훈 씨는 얼굴이 참 동안이다. 동안인지 나이가 정말 어린지는 모르겠다만. 전원우, 급하니까 잠깐 나와봐.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원우 씨가 일어섰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정한이형 불러올게요. 형이 치료해줄 거예요."
"네가 부르지 않아도 이미 들었으니까 빨리 가. 승철이도 기다리고 있어."
"부탁해요, 형."
빠르게 문을 나서는 원우 씨와 지훈 씨를 뒤로, 정한 오빠가 들어와 능숙하게 갖고 온 구급상자를 열고 약품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원우 웃기다. 이게 내 일인데. 깜짝 놀라 여기서 치료하냐고 묻자, 돌팔이는 아니니까 걱정 말라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어쩐지 이 사람은 몸이 가벼워 보였는데, 차고 있는 칼이 없어서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제일 할 일 없다는 게 그런 뜻이었군요."
"치료가 주된 일이니까 애들이 다치지만 않으면 뭐. 경우에 따라서 나도 애들이랑 같이 나갈 때가 있긴 하지만."
"아아…."
"그나저나, 티스 너 조심해. 어떻게 돌아가려고."
"네?"
"만에 하나 네가 여기서 큰일을 당했다고 쳐. 인간인 네가 여기서 죽었다간 정말 갈 곳 없는 신세가 될 거라고."
"……."
"이승에 있는 너의 흔적들이 아예 사라질 거야. 물론 너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까지."
"……."
"물론, 내 추측이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육체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저승으로 넘어온 이상,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이승이 아니라 저승에서 떠돌아야 할 판인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
한 걸음에 모인 셋은 숨을 고르기 바빴다. 지훈은 그 숨조차 고를 시간이 없다는 듯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승철에게 건넸다. 아까, 이상한 놈 처리하면서 나온 거예요. 낡은 종이가 위태롭게 바스락거렸다. 금방이라도 찢어져 흔적을 없앨 것처럼. 승철은 종이에 적혀있는 글씨를 읽기보단 외관을 찬찬히 바라봤다. 어떠한 영이었냐고 묻자, 지훈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칠게 들리던 숨소리마저 조용해졌다. 영이 아니라면, 뭔데?
"모르겠어요. 허상과 비슷한…. 영이 아니었던 건 확실해요."
"……."
"일단 그것 좀 읽어보세요, 형.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요."
우르르 승철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이 자식들이 정말…. 읽어줄 테니 자리에 앉으라며 한 명씩 밀쳐내고 저도 앉았다. 영도 아닌 것을 처리했는데 이런 것이 나왔다, 라. 무언가의 존재가 보낸 메시지라고 해석하면 되려나.
"별들이 사라지고 세상이 온갖 악에 받혀 발악하는 날, 색을 지닌 자들은 그 축을 찾아 임무를 다하라."
"……."
"이 세계의 끝은 가득한 이질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파스슥- 하고 사라지는 종이에 원우는 자신의 수첩을 꺼내어 아까 읊은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다들 당최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관자놀이에 손을 대곤 골똘히 생각하던 지훈이 벌떡 일어나 창문의 블라인드를 허겁지겁 올렸다. 긴박감이 느껴진 행동이 무색하게도, 밖은 매우 평화로웠다.
"이건 분명 예고야. 언제 시작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예고."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되는 걸까요?"
순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적어도, 우린 피할 수가 없지. 여전히 시선은 수첩에 둔 채 원우는 순영의 말을 받아쳤다. 추상적인 말에 정확하게 답을 내리긴 힘들지만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뜬금포로 인간이 들어 올리는 없다는 것.
"티스 씨가 심판에 관련될 수도 있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무 이유 없이 들어오지는 않았을 거야. 어쩌면 그 '이질감'이라는 게…."
"저 인간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아닐지도 일단 까봐야 아는 거고. 지훈은 맘에 들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조차 인간이 관여를 해야 하고, 인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질근거리는 입술이 그가 심기 불편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질린다, 인간.
"근데 그럼 티스가 너무 위험해지는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어. 만약 정말 인간의 도움이 필요해서 온 거라면. 그건 티스 씨의 운명인 거야."
"……."
"일단 다같이 얘기하는 게 좋겠어."
*
방에 있는 공기가 꽤 무거웠다. 정한 오빠는 나와 같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상황을 아는 것인지 왜 불렀는지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팔짱만 낀 채 눈만 꿈뻑였다. 승철 씨가 곧 일어나 모두가 볼 수 있는 가운데로 이동했다.
"티스 씨, 내가 어제 했던 얘기 기억나요?"
"나긴 나는데, 어떤…."
"이 세계엔 아직 심판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말. 어쩌면 티스 씨가 여기 온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요."
"……."
"당분간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래요?"
"네? 제가 무슨 수로…."
"우리도 사실 잘 몰라요. 그렇지만, 이 세계가 평안을 찾을 수 있게 힘써주세요."
돌아가고 싶으면,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거의 반협박 조로 날카롭게 말을 뱉어낸 지훈 씨는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의자를 박차고 나갔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맘에 들지 않는 건지 저렇게 짜증이람. 원래 좀 예민해서 일이 안 풀리면 가끔 저런다며 신경 쓰지 말라는 정한 오빠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꼭, 내가 다 잘못한 것만 같았다. 나 때문에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고. 나 때문에 이 세계가 꼬인 것 같고.
각자 자신의 방으로 해산한 후, 답답한 마음에 옥상으로 올라와 바람을 쐬었다. 검은 물체의 말대로 만약 이 세계가 죽는다면.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실패하고 내가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느 쪽으로든 최악이었기에,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왜 하필 나야…. 평범하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왜 하필….
"여기서 뭐 해요?"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찔끔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낮은데도 불구하고 살랑거리는 목소리가 내 옆까지 다가왔다. 원우 씨였다.
"티스 씨 맘 알아요. 많이 답답하죠."
"그냥 좀 무서워요…. 저 때문에 괜히 다 잘못될까 봐…."
"걱정 말아요. 티스 씨 혼자 하는 거 아니고 우리도 다 같이 하는 거니까."
"티스 씨 다치는 일 없게, 옆에서 지켜줄게요."
바람이 알맞게 불어왔다. 자연스레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곤 내 어깨를 두 어 번 토닥였다. 저녁 바람은 차니까, 얼른 들어가요.
믿어달라는 단어 하나 없이도 말의 무게에 신뢰감이 있었다.
저 사람과 함께라면, 용기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