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혼자라는 것에 대하여
(강다니엘 시점)
"나 너랑 옹성우 같이 있는 거 싫어."
"........."
"출장은 일이니까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이해했어.
근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과장님.."
"옹성우가 너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 내가 이것까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
"너가 하고 싶으면 해. 하고 싶다는데 내가 뭐라고 못하는 거잖아.
팀장님 지시니까 따라야겠으면 따라.
근데 난 보고 있을 자신 없어."
나는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말들을 쏟아냈다. 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대로 차에서 내려 멀어져가는 너를 바라보면서 나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몰랐던 게 아니다. 나도 너와 같은 위치였고, 같은 상황이었던 적이 있으니 그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참을 수 없던 건 나 자신이었다. 옹성우와 같이 있는 너, 그런 너를 바라볼 때면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내 모습.
그런 나 자신이 못마땅해서 화를 참고 참아오다가 폭발한 게 그 말이었던 거다.
말주변이 없다는 생각은 안 하고 살았는데 왜 이렇게 네 앞에만 서면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건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비참했다. 그런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에 불을 켜면 여전히 아무도 없다. 혼자인 게 익숙해진다는 말이 무색할 만치 외로움은 끝이 없다.
외로움이라는 데에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괜찮을 만큼 적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 과정은 끝이 없는지.
결국 다시 불을 껐다. 집은 다시 캄캄해졌다.
곧 부모님의 기일이었다. 늘 부산에 내려가봤으니 이번에도 가는 게 맞았다.
사실은, 혹시라도, 네가 괜찮다면, 같이 가자고 하려 했다. 체육대회 이야기에 막혀서 말도 제대로 못 꺼냈지만.
하루 월차 내고 바람쐬러 갈 겸 같이 부산 내려가자고, 그러려고 했는데 못 그럴 것 같다.
내 말에 상처 받은듯 조금씩 어두워지던 네 표정이 자꾸 눈에 밟힌다. 나 꼭 그래야 했을까, 답 없는 질문을 하며 고개를 떨궜다.
"......."
냉장고 한 칸을 가득 채운 맥주캔을 꺼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캔을 입에 갖다 댔다.
빔프로젝터의 전원을 눌렀다. 프로젝터에서 나온 빛이 반대편 스크린에 가 닿는다.
영화는 습관이 되었다. TV보다는 덜 시끄럽고, 일단 켜두면 사람 소리가 나니까 덜 적적했다.
내용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떠오르는 건 사람의 얼굴, 그리고 들리는 게 목소리면 됐다.
거실 한 켠에 둔 흔들의자에 몸을 실었다. 맥주는 한 손에 들려있다. 영화의 배경음악이 낮게 깔린다.
"안녕하십니까, 마케팅팀의 비타민이 되고 싶은 ○○○입니다!"
하얗고 발갛다. 그게 너의 첫인상이었다.
원래 하얀 편인 건지 면접정장 바깥으로 드러난 손, 목, 얼굴이 온통 하얬다. 그것 말고는 볼도, 입술도 발그레한 게 계속 눈이 갔다.
옹성우가 외근 때문에 못 온다 해서 억지로 끌려와 면접관이 된 상황이었다. 들어오는 것보다 버티는 게 숙제인 게 회사라 솔직히 누가 들어오든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 팀도 아닌 옹성우의 팀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하얗고 발그레한 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무어라 이야기는 하는데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크지는 않지만 똘망하게 뜬 눈, 가지런히 모아놓은 두 손, 그리고 올망졸망 움직이는 입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했다. 말의 내용을 들으려고 하면 할수록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은 왜 이렇게 날 빤히 쳐다보는 걸까, 라고 네가 나를 보며 생각할 것 같았지만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렇게 면접이 끝났다.
감사합니다. 를 끝으로 다른 면접자들과 함께 너가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뭔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합격 통보를 받았을 거다. 말하는 내용이 들리지 않았으니 점수를 줄 방법이 없었는데,
어떻게 해서든 너를 다시 보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마구잡이로 높은 점수를 준 거다.
무책임한 일일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다른 면접관들이 낮은 점수를 줬다면 내가 질책받을 일이었다.
다행히도 너는 괜찮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나를 제외하고 모든 면접관의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너를 다시 보게 된 날, 비록 장소는 탕비실이었어도, 나는 좋았다.
"...나한테는 왜 인사 안 하지?"
"예? 아... 아, 죄송합니다. 마케팅팀 신입사원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탕비실에 들어왔던 네가 당황한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말은 붙여야겠는데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모를 내 어색함이 너를 바짝 당황시킬 만한 질문을 뱉어냈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 날 나는 속으로 웃었다.
첫째는 너를 다시 볼 수 있어 좋았고, 둘째는 앞으로 너를 계속 볼 수 있음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게 너에 한해서인 것 같지만 어쨌든 그랬다.
"......눈독 들이지 말지."
너를 마음에 둔다는 것은 곧 옹성우와 끝없이 충돌이 생길 거라는 걸 의미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네게 호감을 품게 된 것은 나의 욕심이 맞았다.
내가 옹성우와 지내온 시간은 옹성우의 눈빛과 표정을 읽어내리기에 충분했다. 오히려 나에게 그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장담컨대 너를 바라보는 옹성우의 눈빛과 표정은 내가 너에게 품은 그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비롯된 내 불안함과 초조함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다.
나보다 더 가까이에서 너에게 나무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 옹성우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도 난, 너와 내 마음을 서로 확인했던 그날 밤, 철 없게도 너를 떠올리느라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네가 옹성우와 둘이 출장을 간다고 한 날, 내색은 안 했지만 밥이 잘 안 넘어갔다.
네가 출장을 가서 휴대폰을 잃어버린 날,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네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 녹아버렸지만.
너를 만날 수록 나는 새삼스레 나 자신이 표현에 서투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생각과 느낌, 감정을 난 단 십 분의 일이라도 너에게 전달하고 있을까. 이런 내 마음이 네게 대체 닿기는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너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는데, 그런 너를 볼 때면 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나를 일일이 네게 설명해줄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렇게 너를 집에 들여보내고 우리 집에 돌아오는 길은 길었다.
"근데 막 거기에서 과장님 팀에 한사원이..
과장님 차갑지 않다고, 따뜻한 분이라고 그러면서."
"........."
"과장님이 팀회식날 택시도 잡아주고.. 그랬다면서요.
그리고 둘이서만 야근할 때 커피도 사왔다고..."
".........."
"하는데 화가 나요, 안 나요.
근데 또 거기서 화나는 내가 싫고..."
울먹이는 네 모습이 안 봐도 훤했다. 그런 너를 내가 쳐다보면 너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낼 수 없을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아무런 대꾸 없이 네 이야기를 들었다.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친 건지 점점 목소리가 젖어들어갔다.
물론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한사원 한 명한테 해준 것도 아니었고, 과장이라면 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랫 사람 챙기고 윗 사람한테 까이는 게 내가 월급을 받는 이유인데. 그걸 따뜻한 성격이나 감정 때문이라고 한다면 백 번 틀린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을 하기 보단, 기분이 상했을 네 마음을 보듬어 안아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뭐 하나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얼마나 신경쓰이고 답답했을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게 미안했고 안타까웠다.
".....안 할게. 그런 거."
"......."
"너가 싫으면 안 하는 게 맞아.
이제 안 해."
"......."
"기분 풀어. 울지 말고."
말하는 내가 들어도 너무나 무뚝뚝한 말투고, 문장이었다.
그래도 내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말이어서 그 진심 만큼은 네가 들어주기를 바랐다.
짧게 남긴 입맞춤도, 계획적이라기보단 충동적이었다. 상해버린 네 기분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안아주고 입맞춰 줄 수 있다고... 물론 혼자서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현실. 내 한 쪽 손에는 맥주캔이 들려 있고 영화 속 주인공은 울고 있다.
혹시나 네가 울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연락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라는 거, 도무지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그럼에도 왜 구기지는 못하는 건지.
휴우, 내쉬는 긴 한숨 끝에 네가 있다. 잠 못 이루는 나 대신에 너라도 잘 자기를.
터무니 없는 바람을 그렇게 바라봤다.
-
"여보세요, 응. 할머니."
"내 새끼, 애미한테는 잘 다녀왔고?"
"네. 안 그래도 와 있는데."
"으응, 애미가 좋아하겠다...
별 일 없니?"
"네. 괜찮아요."
"할미 안 보고 싶고?"
"보고싶지. 많이."
작은 꽃다발 두 개를 들고 엄마와 아빠를 찾았다. 이렇게 모셔놓을 뼛가루가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사고였다.
교통사고가 커봤자지 뭐, 하면서 살았는데 반대편에서 달려온 게 거대한 트럭일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리고 그 피해로 돌아가신 게 내 부모님이었을 때는 또 이야기가 달랐던 거다.
아직도 그날 밤 기억이 생생하다. 사고현장에서 병원으로 옮겨지던 날 밤의 기억이.
승진 PT를 앞두고 부산으로 가는 KTX를 잡아 타는 기분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거다.
"아가, 정말 여기 올 생각 없니?"
"캐나다요? 글쎄.. 아직은요."
"일이 더 하고 싶어?"
"네.. 아무래도. 아직은 한국에 있고 싶어요."
"...알았다.. 그래도 언제든 오고 싶으면 할미한테 얘기해."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이모는 캐나다에 살았다. 열네 살 즈음부터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나도 캐나다에 있었다.
그러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들어갔고, 그렇게 지금까지 시간이 흘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부터 할머니는 내게 캐나다에 오라고 말씀하셨다.
캐나다야 편하지. 한국보다 훨씬. 그렇지만 여기 남아있는 건... 순전히 일 때문인 게 맞았다.
남자 인생에서 일로써 인정 받는다는 건, 새삼스러울 만치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이니까.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갑자기였지만 챙겨야 할, 아니 챙기고 싶은 사람이 생겨버렸고....
물론 지금은 연락조차 없지만.
"할머니, 나 캐나다 가면.. 어떨 것 같아?"
"어떻긴, 할미는 너무 좋지."
"할머니 말고. 나는. 뭐 하면서 살아?"
"니엘이 너야...
....왜, 오려고?"
"아니, 그냥...."
말끝을 흐렸다. 문득 캐나다에 가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거다.
도망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너를 보고,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
너에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어른이어야 하는데 그걸 벗어나기가 싫었다.
그래서 겁이 났다. 다시 너를 만나기가. 네가 이런 나의 모습에 실망하고 질려버려서 도망칠까봐 그게 무서웠던 거다.
어느 순간 네가 훌쩍 사라져버릴까봐, 나를 떠나버릴까봐, 나는 그게 무서웠나 보다.
할머니와의 통화가 끊어졌다. 건강 잘 챙기시라고 한 마디쯤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겨우 걸어나왔다. 사진 속 엄마아빠는 웃고 있었다. 그걸 봤으니 됐다.
나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다고,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비록 지금은 내가 나를 똑바로 보기가 무서워 숨고 있지만 조만간 다시 보게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 공간을 걸어나왔다. 지켜봐주라. 잘하고 있다고... 꿈에 나와서 말해주라. 그러면서.
서울로 올라가 다시 출근했을 때는 외근에 외근, 또 외근, 그리고 국내출장이 한꺼번에 몰려 있었다.
얼굴 맞대는 영업이야 사원이나 대리급들이 많이 했지만, 액수가 크거나 중요한 건이 있을 때는 내가 가는 게 맞았다.
그래도 터를 닦아놓은 곳 위에다 계약만 성사시키면 되니까 그나마 스트레스는 덜했다. 몸이 힘들었던 거지.
무엇보다 사무실에 있는 시간 자체가 없으니 너를 볼 수 없는 게 힘들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닐지, 잠은 잘 자는지, 차 없이 오고가느라 힘들지는 않을지,
걱정이 산더미인데 지금 상황으로써는 연락을 할 수도, 연락을 해서 만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답답했다.
"과장님, 저희 체육대회... 신청서 내러 가야 하는데."
며칠 간 이어진 외근과 출장 이후 겨우겨우 자리에 좀 앉아서 업무를 보려던 찰나,
한사원이 내게 와 체육대회 신청서를 내러 가자고 했다.
반드시 두 사람이 같이 와서 신청을 해야 한다고 하니 안 갈 수는 없어서 일어나긴 했는데 갑자기 마음에 네가 걸렸다.
너도 신청서를 냈을까. 어떤 기분으로 냈을까. 달리기 연습은 잘 하고 있는 걸까. 다치지는 않았을까...
하도 생각에 생각을 더하다 보니 머리가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채 꺼내지를 못하니 더 그랬다.
"과장님, 저 요새 달리기 연습하고 있어요!"
"아, 그래요."
"처음에는 좀 어려웠는데, 지금은 속도가 많이 붙었어요-"
"....."
"저 열심히 할게요, 과장님!
감사합니다!!"
그런가 보다 했다. 사실 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도 없었고, 그렇게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싫은 티를 낼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니 그저그런 무미건조한 반응만 보이고 있었다.
일은 평범하게 하는데 말이 많은 편인 것 같다. 보통 이런 친구들은 일하면서 말 때문에 문제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은 참아주지만 나중에 거래처랑 말 때문에 문제 생기면 한 번 따끔하게 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너와 옹성우를 마주친 거다.
"어머, 안녕하세요, 옹과장님! ○사원도!
신청서 제출하러 오셨어요-?"
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눈을 마주치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은지 줄곧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네 옆에 선 옹성우가 날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고 날카롭기 그지없는데. 이런 시선이라도 좋으니 너가 날 쳐다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난 바보인 걸까.
끝까지 나를 쳐다보지 않는 너. 그리고 네 손목을 잡은 옹성우.
초조하니 입은 바싹 말라오는데 그렇다고 달려가서 둘을 떼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도 못했다.
신청서를 내고 자리에 돌아왔는데 하루종일 네 손목을 잡은 옹성우의 손만 생각났다.
그런 내가 한심해져 또 자책하고, 다시금 이런 내가 너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싶고.
그 생각을 수백 번 반복하다 체육대회가 온 거다.
-
실은, 체육대회만 지나가면 네게 연락을 해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비록 내 마음에 대한 확신이나 자신은 없었지만 그건 너를 만난 다음에 만들어가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용기가 생겼던 거다. 최소한 네게 말은 붙여볼 수 있을 만한 용기. 잘못을 비는 건 그 다음 문제였다.
하지만 체육대회에서의 그 상황들은 사실상 내게 이별 선고와도 다름이 없었다.
옹성우와 행복해 하는 너, 네 앞에서 한사원을 업은 나.
내 마음이야 어떻든 상황이 그렇게 되었으니 받아들이는 네 입장에서는 내가 어떻게 보일지 뻔했다.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해가며 네 마음을 돌릴 자신도 없었다. 내 용기는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무서웠다. 여전히 나는 무섭고 두려워하는 겁쟁이였다.
너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찾으면서도 막상 네게 다가서지는 못하는. 그런 바보였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괜히 저 때문에..."
"........."
고개를 떨구며 울먹이는 한사원이었다. 미안하다는데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차마 빈말이라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절대 나오지 않아서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1등한 건 축하할 만한 일이었는데 그 말조차 못하고 이렇게 되어버렸네. 나는 네게 축하한다고 말할 기회조차 있을까.
어쩐지 이제는 없을 것 같다.
대충 괜찮아진 한사원을 본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며칠 동안 착잡했던 기분은 그저 계속 착잡할 뿐이었다.
내가 할 일은 이제 마음을 접어가는 것.
잠깐 뿐이었으니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오히려 정리하기 더 쉬운 쪽은 이게 맞았다.
참 못났다. 강다니엘. 이러면서도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우습고 부끄러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또 주말.
너를 정리하기로 마음 먹은 후 일주일은 하루가 일 년 같았다.
정리? 단 하나라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못했다. 그럴 능력이 안 됐다.
정리할 생각도, 능력도 없으면서 말로만 내뱉은 거다.
그나마 출근을 하면 일이라도 있으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생각이 덜 났는데,
주말에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 혼자 있으려니까 도저히 네가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는 게 너무 괴로웠다.
잠을 자려고 해도, 밥을 먹으려고 해도, 계속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네 모습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살려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러보지만 역시나 아무도 날 구해주지 못했다.
"........"
그렇게 괴로워하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지잉, 지잉, 사납게 진동이 울려대는 탓에 잠에서 깼다.
지금 몇시야, 몇시인데 누가 전화를 해. 하면서 휴대폰을 봤더니 너였다.
급한 마음에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을 거란 건 생각도 안 하고 일단 받았다. 화가 난듯한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에요."
"집."
"그때 701동이었죠? 몇 호에요?"
"302호. 근데 왜.."
"...집 앞이에요. 문 열어줘요."
전화가 끊겼다.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보다가 곧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너의 전화를 받았고, 너는 지금 우리 집 앞이고, 나는 이제 문을 열어야 한다는 걸 안 거다.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지고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갑자기 바짝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초조해진 내가 뭐부터 해야 할지 생각을 시작하자마자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조심스레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문 열어요. 과장님."
"......"
"안에 있는 거 알아요. 빨리 열어요."
쾅쾅, 두어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일단 무언가에 홀리듯 현관문 앞으로 가 문을 열었다.
너는 들어올듯 말듯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와 눈을 맞춘다.
"왜 이야기 안 했어요."
".....뭐를."
"뭐를? 지금 뭐를이라는 말이 나와요?
왜 나한테 말 안 했냐구요."
나는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서 물은 건데, 너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내게 따진다.
근데 나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사랑스러워 보이면 미친 거겠지.
긴장해서 빨리 뛰던 심장이, 이제는 보고 싶었던 너를 다시 보게 된 설렘으로 두근거린다.
......위험하다.
"들어오지 마."
"싫어요. 들어갈 거예요."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
나가서 이야기 해."
"싫다고요. 들어갈 거예요.
빨리요."
나는 집 안으로 너를 들일 수는 없겠다 싶어 일단 문을 닫았다.
곧이어 쿵쾅대며 문을 부술듯 두드리는 너. 나는 금방 나오겠단 말을 남기고 지갑이라도 챙겨 나오려 방으로 가려 했지만,
"와, 진짜. 너무하네.
어떻게 얼굴 보러 온 애인을 이렇게 밖에다 세워둬요?
내가 무슨 거지도 아니고. 아 빨리 문 열어줘요!"
좀 심했나... 그런데 또 문 연다고 해도 어떻게 할 건데.
뭘 확실히 정할 수도 없는 상황. 그렇다고 또 생각한다고 확실히 정해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지만 문을 연다고 해결될 게 아니라 일단 닫아놓고 생각하자며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있던 찰나였다.
"지금 아니면 완전 쫑이에요.
셋 셀 때까지 안 열면 나 다시 가요, 진짜.
하나, 두울,"
열었다, 문. 혹시라도 셋 세고 진짜 가버릴까봐.
다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너. 나는 내가 열어놓고 놀라 한 걸음 뒷걸음질 친다.
너는 내가 문을 못 닫게 일단 한 발자국을 내민다. 나는 급하게 말을 뱉는다.
"잠깐만 기다려. 지갑만 들고 나올 테니까."
"싫어요!!"
너는 그 곳에서 한 발자국을 더 내민다. 나는 잔뜩 당황해서 너를 보며 오지 말라고 말한다.
너는 꿀꺽 침을 삼켜내며 문 틈 사이로 몸을 밀어넣는다.
떨리면서도 당돌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이미 될대로 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
"...들어오면 집에 안 보내. 나 경고했어."
투욱, 무겁게 문이 닫혔다. 너는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떨군다.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다 툭, 하고 머릿속에서 뭔가 끊기는 느낌이 든다.
....그 툭 끊긴 게 이성인 것 같다.
"........"
"....보고 싶었,"
내 입술이 며칠동안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네 입술을 갈구한다.
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너는 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잔뜩 목마르고 배고파 지친 내게 너는 샘물이 되어 나를 적신다.
네 팔이 내 목에 감기고, 나는 너를 안아올려 온전한 내 공간 안으로 들인다.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열려본 적 없는 공간, 그 공간에 너란 사람이 들어왔다.
네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 그, 면접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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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화해에는 키스져. (찡긋) 다들 잘 지내셨나요? 저는 다니엘 시점에서 빨리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했어요. 원래 어제부터 쓰기 시작했다가 풀어낼 내용이 많아서 오늘까지 써서 올립니다. 독백이 많은 터라 평소와 분위기가 좀 달랐을 수 있지만, 독자님들께 신선함으로 다가갔기를 바라봅니다. 이번 주말에는 지금까지 쓰인 BGM을 한꺼번에 좀 정리해서 들고 오려고 합니다. BGM 문의 주시는 분들 많은데 그럴 때마다 즐거워! 새로워! 짜릿해! 이번 BGM은 정키-잊혀지다(Feat. 양다일) 입니다. 노래 좋지여? 듣자마자 녜리가 생각나서 넣었습니당... 헤헤 이번 편 짤들은 제시된 장면장면마다 실제로 사용했던 그 짤들을 넣어보았어요. 나름 신경써서 그때의 기억이 나도록 장치를 마련해두었달까...ㅎㅎ 보시는 분들도 재밌게 봐주셨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그동안 여주 시점에서는 제시되지 않았던 첫만남이라든지... 니에리 부모님의 이야기... 캐나다 이야기... (이건 니에리가 캐나다 유학 다녀왔다는 데시물 카더라를 바탕으로)를 넣었어요. 그리고 니에리가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그려보았습니다. 하다 보니 이런저런 전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런 게 독자님들께 잘 스며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써주시는 댓글들은 정말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읽고 있습니다. 제가 답댓은 일일이 못달아드려도 열심히 읽고 있음을 알아주세여..ㅠ.ㅠ
아 그리고 며칠간 터진 떡밥(도망쳐!!! 라든지, 독방 '헤어지자'를 애들 말투로 한다면?)들이 너무 웃겨서ㅋㅋㅋ 혹시 아직 안 보신 분들 있으면 꼭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당... 흐흐 낮에는 덥고 아침저녁으로는 추운데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요! 수요일인데 컨디션 관리 잘하시고! 종강하신 분들은 축하드립니다! 직장인은 종강도 방학도 없네요 핳핳ㅎㅎㅎ핳핳ㅎ 울자.. 여튼 저는 댓글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들 편안한 밤 되세요~~♡ ****여러분 저는 암호닉을 평소에 받지 않아요ㅜㅜㅜㅜ 별도 공지로 2차 암호닉 신청 받을테니 기다려주시고 댓글로 아무리 신청하셔도 안 됩니다요!! +) 아맞다맞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걸 까먹을 뻔 했어요!! 맨 마지막 장면은 제 인생 최애 드라마인 〈커피프린스 1호점>의 키스신을 오마주한 겁니다! 그 장면을 유독 좋아하는데 이 타이밍에 넣으면 너무너무 좋을 것 같아서 부족한 솜씨로나마 글로 써서 넣어보았습니다. 뭔가 익숙한데? 하신 분들은 아마 커프를 보신 분들이 아닐까...ㅎㅎㅎㅎ 그 장면이 궁금하신 분들은 네이버캐스트에서 '커피프린스 1호점' 치시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