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민 선배의 복학 소식에 온 학교가 들썩였다. 예나 지금이나 선배의 인기는 참 변함이 없구나 그런데 나는 이 학교에 1년을 다니면서 왜 몰랐을까 그것도 재환 선배랑 수도 없이 겸상을 하면서 재환 선배를 버리고 홀연히 군대로 떠난 룸메이트가 영민 선배였다는 걸 왜 몰랐을까 그건 아마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하고 대화를 깊게 이어나가지 못하는 내 성격 탓이었을 것이다.
전과를 해야 하나 아니 아예 학교를 옮겨야 하는 걸까 휴학을 할까 자퇴를 할까 고민만 하다 겨울방학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아무리 경영학과 학생 수가 타과에 비해 많은 편이라고 해도 분명 전공과목 중에 하나 정도는 겹칠 것으로 예상됐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개강 첫날 첫 수업에서 영민 선배를 마주해야만 했다.
"혹시 옆에 자리 있어요?"
아직 이른 시각이라 강의실에 빈자리가 널렸는데 굳이 내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간 얼굴로 웃는 영민 선배를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허둥지둥 거리며 옆자리에 올려둔 내 가방을 치워냈다. 고마워요라고 웃으며 내 옆자리에 앉는 선배와 최대한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괜히 전공서적을 뒤적거렸다.
진짜 나를 못 알아보는 걸까 아니면 못 알아보는 척을 하는 걸까 두 달 전 처음 만났던 그 술자리에서도 영민 선배는 나에게 존대를 썼다. 어차피 후배인데 말 편하게 해~라는 재환 선배의 말에 머쓱한 듯 웃으며 그래도 돼?라고 물어오는 선배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재환 선배가 민망한 듯 이해해 얘가 좀 낯가림이 좀 많이 심해서 그래라고 하며 일단 그렇게 넘어갔다.
"그래도 구면인 사람이 여주 씨뿐이라서 옆자리에 앉은 건데... 혹시 많이 불편해요?"
"에? 아.. 좀..."
"그렇구나... 나 자리 옮길까요?"
"네? 아.. 아뇨 그럴 필요까지야..."
"그럼 옆에 앉아도 되죠?"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또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내 동의를 얻은 선배가 다시 활짝 웃어 보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 예쁜 미소가 내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충분히 예뻐
02
w.갓제로빵민
이걸 바통터치라고 해야 하나 영민 선배가 제대를 하자 재환 선배가 울면서 입대를 했다. 너는 언제 가냐는 사람들의 말에 아휴.. 가야지 가야지~라며 한숨을 내뱉더니 진짜로 가버렸다. 재환 선배가 입대하기 전날 술에 잔뜩 취해서 여주야 우리 여주 몸 건강히 잘 있어야 해 알겠지?라며 울었다 그리고 그런 재환 선배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영민 선배의 손과 내 손을 마주 잡게 하더니 너 인마 임영민 우리 여주 안 그런척해도 엄청 외로움 잘 타는 애니까 잘 챙겨줘야 해 알겠어?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게 재환 선배가 입대를 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재환 선배의 빈자리는 영민 선배의 차지가 되었다.
솔직히 일주일은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살갑게 다가오는 선배를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못해 나 혼자 끙끙거렸다. 내 모든 관심사는 선배가 날 알고 있는지였다. 그렇다고 내가 선배 혹시 5년 전에.... 김여주라고 기억해요?라고 물어보지도 못한다.
결국 일주일 만에 내린 결론은 정면돌파였다. 5년이란 시간이 짧은 것도 아니고 내가 뭐라고 선배가 아직까지 기억하겠어 선배는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해 뻣뻣하고 어색하게 굴에서 내 무덤을 팔 바엔 차라리 이렇게 합리화 시켜버리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근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재환이랑은 무슨 사이야 혹시 둘이.... 사귀어?"
밥 먹다 말고 이게 웬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지? 싶어서 선배를 바라보았다. 날 놀리려고 그러는 건가 그렇다기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딴 생각을 하면서 밥알을 세고 있던 내가 그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동안 선배는 아 내가 괜한 거 물어봤구나 하면서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사실 저 질문은 영민 선배뿐만 아니라 지난 1년 동안 재환 선배랑 다니면서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선배 눈에도 그렇게 보여요?"
"응?"
"아니 그 말 좀 자주 듣긴 했어요"
"혹시... 비밀연애 뭐 그런 거야?"
"아~ 아뇨 절대 네버 아니에요"
"그래?"
"재환 선배는 그냥 좀 많이 고마운 선배이긴 한데... 그냥 선배에요 선배 "
"그럼 재환이도 너랑 같은 마음이야?"
글쎄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그렇지 않을까요? 내 애매모호한 대답에 영민 선배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재환 선배가 나를? 원래 좀 오지랖이 넓고 착한 선배라서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나를 좀 잘 챙겨주긴 했지만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재환 선배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한테 다 친절한 선배였으니까 그리고 본인 피셜로 나랑 의남매를 맺었다며 떠들고 다녔다. 물론 내 동의 따윈 필요치 않았다.
"근데 그건 왜 물어봐요?"
"아냐- 그냥 유달리 친해 보여서 물어봤어"
유달리 친해 보인다고 흐음 내가 봤을 땐 재환 선배가 친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보였다. 안 그렇게 생겨서 엄청난 인싸였으니까 우리 과뿐만 아니라 다른 과 사람들도 다 두루두루 친했다. 역시 술자리의 킹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튼 그랬다. 오죽했으면 재환 선배의 입대 소식에 이젠 누구랑 술 마시냐며 한탄하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냥 정말 친한 선후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정말?"
"네"
재환 선배가 이 말을 들었다면 정 없다며 펄쩍 뛰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확실히 선을 그어놔야 할 것 같았다. 선배가 괜한 오해를 할까 봐 신경이 쓰인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왜곡되는 게 끔찍하게도 싫어서 그래서 해명을 하는 거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감정이었지만 아무튼 선배가 오해하는 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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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 물을 사러 갔다가 영민 선배와 마주쳤다. 뭔가 유치원 생들이 맬법한 귀여운 가방을 앞으로 메고 있어서 뭐지 싶었는데 갑자기 하얀 생 강아지가 뿅 하고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아 어떻게 귀여워~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선배가 키우는 거예요?"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원래 내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편의점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강아지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아직 4개월밖에 안 됐다는 하얀색 말티즈는 딱 내 손바닥만 한 앙증맞은 사이즈였다.
"이름이 뭐예요?"
"사랑이"
"사랑아 안녕~ 아구 귀여워라~"
이름처럼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확 납치해서 키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너무 예뻤다. 근데 어쩌다 강아지를 키우게 됐냐는 내 물음에 선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은 남동생이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군대에서 받은 월급을 탈탈 털어서 분양받았는데 강아지 털 알레르기라는 변수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얼굴이 벌한테 쏘인 것처럼 띵띵 부어 올라서 하는 수 없이 내가 데려왔어"
"그렇구나 저도 사실 외동이라 너무 외로워서 어렸을 때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엄청 졸랐었거든요 근데 엄마가 알레르기가 심해서 못 키웠어요"
눈은 여전히 강아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영민 선배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때 내 머리 위로 영민 선배의 큰 손이 턱하고 올려졌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 영민 선배가 내 머리를 꼭 강아지 쓰다듬듯 두어 번 쓰다듬었다. 뭐야 갑자기 또 사람 심쿵하게 쳐다보고 난리야
"자세히 보니까 너랑 사랑이랑 좀 닮은듯"
"에?"
"아 여주라고 이름 지을껄 그랬다"
"선배 저 지금 개같다고 놀리는거죠?"
"아니 너 귀엽다고"
선배의 이런 행동과 말투가 자꾸만 내 마음을 미친듯이 흔들어 놓는다. 처음 선배를 마주하던 날 17살의 내 모습이 자꾸만 수면위로 끌어올려져 괴로웠는데 이젠 그런 마음보단 지금의 나라면 어쩌면 조금은 용기를 내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여전히 선배는 나에게 첫 사랑이었다.
남기는 말 |
생각보다 빨리왔죠?ㅎ 현생이 절 너무 괴롭혀서 정말 쥐어 짜내다 싶이 했어요 사실 그래서 그런지 글의 흐름이 안 이어지고 뚝뚝 끊기는 기분이라서 몇번이나 지웠다 썻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답이 안나와서.... 이게 최선인가봐요ㅠ 진짜 글 잘 쓰시는 금손림들의 대단함을 다시한번 느낍니다ㅠㅠ 지난편에 댓글 달아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진짜 댓글 하나하나 답은 못 해 드리지만 댓글 때문에 큰 힘이 납니다 제가 뭐라고.. 암호닉까지 신청해주시고 너무 감사드려요ㅠ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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